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촘스키 교수의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를 통해 워싱턴을 구심점으로 한 신자유주의 진영에 의해 가동되고 있는 국경을 초월한 범세계적 차원의 이윤 추구 메커니즘에 휘둘려 대다수의 저개발 국가나 기층 민중의 삶이 질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비정한 실상을 접하고 아찔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힙니다. 이윤 추구에 급급한 식량 수출 기업은 기아 상태를 악용하여 수입 증대와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등 비인도적인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소말리아의 군벌들은 그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구호물자를 약탈하는 등 아사지경에 처해있는 민중들의 가련한 삶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중첩되어 120억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또 많은 양이 긴급 구호물자로 지원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은 FTA협상을 마무리한 한미 간의 무역 협상 진행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기득권층은 협정 체결로 오히려 더 큰 이익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기업이나 군벌들의 농간에 의해 인간적인 배려의 대상에서 소외된 이들이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이, 중소기업 같은 영세 사업장은 도산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고 기층 민중들은 실업에 따른 소득 감소로 삶의 질이 더욱 나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부 계층이 부를 향유하는 가운데 대다수 서민들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기아의 원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여러 분야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진영의 음험한 기도를 또렷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실상이 가려져 있던 FTA 등 많은 현안을 제대로 인식하고 또 이를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꼭 필요한 소중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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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2:04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식물동화 - 삶의 지혜가 담긴 아름답고 신비한 허브 이야기
폴케 테게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예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마다 유독 끌리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꽃 같은 식물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것은 실제적인 뚜렷한 이유에서라기보다 관념에 의한 경우가 많습니다. 직접 접하거나 오래도록 살펴본 다음 내린 결론이 아니라 이름에 혹하거나 자신만이 간직한 이미지나 옛 추억이 오버랩되며 형성된 고정관념에 의하여 그에 대한 애착을 보이기 일쑤인 것입니다.

 나는 꽃 중에서 특히 목련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목련은 지는 모습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됩니다. 볼품 없이 오래도록 매달려 있다가 뒤틀리며 바래져 그 희디희던 꽃잎이 흑갈색이 되고서야 비로소 한살이를 마감하는 것이지요. 마침 그때 봄비라도 내린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추한 말로를 고스란히 드러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과는 달리 목련하면 아릿한 이미지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참혹한 시절을 뚫고 헐벗고 메마른 가지에서 잎도 없이 둥실 큰 연꽃을 피워 올리다니, 그 신비함이란. 목련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김광석 님이 부른 '회귀'라는 노래 때문입니다. 김지하 시인의 시를 노래한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아득함은 한동안 마음결을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목련은 피어 흰 빛만 하늘로 오르고

 ......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긴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하여 그런 신비하고 아릿한 관념이 나의 뇌리에 붙박여있기에 추한 뒷끝과는 상관없이 꽃이라 하면 목련부터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식물 동화>에 등장하는 꽃 가운데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라일락과 로즈마리가 먼저 두드러지게 다가왔습니다. 주변에서 자주 보아온 것이기도 하지만 이름에의 끌림이랄까, 신비로운 이국적 이미지에 혹했다할까 하여간 매우 강한 흡인력을 갖고있는 꽃입니다. 물론 나에게만 그렇겠지요. 그래서 글을 먼저 읽고 라일락과 로즈마리 편이 좋았던 게 아니라 그 꽃들을 좋아하기에 관련되는 글을 찾아 읽었던 것입니다. 예의 그 고정관념 발동된 것이지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식물 동화>는 가볍게 치부해버릴, 그렇고 그런 만만한 책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들에 대해 정감 있게, 때론 환타지 같이 신비롭게 풀어나가는 이야기에 쏙 빨려들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야기 구성도 치밀하고 문체도 개성적이어서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식물의 약이나 음식으로서의 효능이란 실용적인 면을 얘기하고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것도 무미건조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이야기 속에 자연스레 녹여내어 사건이나 스토리 전개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상황에 딱 적합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라일락 편에서는 주로 약효에 대해 그렸는데, 이야기 속에 약재의 성질을 잘 버무려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었습니다. 폭포(소변)가 멈춘 왕의 샘물을 다시 흐르게 하기 위해 뿌리를 다려 먹였다든지, 왕의 떨어진 입맛을 돋우려고 라일락꽃을 반죽하여 빵을 구워 살려낸 것은 물론 공주님이 조용한 장소(화장실)에 오래 앉아있게 되자 열매를 달여 먹여 공주님의 사랑을 얻고 이에 놀란 임금님의 목에 걸린 기쁨을 껍질을 달여 먹여 튀어나오게 하여 왕과 공주를 구하고 드디어 왕위에까지 오르는 스토리 라인으로 라일락의 효능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주인공 목동이 온 백성들에게 그런 기적을 낳은 싹을 골고루 나눠주어 집집마다 라일락이 한 그루씩 서 있게된 유래가 되었다고 끝맺음을 하여 완벽하게 아우러진 한편의 해피엔딩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로즈마리는 효능보다 꽃을 피우는 기나긴 과정을 줄거리로 하여 꽃의 성질을 이야기 속에 담고 있습니다. 힘 자랑만 하는 가시나무, 덧없는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장미와 함께 있던 로즈마리는 마리아와 요셉을 태운 나귀가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향기가 말할 수 없이 좋은데다 맛도 그만이고 해충도 쫓아주는 면을 지닌 것을 알아보고 찾아오자 제 그늘 아래 푹 쉬게 합니다. 이때 마리아와 요셉을 둘러싼 대기에 말할 수 없는 충만이 가득한 것을 로즈마리는 보게 되지요. 로즈마리 그늘을 떠나 길을 나서 마구간 구유에서 아기 예수님을 막 낳으려는 순간 외딴 길가 헐벗은 덤불에서 잎만 달고 별 주목도 못 받던 로즈마리가 비로소 하늘처럼 푸른 꽃을 피우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애틋하고 때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그냥 관념으로만 사랑하고 있던 꽃들에 대해 더욱 애착이 가고 더불어 그 실용적 쓰임새가 고맙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여 <식물 동화>는 요즘 새로 대두되고 있는 대체의학 차원의 자연 치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동화의 매력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순진무구한 아이들까지 더러는 환타지물의 신비로운 세계에 푹 빠져있는 매니아들에게까지 살갑게, 또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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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잊지 못할 일 -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59인이 말하는
도종환 외 지음 / 한국일보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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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계몽 시대 이후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관념뿐이건 실상이 존재하건 어떤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명확한 근거로 논증을 해내고 인과율에 입각한 과학적 원리를 무수히 발견했음은 물론, 각종 첨단문명을 구가하고 있는 모습이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이 그리 합리적인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자연계의 합법칙적 현상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습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쿨해 보이기까지 하는 우리도 실은 많은 부분에서 찰나의 우연에 좌우되는 지극히 비합리적이기 일쑤인 존재라는 자각 말입니다. 누군가 별 뜻 없이 불쑥 던진 한 마디가 화살처럼 꽂혀 나침반이 전혀 새로운 쪽으로 떨리게 만드는 것을 주변에서 허다히 보았습니다. 저도 선배가 습관적으로 들고 다니던 책의 매력에 혹하여 제 일생이 좌우될 학과 선택을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했습니다. 경제학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그에 대한 체계적 준비도 없이 벼락처럼 닥쳐온 상황이 나의 지향을 한곳으로 붙박아버린 것입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에 나오는 이수호 위원장이 교직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도 고등학교 때 온실 담당 생물 선생님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떤 마음의 준비도 물질적 뒷받침도 없는 상황에서 그 선생님의 대수롭지 않은 말 한 마디가 짜릿한 전율로 다가와 그의 오늘이 있게 만든 것입니다. 저 역시 교직에 있어서인지 생물 선생님이 이수호 위원장에게 해 주었다는 "수호야, 넌 선생님이 되면 참 잘할 것 같아." 같은 결정적 말을 딱 적합한 아이에게 극적인 상황에서 들려주어야겠다고 늘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얼마나 꽂힐지는 차치하고 말입니다.

 환경운동가 최열 선생님의 경우는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진 것을 더욱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야 토론에 참가한 후 귀가 길에 탑승했던 택시를 다음 번에도 또 타게되면서 그 기사와의 인연이 이어지고 그때 오간 대화에서 환경통신원제도를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환경운동가 위주의 상층 중심 시민운동이 풀뿌리 단계로 정착하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지요. 그런 의미 있는 구상이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와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구병 교수의 경우도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우연한 상황이 우리 인생을 좌우할만한 결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릴 때 동네 형들이 반 장난삼아 물에 빠뜨린 일을 계기로 땅 짚고 헤엄치기를 즐기던 단계에서 거칠고 험한 파도에 에워싸인 삶의 바다로 나갈 준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수영 강사의 과학적인 프로그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와 수영을 체화시켰던 것입니다. 그것도 대단한 적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울타리 안에 있는 형들과의 일상적 놀이에서 그러한 기술과 의지와 신념이 싹텄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갈 육체적, 정신적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렇듯 어느 순간 우연히 닥쳐온 상황이, 불쑥 상대방이 던진 예기치 않은 한마디 같은 비합리적인 것들이 어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결코 돌발적으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최열 선생님의 경우처럼 우연이 겹치면 필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필연이나 합리로 이어질 많은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말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분야로 두려움없이 나아가는 도전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상상 밖의 큰 열매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는 못되지만 부단히 합리를 지향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 꽤 괜찮은 존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은 이러한 깨우침을 담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로 빼곡합니다.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는 선배들의 값진 삶이 우리의 그것에도 큰, 더러는 뼈저린 울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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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함께 읽기
강준만 외 지음 / 돌베개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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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느닷없이 다가온 실존적 만남이 삶의 지향을 바꿔놓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나에게도 그러한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접하게 된 행운도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서점 진열대에 놓여있던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을 별 뜻 없이 집어들어 눈길 가는 대로 몇 군데 읽어보다가 그만 저릿하게 감전된 듯 한동안 마음결을 추스를 수 없게된 경험을 한 다음부터 신 선생님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자장 안으로 빨려들어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부단히 스스로를 살피며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도 나름의 수준에서 숙고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야 나무야>에 매료된 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강의>에 이르기까지 신 선생님의 글이란 글에는 흠뻑 빠져 무작정 읽었었는데 어느 정도 냉정해진 다음에야 신 선생님의 글이 왜 이토록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지 비로소 곰곰이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빼어난 글 솜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는데, 이는 신통한 답이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신 선생님은 분명 대단한 필력을 지닌 분이긴 하지만 단순히 문장력 하나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흡인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충분한 이유라고 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또 하나 떠올려본 것은 선생님의 파란만장한 삶의 곡절이 흥미를 유발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함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굴곡 많았던 우리 근, 현대사에서 선생님 못지 않게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좌충우돌하셨던 분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 <신영복 함께 읽기>의 제2부 "신영복을 말한다"를 읽다가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따스하고 여린 심성이 촉촉하게 배어있는 선생님의 삶의 모습이 글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그런 심성에서 우러나온 곡진한 행동이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기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보고 그 울림에 공명하였던 것입니다.

따뜻하고 여린 심성을 지니셨던 선생님은 어느 누구하나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성공회대의 사제 후보생들에게는 사제의 세계로 입문하는 동행이 되어 주었고, 교사들에게는 선배 교사가 되어 교육에 대해 같이 속살거렸으며 입주 과외 집의 유치원 아이에게는 딱 그 수준의 소꿉놀이 친구가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감방에서 무식하고 험상궂은 도둑놈들에게는 그들의 하소연을 살갑게 들어주는 동네 형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마음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진솔하게 들려주는 글이었으니 어찌 따뜻한 가슴을 아는 이들에게 큰 울림이 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선생님의 글을 제대로 접하게 되면 누구든지 가슴 서늘해지면서 그간 지녀왔던 사고체계의 작동이 중지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홀로 결단하여 선생님이 삶으로 보여주었고 글로 간곡하게 일깨웠던 세계로 스스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내밀한 고백들, 간절한 영혼의 회복을 보여준 많은 얘기들이 제2부 "신영복을 말한다"에 빼곡하게 들어있었습니다.

하여 선생님의 삶의 모습과 그것이 오롯이 배어있는 글은 우리들 냉랭하게 굳어버린 심성을, 일그러진 모습을 또렷하게 비쳐주는 거울이었습니다. 내면의 미성숙과 탐욕과 어리석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는 감어인(鑒於人)이었던 것입니다. 무감어수(無鑒於水) 감어인(鑒於人)의 그 인(人)이 바로 신영복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꿈꾸는 더불어 숲의 세계, 선량한 사람들의 땀 냄새가 솔향기와 섞이고 솔바람 은은하게 날리는 곳으로 언제까지나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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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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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아우성이다. 인문학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될 지경이라느니, 철학이 사라진 야만의 시대라느니 등등 오늘 여기의 지적 풍토를 비관적으로 진단하는 목소리 일색이다. 물론 이런 개탄을 일과성의 호들갑스런 엄살쯤으로 여겨버리려는 움직임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항변이 거의 잦아든 지경이라 하겠다.

돌이켜보면 급속한 경제 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지배적인 미덕으로 자리잡게되었고 그 결과 작은 일에도 심사숙고하여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유형의 인문학적 행동방식은 폄하되며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철학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문화를 다루는 분야는 GDP를 증가시키는데 직접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완전히 논외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는 거의 40여 년 이상 일관되게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겪고있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무런 위기 징후도 없다가 어느 순간 우연히 벌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이 정부나 기업, 더구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배제되어 그들의 삶의 방식과 유리되게 된 데는 이런 외적 여건 못지 않게 철학자를 비롯한 인문학 종사자들 내부의 체계적 준비 미흡과 적절한 대응 전략 부재도 한 몫을 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을 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 그들만의 암호 같은 체계 하에서 내부 재생산에만 급급해온 것이 그 동안 학계의 관행이었다. 하니 점점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고 급기야 백안시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렇게 될 때까지 내부에서 자기 갱신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지적 특권의식에 매몰되어 문화 권력의 단 맛에만 취해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상황을 스스로 불러왔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제 철학계의 반성적 성찰과 새로운 모색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외면하는 대중들만 탓할게 아니라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다가가는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할 때다. 최근 이러한 인식에 공감하고 있는 이들이 타개책의 일환으로 대중적 철학 서적 출간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소프트 혹은 에세이라는 이름이 곁들여진 인문학 관련 서적 출간이 시대의 한 트랜드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분명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최근에 나온 대부분의 저작들은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데만 치중한 감이 없지 않아서 공허함을 떨칠 수 없다. 삶의 곡절이 배어있지 않는 경박한 담론에 그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그 기반을 현실적 토대 위에 둘 때에야 비로소 대중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들의 실제 삶에 의미 있게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광우의 <철학 에세이>는 이런 두 가지 미덕을 겸비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쉽고 재미있게 흥미를 유발하는 것에만 급급하여 머리로 기교를 부린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아니 손과 발로 쓴 것이다. 민중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대끼며 함께 해 온 그의 삶의 역정이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유머와 재치, 기발한 아이디어 등 대중의 관심을 흡인할 수 있는 특장을 두로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황광우는 대중의 눈높이를 겨냥한 기획 차원에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를 글 곳곳에 다양하게 깔아두고 있다. 이를테면 철학자의 사상의 진수를 직설적으로 언급하기보다는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굴하여 실감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글 전체에 생동감과 기복이 느껴져 집중력을 잃지 않고 저자의 의식을 따라갈 수 있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친구의 탈옥 제의를 거부한 소크라테스나 토마스 모어, 또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되 기득권 층에게는 가혹하리 만치 엄정하게 허위 의식을 질타하던 예수 그리스도 등 순결한 영혼을 지닌 철학자들의 사람 냄새 배어있는 뭉클한 이야기는 압권이었다. 또 콘서트처럼 소프트하고 리드미컬하게, 때론 스타카토로 더러는 유장한 흐름으로 의미 심장한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다. 더구나 인상적인 것은 스코프(scope)와 시퀀스(sequence), 즉 내용의 범위와 배열을 대중들의 의식 수준을 감안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주제의 일관성을 꾀하면서도 생기발랄하게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서두에 소크라테스와 공자를 배치했다가 마지막 부분을 공자와 동시대인인 노자로 마무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시간 순서와는 무관하게 독자들로 하여금 누구나 흐름을 따르다보면 자연스레 주제를 파악하고 지적인 향상을 꾀할 수 있게끔 몰아 가고 있는 것이다.

또 민중과 더불어 아픈 시대를 살아온 이답게 황광우는 철학을 고답스런 관념의 유희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들이 안고있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창조적 아이디어를 제공함은 물론 직접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까지 하여 싸늘하게만 보이는 철학에 따스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온고지신의 지혜가 말뿐이 아님을 여러 사례들 들어 적시하고 있어서 철학이 진정 현실에서 필요한 것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철학 콘서트>는 철학, 더 나아가 인문학에 등을 돌려버린 대중을 은근하게 부르고 있는 사이렌(siren)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권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의미를 발견하게 하여 자장 안으로 빨려들 듯 철학을 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게는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부재니 하는 아우성이 대중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부족을,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지혜의 결여를 자인하는 탄성으로 들린다. 그 비관론자들에게 적어도 황광우의 삶과 글을 한번 접해보고 이야기하라고 넌지시 일러주고 싶다. 콘서트장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또렷이 비쳐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창조적 아이디어의 일단이라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편의 콘서트에는 여러 요소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것은 형식면이기도 하고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작가의 지향과 의식의 깊이가 반영되어 있게 마련이다. 황광우의 그것은 철학으로부터 떠나버린 대중들을 다시 이끌어 철학이 결코 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삶과 유리된 것은 더더구나 아님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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