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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평점 :
인류는 구제불능인가?
더 이상 가망이 없는가?
종의 특성 상 결국은 멸망하고 말 사악하고 무기력한 존재인가?
[제노사이드]의 진단은 암울한 톤 일색이다. 대다수 현생인류의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감수성으로 미뤄볼 때 여지가 없어 보인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의 저급하고 무모한 측면을 까발리고 있는 대목에선 비관적인 쪽으로 동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인류를 단번에 절멸시킬 핵단추를 충동적으로 눌러버릴 정도로 자제력 없고 도덕의식이 낮은 이가 미합중국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모습에선 섬뜩하기까지 했다. 카우보이처럼 들떠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공격명령을 내리곤 하던 그는 결국 음부티족 캉가 밴드에서 태어난 피그미족 아키리를 제거하기 위해 네메시스 작전 개시를 명령한다. 더구나 참가한 대원들까지 모두 작전 종료 즉시 독약캡슐을 삼키고 죽도록 세팅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태연자약하다. [제노사이드]에서 그리고 있는 일반인들의 모습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와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무관심하여 사태가 악화되는 것도 모르고 방관하며,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사태를 돌이킬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니 속수무책일 뿐이다. [제노사이드]에선 이처럼 현생인류의 치명적 약점인 지적 능력의 저급과 도덕의식의 결여를 냉정하게 곱씹어 보게 이끈다. 앞날이 어찌 될지도 모르면서 미쳐 날뛰고 있는 기괴한 몰골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임을.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의 정의야. 인간성이란 잔학성이란 말일세. 일찍이 지구 상에 있던 다른 종류의 인류, 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도 현생인류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나는 보고 있네.(472)
반면 누스, 진화한 인류인 아키리는 슈퍼컴퓨터보다 뛰어난 지력에다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런 의식의 소유자는 인간 중에 없기에 그를 이해하려면 신의 모습을 그려보면 될 것이다.
현생인류에서 진화한 다음 세대의 인간은 대뇌 신피질이 보다 크고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압도적인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지적 능력을 올리비에는 이렇게 상상했다. ‘제4차원의 이해, 전체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점, 제6감의 획득,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 보유, 특히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특질의 소유’(247)
그렇다면 네메시스, 곧 천벌은 누구에게 내려지는 게 마땅하겠는가? 그 불길은 과대망상에 빠진 카우보이 같은 현생인류를 향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저급하고 부도덕한 인류가 그간 버텨올 수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요소요소에 산재해 있는 a few goodman, 선의를 지닌 양심적인 이들의 자발적 헌신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소수마저 없었다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벼락을 맞아도 진즉에 맞았을 것이다. [제노사이드]에 등장하는 a few goodman, 그 빛나는 이름들을 불러본다.
#1 : 아서 루벤스와 몇몇 과학자들
슈나이더 연구소 분석관을 거쳐 네메시스 작전 책임자로 진두지휘하고 있는 아서 루벤스, 그는 임무 수행을 주도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희생을 줄일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 흔들리는 갈대였다. 루벤스가 주목한 것은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는 제1의 공적은 국가나 군산복합체 같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실존적 개인이었다. 국가의 인격이란 의사결정권자의 인격 바로 그 자체일 것이므로. 그리고 그 개인이 실은 얼마나 미욱한 존재인지 빤히 알고 있었다. 이런 위험성을 파악한 루벤스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무기인 보통 이상의 지력을 사용하여 그 개인의 잘못된 결정, 권한 남용을 막고자 지혜를 짠다. 그의 판단 여하에 따라 40여 명 피그미족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기억하며.
멜빈 가드너 박사나 하이즈먼 박사 같은 깨인 과학자들도 하나님의 천벌을 막아준 방패였다. 그들은 과학적 지성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성찰력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무모한 작전에 대한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대처가 가능했다. 가드너 박사는 파괴적인 과학보다 현생인류의 정신세계 자체가 위기로 치닫게 하는 결정적 요인임을 지적하였다.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415)
#2 : 예거
내가 꼽는 [제노사이드]의 베스트 캐릭터는 조너선 예거이다. 예거의 용병 합류 계기는 리스본에 남아 있는 아들, 저스틴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막대한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네메시스 작전에 참여한 그는 기괴하게 보이는 아키리의 모습에서도 부성을 느낀다. 아들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아키리가 비록 인간과는 다른 종족일지라도 그 여리디 여린 것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키리는 인간과는 다른 종족인지 모르지만 지성과 인격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강하고 올곧은 정신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만약 예거도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는 유치하고 호전적인 일면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야말로 믹이 말하는 위험한 존재가 될 터였다.(368)
심지어 예거는 동료인 믹이 소년병 게릴라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그를 죽이는 불상사까지 저지르고 만다. 무고한 아이들의 희생을 막고자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동료에게 총탄을 안긴 것이다. 기지 넘치고 인간미까지 지닌 예거의 눈부신 활약으로 결국은 ......(스포일러 회피용...)
#3 : 사카이 유리
에마의 엄마, 사카이 유리는 겐토가 이 일에 끼어들어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될까봐 통신용 (...색)컴퓨터를 회수하려 한다. 그런 마음 씀씀이도 모르고 겐토는 한때 아버지와의 불륜을 의심하며 그녀를 미워했다. 베일에 가려 있던 사카이 유리는 에마를 자기 호적에 입적시키고 누스를 구하려 일본과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포스트 역할......(스포일러 회피용...)
#4 : 겐토와 정훈
우리의 히어로, 겐토와 정훈. 두 콤비의 모습은 여러 모로 상징적이다. 자연스런 인간애의 발로인 듯, 스스럼없이 가시밭길로 뛰어든 두 젊은이의 모습은 인류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만든다. 또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한국과 일본의 정신적 분계선을 말끔히 지워버리려는 듯 아름다운 협력의 모습도 보여준다. 이들의 헌신과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으로 결국엔......(스포일러 회피용...)
이런 몇몇 a few good man들 때문에 인류는 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인류에게, 또 대자연에게 극악무도한 패악을 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겨우겨우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지력과 심성을 가진 이들이 아직 우리 주변에 있기에 앞으로도 당분간 종으로서의 현생인류는 절멸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예거가, 겐토가, 정훈이 모습을 바꾸어 우리 곁에 있기에 말이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만약 나라면, 내가 사태를 돌이킬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면 그들과 같이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다. 그러니 정말 대단하다고 인정할밖에. 그들의 고뇌에 찬 결단에,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는 순수한 헌신에 머리 숙인다. 하여 [제노사이드]의 결말은 대반전이라 하겠다. 암울한 가운데 한 줄기 서광이 가느다랗게 비치고 있음을, 그 얇디얇은 빛줄기에 많은 이들의 구원이 달려 있음을, 그리고 먹장구름 너머엔 아직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음을 알려주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