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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사랑 할 수 없는 29세 싱글들의 사랑 이야기.
《29세의 크리스마스》
이 소설은 일본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지만
배우 엄정화와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장진영이 주인공이었던 영화
<싱글즈>(2003)로 소개된 소설이기도 합니다.
29살은 다른 나이에 비해
약간은 더 초조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일이든 공부든 인생이든 서른이 되면
더 잘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기도 하니까요.
이런 서른을 바라보는
29세의 싱글이 사랑을 해야 한다면
어떤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자신에게 적합한
사랑의 형태를 고민하면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자기만의 사랑을 만드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럼, 29세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만의 '사랑'을 찾길 바라겠습니다.
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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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바람
1
벚꽃 잎 한 장이 화장대 위에 떨어졌다. 집 근처에는 벚꽃나무가 없는데. 아마도 어제 바람이 많이 불더니 마쓰자와 초등학교 쪽에서 날아온 것 같다.
화장수 묻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주워 화장대 거울에 붙여놓고 시계를 곁눈질하며 부지런히 빗질을 했다.
해마다 벚꽃이 날릴 무렵이 생일이었다. 앞으로 1년 뒤면 서른. 자신이 그런 나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이 같은 건 생각한 적도 없어, 이렇게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나이 따위 신경 쓰지 않아, 이렇게 허세를 부릴 나이도 아니고.내 나이를 잊고 있었어, 그래, 이렇게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할 거야.
그렇게 잊고 있던 나이를 어떤 순간 문득 떠올리게 된다.
이를테면 머리를 짧게 자른 다음 날, 거울에 비친 모습이 완전히 빵집 아줌마일 때. 나도 모르게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옛날에는 모델 이디 세지윅 닮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짧은 머리가 어울렸는데…….
샴푸 광고에 나오는 여자의 눈동자가 티 없이 맑은 것을 발견했을 때. 10대 때는 나도 저렇게 맑았는데, 지금은 흐리멍덩해지기 시작했다. 조각칼로 그린 듯 선명하던 눈의 윤곽도 지금은 어딘지 풀어져 보인다.
펄이 든 핑크 립스틱을 바르고는 그야말로 팔푼이 같아 보이는 모습에 허둥대며 닦아버린 적도 있다. 이런 색 립스틱은 얼굴 전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는다.
눈도 예전에는 더 반짝거렸다. 턱선도 선명했다. 눈에다 아이라인을 하지 않아도, 입술에다 립라인을 그리지 않아도, 아니, 화장 따위 전혀 하지 않아도 미인이라는 칭찬을 듣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이제 수면 부족으로 거칠어진 피부에는 시세이도의 미드 나이트 시크릿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얼른 뛰어가서 산다. 좋은 화장품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비싼 돈 내고 피부관리센터에 다니는 선배를 비웃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까칠해진 피부는 오일을 찾고 있다. 눈두덩 위에서 작은 뾰루지를 발견하고 ‘드디어 때가 됐군’ 생각한 적도 있다. 옛날에는 아무리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그런 곳에 뾰루지가 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태양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조금이라도 햇빛이 비치면 반사적으로 그늘을 찾아 들어간다. 거뭇한 기미를 발견하고 한참 동안 거울에 시선이 고정됐던 건 스물여덟 때였다.
그러나 이렇게 순간순간 여러 형태로 잊고 있던 나이를 떠올리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알찬 인생을 보내왔다.
성질나는 일이 많긴 하지만 회사 일도 꽤 재미있고, 물론 결혼할까 싶은 애인도 있다. 2년 전부터는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그렇게 바라던 싱글 생활까지 누리고 있다.
야부키 노리코는 인생에 만족했다. 적어도 스물아홉의 생일, 그날 아침까지는.
2
생일 파티에는 DKNY의 펄 그레이색 투피스를 입고 가야지. 지난주에 사놓고 아직 팔도 끼어보지 않았다. 매장에서 처음 입어보았을 때 맞춤복처럼 몸에 꼭 맞아 기분 좋았던 옷이다.
애인 구보타 요시노리와는 사귄 지 3년째. 권태로울 정도로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이트 약속을 취소할 때도 전에는 엎드려 사죄라도 할 듯이 전화를 하더니, 요즘에는 일이 생겨서 그런 걸 날더러 어쩌라고, 하는 느낌이 노골적이다.
노리코도 몇 번 일 때문에 약속을 깬 적이 있다. 그때 자신도 예전만큼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피장파장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긴장감 없는 지금의 관계를 근사하게 날려 보내줄 것 같았던 게 바로 DKNY의 투피스였다.
펄 그레이의 우아한 색조는 168센티미터의 늘씬한 이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해주겠지. 구보타는 미디스커트 아래로 잘 뻗은 다리를 새삼스레 감탄하며 볼 거야. 타이트한 스커트는 매력적인 히프라인을 더욱 강조하겠지.
구보타에게 자신의 매력을 한 번 더 인식시키고 싶었던 바람을 이 투피스는 충분히 이루어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달은 지출이 너무 많다고 반성하면서도 큰맘 먹고 이 옷을 샀다.
구두는 굽이 5센티미터쯤 되는 프라다의 힐을 신어야지, 노리코는 행복한 기분으로 빗질을 계속했다.
그 순간 손이 멈춘다.
머리카락 사이로 무언가 허연 것이 보였다.
“뭐지?”
머리 꼭대기에서 오른쪽 아래로 십 엔짜리 동전 크기만 한 맨살이 보였다.
노리코는 빗을 집어던지고 양손으로 머릿속을 헤쳤다. 머리카락이 없다. 만져보자 미끈한 감촉이 손에 와 닿는다.
노리코는 아연실색하여 거울을 보았다.
‘그 인간 때문이야.’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1년 전 노리코가 소속된 기획부에 과장이 새로 부임해왔다. 모회사의 섬유 공장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무엇이든 자기 맘대로 하려 들었다. 그가 해오던 원단 만드는 일과 그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데도, 최신 유행에 관해서는 혼자만 다 아는 척 사사건건 관여하였다.
새 과장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를 만드는 기획에서, 노리코네의 지금까지의 업적 같은 건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무조건 자신의 엉뚱한 취향대로만 밀고 나가려 해서 노리코와는 날마다 충돌이었다.
그가 브랜드명을 ‘콜리플라워’로 하자는 의견을 냈을 때 노리코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전혀 이미지가 동떨어진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한때 유행하긴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브랜드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그렇게 귀여운 인상을 주는 브랜드 명은 요즘 여성들의 기호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에서 젊은 여자가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들고 나오는 것에 감정이 생겼던지 그 후 과장은 노리코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재능 있는 여자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남자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보도 일을 하는 친구 이마이 아야도 그렇게 말했다. 여성들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기성복 업계지만 회사는 아직도 남성 중심이다. 보조 업무를 할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책임 있는 일을 맡게 되는 순간부터 남성 사회의 벽에 부딪치는 일이 많아진다.
노리코는 원형탈모가 생긴 머리를 거울에 비춰 멍하니 바라보다, 화장대 옆 수화기를 들어 아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아야가 나왔다.
“나…….”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대머리 됐어.”
“뭐?”
“벗겨졌다구.”
“누가?”
“나.”
“어디가?”
“머리……. 원형탈모야.”
“무슨 소리야?”
“그 인간 탓이야, 그 인간!”
“그 인간이라니 누구?”
“우리 과장……. 그 인간 때문에 온몸이 스트레스 덩어리였잖아, 나.”
새로운 브랜드가 나올 때까지 고생한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해서 내놓은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 나가야 돼. 네 얘기, 밤에 천천히 들어줄게, 안녕!”
전화가 거칠게 끊겼다. 아야와 전화를 하면 언제나 이렇다.
아야는 방송국 프로그램을 외주로 제작하는 프로덕션의 카메라맨이다. 8킬로그램이나 되는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지고 화제의 인물이나 정치가 등을 쫓아다니며 찍은 영상을 노리코도 텔레비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다. 옆에서 보기에는 무척 근사해 보였지만 쉬운 일은 아닌 듯, 아야는 자주 허리가 아프다느니 위가 안 좋다느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노리코는 한 번 더 머리를 걷어붙여보았다. 보기 좋게 벗겨진 원형탈모가 나왔다.
“생일이란 말이야, 오늘은. 스물아홉 살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노리코는 울음 섞인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날이, 인생 최악의 날이 되리란 걸 그때까지도 예측하지 못한 노리코였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10분이나 늦었다.
노리코는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3
“벌써 아까부터 회의 시작했어.”
기획부에 뛰어 들어가자마자 동료인 다지마 테루코가 옆에 다가왔다.
오늘 회의는 매출이 좋지 않은 새 브랜드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모회사에서 온 과장이 잘난 척하고 추진한 기획이어서 속으로는 꼴좋다 싶었지만, 기획부의 브랜드 담당자로서 노리코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죄송합니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전원의 시선이 노리코에게 모였다.
“오늘은 자네한테 중요한 회의야.”
의자에 앉는 순간, 가미오카 과장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덮쳐왔다. 여성적인 목소리와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신물이 난다.
‘너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노리코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회의 자료를 펼쳤다. 그때,
“콜리플라워 브랜드는 제조 중지하기로 결정됐다.”
사이토 부장이 말했다.
“예?”
노리코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더 이상 계속해봤자 손해만 볼 뿐이라고…… 어제 본부 회의에서 결정됐다.”
사이토 부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노리코는 마음속으로 아까부터 가미오카 과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책임은 그쪽에 있다. 좀 더 충분한 마케팅을 한 후에 내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무조건 돌진하는 과장에게 몇 번이나 건의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사과해야 하는가.
“좀 더 충분한 마케팅을 거쳐야 한다고 제가 몇 번이나 충고했는데 말입니다.”
가미오카 과장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발언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노리코는 어이없는 얼굴로 과장을 보았다.
“지금은 소비자도 현명해져서 말이죠, 메이커가 어떤 취향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거든요.”
그 말을 한 것도 노리코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노리코는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요. 마케팅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은, 저였…….”
노리코의 말을 사이토 부장이 가로막았다.
“됐어, 자네도 변명할 거리야 많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야, 미래.”
사정을 조금은 알고 있는 듯한 부장의 말에 노리코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미오카 과장이 여전히 의기양양한 얼굴로 끄덕이고 있다. 자신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얼굴로. 그것을 보니 또 울컥 치밀었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려.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는 브랜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부터의 과제야.”
부장의 말에 가미오카 과장이 끊임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인간은 대체 어떤 신경구조를 갖고 있는 걸까, 생각하며 노리코는 거울에 비쳤던 원형탈모를 떠올리고 있었다.
“니타.”
사이토 부장이 1년 전에 입사한 젊은 여사원을 불렀다.
“예.”
노란 재킷이 잘 어울리는 니타 미나가 대답했다. 아직 어린 나인데 화장이 짙다.
“올해 파리 컬렉션에는 자네를 파견하기로 했다.”
노리코에게 그것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젊은 감성으로 파리 컬렉션을 보고 오도록. 그래서 우리 회사의 새로운 브랜드 창조에 반영시켜주길 바란다.”
사이토 부장이 논평을 하듯이 말했다.
“예!”
미나가 기쁜 듯이 대답했다.
“잠깐만요.”
노리코는 또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올해 파리 컬렉션에는 제가 가기로 되어 있었고, 호텔 예약도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파리에서 열리는 유명 디자이너의 신작 컬렉션을 보러 갔다 오면 다음 해 기획에 강한 발언력을 얻게 된다.
가미오카 과장이 일어선 노리코를 올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처음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하게 됐어. 그리고 자네는 다른 일을 맡게 될 거야.”
4
“니타 미나 말이야, 사이토 부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래.”
게시판에 붙은 공고를 보면서 다지마 테루코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몸으로 승부하자면 젊고 싱싱한 애들한테는 잽이 안 되지.”
테루코의 말은 노리코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하다. 그것밖에 없었다. 기획의 실패를 노리코에게 떠맡기는 것으로 과장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부장도 그것을 아는 주제에 자신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젊은 여사원을 발탁하는 기회로 이용해버렸다.
남자란 건 다 그런 거야. 노리코는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남자 사회에서 일을 해나가는 한, 아무리 큰 소리로 남자 욕을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발 령
본사 기획부 야부키 노리코
위의 사람을 오늘부로 외식사업부 <쾌식클럽> 점장으로 전속을 명함.
아침 회의에서 다른 일을 담당하게 될 거란 말이 나오자마자 낮에 벌써 게시판에 공고가 붙었다. 쾌식클럽은 회사가 외식사업에 발을 내딛는 첫 번째 주자로 고탄다에 낸 비어 레스토랑이다.
“파리가 고탄다로 바뀌어버렸네.”
옆에서 테루코가 말했다. 넋이 나간 모습으로 공고를 보던 노리코는, 이런 걸 언제까지 보고 있어봐야 소용없어, 하고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옛날부터 생각을 전환하는 데는 빨랐다.
1층 로비에 내려와 공중전화로 구보타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은 파크 하얏트 호텔의 뉴욕 그릴에서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다. 호텔 방을 예약하자고 그에게 제안해볼 생각이었다. 도쿄의 야경이 보이는 방에서 우아한 하룻밤을 보내면 지금의 이 거지 같은 기분을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보타는 노리코보다 두 살 위다. 그의 서른 살 생일에 같은 호텔에 머물렀지만, 지은 지 얼마 안 된 호텔 제일 위층의 그릴에는3개월 후까지 예약이 차 있어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때 구보타는 “네 생일 때는 꼭 여기서 식사를 하자” 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구보타는 신주쿠에 있는 전통 깊은 백화점의 머천다이징 통괄부에 있다. 백화점 업계가 불황인 상황에서도 구보타가 있는 백화점만은 패션 동향에 민감한 젊은 여성 손님을 모으고 있었다.
4년 전, 영업을 담당하고 있던 노리코가 구보타의 백화점을 여러 차례 찾았다. 그 무렵, 젊은 디자이너를 채용한 새 브랜드가 막 완성되었을 때여서 어떡하든 백화점 안에 매장을 만들고 싶었다.
전통 있는 백화점이라는 곳은 좀처럼 그때까지의 방식을 바꾸려 하지 않지만, 업계 전체가 불황인 탓도 있어 구보타의 백화점은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이었다. 노리코는 구보타를 사전 교섭한 효과가 있어서 1층 입구와 가까운 장소에 큰 매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매출은 호조를 보였고, 기획이 성공한 걸 축하하며 건배를 하던 날 밤에 취기를 핑계 삼아 구보타와 키스를 했다. 거래처 사람들하고는 절대 남녀관계를 맺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지만, 달콤한 키스의 감촉에 노리코는 몸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그 후, 3년이 흘렀다.
“나…….”
구보타가 나오자 노리코는 응석을 부리듯이 말했다. 제 아무리 강해 보이는 노리코지만 남자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때가 있다.
“응…….”
구보타가 순간 곤란한 듯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의 중?”
노리코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냐…….”
“파리가 고탄다로 바뀌어버렸어.”
“무슨 소리야?”
“우리 회사가 고탄다에 낸 비어 레스토랑의 점장으로 발령이 났어.”
내 기분 좀 알아줘, 하듯이 노리코는 매달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지만 의외로 차가운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좋잖아.”
“좋지 않아. 브랜드 실패를 내 책임으로 떠맡기고……, 무식한 과장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판매 실적이 오르지 않았던 것을 전부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시장조사가 중요하다고 말한 건 바로 나였다구. 지금은 기성복 업계가 취향을 강요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내가 과장에게 말했다구. 충분한 시장조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사장이 내라고 했으니 빨리 하라고, 그 인간이 말한 거야, 그 인간이!”
말을 시작하자 분해서 멈춰지질 않았다.
“업무 중이야.”
구보타는 귀찮은 듯한 말투다.
“아, 미안. 오늘 몇 시에 할까?”
“오늘?”
“내 생일이잖아, 오늘!”
노리코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침부터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구보타가 잊고 있다니.
“출장이야, 오늘.”
“뭐어?”
“갑자기 그렇게 됐어.”
“어디로?”
“……규슈에 있는 공장.”
“어째서 어제 전화하지 않은 거야?”
“오늘 갑자기 명령이 떨어졌다니까. 네게 연락하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
“갔다 와서 천천히 얘기하자.”
“얘기라니?”
“그럼, 안녕.”
대답도 하기 전에 구보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1화 끝 -
공감되는 29살의 목소리
“
의자에 앉는 순간,가미오카 과장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덮쳐왔다.
여성적인 목소리와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신물이 난다.
‘너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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