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렇다면 우리는 가설을 한번 세워볼 수 있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팬데믹 이후, 즉 포스트팬데믹postpandemic 시대도 초가속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팬데믹이 없었다면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또는 그보다 먼 미래에 일어날 법한 일들이 2, 3년만에 벌어지는 초가속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 P10
탈세계화와 동시에 21세기에 우리는 새로운 냉전, 신냉전도 함께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냉전은 20세기에도 한 차례 있었지요. 소련과 미국, 또는 소련과 서양의 대립과 경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20세기의 냉전은 집안싸움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후속 모델이었고, 적어도 소련을 이끌었던 지도자들 대부분은 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동일한 문화권과 역사관을 공유하는 국가들 간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21세기에 우리가 경험할 냉전 2.0 또는 신냉전은 중국과 미국, 또는 중국과 서양의 경쟁이 될 텐데, 중국과 서양은 분명 다른 문명입니다. 인종도 다르고 역사관도 매우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 가속화될 신냉전은 20세기의 냉전보다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다가올 것입니다. - P13
결론적으로, 지난 5년에서 10년 동안 세상은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1960년대나 1990년대처럼 미래를 낙관하며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우리가 발 딛고 있는 20세기의 세계질서가 붕괴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지난 5년, 10년 동안 걱정과 불안을 품고 지낸 우리의 모습입니다. - P15
최근 들어 두드러지기 시작한 또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가 있습니다. 바로 ‘탈현실화‘로, 현실을 도피하는 흐름이지요. 현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현실이 우리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보니, 화성으로의 이주를 꿈꾸거나 ‘메타버스metaverse‘라고 불리는 디지털 현실로 도피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P15
즉,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뇌가 만들어낸 착시 현상입니다. 물론 실제 세상은 존재하겠지요. - P27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세상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인풋input이 아니라, 우리 뇌의 해석을 거친 결과물, 즉 아웃풋input 입니다. - P28
결국 ‘현실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불가피하게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오리지널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플레이어라면 이 현실은 ‘진짜 세계‘에 살고 있는 내가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선택한 세계이지만, 우리가 정해진 변수에 따라 움직이는 NPC라면 이 현실 또한 무수히 많은 시뮬레이션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 P45
우리 뇌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눈, 코, 귀와 같은 감각기관들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 이 정보를 기반으로 세상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 뇌과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 P50
중요한 사실은 호모 사피엔스가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다 보니, 경험과 기억도 누적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동아프리카에서 출현하고 약 30만 년이 지나도록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뚜렷한 기술적·문화적 발전을 보이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 P98
말하자면, 월드와이드웹의 발전은 수많은 현실들이 하나의 커다란 현실로 녹아드는 과정에서 정점에 해당합니다. 브라질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바로 미국 텍사스에 영향을 주고,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정보가 하루도 지나지않아 인도에 영향을 줄 만큼, 전 지구가 그야말로 하나의 현실로 얽히기 시작한 것이지요. - P109
메타버스는 기존의 인터넷과 무엇이 다를까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메타버스는 체화된 인터넷, 몸을 지닌 인터넷embodided internet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단지 보고 들을 수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 정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체화된 인터넷은 이전의 인터넷과 다릅니다. - P127
그리고 뇌과학적으로는 더 이상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라고 말할 수 없는 Z 세대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Z 세대는 이른바 ‘아이패드 iPad 세대‘로도 불립니다. 그만큼 이들의 어린 시절에는 늘 아이패드가 따라다닙니다. (이들에게는 무선 인터넷이 편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당연한 것이지요.) - P141
결국 메타버스는 우리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젖힐 것입니다. 약 30만 년 전에 동아프리카에서 탄생해 대부분의 시간을 유목민으로 지낸 우리 인류는, 약 1만 년 전에 정착을 시작하며 역사의 두 번째 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세 번째 장은 1만 년 동안의 문명과 문화를 거친 끝에 ‘디지털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류 역사의 세 번째 장이자 마지막 장일지도 모릅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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