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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반 전, 그러니까 2024년 12월 중순 무렵, 인스타 피드를 보던 중 우연히 움베르토 에코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국내에 개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민했다. 러닝타임은 약 80분. 이걸 보기 위해 지하철+도보를 합쳐 편도 1시간, 왕복 2시간을 투자하여 극장에 방문할 것인가? 아니면 기다렸다가 넷플릭스 같은 OTT에 풀리면 그때 볼 것인가? 


그렇긴 하지만 에코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에 가까워 지는 시점. 매년 인근 서점에 들러 "외국 작가" 코너에 살펴볼 때마다, 늘상 움베르토 에코의 저작들이 꽂혀 있던 자리는 어느새 다른 유명 외국 작가들의 저작들로 바뀌고 있었다.


작가로서든, 학자로서든, 에코의 명성은 여전히 드높지만, 세상을 떠난 후 그 역시 망각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미국, 적어도 영미권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감독이 제작한 것이다. 한국의 주요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차지하는 영화들 국적 대부분은 한국 혹은 미국이기 때문에, 자국산이라는 메리트가 있는 한국, 세계 영화시장 어디든 개봉하는 미국을 뺀 나머지 영화들은 대체로 영화제 같은 특별한 자리나, 예술영화를 위한 특수관에서 밖에 만날 수 없다.


OTT 서비스도 고려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마존 프라임이나 애플TV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해당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국어가 한국어인 만큼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


결국 극장에서 보는 것을 선택했고 이는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우리는 흔히 유명 인사들, 특히 유명 작가들을 주로 "글"로 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유명한 작가의 육성을 영화관 특유의 스피커로 듣는 경험은 스마트폰, TV, 태블릿, 모니터 및 스피커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오늘 그 경험을 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주제만을 다뤄보고자 한다.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에코는 현대 시대 정보의 범람을 두고, "소음"이라 표현한다. 우리가 네이버나 구글에서 "뉴스" 탭에 들어가기만 해도 10여가지가 넘는 세부 항목별로 최소 수십-수백여개에 이르는 언론사들의 뉴스가 우리를 덮친다. 여기에 매일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생산되는 무수한 텍스트, 이미지, 영상, 사운드를 고려하자면 "정보의 쓰나미"라는 비유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아틀라스가 짊어진 행성은 "따위"라고 표현될만한 거대한 것을 등에 짊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일개 개인이 소화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장서수는 1500만 권이 넘는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이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한 소년은 도서관의 책을 읽는다. 특별한 목적없이 그 소년은 책을 섭취할 뿐이다. 말 그대로 먹어 치운다. 그걸 보는 주인공은 소년을 두고 바다물을 양동이로 퍼올리는 것에 비유한다.(기억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서술과 다를 수 있다) 사르트르의 "구토"에는 매일 도서관에 나와서 알파벳 순서대로 나열된 모든 책을 읽는 남자가 나온다.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까?


그런데 인터넷에 범람하는 정보는 하나의 책으로 정돈된 지식과 비교를 불허한다. 인터넷을 책에 비유하자면 그 크기는 최소 지구만하다고 해도 모자르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거대한 책에서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읽어내야 한다. 나머지는 걸러내야 한다. 이때 눈에 들어오는, 귀에 들리는 무의미한 정보들 중 지금 당장 우리의 관심사와 직결되지 않는 정보들은 에코의 표현대로 모조리 "소음"이다.


그러면서 에코는 말한다. 앞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은 필요한 정보를 비판적으로 선별하는 것이라고. 


물론 에코의 이 같은 주장은 그가 평소 여러 저서들에서 전개한 음모론의 위험성이나, 책의 수명과 같은 그의 평소 지론들과 연결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짜 뉴스"라는 표현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에 범람하는 음모론과 이를 광신적으로 맹신하는 자들이 에코가 진즉에 비판한 지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직 우리는 에코를 떠나보내서는 안될 지도 모른다.



자, 그럼 우리는 매일 같이 우리를 덮쳐오는 정보의 쓰나미 속에서 어떻게 필요한 정보만을 선별할 수 있을까? 불과 한두달전만 해도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정보를 찾을 때 구글, 네이버를 비롯한 포털 사이트로 정보가 담긴 웹페이지나 동영상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2022년 말, OpenAI는 ChatGPT 3.5를 공개하여 AI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른 지난 2025년 2월 초, OpenAi는 딥 리서치라는 새로운 기능을 발표했다. 딥 리서치는 간단히 말해 유저가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Ai가 대신 웹을 검색하면서 정보를 수집한 후 보고서나 논문처럼 요약해준다. 해당 기능은 매달 200$를 지불해야하는 Pro 구독자들에게만 우선적으로 공개되었다. 


이어서 OpenAI와 경쟁하는 주요 경쟁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비슷한 기능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해당 기능이 지금까지의 AI와는 차별화되면서도 사용자들을 끌어오기에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2월 말 시점인 오늘, OpenAI는 매달 20달러를 지불하는 Plus 유저들에게도 딥 리서치 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해당 기능을 사용해본 사용자들의 후기를 읽으면서 정말 놀라웠고, 이 기능을 언제 쓸 수 있을지 기대하던 차였다. 실제로 써본 후, ChatGPT가 결과물로 내놓은 유사 논문, 혹은 보고서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손수 구글에 검색해가면서 하나하나 자료를 찾아 읽고 정리하고 검토하고 작성했다면 못해도 최소 수 시간은 잡아먹었을 작업을, ChatGPT는 불과 십여분도 안되는 시간 안에 끝냈다. 


처음 등장했을 때 이따금 세종대왕이 맥북프로를 집어 던졌다 같은 한심한 답변을 당당하게 내뱉던 AI가 지금은 대학 학부생, 혹은 그 이상의 과제도 충분히 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다시 에코가 말한 "소음"으로 돌아가보자. 과거 전신, 철도, 전화에서 시작해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을 거치면서, 다양한 매체를 바탕으로 지식과 정보가 생산되는 속도는 가속화되었다. 지금은 거의 무한하게 증식하며 세상을 "소음"으로 뒤덮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AI는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이제 그런 소음을 죄다 걸러내고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AI가 정보를 왜곡하지 않았는지, 편향되지 않았는지 검토하는 것은 사용자가 감당해야 할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에코가 말한 "소음"으로부터 해방될 날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AI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구글로 무수한 웹사이트를 검색하던 시대를, AI가 클릭 한 번에 정리되는 시대로 만드는 데에만 머무를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그건 현실을 잘못 읽은 것이다. 조만간 우리는 에코가 말한 "소음"이 들리지 않는 시대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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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3권 모두 읽게 되었다. 


우선 다음 두 가지 사례가 떠오른다.


1. 단체 패키지 여행을 갔디. 현지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한다. 그런데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다.


2. 뷔페에 가서 한식, 일식, 중식, 양식 메뉴를 접시 하나에 담아온 후 깨끗이 비웠다. 식후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눌 때 뷔페에서 몇 조각 집어먹은 음식만 가지고 한식이 이래서 어떻고 중식이 저래서 어떻고 품평한다.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책이다. 제목이 말하는 것에 충실하기에 그 이상을 바래서는 안 된다. 저자가 독특한 관점을 내세워 지식의 위계를 제시하고, 그를 바탕으로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진리를 포괄하는 폭넓은 지식을 전개하긴 하나, 그 깊이는 너무나도 얕다. 얼핏 보기에는 그 방대함에 압도될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방대한 지식을 압축시켜놨기 때문에 결국 그 수준은 고등학교 탐구영역과 대학 학부 전공 사이에 수렴하게 된다. 쉽게 말해 대학 학부 수준 교양 과목들 몇개를 합쳐서 한꺼번에 듣는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앞서 1번의 감상처럼 왠만큼 책 꽤나 읽은 사람, 교양 꽤나 쌓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 피상적인 얕음이 눈에 보일 것이다. 반대로 교양이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쌓은게 별로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2번의 사례처럼 흘러가기 좋다. 


이건 사실 당연한 현상이다. 방대한 지식을 우겨넣는 과정에서 저자가 책에 넣을 지식을 선별하는 과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수백, 수천, 심하면 수만 페이지 짜리 책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책을 누가 읽겠는가? 위키백과로 책을 만들어 팔면 누가 그걸 읽겠는가? 이건 그 어떤 천재가 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지식의 중요도를 판별할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안그러면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책의 가치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책이든 편향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가 사실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역사가의 관점이 개입할 수밖에 없듯이, 저자가 어떤 지식을 엮는다고 할 때 저자가 자신의 관점에 의거해 중요한 지식과 그렇지 않은 지식들로 나뉘어 엮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측면에서 이 시리즈물을 더 살펴보자면, 2권에서 나름의 지식 체계를 제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 모티머 애들러가 『평생공부 가이드』에서 알파벳식으로 지식을 나열하는 백과사전 구성을 비판한 점에 비춰볼 때, 지식의 위계를 구성한다는 시도는 그 깊이가 깊고 얕음을 떠나 의미있는 일이다.



다만 그러한 지식의 위계가 모두가 납득할만한 것인가? 라고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에 대한 답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어쨌든 이 시리즈의 장점과 단점 모두 얕은 지식을 추구하는 점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너무 많은 내용을 축약해서 담아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의문을 자아내는 지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책 말미에 가서 이 책의 독서를 여행에 비유하며, 앞으로의 여정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특정 분야의 지식에 흥미가 생긴 독자라면 당연히 그보다 더 깊은 지식을 추구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디로 나아가야할 것인가? 어느 책을 읽어야할 것인가? 예를 들어 역사 분야에 흥미가 생겨 책을 더 읽고 싶은데 어느 책을 읽으면 지식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가이드가 단체여행객을 인솔하여 산 정상에 올랐는데, 그 너머 보이는 산은 알아서 가라는 격이다.


물론 여행 목적지가 이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었다면 가이드가 굳이 이 산 너머 저 산까지 어떻게 갈지 알려줄 필요도, 의무도 없고, 굳이 돈을 더 받지도 않으면서 인솔까지 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시작할 때 두 가지 감상에서 시작했다. 2번 같은 케이스는 책 한 두권 읽고 그걸 바탕으로 타인이나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성급히 재단하는 경우로 이어지기 쉽다. 예를 들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만 읽고 타인과 소위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로마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단, 비판적 관점을 취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이나 더 읽을 책 목록을 제시해줬으면 지식에 흥미가 생긴 독자들이 그 분야를 더 파고들수 있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 시리즈물이 깊고 방대한 지식을 넓고 얕은 지식으로 압축한 이상,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나 편향된 정보를 전달하였을 수도 있으니, 독자를 위해서라도 이런 후속 조치 정도는 취했어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이 제시되는 것은 제로편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단촐하다. 1편과 2편은 참고문헌이 없다. 물론 책 여기저기서 누구의 연구 결과라거나 누구의 말을 인용하긴 하지만 책을 읽으며 집중하는 도중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새로운 인물의 주장을 그 자리에서 따로 찾는 것은 한참 몰입해서 읽는 행위를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시리즈는 교양이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교양을 쌓기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정도라면 적절하다. 물론 이 역시 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장착했을 때 그렇다. 그런 비판적 관점 없이, 저자가 제시하는 압축된 내용에 대해 아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책의 내용을 무작정 수용하는 식으로 이 시리즈를 읽는다면 제일 처음 말한 2번의 사례를 실천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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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론』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4년에 씌여진 책으로, 저자는 그 유명한 베블런이다.


이 책은 1904년 당시 미국 기업들의 행태를 분석한 책이다. 그럼에도 읽다보면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기업인들의 행태가 현재와 겹치는 지점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가끔 대의제에 입각한 입헌 민주주의 국가가 과연 정말 민의를 반영하고 있는게 맞나? 싶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제목은 『기업이론』인데 왜 민주주의 국가가 나올까? 아무튼 책에서 나온다. 기업가들이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를 좌우하는지를 해부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국심이다. 베블런은 애국심에 대해 아주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애국심은 기업가들의 이익을 일반 시민들의 이익으로 둔갑시키는 수단이다. 애국심 덕분에 일반 시민들은 기업가의 이익이 늘어나면 자신들의 이익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 책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100년전 미국인데 어째서 지금도 설득력이 있는거 같지 라고 느낀다면, 정상이다. 


이 책을 쓴 소스타인 베블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경제학'에 비춰보면 이 사람을 '경제학자'라는 범주에 묶어둘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절로 부딪치게 된다. 바로 위의 사례를 보자. 경제학자와 "애국심". 둘 사이에 교집합 따윈 없어보이는데?


그렇긴 하지만, 베블런은 아무튼 경제학자다. 그것도 유명한. 그도 그럴게, 이 사람의 첫 단행본 연구서가 바로 그 『유한계급론』이다.


『유한계급론』을 읽다보면 지금 우리가 접하는 경제학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경제학을 접하게 된다. "유한계급"만 놓고보면, "유한계급"이 선사 시대 어느 시점에서 생겨났다는 언급을 보면 왜 "경제학"에서 사회학이나 역사학에서 다룰법한 "계급"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 싶다. 거기다가 베블런은 유한계급의 근거를 보여준답시고 저기 인도의 원시 부족을 사례로 끌고온다. 


베블런 본인은 "경제 이론"을 들먹이면서 "경제 이론에 의하면 ..."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이거 정말 경제학 책 맞나?" 


나중가면 아예 진화론에, 인종 논의까지 나오는데, 왜 경제학에서? 싶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 시대에 매일 같이 논쟁을 몰고다니는 리처드 도킨스나, 도킨스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생물학자로서 '사회생물학'이라는 화두를 던져 인문, 사회과학계에 파란을 일으킨 에드워드 윌슨 같은 생물학자들도 사실 100년 전 미국의 지식인들이 진화론을 바탕으로 전개한 파격적인 논의들 앞에서 한수 접어줘야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경제학자' 베블런의 논의가 천방지축인 이유를 꼽자면 우리가 아는 현재의 경제학은 20세기 후반을 거치며 형성된 결과물이어서다. 20세기 이전, 특히 19세기 말의 경제학은 지금과 너무나도 달랐다.(그렇다고 현 경제학의 뿌리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대충 애덤 스미스-리카도와 맬서스-존 스튜어트 밀-앨프리드 마셜-케인즈 ... 같은 식으로 주류 경제학의 계보가 이어진다.)


어쨌든『유한계급론』은 고전의 반열에 든 책이다. "왜 고전인가요?"라고 물으면 속시원히 대답해줄 사람이 드물어서 그렇지. 그 증거가 국내 번역판본의 수다.


완역본만 5권에, 편역본이 2권 나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비교하자면 『자본론』은 3권이나 되는데 이 책은 1권뿐이고, 거기다가 원서가 영어니 독자나, 번역자나 진입장벽이 낮아보인다는 게 참 크다.(낮다는 말이 아니다!)



   



이상의 5권은 완역본이다. 





이상의 2권은 편역본이다.


이 중에서 읽은 번역본은 사실 


3권 뿐이라 어느 책이 가장 번역이 낫니 하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뭣보다 베블런 본인이 글을 정말 어렵게 쓰기 때문이다. 글만 어렵게 쓰는 게 아니라 셰익스피어마냥 자기가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거기다가 일반 명사를 고유명사처럼 써댄다. 베블런의 책은 몇 권 더 번역되어 있는데, 번역자의 후기를 읽다보면 항상 번역하기 어려웠다는 말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다만 『유한계급론』만 놓고보자면 작년에 나온 휴머니스트 번역판이 다른 번역판본들에 비해 가격은 조금 나가도, 소스타인 베블런에 대한 최신 연구성과들을 적극 반영한 주석이나 해제가 수록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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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기생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지구상에 정체 불명의 생물체가 나타난다. 생물체는 인간의 몸에 침투하여 뇌를 차지하고 그 사람 행세를 한다. 생물체들은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 인간을 포식하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외계인이나 지구상의 생물체이지만 미발견 상태인 생물체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까. 16세기까지 유럽, 특히 가톨릭교권에서 이런 생물체의 존재를 거론했다간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화형당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도 아니고, 그런 유아론적인 대책이 통하는 시대도 아니니까(가끔 그런 대책이 논의되긴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만화 『기생수』에 범접할만한, 오히려 그 보다 더 한 현실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에서는 기생수들이 인간을 죽이지만 사실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간측이 대응에 나서자 기생수들이 소탕당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현실에서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난 생물체들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사자, 호랑이, 고래처럼 인간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동물은 지구상에 많다. 그러나 그 생물체들은 인간 앞에서 무기력했고 인간의 보호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속한 인간종의 현실은 『기생수』와 다르다. 우리의 현실은 20, 30년전 우리가 예측하거나 예언한 것들을 보란듯이 빗나가버렸다. 


20세기 후반 당시의 예측이나 예언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과 인간 사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장미빛 전망이었다. 이 같은 예측은 당연히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 전망이 들어맞은 지점도 있다. 예컨대 스마트폰이라던가. 그러나 완전히 들어맞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사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술적 특이점이 올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식으로 여전히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구원자가 강림할 것이라는 식의 옛 종교적 믿음에서 구원자를 '기술'로 치환한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당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건 단지 공통점만 따진 셈이니까) 그렇긴 하나, ai의 발전 속도나, 신석기 시대를 거치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기술의 발달이 한편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자동차가 적절한 사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 길거리에는 마차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다. 말똥과 그 악취로 도시가 뒤덮이느냐, 새로운 대체 수단을 찾느냐. 선택은 자동차였다. 자동차는 말똥을 남기지 않으니, 도시가 더럽혀질 일도 없었다. 그 대신 자동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교통사고는 마차나 기차만 다니던 시대에도 있었을테니까)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은 낙관론과 정반대되는 비관론적, 나아가 종말론에 가까운 예언이나 예측이었다. 어린 시절 환경 보호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지구상의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증가하여, 지구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고 말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예언 뒤에는 인구 증가에 따른 환경파괴에 대한 묘사가 그에 뒤따랐다. 어떻게 보면 맬서스의 재림이라 할만한 수준의 주장들이었다. 


막상 부닥친 현실은 종말론과는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미세먼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황사와 미세먼지는 겨울, 봄마다 한반도에 찾아오는 불청객이자 당연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미세먼지를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면서 마스크를 끼고 일상샐활을 하거나, 그냥 평소대로 생활할 뿐이다. 20세기 말 환경운동가가 봤으면 이 무슨 디스토피아인가하고 절규했을지도 모른다.


자, 이제 진짜 현실은? 물론 여기서 기후변화(혹은 위기)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단지 만화 『기생수』보다 더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할뿐이다. 


분명한 것은 기생수보다 더한 것이 현실의 우리들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효과는 『기생수』의 기생수들이 인간을 포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출산율(혹은 출생률) 이야기다. 한국의 90년대 생이 학교를 다닐 때는 한 반에 30, 40명이 있었던 반면, 00년대 생이 다닐 때는 20명으로 줄어들더니,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입학생 숫자가 두자리수를 못 채우고 한 자리 수에 머물다가 폐교되는 초등학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학교들은 몇년 전부터 입학생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지방거점국립대학들 조차도 학과별로 정원 미달이 발생하여 대학 간의 통폐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여파는 군대에 이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취업시장에도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기생수』에 등장하는 히로카와 시장은 포식자로서 기생수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히로카와 시장의 말처럼 기생수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인간의 개체수를 조절하려 들더라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려면 기생수의 개체수가 인간 전체의 개체수와 비교가 가능한 수준이 되거나, 기생수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인구를 통제하는 상황이 연출되어야할 것이다).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한국이 대단히 극적인 변화를 보이긴 하고 있지만). 전세계 선진국들이 나날이 줄어가는 출산율 혹은 출생율로 인해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긴 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등 전세계의 산업 중심지, 금융 중심지, 문화 중심지라 할만한 지역들에서 출산율이 감소함에도, 뚜렷한 대책이 없어서 이민(을 빙자한 타 국가로부터 인구 빼오기)에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이는 선진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 대국으로 알려진 중국, 인도, 나아가 종교적 영향력이 지대한 이슬람권 국가들도 출산율이 수십년 사이에 급락했다. 동남아 국가들은 아직 선진국도 되지 못했는데 벌써 출산율이 급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터져 나온다. 선진국으로 이민 간 이민자들도 세대가 지날수록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2세대부터는 출산율이 현지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한다. 


앞으로의 전망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륙의 국가들은 출산율과 인구 감소로 인해 인구 성장이 정체되거나 심하면 감소할 것이라 한다. 그에 비례하여 타국의 이민자를 차지하려는 국가 간의 경쟁도 심화될 것이다. 


즉, 인구가 너무 늘어나서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빗나가기 직전인 셈이다. 오히려 지구상의 국가들은 너도나도 확정된 미래, 그러니까 줄어드는 인구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발악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여기서 환경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점은 인구라는 통계 수치보다는 개개인의 소비 패턴이 더 중요할 것이다. 전 세계인이 선진국 최상류층처럼 소비하고 다닌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지난하게 인구 이야기를 한 이유는, 『기생수』의 기생수는 '따위'라고 만들만한 가공할만한 무언가가 이미 전 세계에 확산된 게 아닐까 하는, 간단한 의문에서 시작한 것이다.


'전염병 주식회사'라는 게임이 있다. 스마트폰으로도 가능한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다양한 유형의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변이시켜 지구상의 인간을 말살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게임 상의 인간들도 가만있지 않는다. 어느 정도 전염이 확산되면 전염병을 인식하고(현실의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인식하였듯이) 대응에 나선다(현실의 백신 접종, 사회적 거리두기처럼). 이때 인간 사이에 전염병을 퍼뜨리는 매개체는 다음과 같다. 바이러스, 세균, 박테리아, 프리온, 기생충, 나노머신.


하지만 이런 매개체를 통해 퍼져나가는 질병은 그 실체가 있다. 감염된 사람들의 신체에 실제로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체온이 높아지거나, 미각과 후각을 상실하거나 등등. 그러면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기생수』의 기생수들도 실체가 있다. 만화 상에서 그 식별법이 나온다. 사람으로 위장하지만 위장한 기생수의 머리카락을 뽑아보면 바로 판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하는 것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대부분의 기준이 이 것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정신병과는 다르다. 정신병 역시 구체적인 증상을 수반하는데, 이것은 그런 증상이 없기 때문이다. 감염된 사람이 감염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 바로 옆 사람,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 버스에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 지하철에서 부대껴 가는 사람, 아니면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이나 기업가들, 그 한명 한명이 감염자일지, 정상인일지(비감염자가 더 적절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럼 바이러스보다, 인간이 상상한 기생수보다 더 독한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 「인셉션」에서, 정보를 빼내려 사이토에게 접근한 주인공 돔 코브는 이런 말을 한다.


"가장 생명력이 강한 기생충은 무엇일까요? 박테리아? 바이러스? 장내 기생충? '생각'입니다. 일단 생각이 뇌에 자리잡으면 제거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 


'생각'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말은 트럼프가 내세우는 가치관, 세계관, 일련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심리적 문제다. 즉, 한 번 투표를 했을 뿐인데, 그 결과를 보고나니 이웃집에 사는 스미스 씨는 트럼프의 생각을 받아들인 지지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스미스씨 입장에서는 이웃에 사는 존스 씨가 트럼프의 생각을 받아들인 지지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 머리 속에 의심이라는 감정과 그로부터 나오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이다. 그 어떤 전염병의 매개체보다도 빠른 속도로.


저기서 트럼프를 다른 나라나 미국 내의 다른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으로 바꿔도 적용가능할 것이다. 


미국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이 유행했다. 누구나 소련의 스파이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매카시즘을 보고 어떻게 저런게 유행했나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 사람들 입장에 서보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저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를 지도 모르는데(=다른 생각에 전염되었을 수 있는데=공산주의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사실을 뭘로, 어떻게 판별한단 말인가? 


'나'와, '나'가 속한 집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같은 사람' ,'같은 부류', '같은 집단'으로 취급하지 않은 경우는 사실 인간 역사에서 늘상 있었던 일이니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사례를 일일이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의 차이가 현실에서 일으키는 변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한참 뛰어넘는다. 다시 인구 문제로 돌아가보자. 위에서 말했지만, 한때 인구가 무한히 불어나 지구가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맬서스적인 종말론이 유행했다.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통계를 보고 인구 감소를 우려하며 여러 대책을 내놓는 중이다. 그러한 변화의 기저에,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만 해도 한때는 나이가 들면 무조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했지만, 지금 그런 생각은 당연하지 않다. 구시대의 사고방식은 신시대의 사고방식에 밀려났거나, 밀려날 예정이다. 게다가 지금은 구시대의 사고방식을 강요할 수단도 모조리 사라졌다(정책 결정권자들이 시대착오적인 결정이 가끔 내리긴 하지만). 게다가 인구 문제는 '올바른 생각'과 '그릇된 생각'을 구분해서 '그릇된 사고'를 가진 다른 사람을 탄압해서 통제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보통 '올바른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사실 사슴보고 말이라 우기는 지록위마를 실천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그 같은 생각의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은밀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대다수 사람들이 변화를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변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이후다. 물론 그런 변화를 일찍이 눈치 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어쨌거나, 현실은 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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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5-17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을 유기체로 볼 수도 있군요.
지구를 유기체로 가정하면 인구 감소도 맬서스의 종말론에 대비하는 지구 자정작용의 하나일 수도 있겠네요. 현실은 늘 상상 이상이니까요.

Heath 2024-05-17 14:14   좋아요 0 | URL
현실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겨진 것들의 기록』은 죽은 자의 흔적을 정리하는 유품 정리사의 책이다.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를 이루면서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을 인간이 도맡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꺼름칙한 일들, 불쾌한 일들, 혐오스러운 일들은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 않고, 눈에도 잘 띄지 않는다. 분명 이 사회를 이루는 한 부분인데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 남은 사람들이 맡는 일일 것이다.


그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다. 작년에는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했다. 그런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도 첫 장면은 주인공 마히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며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만 여기서 묘사되는 그녀의 죽음은 많은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낭만화된' 죽음에 가깝다. 그녀의 시신은 나오지 않는다. 죽은 후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에 남는다. 하야오 감독의 이전 작(무려 11년 전) 〈바람이 분다〉도 보면 비슷하게 '낭만화된' 죽음이 나온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사라지듯이 세상을 떠나고,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만 기억한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어느 신화든 간에 누군가가 죽고 그 시신을 수습했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누군가가 '승천'했다거나, '실종'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죽음을 신비롭게 표현하고 동시에 죽은 이의 시신을 처리한다거나 같은 현실적인 일은 대개 생략된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는 불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영혼은 올림푸스로 승천한다. 물론 그 반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지브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금은 세상을 떠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이었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다케토리 이야기를 각색한 〈가구야공주 이야기〉였다. 썸네일은 아쉽게도 블루레이가 없어서 아트북으로 대체했다. 이 영화에는 하늘에서 아미타와 함께 천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내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장면에 깔리는 배경음악은 신나고, 생동감이 넘치고, 흥겹다. 



해당 OST의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가장 슬픈 장면에 가장 행복한 음악이 깔린다' 라거나, '어떻게 행복한 음악이 슬픔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이 이 행복한 음악에 대한 감상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천인들이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그 후로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우연히 다른 책을 읽을 때 '아! 그 장면이었구나'하는 부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정토종 예술에 있어서 선호 받는 테마는 '내영(來迎)', 즉 죽음의 순간에 있는 신도에게 구세주 아미타가 몸소 강림하는 것이었다.

코야산[高野山]에 있는 세 폭의 내영도(來迎圖)에서 나타난 것처럼 초기 '내영'의 방향은 마치 관찰자가 임종을 맞은 것처럼 관찰자를 향해 있었다. 여기서 커다란 아미타를 구름 위를 떠다니는 스물다섯 명의 보살이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은 관찰자를 바라보며 관찰자를 향해 오고 있다. 그들은 가운데 그림의 왼쪽과 꼭대기 뒤쪽에 자리 잡고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들의 아래로는 자연풍경이 펼쳐지는데, 왼쪽 아래의 자연 풍경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면 오른쪽 자연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풍경은 그림 전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조심스럽게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상상 속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기라기보다는 도상학적 효과를 더 크게 지닌다. 각 인물의 세부묘사는 장식적인 디테일과 색감과 사실성의 뚜렷한 발전을 보여준다. 특히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이 흥미롭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관찰하는 포즈로,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관악기를 부느라 뺨을 잔뜩 부풀리고 있다.......

내영(來迎)은 아마도 일본 예술에서 1053년, 교토에 있는 뵤도인[平等院] 사원의 본당인 봉황당(鳳凰堂)의 문에 처음으로 나타난 주제일 것이다. 내영도가 일본의 공헌이자 창조품이며, 어떤 믿음에 의해서라도 획득된 신격의 가장 시적인 장면들 중 하나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밀교(密敎) 도상들의 비밀스럽고 금기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내영도의 핵심적인 부분은 밀종의 태도를 역전시키며 붓다가 그를 보는 자에게 바로 온다는 것이다. 아미타는 단지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보는 자에게 다가온다. 이 그림은 죽어가는 신도가 보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그 신도의 영혼은 붓다에 의해서 서방 정토로 받아들여지고 환영받는다. pp.278-279.


조지프 캠벨, 『신화의 이미지』



간단히 말해, 과거 일본인들이 상상한 죽음의 순간이었다. 구세주 아미타가 죽어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아미타가 그대를 응시할 것이니. 


어떻게 보면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맞이하러 오는 대상이 아미타와 천인들에서 반려동물이 되었을 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의 자리를 정리 해야 한다. 그게 가족의 손을 거치든, 아무런 연고 없는 타인의 손을 거치든 간에.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다면,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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