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님은 새해에 읽을 첫 책 중 하나로

슈바이처 박사의 《나의 생애와 사상》을 추천하여 주셨습니다.
(조선일보, 2016년 1월 2일 자 : http://goo.gl/GK0ycW)

많은 분이 슈바이처 박사의 의료 활동과 인류애를 기억하지만,

김형석 명예교수님은 슈바이처 박사가 남긴 생명에 관한

‘불멸의 윤리관’을 기억해야 한다고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윤리관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으로 말해지는데요.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생명이 다른 생명과 ‘관계 맺는 법’을 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인간이 관계를 고민할수록

서로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더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요.


그럼, 관계에 관한 슈바이처 박사의 글은

첨부한 이미지 카드를 통해 만나보세요.^^



악수하는 슈바이처의 손

​오직 생각하는 인간의 생명 의지만이

다른 생명 의지를 의식하고 유대를 맺고 싶어한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슈바이처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이라도

계속 다른 생명을 희생해가며 살아가야 하는,

잔인한 법칙에 얽매여 있다.



딸 레나를 안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 레나는 박사의 생일인 1월 4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은

윤리적 존재로서 이러한 필연성을

벗어나려고 애쓰며다른 생명을

고통에서 해방해주기를 열망한다.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간성을 보존하려고

환경과 싸워야 하며,



책을 완성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글을 쓰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 

​불리한 사회적 여건 아래서도

인간성을 위한 절망적인 투쟁을 희망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의 손. 

의료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순회 연주회를 했다.

 

나의 삶은 이러한 원칙으로

의지할 곳과 방향을 발견했다.

나는 생각을 통하여 인간을 향상하려

노력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와 대화를 나누는 슈바이처.

 

그러나 오늘날은 고민 끝에 얻은

개인의 신념을 멸시하고 불신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국가와 사회가

자신들이 준비한 신념을 믿게 하고,

자유로운 정신의 사람을 불편하게 보기 때문이다.



21세의 슈바이처 박사.

 

우리 시대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은사람들이

강요된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착오다.





조선일보 추천사 읽기

http://goo.gl/GK0y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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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이미지 출처 www.pnbbox.co.kr


썰렁해서, 어려워서 아무나 읽을 수 없다.

'영국식 유머'가 살아있는

소설 5권 + 영화




영국 유머 소개글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약이 되는 웃음을 만드는 수단 중 하나인 유머는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중에서도 영국식 유머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죠.

예1.

(약 대신 매일 운동하고, 잘 자라는 의사의 처방전을 확인하지 않고, 약사에게 약을 달라며 처방전을 주자 약사가 유머로 하는 말)

"저는 약사입니다. 만약 제가 식사와 음료를 제공하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호텔 지배인이라면, 손님에게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그저 약사에 불과한 것이 유감이군요."

- 《보트 위의 세 남자》 중에서



예2.

(여행 출발을 위해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난다고 했는데, 둘 다 늦잠을 잔 상황.)


나는 해리스를 깨웠다. 그가 말했다.

"여섯 시에 일어난다고 했잖아."

나는 물었다.

"그랬지. 왜 안 깨운 거야?"

"네가 나를 안 깨우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깨워?"

- 《보트 위의 세 남자》 중에서

참, 공감하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약사가 호텔 지배인이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하고, 네가 나를 안 깨워서 내가 너를 깨울 수 없었다는 이상한 말도 하구요. 영국 유머에는 이처럼 과장되게 말하거나, 반어법이나 역설법 등을 사용해 풍자를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수사가 많은 만큼 문맥을 이해해야 비로서 웃을 수 있고, 때로는 영국의 ​역사적, 문화적 요소도 이해하고 있어야 하죠.

아무튼, 한국 사람이 영국식 유머를 처음 접하게 된다면 아마, 아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새롭게 유행하는 ​하이개그인가?"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썰렁하지?"


그러나, 영국식 유머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썰렁하다는 점 외에도 특징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입장입니다만, 아마도 그 특징이 영국식 유머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그건 바로 유머를 하는 사람이 거의 웃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태도가 보기에 따라 잘란 척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심각하게 바보 같아 보이거나, 주변 사람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는데 본인은 태평할 정도로 무심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로 슬랩스틱 코미디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미디언은 코미디 안에서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지만 본인은 진지하죠. 때론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심각한 상황에 쳐해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코미디 배우 미스터 빈의 작품이나, 김병만 배우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상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코미디가 전달하는 진실은 많은 유머들이 불행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불행이나 고통을 맞이한 인간의 행동을 마냥 유머러스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왔더니 화장지가 없어서 낭패였다 같이 때로 상황이 정말 웃겨서 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겪은 사람 앞에서 웃으면 미안한 마음도 분명히 느끼니까요.


아무튼, 영국식 유머를 하는 사람이 잘 웃지 않는 건 아마도 ​자기의 불행이든, 타인의 불행이든 불행을 보고 웃는다는 건,

자기 반성이 없는 것과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웃기는 이야기라도 타인의 불행을 보고 웃는 자신을 보면 웃을 수 없다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는 지나칠 정도로 겸손하게 유머를 한다고 하네요.음... 뇌혈관 수술을 잘 하는 의사가 칭찬을 받는다면, 의사는 "나는 수술을 잘 하지 못해요. 나는 고작 뇌에 있는 수도관을 고칠 뿐이고 심지어 배관공보다 잘 고치지도 못하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의 약사 이야기와 조금 비슷하네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영국식 유머는 이런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유머는 현실을 보여준다

- 제롬 K 제롬의 '세 남자' 시리즈


영국 코믹 소설을 대표하는 책. 여행을 통해 삶을 재충전하려는 엉뚱한 세 남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단 원조를 알아야 다른 것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읽을 책. 독자들은 주로 《보트 위의 세 남자》를 추천하는 편


"진실을 말하는 태도만큼 지금까지 발견된 작품 중에서 이 책을 능가할 작품이 없다."

_ 제롬K 제롬 



유머는 슬픔과 함께 한다

- 《영국 남자의 문제》

최초로 부커상을 수상한 유머러스한 소설이라는 의미심장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책, 모든 문장에 웃음과 슬픔이 공존할 수 있도록 썼다고 하는데요. 재미보다는 진한 감동을 바란다면 선택할 책입니다.



유머와 인간애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건지 섬 사람들의 이야기. 전쟁을 다루고 있으면서 유쾌한 이야기를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책. 유머 감각과 인간애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영국식 블랙 유머의 정수

- 《멋진 징조들》

이런! 속세의 즐거움에 빠진 천사와 악마가 성경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함께 합니다. 종교의 문제를 비판하고, 인간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말이죠. 재미와 의미 두 가지를 얻고 싶다면 이 책.




킹스맨

블랙 유머가 있지만, 아! 이게 영국식 블랙 유머구나!란 감탄 없이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 그 이유는 유머보다 매너가 핵심인 것 같아서....(믿거나 말거나) 



어바웃타임

어떤 대사가 영국식 유머인지는 쉽게 찾을 수 없지만, 눈감고 숨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모습과 사랑이 유머러스한 영화. 만약, 눈 뜨고 시간 여행을 했다면 미래로 갔을까요?



위드네일과 나

 

위대한 영국영화 100선 중 하나이면서, 어떻게 젊은 주인공들이 젊음을 허비하는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담았느냐고 묻지 마세요. 웃기고 모자라 보여도 타인의 삶을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다는 영국식 유머의 진수가 담겨있는 거니까요.



영국식 유머에 대한 추가 이야기를 더 읽고 싶다면,

아래 글들을 추가로 읽어보세요.

(제목 클릭하시면 됩니다.)

1. 영국의 유머는 정말로 재미없는가? _iae유학네트

2. 영국 유머 _HELEN AUSTEN

3. 영국의 스탠드 업 코미디를 보고나니.. _품절녀의 영국 귀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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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3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ㅡ유명한 정신과의사 시리즈와 맞먹어요..좋아하는데..이런 스타일!

문예출판사 2016-01-04 17:11   좋아요 1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소식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갱지 2015-12-31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 그대로 참, 타인의 취향-;-)

문예출판사 2016-01-04 17:11   좋아요 2 | URL
네, ㅜㅜ 영국 유머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아요.^^
 



​*


조르주 바타유가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화두를 가지고 저술한 책이다.


바타유는 인간이라도 사물 또는 도구(수단)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삽과 연필 등 도구는 사용되지 않을 땐 아무런 가치가 없고,

어떤 목표와 관계를 맺을 때만 가치를 가진다.

도구적인 인간의 삶도 그렇다.

바타유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살기 위해 일 하는 사람을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된다.


예로 농부는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삶을 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작물을 소비하는 사람에게 농부는

작물을 소비하기 위한 도구(생산자)에 불과하다.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일이 누군가의 도구가 되어버리는 시대.

인간은 도구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벗어나고자 하고,


바타유는 인간이 도구적 삶을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전쟁, 종교, 제사, 축제의 진실한 의미를 그려낸다. 




■ 출판사 소개글


조르주 바타유의 《종교이론》 개정판 출간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조르주 바타유의 《종교이론》은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수단으로서의 인간과 그로부터의 초탈을 위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제2부는 이윤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폭력을 현실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근대 산업사회 이후의 군사적 질서에 대한 비판이다.

사상을 벽돌담의 벽돌에 비유하는 바타유는 하나의 철학이 철학일 수 있으려면 인류의 사상사에서 그 다음에 있을 철학적 논의들에 대한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벽돌이 쌓이고 쌓여 돌담을 이루듯이 철학도 쌓이고 쌓여 사상의 담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무한조립은 불가능하며, 어떤 철학자는 새 집의 초석을 놓아야 한다. 또는 철학적 답변은 개인적 입장을 무시할 수도 있고 이전에 있었던 또는 이후에 올 어떤 사상적 흐름에도 가슴을 활짝 열고 거역할 수 있다. 사상적 불만, 미완성은 답변과 관계있으며. 더 나아가 답변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이론》을 쓰는 바타유의 화두는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나는가?’이다. 바타유는 인간도 동물성, 사물 또는 도구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도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목표와 관계할 때만 가치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의 가장 두드러진, 가장 심각한 탈선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구를 사용해서 어떤 것을 생산하지만, 그 생산물은 다시 다른 어떤 것에 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리는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삽으로 땅을 파고 거기에 식물을 재배한다. 거기서 생산된 작물은 누군가가 먹는다. 그러나 다시 그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농산물과 가축은 사물들이며, 사육과 경작의 순간만큼은 경작자, 사육자도 사물들이다. 그 세계에 속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수단이다. 경작자는 인간이 아니다. 경작자는 빵을 먹는 사람의 수단인 셈이다. 바타유는 수단을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을 전쟁, 종교, 제사, 축제에서 찾는다. 살상이 자행되는 전쟁은 얼핏 축제가 갖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쟁과 축제는 큰 차이가 있다. 축제는 적을 사물 취급하지 않지만 전쟁은 적을 사물 취급한다. 전쟁은 개인의 생명과 그 가치를 위험에 빠뜨리는 반면, 살아남은 개인을 그 위험한 놀이의 수혜자로 만든다. 다시 말해 전쟁은 살아남은 병사를 초라한 사물로서의 개체가 아닌 영광스런 개체로 승화시켜준다. 그러나 바타유는 실아 남은 병사의 영광을 허위의 영광으로 규정한다. 병사는 폭력을 통해 인류를 전적인 사물의 질서로 환원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물론 무의식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병사의 그러한 태도는 주로 현실적 질서의 우세를 돕는다. 병사가 차지하는 신성의 권위는 세계를 유용성으로 끌어내린 뒤 얻은 거짓 권위이다. 바타유는 병사의 품위를 창녀의 웃음에 비유한다. 군사적 정복의 정신은 희생의 정신과는 반대이다. 군사적 질서의 왕은 내부의 폭력을 막기 위해 원칙적으로 폭력을 철저히 바깥으로 돌린다. 군사적 질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폭력을 현실적 목적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군사적 질서는 축제와는 달리 힘의 최대 소비를 목표하지 않는다. 힘의 소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사적 질서의 원칙에 의한 힘의 소비는 기껏해야 이윤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의 힘의 소비로서, 단지 더 큰 힘을 얻기 위한 것이다.

바타유는 종교도 이러한 군사적 질서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며, 그 예로 이슬람을 든다. 바타유에 의하면 이슬람은 군사적 힘과 정복을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행동을 볼 수 없는 엄격한 군사적 질서의 종교이다.
그러나 축제 또는 제사는 다르다. 제사는 미래를 염려하는 생산의 반대 명제이며, 오직 순간에만 관심을 갖는 소모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제사는 버리고, 주는 것이다. 석탄이 타는 화로는 대체적으로 부인할 여지가 없는 유용성을 갖는다. 반면 제사에서 제물은 그런 모든 유용성을 벗어난다.

제사의 정확한 의미를 찾자면 바로 이와 같다. 우리는 사치품을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유용한 것을 제사 지낸다. 또한 제물이 이미 손상된 것일 때는 제사란 있을 수 없다. 사치품이란 제작을 위한 노동의 유용성을 애초에 제거시켜버린 물건이다. 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사치품은 유용성을 잃는다. 사치품을 제사 지낸다면 그것은 같은 대상을 두 번 희생시키는 것이 된다.

그런가 하면 축제는 사람들을 모아, 그들에게 전염성이 강한 제물의 소모(영성체)를 통해 제한적 의미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불길을 향해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축제는 파괴적 열망을 분출시킨다. 춤, 시, 음악 그리고 다양한 예술들이 축제를 웅장한 폭발의 시간과 장소로 만든다. 폭발의 순간, 수단에 종속되었던 인간은 비로소 수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목차

출발에 앞서
서문

1부 기본 여건들
1. 동물성

1) 먹는 동물과 먹히는 동물의 내재성
2) 동물의 의존성과 독립성
3) 동물성과 시詩적 허위
4) 물이 물에 있듯이 동물은 세상에 있다

2. 속세의 성립과 인류
1) 사물의 지위 : 도구
2) 내재적 요소들의 사물 차원의 지위
3) 주체로서의 사물들의 지위
4) 절대적 존재
5) 신성
6) 정신적 존재들과 신들
7) 사물들 세계의 지위와 사물로서의 육체의 지위
8) 먹힌 동물, 시체 그리고 사물
9) 노동자와 도구

3. 제사, 축제 그리고 신성세계의 원칙들
1) 제사의 필요성과 원칙
2) 신적인 세계의 비현실성
3) 죽음과 제사의 일상적 결합
4) 제사의 성취
5) 개인, 고뇌 그리고 제사
6) 축제
7) 축제의 한계, 유용성에 근거한 해석 그리고 집단의 입장
8) 전쟁 : 바깥을 향한 폭력과 폭발의 환상
9) 전쟁의 폭발을 인간 상품으로 엮어내기
10) 인간 제물

2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군사적 차원에서 산업 증대로)

1. 군사적 질서
1) 자원과 소비의 균형에서 발전을 위한 힘이 비축으로
2) 일반적 사물로서의 제국의 입장
3) 법과 윤리

2. 이원론과 도덕
1) 신성과 속세의 이원론적 입장, 그 경계의 자리바꿈
2) 신적 내재성의 부정과 이성의 초월성에 대한 신의 입장
3) 감각 세계의 합리적 배제와 폭력의 초월성

3. 매개
1) 도덕적 신성의 보편적 약점과 악의 힘
2) 악의 개입과 무능한 복수의 신
3) 신성의 제사
4) 작동을 시작한 신성

4. 산업의 비약적 발전
1) 신적 내밀성과 현실적 질서 간 관계의 완전한 부재
2) 생산과 비생산적 파괴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조망
3) 완성된 환원의 세계 또는 사물의 지배
4) 사물에 대한 명료한 의식 또는 과학
5) 자아의식
6) 사물의 전반적 파괴

누구에겐가…
부록 알람표와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조르주 바타유 연보



■ 본문에서

 

■ 철학은 일관성 있는 개요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은 적어도 인류 전체, 아니면 적어도 개인을 설명해줄 수는 있어야 한다. 어떤 철학이 철학일 수 있으려면 인류의 사상사에서 그 다음에 있을 철학적 논의들에 대한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19쪽)

■ 사물의 지위는 동물성 안에서가 아니라 도구의 인간적 사용 안에서 찾아진다. 도구란 수단이며, 목표와 결과를 위해 또는 도구를 사용해서 더 완전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데 쓰이는 물건이다. 우리는 도구를 사물로 또는 구분이 불분명한 연속성의 차단으로 포착하며, 도구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도구는 바야흐로 나 — 아닌 것에 대해 눈을 뜨게 한다. (35쪽)

■ 사물의 질서가 생명을 이어주는 지속이라면 신성은 그 연결을 풀어헤치는 놀라운 폭발, 즉 폭력이다. 축제는 끊임없이 둑을 무너뜨리려고 위협하며, 축제가 성취되면 이제 순수광채의 전염적 충동이 생산 활동을 가로막는다. 신성은 정확히 말해서 나무를 태워서 소진시키는 불길과도 같다. 축제는 사물의 대립항으로서의 불길이며, 그래서 축제는 열과 빛을 분산시키면서 번지고, 불을 붙이며, 축제의 불길에 휩싸인 사물은 다시 불길이 되어 다른 것에 불을 붙이고, 앞뒤 없이 타오른다. 저녁이 되면 엄청난 광채의 태양도 서녘에 지듯이 제사도 시들지만, 그러나 결코 단절을 모르는 제사는 개체들의 총체적 부정을 초대한다. (63~64쪽)

■ 살상이 행해지는 전쟁, 약탈, 침략적 전투 행위는 적을 사물로 취급하지 않는 점만 빼면 축제와 매우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전쟁은 폭발력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또는 한계가 있다 해도 전쟁은 잃어버린 내밀성 회복의 완만한 행위로서의 제사와는 다르다. 전쟁은 병사로 하여금 내재성을 잃게 만드는 바깥으로부터의 느닷없는 침입이다. 그리고 전쟁은 개인의 생명과 가치를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개인을 와해시키려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또한 그와는 반대로 살아남은 개인을 그 위험한 놀이의 수혜자로 만듦으로써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69쪽)

■ 제국은 우선 현실적 질서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제국은 자신을 하나의 사물로 간주하며 스스로 정한 목적에 복종한다. 제국은 말하자면 이성의 경영이다. 그러나 제국은 그 경계선에 위치한 다른 제국의 동등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국 주변의 모든 다른 제국들은 단지 정복 대상으로서의 제국들일 뿐이다. 제국은 그런 점에서 좁은 의미의 공동체가 갖는 단순한 개별체의 성격을 상실한다. 일반적으로 사물들이란 사물들을 포괄하는 질서에 편입되지만, 제국은 그런 의미의 사물이 아니다. 제국은 사물들의 질서 자체이고, 또 보편적 사물 자체이다. (78쪽)



■ 지은이


조르주 바타유(Georgs Bataille)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사상가. 문학사가들에 의해 ‘저주의 작가’로 불리는 바타유는 사실 당대의 지성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였다. 젊은 시절 성직에 뜻을 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누구보다도 신성모독적인 저술을 많이 남긴 이단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일생을 무신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절대성을 탐구하는 사색을 지속했다. 일찍부터 사회학, 인류학에 관심을 가져 마르크스, 헤겔, 니체 등을 탐독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한때 초현실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바타유의 저작은 철학, 사회학, 경제학, 예술론, 소설, 시, 문예비평 등 광범위한데, 그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죽음, 에로티즘, 금지, 침범, 과잉, 소비, 증여, 성스러운 것 등의 주제는 모두 절대성이라는 중심 테마에 수렴된다.

저서로는 무신론 대전 3부작 《내적 체험》, 《죄인》, 《니체에 관하여》, 처절한 죽음과 에로티즘을 다룬 소설 《눈 이야기》,《마담 에두아르다》, 문학이론서 《문학과 악》, 《에로스의 눈물》, 미술에 심취한 시기에 쓰여진 《선사시대 그림: 라스코 또는 예술의 탄생》, 《마네》 등이 있다. 

 


 

 

■ 옮긴이


조한경
​​서울대에서 문학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전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암재단의 지원으로 프랑스 리옹3대학교에서, 학술재단의 지원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교환교수 연구 기간을 가졌다. 번역서로는 《미덕이란 무엇인가》(앙드레 콩트 스퐁빌), 《에로티즘》 (조르주 바타유), 《저주의 몫》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의 역사》 (조르주 바타유),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 《초현실주의》 (이본 뒤플레시스) 등이 있다.
저서로는 《사실주의》, 《변혁의 시대와 문학》(공저), 《서양 문예사조》(공저), 《라모의 조카》, 《프랑스 현대문학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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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타인의 잘못을 평가하는 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인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작품

◆ 가장 뛰어난 불문학 번역가 故 이휘영 선생님 번역



■ 출판사 서평


심판과 참회의 아이러니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며
카뮈 자신과 동시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낸 작품!


센 강에 뛰어내려 자살하는 여자를 구하지 않고 방조한 이후 ‘정상’에서 ‘지옥’으로 추락’을 경험한 변호사 클라망스의 참회와 심판을 통해 카뮈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르트르를 포함한 프랑스 지식인의 모습, 나아가서는 비극의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20세기’를 몸소 겪었던 동시대인들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투영하고 있는 《전락》이 문예 세계문학선 119번으로 출간됐다. 20세기의 양심이라 불리는 카뮈의 작품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책은, 광복 후 최초의 프랑스어 사전인 《불한소사전》과 《엣센스 불한사전》 등을 편찬했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아시아 최초로 번역해 한국의 프랑스 문학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불문학자 고(故) 이휘영 서울대 교수가 원전을 직접 번역한 작품이다. 책의 말미에는 변광배(한국외국어대학교 교양대학) 교수의 깊이 있는 해설을 실어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이방인》에서 “인간이란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했던 카뮈는 《전락》에서는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 인간의 반응과 태도를 보여준다.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참회하고 난 후에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다는 점을, 또한 이러한 잘못은 20세기를 살았던 모든 이들이 의무적으로 떠안아야 할 몫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줄거리 
《전락》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이 작품은 운하와 회색빛의 도시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의 한 술집을 배경으로 파리의 전직 변호사였던 클라망스가 끝없이 늘어놓는 ‘계산된 고백’을 따라 진행된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파리에서 명성을 날리던 변호사,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싸우는 덕망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서 항상 정상에 올랐다는 느낌을 지닌 채 마치 초인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또 그들과의 관계에서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요컨대 파리에서 변호사로서 ‘양심상의 평화’를 만끽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클라망스가 파리에서 누렸던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이와 같은 만족스러웠던 삶과 ‘양심상의 평화’는 센 강의 퐁데자르를 건너던 중 듣게 된 정체 모를 웃음소리로 인해 급변한다. 그에 따르면 이 웃음소리를 들었던 순간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웃음소리는 그가 파리에서 직접 겪었던 한 사건에 대한 기억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문제의 웃음소리를 듣기 2~3년 전에 센 강의 퐁루아얄 위에서 이 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굽어보고 있던 한 젊은 여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이 젊은 여자를 외면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갔지만 곧 이 여자가 강으로 뛰어든 소리와 이 여자의 비명이 잦아드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달려가서 그녀를 구하고 싶었지만 결국 “너무 늦었다, 너무 멀다”고 판단하고 길을 계속 갔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후일 변호사 클라망스의 명성을 더럽히는 얼룩이자 오점이 되고 만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어린 심판을 받게 될까 봐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퐁데자르 위에서 들었던 정체 모를 웃음소리는 바로 그들로부터 오는 비난어린 심판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그는 ‘정상’에서 ‘지옥’으로 ‘추락(chute)’을 점차 경험하게 된 것이다.

심판과 참회의 아이러니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통해 “인간이란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 보이는 반응과 태도이다.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참회하고 난 후에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잘못이 20세기를 살았던 모든 이들이 의무적으로 떠안아야 할 몫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이것이 바로 카뮈가 《전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실제로 카뮈는 《전락》 에 “우리 시대의 영웅(Un heros de notre temps)”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참회자’의 자격으로 자신을 먼저 심판대에 올려 심판하고 참회하는 클라망스,  그리고 ‘재판관’의 자격으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자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면서 그들에게 ‘초상화-거울’을 내밀면서 반성을 단호하게 촉구하는 클라망스는 심판과 참회의 아이러니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 불려 마땅할 것이다.


■ 목차

전락

작품 해설 - 카뮈의 《전락》: 참회와 심판의 아이러니(변광배) 

알베르 카뮈 연보


■ 본문에서

■ 내 직업은 다행스럽게도 정상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내 천성을 만족시켜주었습니다. 직업 덕분에 이웃 사람에게는 도통 신세를 지는 일 없이 늘 친절을 베풀어주는 편이라 그들에 대한 불쾌감도 없었습니다. 내 직업은 나를 판사와 피고 위에 서게 하여, 오히려 내가 판사를 재판하고 그로 하여금 나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했지요. 그러한 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벌받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판결과도 관련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재판정 무대 위가 아니라 천장 어느 곳에 있었던 겁니다. 마치 극 중에 이따금 기계장치로 내려져 줄거리에 변화를 일으키고 뜻을 부여하는 신(神)과도 같았지요. 어쨌든 높은 데서 산다는 것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우러러보이고 존경받는 유일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28쪽

■ 별로 중요할 것 없는 이야기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일을 잊어버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게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대항하지도 않고 얻어맞았지만, 나를 비겁하다고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뜻하지 않은 일격이었던 데다가, 양쪽에서 대드는 바람에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또 클랙슨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명예를 저버리기나 한 것처럼 나는 불행했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군중의 비웃는 눈길을 받으며 차에 오르던 내 꼴이 자꾸만 눈앞에 보였어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만, 그날 내가 매우 말쑥하게 푸른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만큼 군중은 더 좋아했습니다. ‘얼간이’라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그런 소리를 들어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55쪽 

■ 그날 밤 나는 센 강 왼쪽 기슭으로 해서 집으로 가느라고 퐁루아얄을 건너려던 참이었습니다. 자정이 지나 한 시였는데, 가랑비라기보다 차라리 이슬비 같은 비가 내려서 드문 인기척마저 흩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여자 친구와 막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었고, 필시 그 여자는 벌써 잠들어 있었을 겁니다. 좀 흐리멍덩한 기분으로 걷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몸은 가라앉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처럼 흐뭇한 피가 전신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다리 위에서 난간에 허리를 굽히고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사람의 모습 뒤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검정 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젊은 여자였어요. 거무스름한 머리와 외투 깃 사이로 잔득하게 젖은 목덜미가 드러나 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71쪽

■ 나는 연극을 뒤틀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세인들의 그 호평을 파괴해버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건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모두가 상냥스럽게 “당신 같은 사람은……” 하고 말했는데, 그러면 나는 파랗게 질려버리곤 했습니다. 그들의 존경은 일반적인 것이 못 되었기에 나는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나 스스로가 그 존경에 동감하지 않는데 그게 어떻게 일반적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평판이니 존경이니 하는 모든 것을 비웃음의 외투로 덮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습니다. 나는 숨이 막히도록 답답한 심정을 어떻게 해서든 풀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어디서나 내세우던 허울 좋은 마네킹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을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기 위해서, 그것을 부수고자 했던 겁니다. -95쪽 

■ 나는 모든 사람의 것인 동시에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초상화를 만들어냅니다. 말하자면 그건 하나의 가면인데, 사육제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아주 흡사하지요. 여실하면서도 단순화된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이것 보게,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녀석인데!”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저녁처럼 초상화가 다 되면, 나는 그것을 보이고 비탄을 금치 못하며 “이것이 내 꼴입니다” 하고 말하지요. 논고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동시대인들에게 보이는 초상화는 거울이 됩니다. -139~140쪽


■ 지은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1913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에 공립초등학교에 들어가, 뛰어난 교사 루이 제르맹의 가르침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 알제대학 재학 중에는 평생 동안 스승으로 여기게 된 철학 교수 장 그르니에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에 카뮈는 당시의 작가들, 특히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등의 작품을 비롯해 프랑스 고전문학을 두루 섭렵했으며, 서서히 알제리의 젊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1934년에 잠깐 알제리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
던 그는 노동계급 관객들에게 훌륭한 연극을 보여줄 목적으로 극단을 조직해 손수 각본을 쓰고, 연출과 각색 및 연기까지 맡았다.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 카뮈는 진보적 신문 《알제 레퓌블리캥》에 참여해 언론인 수업을 해나갔다.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카뮈는 정의와 진리 및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좌파적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1951년에 발표한 장편 평론 《반항하는 인간》에서 ‘반항’이라는 개념과 정치적·역사적 혁명을 대비했다. 이 평론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물론 장폴 사르트르 같은 친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57년에 카뮈는 마흔넷의 젊은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그 후 3년이 채 안 되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대표작으로 《안과 겉》,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등이 있다.


■ 옮긴이

이휘영
소르본대학교 문학부에서 D.S.C.F. 학위를 획득했으며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광복 후 최초의 프랑스어 사전인 《불한소사전》과 《엣센스 불한사전》 등을 편찬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아시아 최초로 번역했으며, 카뮈의 《페스트》, 《안과 겉》,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사전꾼들》, 르 클레지오의 《홍수》, 《카르멘》, 《독서론》, 《회색 노트》, 《암야의 집》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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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사랑 할 수 없는 29세 싱글들의 사랑 이야기.

《29세의 크리스마스》 

이 소설은 일본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지만

배우 엄정화와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장진영이 주인공이었던 영화

<싱글즈>(2003)로 소개된 소설이기도 합니다. 


 29살은 다른 나이에 비해

약간은 더 초조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일이든 공부든 인생이든 서른이 되면

더 잘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기도 하니까요.


이런 서른을 바라보는

29세의 싱글이 사랑을 해야 한다면

어떤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자신에게 적합한

사랑의 형태를 고민하면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자기만의 사랑을 만드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럼, 29세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만의 '사랑'을 찾길 바라겠습니다.

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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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바람

 

1

벚꽃 잎 한 장이 화장대 위에 떨어졌다집 근처에는 벚꽃나무가 없는데아마도 어제 바람이 많이 불더니 마쓰자와 초등학교 쪽에서 날아온 것 같다.

화장수 묻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주워 화장대 거울에 붙여놓고 시계를 곁눈질하며 부지런히 빗질을 했다.

해마다 벚꽃이 날릴 무렵이 생일이었다앞으로 1년 뒤면 서른자신이 그런 나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이 같은 건 생각한 적도 없어이렇게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나이 따위 신경 쓰지 않아이렇게 허세를 부릴 나이도 아니고.내 나이를 잊고 있었어그래이렇게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할 거야.

그렇게 잊고 있던 나이를 어떤 순간 문득 떠올리게 된다.

이를테면 머리를 짧게 자른 다음 날거울에 비친 모습이 완전히 빵집 아줌마일 때나도 모르게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옛날에는 모델 이디 세지윅 닮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짧은 머리가 어울렸는데…….

샴푸 광고에 나오는 여자의 눈동자가 티 없이 맑은 것을 발견했을 때. 10대 때는 나도 저렇게 맑았는데지금은 흐리멍덩해지기 시작했다조각칼로 그린 듯 선명하던 눈의 윤곽도 지금은 어딘지 풀어져 보인다.

펄이 든 핑크 립스틱을 바르고는 그야말로 팔푼이 같아 보이는 모습에 허둥대며 닦아버린 적도 있다이런 색 립스틱은 얼굴 전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눈도 예전에는 더 반짝거렸다턱선도 선명했다눈에다 아이라인을 하지 않아도입술에다 립라인을 그리지 않아도아니화장 따위 전혀 하지 않아도 미인이라는 칭찬을 듣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이제 수면 부족으로 거칠어진 피부에는 시세이도의 미드 나이트 시크릿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얼른 뛰어가서 산다좋은 화장품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비싼 돈 내고 피부관리센터에 다니는 선배를 비웃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까칠해진 피부는 오일을 찾고 있다눈두덩 위에서 작은 뾰루지를 발견하고 드디어 때가 됐군’ 생각한 적도 있다옛날에는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그런 곳에 뾰루지가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태양을 좋아했는데지금은 조금이라도 햇빛이 비치면 반사적으로 그늘을 찾아 들어간다거뭇한 기미를 발견하고 한참 동안 거울에 시선이 고정됐던 건 스물여덟 때였다.

그러나 이렇게 순간순간 여러 형태로 잊고 있던 나이를 떠올리긴 하지만그래도 나름대로 알찬 인생을 보내왔다.

성질나는 일이 많긴 하지만 회사 일도 꽤 재미있고물론 결혼할까 싶은 애인도 있다. 2년 전부터는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그렇게 바라던 싱글 생활까지 누리고 있다.

야부키 노리코는 인생에 만족했다적어도 스물아홉의 생일그날 아침까지는.

 

2

 

생일 파티에는 DKNY의 펄 그레이색 투피스를 입고 가야지지난주에 사놓고 아직 팔도 끼어보지 않았다매장에서 처음 입어보았을 때 맞춤복처럼 몸에 꼭 맞아 기분 좋았던 옷이다.

애인 구보타 요시노리와는 사귄 지 3년째권태로울 정도로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다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이트 약속을 취소할 때도 전에는 엎드려 사죄라도 할 듯이 전화를 하더니요즘에는 일이 생겨서 그런 걸 날더러 어쩌라고하는 느낌이 노골적이다.

노리코도 몇 번 일 때문에 약속을 깬 적이 있다그때 자신도 예전만큼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피장파장일지도 모른다아무튼 이런 긴장감 없는 지금의 관계를 근사하게 날려 보내줄 것 같았던 게 바로 DKNY의 투피스였다.

펄 그레이의 우아한 색조는 168센티미터의 늘씬한 이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해주겠지구보타는 미디스커트 아래로 잘 뻗은 다리를 새삼스레 감탄하며 볼 거야타이트한 스커트는 매력적인 히프라인을 더욱 강조하겠지.

구보타에게 자신의 매력을 한 번 더 인식시키고 싶었던 바람을 이 투피스는 충분히 이루어줄 것 같았다그래서 이번 달은 지출이 너무 많다고 반성하면서도 큰맘 먹고 이 옷을 샀다.

구두는 굽이 5센티미터쯤 되는 프라다의 힐을 신어야지노리코는 행복한 기분으로 빗질을 계속했다.

그 순간 손이 멈춘다.

머리카락 사이로 무언가 허연 것이 보였다.

뭐지?”

머리 꼭대기에서 오른쪽 아래로 십 엔짜리 동전 크기만 한 맨살이 보였다.

노리코는 빗을 집어던지고 양손으로 머릿속을 헤쳤다머리카락이 없다만져보자 미끈한 감촉이 손에 와 닿는다.

노리코는 아연실색하여 거울을 보았다.

그 인간 때문이야.’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1년 전 노리코가 소속된 기획부에 과장이 새로 부임해왔다모회사의 섬유 공장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무엇이든 자기 맘대로 하려 들었다그가 해오던 원단 만드는 일과 그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데도최신 유행에 관해서는 혼자만 다 아는 척 사사건건 관여하였다.

새 과장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를 만드는 기획에서노리코네의 지금까지의 업적 같은 건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무조건 자신의 엉뚱한 취향대로만 밀고 나가려 해서 노리코와는 날마다 충돌이었다.

그가 브랜드명을 콜리플라워로 하자는 의견을 냈을 때 노리코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전혀 이미지가 동떨어진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한때 유행하긴 했습니다만지금까지 남아 있는 브랜드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특히 그렇게 귀여운 인상을 주는 브랜드 명은 요즘 여성들의 기호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에서 젊은 여자가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들고 나오는 것에 감정이 생겼던지 그 후 과장은 노리코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재능 있는 여자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남자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보도 일을 하는 친구 이마이 아야도 그렇게 말했다여성들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기성복 업계지만 회사는 아직도 남성 중심이다보조 업무를 할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책임 있는 일을 맡게 되는 순간부터 남성 사회의 벽에 부딪치는 일이 많아진다.

노리코는 원형탈모가 생긴 머리를 거울에 비춰 멍하니 바라보다화장대 옆 수화기를 들어 아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야가 나왔다.

…….”

무슨 일이야아침부터?”

대머리 됐어.”

?”

벗겨졌다구.”

누가?”

.”

어디가?”

머리……원형탈모야.”

무슨 소리야?”

그 인간 탓이야그 인간!”

그 인간이라니 누구?”

우리 과장……그 인간 때문에 온몸이 스트레스 덩어리였잖아.”

새로운 브랜드가 나올 때까지 고생한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하지만 그렇게 고생해서 내놓은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가야 돼네 얘기밤에 천천히 들어줄게안녕!”

전화가 거칠게 끊겼다아야와 전화를 하면 언제나 이렇다.

아야는 방송국 프로그램을 외주로 제작하는 프로덕션의 카메라맨이다. 8킬로그램이나 되는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화제의 인물이나 정치가 등을 쫓아다니며 찍은 영상을 노리코도 텔레비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옆에서 보기에는 무척 근사해 보였지만 쉬운 일은 아닌 듯아야는 자주 허리가 아프다느니 위가 안 좋다느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노리코는 한 번 더 머리를 걷어붙여보았다보기 좋게 벗겨진 원형탈모가 나왔다.

생일이란 말이야오늘은스물아홉 살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노리코는 울음 섞인 소리로 투덜거렸다그날이인생 최악의 날이 되리란 걸 그때까지도 예측하지 못한 노리코였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10분이나 늦었다.

노리코는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3

 

벌써 아까부터 회의 시작했어.”

기획부에 뛰어 들어가자마자 동료인 다지마 테루코가 옆에 다가왔다.

오늘 회의는 매출이 좋지 않은 새 브랜드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였다모회사에서 온 과장이 잘난 척하고 추진한 기획이어서 속으로는 꼴좋다 싶었지만기획부의 브랜드 담당자로서 노리코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죄송합니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전원의 시선이 노리코에게 모였다.

오늘은 자네한테 중요한 회의야.”

의자에 앉는 순간가미오카 과장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덮쳐왔다여성적인 목소리와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신물이 난다.

너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노리코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회의 자료를 펼쳤다그때,

콜리플라워 브랜드는 제조 중지하기로 결정됐다.”

사이토 부장이 말했다.

?”

노리코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더 이상 계속해봤자 손해만 볼 뿐이라고…… 어제 본부 회의에서 결정됐다.”

사이토 부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노리코는 마음속으로 아까부터 가미오카 과장을 노려보고 있었다책임은 그쪽에 있다좀 더 충분한 마케팅을 한 후에 내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무조건 돌진하는 과장에게 몇 번이나 건의했었다그런데 어째서 내가 사과해야 하는가.

좀 더 충분한 마케팅을 거쳐야 한다고 제가 몇 번이나 충고했는데 말입니다.”

가미오카 과장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발언했다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노리코는 어이없는 얼굴로 과장을 보았다.

지금은 소비자도 현명해져서 말이죠메이커가 어떤 취향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거든요.”

그 말을 한 것도 노리코였다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노리코는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요마케팅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은저였…….”

노리코의 말을 사이토 부장이 가로막았다.

됐어자네도 변명할 거리야 많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야미래.”

사정을 조금은 알고 있는 듯한 부장의 말에 노리코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미오카 과장이 여전히 의기양양한 얼굴로 끄덕이고 있다자신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얼굴로그것을 보니 또 울컥 치밀었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려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는 브랜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부터의 과제야.”

부장의 말에 가미오카 과장이 끊임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이 인간은 대체 어떤 신경구조를 갖고 있는 걸까생각하며 노리코는 거울에 비쳤던 원형탈모를 떠올리고 있었다.

니타.”

사이토 부장이 1년 전에 입사한 젊은 여사원을 불렀다.

.”

노란 재킷이 잘 어울리는 니타 미나가 대답했다아직 어린 나인데 화장이 짙다.

올해 파리 컬렉션에는 자네를 파견하기로 했다.”

노리코에게 그것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젊은 감성으로 파리 컬렉션을 보고 오도록그래서 우리 회사의 새로운 브랜드 창조에 반영시켜주길 바란다.”

사이토 부장이 논평을 하듯이 말했다.

!”

미나가 기쁜 듯이 대답했다.

잠깐만요.”

노리코는 또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올해 파리 컬렉션에는 제가 가기로 되어 있었고호텔 예약도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파리에서 열리는 유명 디자이너의 신작 컬렉션을 보러 갔다 오면 다음 해 기획에 강한 발언력을 얻게 된다.

가미오카 과장이 일어선 노리코를 올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하게 됐어그리고 자네는 다른 일을 맡게 될 거야.”

 

4

 

니타 미나 말이야사이토 부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래.”

게시판에 붙은 공고를 보면서 다지마 테루코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몸으로 승부하자면 젊고 싱싱한 애들한테는 잽이 안 되지.”

테루코의 말은 노리코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분하다그것밖에 없었다기획의 실패를 노리코에게 떠맡기는 것으로 과장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부장도 그것을 아는 주제에 자신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젊은 여사원을 발탁하는 기회로 이용해버렸다.

남자란 건 다 그런 거야노리코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그러나 남자 사회에서 일을 해나가는 한아무리 큰 소리로 남자 욕을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발 령  

 본사 기획부 야부키 노리코  

 위의 사람을 오늘부로 외식사업부 <쾌식클럽점장으로 전속을 명함. 

 

아침 회의에서 다른 일을 담당하게 될 거란 말이 나오자마자 낮에 벌써 게시판에 공고가 붙었다쾌식클럽은 회사가 외식사업에 발을 내딛는 첫 번째 주자로 고탄다에 낸 비어 레스토랑이다.

파리가 고탄다로 바뀌어버렸네.”

옆에서 테루코가 말했다넋이 나간 모습으로 공고를 보던 노리코는이런 걸 언제까지 보고 있어봐야 소용없어하고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옛날부터 생각을 전환하는 데는 빨랐다.

1층 로비에 내려와 공중전화로 구보타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은 파크 하얏트 호텔의 뉴욕 그릴에서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다호텔 방을 예약하자고 그에게 제안해볼 생각이었다도쿄의 야경이 보이는 방에서 우아한 하룻밤을 보내면 지금의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보타는 노리코보다 두 살 위다그의 서른 살 생일에 같은 호텔에 머물렀지만지은 지 얼마 안 된 호텔 제일 위층의 그릴에는3개월 후까지 예약이 차 있어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그때 구보타는 네 생일 때는 꼭 여기서 식사를 하자” 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구보타는 신주쿠에 있는 전통 깊은 백화점의 머천다이징 통괄부에 있다백화점 업계가 불황인 상황에서도 구보타가 있는 백화점만은 패션 동향에 민감한 젊은 여성 손님을 모으고 있었다.

4년 전영업을 담당하고 있던 노리코가 구보타의 백화점을 여러 차례 찾았다그 무렵젊은 디자이너를 채용한 새 브랜드가 막 완성되었을 때여서 어떡하든 백화점 안에 매장을 만들고 싶었다.

전통 있는 백화점이라는 곳은 좀처럼 그때까지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지만업계 전체가 불황인 탓도 있어 구보타의 백화점은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이었다노리코는 구보타를 사전 교섭한 효과가 있어서 1층 입구와 가까운 장소에 큰 매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다행히 매출은 호조를 보였고기획이 성공한 걸 축하하며 건배를 하던 날 밤에 취기를 핑계 삼아 구보타와 키스를 했다거래처 사람들하고는 절대 남녀관계를 맺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지만달콤한 키스의 감촉에 노리코는 몸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그 후, 3년이 흘렀다.

…….”

구보타가 나오자 노리코는 응석을 부리듯이 말했다제 아무리 강해 보이는 노리코지만 남자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때가 있다.

…….”

구보타가 순간 곤란한 듯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의 중?”

노리코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냐…….”

파리가 고탄다로 바뀌어버렸어.”

무슨 소리야?”

우리 회사가 고탄다에 낸 비어 레스토랑의 점장으로 발령이 났어.”

내 기분 좀 알아줘하듯이 노리코는 매달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의외로 차가운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좋잖아.”

좋지 않아브랜드 실패를 내 책임으로 떠맡기고……무식한 과장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판매 실적이 오르지 않았던 것을 전부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시장조사가 중요하다고 말한 건 바로 나였다구지금은 기성복 업계가 취향을 강요하는 시대가 아니라고내가 과장에게 말했다구충분한 시장조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사장이 내라고 했으니 빨리 하라고그 인간이 말한 거야그 인간이!”

말을 시작하자 분해서 멈춰지질 않았다.

업무 중이야.”

구보타는 귀찮은 듯한 말투다.

미안오늘 몇 시에 할까?”

오늘?”

내 생일이잖아오늘!”

노리코의 목소리가 커졌다아침부터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구보타가 잊고 있다니.

출장이야오늘.”

뭐어?”

갑자기 그렇게 됐어.”

어디로?”

……규슈에 있는 공장.”

어째서 어제 전화하지 않은 거야?”

오늘 갑자기 명령이 떨어졌다니까네게 연락하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

갔다 와서 천천히 얘기하자.”

얘기라니?”

그럼안녕.”

대답도 하기 전에 구보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 1화 끝 -



공감되는 29살의 목소리


의자에 앉는 순간,가미오카 과장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덮쳐왔다.

여성적인 목소리와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신물이 난다.


너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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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희망 2015-12-2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어 공부할때 드라마로 보고 주인공에게 푹 빠졌었죠
서점에 책도 있길래 사서 읽었는데 사실 드라마만큼 좋진 않았어요 . ㅜㅜ
지금 책도 없고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좋네요 내 그때도 생각나고
연재인건가요?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