한나 - H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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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설픈 액션영화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액션은 부족했다 홍콩무협영화처럼 무술장면들이 많지 않았고, 와이어 액션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니키타 영화에서의 논쟁처럼 과연 화려한 액션영화로 볼 수 있을까 하는 논쟁이 붙을 수 있는 영화다. 색다른 액션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아니 액션 영화가 아니다.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액션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된 영화사의 마케팅전략일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제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심형래 감독 역시 방법은 다르지만 비슷한 마케팅을 했고, 다른 감독들이나 제작사 역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과대광고일 뿐이다. 이런 영화들 역시 한나처럼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운명이며, 우리들 모두가 그런 운명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의 사운드가 매우 컸고 사람의 긴장감을 일으키기 위해서 갑작스레 사운드를 높이기도 했다. 액션의 약한 강도를 높이기 위한 고육책이란 느낌이 들었다. 방해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처럼 영화 속의 긴장과 불협화음, 그리고 냉소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어울리지 않을 서정적인 발라드보다 이런 음악이야말로 원치 않은 인생을 살아야 할 어느 살인병기 여전사의 운명을 살 어린 소녀의 불우한 운명을 형상화하는 것에 적합했으리라. 
 

 

  세상에서 내몰린 불행한 소녀로서 정부의 의도에 따라 악용되거나 삭제되는 상황에 노출되는 소녀 여전사 한나(시얼샤 로넌)는 자신의 인생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가련한 소녀 그 자체다. 정부든 정부 내의 Agent든 한 인간을 멋대로 생산하면서도 뻔뻔하게 다시 그녀들을 재삭제하려고만 했다. 조직의 폭력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를 알 수 없었고 이미 만들어진 시공간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살던 어린 여전사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마치 로드무비처럼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위험한 여정을 겪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알게 된 자신에 관한 것들에 의해 자신이 무엇이고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 속에 자신의 불행이 숨쉬고 있음도 말이다.
  한나는 니키타란 영화가 없었다면 탄생하기 힘든 영화처럼 보인다. 어린 여전사를 담은 영화에선 화끈한 액션보다 인간의 흉측한 음모와 배신, 그리고 탐욕이 더욱 부각됐다. 자신을 돌봐주는 이들이 하나하나 죽어갈 때마다 한나는 어쩔 수 없이 살인흉기 본연의 임무로 내몰린다. 그녀는 유전자에 의해 강인한 여전사로 길러진 게 아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주변의 세상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무기를 들게 되는 것뿐이다. 자기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주변 인물들에 대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냥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최선일 뿐인 현실은 계속 그녀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갈 뿐이다. 외로워져야만 모두가 행복한 상황,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운명 앞에 소녀는 너무 가련하게만 보인다. 그나마 얻은 친구조차 그녀의 비현실적인 힘과 능력, 그리고 자신을 쫓아오는 음험한 대상들에 의해 날아가 버린다.
 

 

  자신을 향해 오는 부정적인 힘으로부터 도망을 가면서,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알면 알수록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그녀의 불만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주변 인물들에 대한 분노는 늘어갈 뿐이다. 차라리 나오지 말았어야 할 인간의 탄생, 그것은 소설 ‘프랑켄쉬타인’에서의 괴물이고, 악용되면서도 자신의 인간적 행복은커녕 최소한의 편안함도 허락되지 않은 점에서 ‘니키타’의 또 다른 운명일 뿐이다. 영화 속 평행이론, 정말 그녀가 짊어질 운명인 것이다.
  불쌍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고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덤비는 이들을 차례대로 뿐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여전사를 만들려는 기획의도가 어디서부터 차질이 빚어졌는지 모르지만 도리어 자신을 삭제하고자 총을 발사한 세상에 대해, 그녀는 불만이었다. 감정표현에 서툴고 대인관계에서도 언제나 유연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이 아닌 세상이란 것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외딴 곳에서 살면서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고강도의 훈련을 받으면서 세상이 자신을 잘 대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세상은 확실히 녹녹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의 대접이 반대였음을 알았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살고, 또한 도망치는 것, 가련한 인생을 짊어져야 할 한나의 운명이었다. 과연 2편이 제작될지 모르지만 지금의 구도는 결코 벗어날지 의문이다. 버림받은 어린 소녀의 인생 속에서 우리는 국가는 물론 사회의 폭력성을 보게 된다. 사회의 이익이라면 쉽게 버리는 속성 말이다. 하지만 사회를 위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사회를 조정하는 자들이 가장 큰 수혜를 얻는 것을 보면 사회의 이름으로 희생을 남발하는 몰염치한 사회 기득권층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결국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런 자들에 대한 한방을 날린, 한나, 정말 고마웠고 통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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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천둥의 신 - Tho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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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슈퍼 히어로가 가지가지다. 이젠 북유럽의 오딘과 토르의 신화를 이용, 거대한 망치인 해머 ‘묠니르’를 던지고 휘두르면서 악당을 물리치는 ‘토르’까지 만화영화에 이어 블록버스터 슈퍼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하긴 장애를 딛고 슈퍼 히어로로서 나온 영화도 있으니 만들고자 마음 먹는다면 못할 것도 없다. 그래도 뿔 달린 모자를 쓴 원시적인 바이킹의 후예가 슈퍼 히어로러서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고, 신의 영역에서 거친 악당처럼 망치를 휘두르는 모습은 좀 이색적이었다.
  영화 출연진들, 정말 장난 아니다. ‘블랙 스완’으로 올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나탈리 포트만’이나 그 유명한 ‘안소니 홉킨스’가 나올 정도면 이 영화의 캐스팅, 대단한 것이다. 이런 거물급들에 비해 주인공 ‘토르’로 나온 ‘크리스 헴스워스’는 솔직히 누군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신인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프로필을 봐도 2010년도 정도에 데뷔한 것을 보면 풋내기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리라. 그런데 이 친구, 다른 조연배우들을 압도한다. 연기력으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초특급 근육질 몸매로 상대의 기를 죽이고 있었다. 여성분들이야 당연히 좋을 것이지만 남성들에겐 솔직히 질투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성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몸매를 제대로 가꾸고 싶은 이들의 이상향이라도 돼서 그런 것 같다. 아무튼 거의 몸매, 정말 보기 좋았다.   

 


  슈퍼 히어로 영화가 다 그럴 것이다. ‘토르’란 영화는, 심오한 철학과 성찰을 다룬 ‘배트맨’이나 ‘뉴욕’의 어두운 진실 속에서 방황하는 ‘스파이더맨’을 다루려는 것도 아닌, 철저한 대중성을 목표로 하는 영화일 뿐이다. 그래서 연기력으로 유명한 나탈리 포트만이나 안소니 홉킨스가 출연해도 딱히 그들에게 대단한 연기력을 원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3D 영상을 제대로 만들려는 의지 덕분에 SF 영상으로 꾸며진,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그날 하루 스트레스 풀어주는 재미있는 영화일 뿐이다. 다행히 이런 목표에 적합한 작품으로 구성됐다.  
  주인공 토르는 한국에서 한참 유행하고 있는 까칠남 재벌 2세를 그대로 닮고 있다. 성격은 오만하고 자기 멋대로이며, 자기 원하는 바대로 안 되면 모든 것을 엎어버리는 전형적인 철없는 귀공자다. 그가 또 신의 세계의 왕인 ‘오딘’의 아들이어서 미래 역시 밝은 까칠남이다. 이런 구성은 보나마나 이런 인간은 실수를 저지르고 모함이든 뭐든 무슨 이유에서건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곳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런 그를 구원하는 것은 미천한(?) 신분의 평범한 여성이 구원하게 된다. 아니면 최소한 나쁜 성질을 바꿔주면서 좋은, 혹은 선량한 청년으로 만든다. 그런 다음 그 선량해진 청년은 위기에 빠진 지구, 혹은 자신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힘을 다시 찾고 다시 엄청난 히어로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도 평범한 여인을 계속 사랑한다. 정말 뻔한 스토리다.  

 

 

  이런 거 보면 동양이나 서양이나 신데렐라 스토리에 까칠남 길들이기 스토리의 결합은 어디에서나 다 흥행코드로 생각하나 보다. 그러니 한국 드라마의 전형성을 굳이 한국적 특색이라고 비판할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이런 내용은 환타지일 뿐이고, 그냥 대충 즐기다 영화 끝나면 나오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 보면서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거의 똑같을 뿐, 차이가 날 것도 별로 없다. 즉 인간은 평등한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품성을 느끼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 영화 볼 만하다. 그리고 깊이 있는 영화만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적인 영화라도 계속 봐야 할 필요도 느낀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하고, 그걸 즐기기만 해도 좋은 시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화,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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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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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이나 구성, 모두 Old했다. 마치 60-70년대로 다시 간 느낌이랄까? 출연진들이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겠지만 그들이 영화 속에서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과연 지금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긴 있긴 있을 것이다. 다만 오래 전에 멸종된 듯한 사람들이 한 집에서 모두 모여 있다는 것이 이상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통계적을 따진다면 없다고 대충 판단을 내려도 틀리지 않은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을 영화로 한 것, 이 영화를 평가한다면 그렇다.
  결혼한 여자들의 마음을 녹이려고 했을까? 어느 아줌마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가해자들이다.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Plot을 구성했다. 가장인 남편을 카메라 앵글로 잡는다면 역시나 다른 가족들이 가해자로 보였을 것이고, 아들이나 딸 입장에서 찍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입장에 서서 찍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누구의 입장에서 영화를 찍느냐 하는 것이,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바로 감정이입 할 관객을 선별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고, 또한 누구를 마케팅할 타겟으로 삼을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큰 고객으로 자리매김한 아줌마들을 선정했고, 그래서 이 영화는 가정주부들의 입장에서 제작됐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시한부 인생을 통보 받은 아줌마 주변의 가족들은 엉망진창이다. 시어머니는 치매가 걸려 언제나 가장 가혹한 가해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4살짜리 어린이가 되어서 마음껏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시어머니에 대해 언제나 스트레스만 쌓인다고 이야기하는 아줌마들의 영원한 분노를 당연시하게 만드는 구성이다. 최근 며느리들의 횡포로 인해 힘들어하는 시어머니가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영화는 과거의 시점으로 도망갔다는 인상을 줬다. 딸은 가해자가 되는 연애를 하면서 자신의 고충을 주변 가족들에게 힘들다고만 이야기한다. 아들은 자기 원하는 진로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버리며 재수하는 상황에서 여자를 잉태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책임질 자세도 없는 엉망인 아들일 뿐이다. 그나마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난 남편은 아닌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내를 걱정하지 않은 남자라는 전통적인 여성 위주의 영화에서의 나쁜 남자로 비춰질 수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정말 엉망으로 살고 있는 며느리의 친동생은 누나 때문에 근근이 살면서도 누나 고마운 줄 모르고 함부로 폭력만 행사한다.
  이런 엉망인 가족들 사이에 여자가 산다. 그것이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여자다. 하지만 과연 오늘날, 이런 여자가 일반적일까?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피해자란 사실에 주목하며, 이혼이 대세인 시대에 누가 옳든 그르든 이혼하면 된다고 하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이 시대에 그렇게 산다고 한다. 남자들에겐 Fantasy가 될 수도 있고, 여성들에게 가해자 속에서 사는 자신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가 그리 일방적일 수도 없고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개인주의가 확산되는 이제, 과연 그렇게 살려고 할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 이제 그렇게 살려는 사람들이 특별한 경우인 그런 시대다. 
 

 

  영화 속의 가족이 오늘의 엉망인 가족에서 과거의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그래서 묘했다. 어쩌면 자막이 오르는 마지막에서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한 가족의 모습은 사랑의 회복일 것이며, 가족애의 가치를 보여주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가족의 모습일 것이다. 많은 가족들이 헤어지지 않고, 서로 도우며,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가족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원할 것이고, 또한 그것들을 회복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점차 Fantasy로만 변해가는 지금, 영화는 가족의 환상을 꾸며서 관객들에 다가왔다.
  현대인들의 약한 연결고리와 그로 인해 고독에 휩싸이며 고민하는 노희경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녀의 작품에서 언제나 등장시킨 배종옥의 주연이었지만 전혀 도시적이고 현대적이지 않았다. 아마도 의도했으리라. 과거로의 귀환 말이다. 그래서 호퍼의 작품들처럼 차디찬 현대적인 배경 속에 보이는 외로운 인간이 아닌, 따뜻한 가족에 둘러싸인 인간을 꿈꾸고 시나리오을 썼을 것이다. 그야 말로 영화 ‘아바타’와 같은 Fantasy영화인 것이다. 제작비는 훨씬 적었겠지만 말이다.
  대중성을 얻게 되든 아니든, 이런 시도는 Old해 보이지만 반갑기도 하다. 현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보인다 해서 그리 좋을 것은 없다. 오늘날 가족은 해체되고 있으니까. 그 속에서 이혼 등으로 해체될 때, 내가 차지할 몫은 얼마나 될까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있지만 우리가 꿈꾸는 인간미와 가족애는 사실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볼 때,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이 이별하는 장면이나 참혹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듯, 가족 영화에선 오늘날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가치와 그 복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 반갑다. 그리고 이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래야 살 맛이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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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5-0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희경 작품 영화화 한다는 게 이 영화였군요.
노희경은 다 좋은데 올드한 게 문제여요.
그래서 처음엔 몰입이 잘 안되기도 해요.
하지만 올드하다기 보단 클래식컬하다고 봐줘야 하지 않을까요?
올드한게 먹하는 거라면.
괜히 영화 보지도 않고 아는 척 했습니다.
그래도 별이 다섯 개라 한마디...^^
 
적과의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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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이념에 대해 우린 얼마나 알까? 특히 이념 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이 말이다. 우리도 이런데 일제 식민지를 겪고 난 후 1950년의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만큼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을까? 분명 있었겠지만 전국민이 한글을 깨친 현대인들에 비해 그 숫자는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념은 그 당시에 강요되는 사안이었고, 그것을 전쟁을 통해서라도 강요하려 했다. 6.25 전쟁에 대한 비극이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이런 강요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강요, 너무 큰 희생을 치르게 했다.
  한반도란 같은 문화권과 국가 내에서 공존했던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념으로 38선으로 갈라지고, 일제에 대항해 같이 뭉쳤던 그들이 남북한이란 경계선에 의해 적대적이 되고, 그래서 전쟁을 벌인 이런 코미디 같은 이야기가 한반도에서 1950년 6월 25일에 정말 일어났다. 당시 태반이 농민이었던 시절이니 문맹률은 높았을 것이고 이념보다 농사일과 같은 먹고 사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일 때였다. 먹고 사는 것이 지상과제인 사람들에게 군복으로 이념을 표현한 그들이 몰려왔을 때, 생존하기 위해 선택해야 했던 것들은 너무 적었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해야 살 수 있는 불확실한 현실이 전개된 것이다.   

 

 


  현실도 형편없었고, 상황대처도 형편없는 당시, 평택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들이닥친 북한군대는 해방군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누군가를 희생시키는데 매우 민첩한 군대였다. 특히 전시라 이런 행동은 쉽사리 할 그런 환경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인해, 그리고 이념을 민중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한 북한의 젊은 청년장교 김정웅(김주혁)로 인해, 그 마을에서 공존의 미학은 실현된다. 비록 둔탁하고 위험한 줄타기이긴 했지만 자신의 이념이 옳다는 신념과 박설희(정려원)와의 과거의 사랑을 오늘에도 실현시키고 싶은 인간적 마음이 추악한 충돌로까지 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이런 선량함은 전시 중엔 지켜내기 힘든 것이다. 전쟁은 상대를 희생시키는 것이 기본이고 자신의 목적 앞에선 그 어느 누구도 신뢰할 수도 없고, 어느 순간 누군가가 자기의 반대편에 설 수 있다는 불신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즉 미쳐버리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광기 앞에 선 북한군 장교는 어려운 선택을 강요 받는다. 이념적이거나 인간적이기보다 차가운 전쟁의 잣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명령 말이다. 추상적이고 편향적인 적대적 인간관이 현실의 동화 같은 인간관계를 압도하는 순간이고 어려운 선택을 강요 받는 북한군 장교의 모습은 당시 한국의 모든 지성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자화상이었을 것이며, 인간적 품성을 지닌 그들도 현실이란 냉혹한 조건 앞에 무너지는 이유였으리라.  

 

 


  영화 속에서 그의 아름다운 선택도 결국 무너졌다. 비록 의도적으로 갈등과 긴장을 만든 서사적 구조로 인한 것이겠지만 어떻든 마지막의 총격전은 매우 가슴 아픈 비극이었다. 방공호 속에서의 어이없으면서도 인간미 앞에 갈등하는 북한군들의 총질은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재단한 상부의 선택이 실제론 얼마나 추악한 것이며, 또한 그에 대한 피해를 과연 누가 짊어지게 될까 하는 문제제기에 대해 충분한 답변이 됐다. 또한 그와 그녀의 마지막 동침은 아름다움이 전쟁 앞에서 얼마나 허망하게 파멸되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념이 인간을 위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위한다는 전쟁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수단으론 적합할 수 없는 방법이다. 그 방법의 피해가 가장 적나라하게 발휘된 것이 한국전쟁이고, 그 이후 합리적으로 따지는 과정은 생략된 체 서로 간의 짐승적인 증오의 시기를 맞게 된다.
  영화 ‘적과의 동침’은 한국전쟁을 다룬 지금까지의 영화와 매우 색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다. 이전의 뛰어난 작품들이 가족의 문제를 갖고 한국전쟁에 접근했다면 이 영화는 가족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전쟁과 인간미의 충돌, 그리고 그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의 내적 고민들을 반어와 역설의 미학 속에 비극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 영화엔 웃기는 코미디적 요소도 있지만 출연진들의 말 속 하나하나에 담긴 시대적 고뇌와 방황을 읽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전쟁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다. 아마도 한국전쟁을 다루는 앞으로의 전쟁영화에서 이 영화는 그런 영화들이 한 번은 고민해야 할 테마를 던져주었고, 그 영화들의 교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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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셰티 - Machet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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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를 봤을 때, 유명한 배우들이 나오는 것도 놀랐지만 분위기가 어쩐지 B급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B급 영화다. 유명배우들이 나온다면 뭔가 그럴 듯한 분위기에서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상식 아닐까? 하지만 이 영화, 보기도 전에 생각했던 그런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했고, 그런 상식을 깨는 것을 미학이라고 이야기하듯 맘껏 B급 영화의 묘미를 선사한다.
  아마도 B급이란 표현 자체가 수준 낮다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아니 그렇게 표현해서 재미를 선사해주고 작품성도 나름 만들어가는 기획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피가 낭자하면서 코믹하고 어설픈 그런 장면들이 넘치도록 하는 그런 영화 말이다. 어린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구성, 세련되지 못한 내용, 그리고 어설픈 상활 설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그저 그런 포맷을 지닌 영화로서 ‘마셰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영화에 주인공 하기도 벅찰 그런 인물들이 주연도 아닌 조연으로 나온다는 것도 희한한 캐스팅이다. 정말 B급 영화처럼 이 영화 괴이하다.
  희한하게도 이런 B급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그런데 매우 묵직하다. 미국에서의 이민문제는 매우 첨예한 정치적 사안이다. 그리고 휘발성 가득한 민감한 내용이다. 멕시코와 미국 사이의 국경선에 담을 쌓고 아예 라틴계의 불법이민을 더욱 압박하려는 정치적 조치들이 난무하고 있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다 먹고 살자고 넘고,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막겠다고 하는, 그런 충돌적 형국이다. 지금도 미국과 멕시코 국경들을 따라 거대한 담은 건설 중에 있다. 이럴 때, 이 영화는 흥미거리들만을 다루려는 B급 영화의 기존의 아성에 도전하는 듯, 매우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것도 B급 영화 방식처럼 매우 투박하고 폭력적인 것은 물론, 거의 과격한 혁명에 가깝다.
  기괴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덕분에 괴이한 영상미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고 지금도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런 ‘썬 시티 시리즈’ 제작에 공동으로 참여한 로드리게스 감독도 그런 부류 중 하나다. 이번 영화는 아예 타란티노 감독과 합심해서 만들었던 영화 <그라인드하우스>에서의 예고편이었던 가짜 영화 <마셰티>를 진짜 영화로 만들면서 타란티노 식 장면 만들기에 충실했다. 아니 더했다. 영화 속의 영화, 즉 타란티노 감독과의 인연을 이 이상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또 다른 타란티노인 로드리게스 감독은 라틴계 미국인이다. 괴이한 영상을 타란티노 영화는 라틴 문학의 정수인 마술적 사실주의와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인지 라틴게인 로드리게스 감독이 타란티노 식 표현법을 차용하는 것이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신화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그러면서도 잔혹하면서도 기이한 세상을 만드는 방식은 로드리게스 감독에겐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가 보다. 
  히스패닉계가 갖고 있는 운명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론 라틴계의 불법 이민이다. 이 점에 대해 라틴계인 로드리게스 감독이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사실 그의 이름 자체가 운명적으로 역설이다. First name은 영국식인 Robert이지만 그의 Last name, 즉 성은 Rodriguez다. 그는 분명 태생적으로 앵글로 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란 두 가지 문화권이 결합된 미국인이다. 또한 텍사스 자체도 원래는 멕시코 영토였지만 미국과의 전쟁으로 멕시코가 빼앗긴 비극의 영토다. 사실 Texas란 이름 자체가 스페인어다. 알라모 전쟁으로 멕시코 너머의 영토가 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영화가 생산됐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라틴계의 삶이 터전이 되고 만 미국에서 다 쓰이다가 필요 없거나 미국 내의 백인들의 경제상황이 어려우면 그냥 내쫓기는 상황을 당해야 하는 불법라틴이민자들과 그는 같은 피를 나눠온 사이인 것이다. 그 지점에서 그의 영화는 단순한 오락거리 이상으로 넘어간다.
  밀림 속에서나 사용할 듯한 무자비해 보이는 칼인, 마셰티는 그런 편향된 결론 속에서, 보이는 이미지처럼 휘둘릴 때마다 핏물이 넘실거린다. 그 속에는 불법이민으로 어렵게 살고 실컷 이용당하다가 마약이나 정치와 관련된 이권에 의해 쉽게 내쫓기는 라틴계인들의 분노가 담겨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단물 다 뺏고 내쫓는 상황은 극단적인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악용된다는 것은 불법이든 합법이든 불편한 속내를 만드는 법이니까. 미국을 위해 봉사하다가 백인들의 음모에 악용되는 라틴계의 전직 경찰의 모습에서, 그리고 같은 라틴계인 불법이민자를 솎아내는 히스패닉계 이민경찰관이 사회의 정의와 미국의 법이 일치하지 못했을 때의 분노 표출과 선동하는 행동으로의 변화는 그런 불편한 속내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핏줄이라서 들고 일어선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백인들을 살육한다. 그들이 사적 국경 수비대이든, 불법을 자행하는 범죄인이나 정치인이든 상관이 없었다.
  영화에서 행동을 보이자고 선동하는 영화 속의 주요 인물들은 섬뜩함을 보여준다. 영화는 B급 영화다운 즐거운 재미를 줘야 하는데 강한 사회성을 바탕으로 한 현실인식의 의미를 보여주고 이상하게 강한 호소력과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영화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하고 있다. 불법이민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지자면 복잡한 사회적 문제와 쟁점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선 이미 불법이민을 단죄하는 미국 백인계는 다 악당들이다. B급 영화의 편향된 사고가 전혀 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결론이다. 이 영화를 본 미국의 백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한국에서의 황인종이야 라틴계에 대한 동정으로 기울겠지만 백인의 마음은 뒤숭숭했을 것만 같다. 뭔가 바꾸지 않으면 크게 다친다는 식의 마카로니 웨스턴 B급 타란티노식 영화는 직설적이면서 협박 분위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런 것들과 다른 것들로 화제가 됐다. B급 영화에 대니 트레조(마셰티), 로버트 드니로(맥로린 의원), 제시카 알바(사타나), 스티븐 시걸(토레즈), 린제이 로한(에이프릴)과 같은 거물들이 출현했고, 제시카 알바와 린제이 로한의 노출이 화제가 된 것은 영화 외적인 것에 너무 매몰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화제성이 될만한 것들이지만 마셰티란 제목과 그것이 담고 있는 미국 내에서의 라틴계의 분노와 그 위험성이 더 부각되어야 할 것이고, 미국처럼 공존의 문화를 거의 이루지 못한 한국 역시 그런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너무 가치와 교훈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설프게 여기면 안 될 것도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 마셰티는 그래서 마냥 웃고 즐겁게만 볼만한 것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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