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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사회는 죽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미국이 유럽을 대신해서 서민들이 동경할 만한 귀족 사회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공황 때문에 이제는 그럴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가엾은 내 조국은 손도 못 쓰고 중산층 사회로 전락하고 있지요. 글쎄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는 택시 기사가 나한테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말을 걸더군요. 믿어지십니까?" - P335

나는 더 이상 엘리엇을 비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도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상류사회는 그의 인생의 전부였고, 그런 의미에서 파티는 숨구멍과도 같은 것이었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은 모욕이요,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치욕으로 여기던 그가 나이를 먹으면서 필사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P336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교활한 마귀는 또 한 번 예수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 거야. ‘만일 네가 치욕과 불명예, 태형, 가시면류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너는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한 인간이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예수는 지고 말았어. 마귀는 옆구리가 아프도록 웃어 댔지. 사악한 인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범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야." - P347

나는 조금 전에 머릿속에 떠올랐던 뜻밖의 발상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러고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기독교가 일으킨 잔인한 전쟁들과 박해, 기독교도들이 기독교도들에게 가한 고문, 몰인정, 위선, 편협 등을 보면서 마귀는 흡족한 얼굴로 손익을 따져 보고 있지 않을까? 인류에게 죄의식이라는 쓰디쓴 짐이 지워졌다는 사실, 그 죄의식 때문에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 컴컴해지고 잠시 스쳐가는 이 세상의 쾌락들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마귀는 킬킬거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아무리 마귀라도 인정할건 인정해 줘야지.‘ - P349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공포를 안고 살다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폐쇄공포증이나 고소공포증 같은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 심지어는 삶에 대한 공포, 그런 것들이었어요. - P407

"우연히였죠.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몇 년간의 유럽 생활 끝에 치러야만 했던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저한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돌이켜 보면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마치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인도에 간 건 쉬고 싶어서였어요. 너무 공부만 파다 보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졌죠. - P409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광경을 직접 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죠. 그러다가 죽은 사람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됐어요. 수치심이 밀려들더군요."
"수치심?"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수치심, 그 친구는 저보다 서너 살 위였는데, 정말 정력적이고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혈기왕성하고 선량하던 사람이 애당초 살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엉망진창의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겁니다." - P416

그래서 끊임없이 자문했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어차피 내가 살아 돌아온 건 단지 운이 좋아서였잖아요. 그래서 제 삶을 십분 활용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죠. 그 전까지 저는 신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 P417

수사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은 어떻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아이들이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한테 양식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이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먹여 줄 거라고 믿잖아요.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 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 P421

어차피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한 존재잖아요. 인간을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다면 그건 하느님이 그것을 의도했기 때문이겠죠. - P423

선량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대체 악은 왜 창조한 겁니까? - P423

그보다는 이 세상을 창조하진 않았지만 악행을 발견하면 최선을 다해 바로잡는, 인간보다 훨씬 더 선량하고 현명하고 위대한 신을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죠. - P423

"윤회가 세상의 악에 대한 설명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우리가 겪는 나쁜 일들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면 그저 단념하고 견뎌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에서 선을 추구하면 다음 생에서는 고통이 줄어들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자신이 겪는 악이나 불행은 비교적 쉽게 견딜 수 있죠. 약간의 강인함만 있으면 되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 종종 너무나도 부당하게 보이는 일들은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그런데 그것이 과거의 업보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애석한 마음도 들고 고통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겠죠. 그게 마땅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에 대해 분개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 P437

양초에 불을 붙이고 (p. 440) 그 불꽃에 정신을 집중시켰어요. 그러자 얼마 후 그 불꽃을 통해 저편에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의 형상이 보이는 겁니다. - P440

얼마 후 그들은 전부 사라졌죠. 1분 후였는지, 5분 후였는지 아니면 10분 후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밤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양초의 불꽃만 남았어요." - P441

자아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겁토록 존재해온 것이기 때문에, 마침내 일곱 가지 무지의 베일을 벗게 되면 다시 처음 상태, 즉 무한의 상태로 돌아가죠. 바다에서 증발한 물이 소나기가 되어 웅덩이를 이뤘다가 개천으로, 시내로 흘러 들잖아요. 그런 다음 이리저리 굽이치고 돌멩이와 나뭇가지에 부딪치며 산골짜기와 넓은 평원을 지나 강으로 흘러들고, 마침내는 처음 있던 곳, 즉 끝없는 바다에 도달하죠. 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 P444

"설탕을 맛보고 싶긴 해도 설탕이 되고 싶지는 않다? 결국 개성이라는 건 자아의식의 표출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 영혼은 개성의 흔적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완전히 씻어 내지 않으면 절대자와 하나가 될 수 없죠." - P444

"실재라고 할까요? 사실, 정확히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아닌지만 말할 수 있죠. 그건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것을 브라만이라고 부르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 만물에 내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만물이 의존하는 대상, 사람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죠. 속성도 없고요. 항구 불변도, 가변도 초월한, 전체이자 부분이고 유한하면서 무한한 (p. 445) 존재예요. 시간에 따라 완성되지도, 완벽해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영원하죠. 그것은 진리이자 자유입니다." - P444

제 안에 있는 에너지가 분출구를 찾고 있는 느낌이었죠.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닌 듯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의 만물을 사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만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신을 말입니다. 그 환희의 순간에 제가 정말 절대자와 하나가 되었던 거라면 그리고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그 무엇도 저를 건드릴 수 없다는 의미였죠. 이생의 업(業)을 모두 이루고 나면 더 이상 윤회해선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이 들자 당혹스럽더군요. 저는 몇 번이고 다시 살고 싶었죠. 어떤 종류의 삶이든, 아무리 많은 고통과 슬픔이 따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 P460

제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절대자가 이 세상에 그 자신을 현현했을 때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지각변동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없었다면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장인들은 얇은 도자기로 예쁜 모양의 꽃병을 만들어 거기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고 멋지게 색칠한 다음, 완벽한 광택을 추가하죠.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도 그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쉽게 깨질 수밖에 없어요.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P462

"이봐, 자넨 늘 돈이 있었지만 난 그렇지 않았어. 돈은 나한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줬거든. 그건 바로 자유지. 돈이 있으면 못마땅하게 구는 사람한테 언제든 꺼져 버리라고 말할 수 있잖아.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자넨 모를 거야."
"하지만 저는 꺼지라고 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요. 설사 그런 사람이 생겨도 은행에 잔고가 없다고 못하지는 않을 겁니다. 선생님한테는 돈이 자유를 의미하지만 저한테는 속박이 될 뿐이죠." - P469

그러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이 글이 일종의 성공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재산을 확보하여 활동적이고 교양 있는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으며,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업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나설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다. 수잔 루비에는 안정을, 소피는 죽음을, 래리는 행복을 얻었다. -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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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구의 술고래한테서,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냉소적인 사내의 입에서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니,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행복이니 하는 얘기들이 나오는 걸 듣고 있으니 정말 묘한 기분이었어요. 전부 처음 듣는 얘기들이라 흥분도 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죠. 뭐랄까, 칠흑처럼 깜깜한 방에서 홀로 잠이 깨어 누워 있는데 갑자기 커튼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들어온 기분이 들었어요. 그 커튼만 열어젖히면 찬란한 새벽의 넓은 벌판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은………. - P176

그는 무(無)에서 무가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이 세상은 영원성의 현사(顯示)라고 말했어요. 게다가 이런 말도 했어요. 선(善)뿐만 아니라 악(惡) (p. 177) 역시 신의 직접적인 현현이라고. - P176

그날, 그때 걷던 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제 발자국 소리와 이따금 농가에서 들리는 수탉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레한 회색빛이 대기에 맴돌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먼동이 트고 해가 솟아오르자,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싱싱한 푸른색이 넘치는 들판과 숲들과 밀밭이 상쾌한 아침 햇빛 속에서 빛났어요. - P192

이사벨의 오빠들은 둘 다 멀리 외국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엘리엇은 아무리 지루한 여행이 되더라도 결혼식에서 조카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기 위해 시카고로 가야만 했다. 그는 프랑스 귀족들이 단두대에 오를 때도 화려하게 차려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일부러 런던까지 가서 새 모닝코트와 보랏빛이 도는회색 더블 조끼와 실크해트를 장만했다. 그리고 파리에 돌아간 얼마 후에 나를 초대해 그것들을 보여 주었다. - P194

"그 녀석은 지저분하고 옹졸한 속물일 뿐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고 경멸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속물근성이에요. 나 아니었으면 지금쯤 형편없이 빌빌거리고 있을 높이 원! 그 녀석 아버지가 뭐 하는 줄 아세요? 사무실 가구 따위나 만드는 가구장이래요, 가구장이." - P203

그때부터 엘리엇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최고급 요리사를 불러왔고, 얼마 후 그의 집에가면 리비에라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평판이 자자해졌다. 집사와 하인에게는 어깨에 금줄 장식이 달린 흰색 제복을 입혔다. 그는 최대한 후하고 성대하게 손님들을 대접하되, 고상한 품위를 지키기 위한 한계선은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P207

내가 엘리엇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감탄한 점은, 그가 신분 높은 인사들을 대할 때 우아함과 예의를 한껏 갖추면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08

그래서 그레이 본인도 걱정스러운가 봐요. 일을 하고 싶어하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직 오라는 데가 없으니까 괴로운 모양이에요. 남자라면 당연히 사회에서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마치 팔리지 않는 상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p. 233) 든다고 괴로워하거든요. - P232

성적인 열정 없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간혹 열정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일테면 애정이나 온정,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의 공유, 아니면 습관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습관일 가능성이 높지. 평소에 밥 먹던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지듯이 성관계도 습관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어. 물론, 사랑이 없어도 욕망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욕망하고 열정은 엄연히 다른 거야. 욕망은 성적 본능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라구.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다른 기능과 똑같은 거지.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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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 P7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며 따라서 포괄적인 결론이다. 결혼 역시 꽤 괜찮은 마무리 방식이지만,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해피엔딩이라 부르는 것을 비웃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결혼으로써 이제 필요한 이야기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본능이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들은 생물학적 임무를 완수한 셈이고 이제 관심은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 P9

이 책은 내가 이따금 만나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한 남자를 회상한 내용이다. 나는 그가 나와 만나지 않았던 기간에는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기간에 있었을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 좀 더 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단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쓰고 싶다. - P10

오래전에 나는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썼다. 그 책에서 나는 유명한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내가 창조한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소설가의 특권을 이용해, 그 프랑스 화가에 대해 아는 빈약한 정보들이 주는 암시를 토대로 많은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허구로 꾸며 내지 않았다. - P10

조금 아까 나는 아무것도 허구로 꾸며 내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약간 수정해야겠다. 나는 헤로도토스 시대 이후 역사가들이 그래 온 것처럼 내가 직접 듣지 못한 말들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표현했다. 그렇게 한 것은 역사가들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일 그저 서술했다면 제대로 느낌을 살리지 못했을 장면에 생동감과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서다. 나는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 P11

래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저 얘기를 다 믿지는 마세요. 이사벨은 나쁜 여자는 아니지만 거짓말을 잘해요." - P39

어느새 우리는 미술관에 도착했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도 그림으로 옮겨 갔다. 나는 엘리엇의 박학다식함과 예술적 안목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관광객이라도 안내하듯 나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 어떤 미술교수라도 엘리엇만큼 훌륭하게 그림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 P41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시행착오 따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도 들어가 봐야 제 목표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자네 목표는 뭔가?"
그는 잠시 망설였다.
"바로 그게 문젭니다. 아직 목표를 모르겠어요."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잠자코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꾹 참았다. 나는 순간, 직감이랄까, 이 청년의 내면에서 어떤 혼란스러운 갈등이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 P58

"난 증권 같은 걸 만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어."
"알았어. 그럼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의학 공부를 하는 건 어때?"
"아니, 그런 건 싫어."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 P80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하지만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 P84

이사벨은 특정한 방식으로 교육받으며 자랐고, 또 그러면서 배운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지키며 사는 여자였다. 부족함 없이 원하는 것은 늘 가지며 살았으므로 돈에 목을 매지는 않았지만,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돈은 곧 힘과 영향력을 의미했고 사회적 지위도 의미했다. 남자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남자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 P87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전투가 끝난 뒤에 프랑스 병사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 그런데 마치 극단이 망한 후라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져서 먼지 가득한 구석에 쌓여 있는 꼭두각시 인형들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 P89

"어쨌든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이제 막 뭔가 조금씩 보이려고 하니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정신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어. 난 그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
"거기서 뭘 찾고 싶은데?"
"내 의문에 대한 대답들." - P116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그런 질문을 던져 왔다는 것은 그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게다가 답을 찾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다양한 대답들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대답을 찾아냈어. - P117

"당신은 정말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 내가 뭘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구. 나는 아직 젊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남들이 하는 것들을 하고 싶단 말이야. 파티에도 가고, 춤추러도 가고 싶고, 골프도 치고 승마도 하고 싶어. 예쁜 옷도 마음껏 입고 싶고, 친구들처럼 멋진 옷을 못 입는 게 여자한테는 얼마나 속상한 일인지 알아? - P121

"한마디로, 시카고에 자리를 잡고 헨리 매튜린 씨의 회사에 들어가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지? 거기서 일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주식을 사도록 만드는 것이 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증권 브로커는 사회에 필요한 존재야.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직업이고."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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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악마가 돼버렸어."
그러자 아예샤가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신의 심부름꾼일 뿐이야."
오스만은 분개했다.
"그렇다면 너의 신은 왜 하필 죄없는 것들만 열심히 죽이는지 말 좀해봐.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자신감이 부족해서 우리가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해주길 바라는 거야?"
이 불경스러운 발언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아예샤는 더욱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다. - P284

참차는 눈을 감고 생각을 아버지에게 집중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평생에 단 하루라도 아버지 창게즈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날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한 사람의 아버지라는 용서할 수 없는 죄도 막판에 가서는 결국 용서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 P323

그러나 비록 감추고 있었지만 살라딘은 시간이 갈수록 일찍 거부했던 예전의 자기 모습으로, 즉 수많은 살라딘 — 아니, 살라후딘 — 으로 점점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아들은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할 때마다 하나둘씩 떨어져나갔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 P339

죽음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훌륭한 부분들을 이끌어냈다. 인간에게 그런 일면도 있음을 목격하는 것은 — 살라후딘은 느꼈다 — 참으로 멋진 일이었다: 사려깊고 다정하고 고귀하기까지 한 모습들. 우리는 아직도 숭고해질 수 있는 존재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축제 기분에 빠져들었다. 온갖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는 아직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 P345

누군가 이렇게 썼다: 이 세상은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현실임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 P354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면의 시작인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세상도 확고 부동한 현실일 테고, 이제는 자신과 저 피할 수 없는 무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든든한 아버지도 없었다. 고아의 삶, 무하마드가 그랬듯이, 누구나 그렇듯이 기이하게 찬란한 죽음에 의해 비로소 훤히 밝혀진 삶이었다. 이 죽음은 그의 마음속에서 마술 램프처럼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 P356

그는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브릴은 자기 내면의 악마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이제 보니 살라딘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는 지브릴이 자기 목숨을 구해주었던 브릭홀 화재 당시의 일로 두 사람이 깨끗이 정화되었다고 믿었고, 그렇게 쫓겨난 악마들은 불길에 휩싸여 타버렸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사랑도 증오 못지않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큰 힘을 가졌으며 미덕도 악덕 못지않게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완벽한 치유는 불가능한 모양이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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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꿈 속의 아이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에게 무자식의 운명을 선사했고,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녀를 멀어지게 하고 그의 대학 동창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만들었고, 그는 한 도시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를 히말라야 산맥의 높이에서 그 도시를 향해 내팽개쳤고, 그는 한 문명을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가 악마로 변하고 모욕당하고 그 문명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망가지게 했다. - P165

"아니, 괜찮네. 난 하늘에서 떨어졌고, 친구에게 버림받았고, 경찰에게 폭행당했고, 염소로 둔갑했고, 일자리도 잃고 마누라도 잃었고, 증오의 힘을 배웠고, 인간의 모습을 되찾았어. 그런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뭐겠나? 자네도 잘 쓰는 말이겠지만, 이젠 내 권리를 요구해야지." - P166

"밖으로 드러난 상처나 구멍의 크기만으로 내면의 상처를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야." - P171

그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지브릴을 괴물로 보는 생각이었다. 괴물 좋아하네: 정말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진짜 괴물들은 저 바깥 세상에 있다 —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독재자들, 아동 강간범들, 할머니 살인마. - P175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라. 계시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창조의 규칙은 상당히 명확한 편이다. 이것저것 만들어 차려놓은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놓은 뒤에도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규칙을 바꾸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면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제법 자제력을 발휘해 왔는데 이제 와서 일을 망칠 생각은 없다. 물론 나도 참견하고 싶을 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꽤 많았다. 그리고 한 번은 참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알렐루야 콘의 침대에 걸터앉아 슈퍼스타 지브릴에게 말을 걸었으니까. 우파르발라냐, 니차이발라냐: 녀석은 그걸 알고 싶어했지만 나는 확실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 저렇게 알쏭달쏭해 하는 참차에게 수다를 떨 생각도 물론 없다.
난 이제 떠나겠다. 저 녀석은 곧 잠들 것이다. - P176

그래도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중요하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악의 본질, 악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어째서 점점 자라나는가, 어떻게 인간의 다원적인 영혼을 일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 - P199

참차는 지브릴의 처지를 부러워하는데 지브릴은 참차의 처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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