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잊지 못할 일 -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59인이 말하는
도종환 외 지음 / 한국일보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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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계몽 시대 이후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관념뿐이건 실상이 존재하건 어떤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명확한 근거로 논증을 해내고 인과율에 입각한 과학적 원리를 무수히 발견했음은 물론, 각종 첨단문명을 구가하고 있는 모습이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이 그리 합리적인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자연계의 합법칙적 현상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습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쿨해 보이기까지 하는 우리도 실은 많은 부분에서 찰나의 우연에 좌우되는 지극히 비합리적이기 일쑤인 존재라는 자각 말입니다. 누군가 별 뜻 없이 불쑥 던진 한 마디가 화살처럼 꽂혀 나침반이 전혀 새로운 쪽으로 떨리게 만드는 것을 주변에서 허다히 보았습니다. 저도 선배가 습관적으로 들고 다니던 책의 매력에 혹하여 제 일생이 좌우될 학과 선택을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했습니다. 경제학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그에 대한 체계적 준비도 없이 벼락처럼 닥쳐온 상황이 나의 지향을 한곳으로 붙박아버린 것입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에 나오는 이수호 위원장이 교직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도 고등학교 때 온실 담당 생물 선생님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떤 마음의 준비도 물질적 뒷받침도 없는 상황에서 그 선생님의 대수롭지 않은 말 한 마디가 짜릿한 전율로 다가와 그의 오늘이 있게 만든 것입니다. 저 역시 교직에 있어서인지 생물 선생님이 이수호 위원장에게 해 주었다는 "수호야, 넌 선생님이 되면 참 잘할 것 같아." 같은 결정적 말을 딱 적합한 아이에게 극적인 상황에서 들려주어야겠다고 늘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얼마나 꽂힐지는 차치하고 말입니다.

 환경운동가 최열 선생님의 경우는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진 것을 더욱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야 토론에 참가한 후 귀가 길에 탑승했던 택시를 다음 번에도 또 타게되면서 그 기사와의 인연이 이어지고 그때 오간 대화에서 환경통신원제도를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환경운동가 위주의 상층 중심 시민운동이 풀뿌리 단계로 정착하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지요. 그런 의미 있는 구상이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와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구병 교수의 경우도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우연한 상황이 우리 인생을 좌우할만한 결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릴 때 동네 형들이 반 장난삼아 물에 빠뜨린 일을 계기로 땅 짚고 헤엄치기를 즐기던 단계에서 거칠고 험한 파도에 에워싸인 삶의 바다로 나갈 준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수영 강사의 과학적인 프로그램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와 수영을 체화시켰던 것입니다. 그것도 대단한 적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울타리 안에 있는 형들과의 일상적 놀이에서 그러한 기술과 의지와 신념이 싹텄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갈 육체적, 정신적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렇듯 어느 순간 우연히 닥쳐온 상황이, 불쑥 상대방이 던진 예기치 않은 한마디 같은 비합리적인 것들이 어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결코 돌발적으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최열 선생님의 경우처럼 우연이 겹치면 필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필연이나 합리로 이어질 많은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말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분야로 두려움없이 나아가는 도전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상상 밖의 큰 열매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는 못되지만 부단히 합리를 지향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 꽤 괜찮은 존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일>은 이러한 깨우침을 담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로 빼곡합니다.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는 선배들의 값진 삶이 우리의 그것에도 큰, 더러는 뼈저린 울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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