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知性)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것은 돼지였고, 한편 누가 보아도 지도자다운 소년은 잭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랠프에게는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조용함이 있었다. 몸집이 크고 매력 있는 풍채였다. 뿐만 아니라 은연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소라였다. 그것을 불고 그 정교한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강암 고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그런 존재는 별난 존재였던 것이다. - P30

세 소년은 모두 잭이 어째서 죽이지 않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칼을 내리쳐서 산 짐승의 살을 베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용솟음칠 피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 P43

지켜보고 있노라니, 한 덩어리의 나무밑께서 불꽃이 일어나고 연기도 시꺼메졌다. 조그만 불꽃이 나무줄기 하나를 휘어잡더니 나뭇잎과 가시덤불 사이를 헤쳐나가면서 일변 갈라지고 일변 기세를돋구었다. 어떤 불꽃은 나무줄기에 가 닿았는가 했더니 이내 빨간 다람쥐 모양 기어 올라갔다. 연기가 뭉게뭉게 진하게 피어오르더니 일변 파들어 가고 일변 바깥으로 번졌다. 다람쥐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곁에 서 있는 나무로 달라붙다가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나뭇잎과 검은 연기가 이루어놓은 캄캄한 천개(天蓋) 밑으로 불길은 수풀의 멱살을 잡고 파먹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몇 마장이나 되는 검고 누런 연기가 늠름하게 바다 쪽으로 소용돌이쳐 갔다. 불꽃과 거역할 수 없는 불길의 방향을 보고 소년들은 날카롭게 신나는 환성을 질러댔다. 불꽃은 마치 일종의 야생동물이기나 한 것처럼 아메리카 표범이 배때기로 땅위를 기어가듯이 분홍색 바위의 노출부 주변에 한 줄로 서 있는자작나무 비슷한 유목 쪽으로 기어갔다. 맨 앞의 유목을 가볍게두드렸는가 했더니 이내 그 나뭇가지는 불길에 싸였다. 불길의 심지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바귀를 날렵하게 뛰어넘고 줄지어 있는 나무 전체를 따라서 요동하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깡총깡총 뛰고 있는 소년들의 저 밑으로 1평방 마일의 숲은 연기와 불길의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제가끔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불길의 소음은 합세를 해서 온 산을 진동시키는 폭음으로 변하였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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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일본을 연구하는 사람인데, 한국에서 일본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쉽게 공격에 노출됩니다. - P123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조선 시대에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현대 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민족 감정>과는 무관하게 면면히 이어지는 행정의 연속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80~90년 전에 식민지 당국이 만들어 낸 도시 구조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살아 있는 상황에서, 조선 총독부나 일식 가옥 같은 건물 몇 채를 철거하고는 〈일제 잔재 청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147

대서울을 답사하다 보면, 곳곳에서 재개발·재건축을 둘러싸고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현대 한국 초기의 개발 방식이 21세기 초에도 답습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 P152

현대 한국에서 유독 아파트 단지가 발달한 것은, 원래라면 국가가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각종 기반 시설을 아파트 단지에 입주하는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국가 입장에서도 이른바 <낙후 지역>을 손쉽게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두 차례에 걸쳐 만들어진 남서울 아파트의 놀이터는, 못 미더운 정부를 둔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 기반을 만들어 나간 현대 한국의 역사를 보여 주는 유산입니다. - P155

즉 부군당은 기존의 양반 계층이 아닌 신흥 자본가 계급이 모신 신앙 대상으로서, 마치 유럽의 부르주아지가 기존 귀족 계급의 신앙인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자신들의 정체성을 수립한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초기에 부군당을 섬긴 아전·하인·노비, 그리고 조선 후기에 부군당을 섬긴 신흥 중간 계급이 오늘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축이되는 시민의 원형에 해당하며, 거칠게 말하자면 부군당 신앙은 민주공화국 한국으로 이어지는 정신적 원류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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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나라. 지역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이해할 때에는 그 나라의 변경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계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야,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 P9

<진자(神社)라고 하니까 문제지, 우리에게는 당산(堂山)이다. 남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나무나 돌도 귀하게 여기면 당산인데, 하물며 100년 가까이 마을 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것을 《일제 잔재》 하는 것은 바깥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 아닌가라는 마을 노인의 말씀이, 20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건물이라면 무조건 파괴하는 것이 <민족 정기>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편협한 생각의 소유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근현대 한반도 역사 백 년의핵심을 찌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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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금전은 본래 사람이 만든 것이다. 신선이 소유한 바가 아니다. 이 사람은 이를 사람에게서 구하지 않고 반대로 신에게서 구하려고 했다. 신이 어찌 인간의 금전에 상관하는 자일 것인가?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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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짜 실존적 딜레마—필멸자인 동시에 자신의 필멸성을 의식하는 동물의 딜레마—는 극복할 방법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오랜 세월을 들여 독자적 존재가 되고, 자기만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다듬고, 취향을 넓히고 벼리고, 삶의 실망거리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성숙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연 속의 고유한 피조물이되고, 존엄과 고귀함을 갖춰 동물적 조건을 초월하며, 더는 휘둘리지 않고 더는 완전한 반사작용에 머물지 않고 어떠한 틀에서도 찍혀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앙드레 말로가 《인간의 조건》에서 말한진짜 비극이 시작된다. 60년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가며 그런 개인을 만들어놨는데, 이제 그가 잘하는 것은 죽는 일뿐인 것이다. 이고통스러운 역설은 당사자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아니, 그가 가장잘 안다. 그는 자신이 괴롭도록 고유한 존재임을 느끼면서도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안다. 그는 메뚜기처럼 언젠간죽을 신세다.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앞에서 말했듯 요점은 우리가 최고의 개인적 발전과 해방을 성취하더라도 인간 조건의 진짜 절망을 맞닥뜨린다는 것이다. - P415

창조는 수억 년간 모든 피조물의 피에 젖은 행성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악몽이다. 약 30억 년간 지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보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온건한 결론은 지구가 거대한 거름 더미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양이 언제나 피를 말리고 그 위에서 만물이 자라게 하고 자신의 온기로써 유기체의 안락과 확장에 따르는 희망을 선사하며 우리의 눈길을 돌린다. - P435

과학으로 사람을 조종하려 드는 모든 사람의 문제는 삶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모든 과학은 ‘부르주아적‘이요, 관료적이다. 내 생각에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이 지구상에서 무엇을 하든 창조의, 기괴한 것의, 만물 아래에서 울리는 으스스한 웅성거림의 공포라는 체득된 진실 속에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으면 거짓이다. 무엇을 성취하든 그것은 피조물의 주관적 에너지 속에서, 열정과 이상과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을 억누르지 않고 한껏 발휘해 성취되어야 한다. - P436

랑크는 지나치게 고지식하지도, 지나치게 과격하지도않았다. 그는 인간이 언제나 자신의 몸 너머를 지향해야 하고 건강한 억압에 토대를 두어야 하며 분명한 불멸 이데올로기와 영웅적 초월의 신화를 추구해야 함을 간파했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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