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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림 떨림 울림 - 이영광의 시가 있는 아침 ㅣ 나남시선 83
이영광 엮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평점 :
이 시선집이 약간 낯설게 느껴진다. 대개 이런 부류의 책은 텍스트가 주가 되고 여기에 약간의 코멘트를 곁들여 가볍게 소개하기 십상인데 [홀림 떨림 울림]은 선정자의 의도가 더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듯해서다. 짧지만 시의 선정 및 배열, 거기에 깃들인 의미까지 포착한 시인의 해설은 울림이 깊고 오래 간다.
시인은 인간이 시에 반응을 보이는 과정을 홀림, 떨림, 울림의 세 단계로 분류한다. 우선 이것저것 연유를 따질 필요도 없이 우리 마음을 홀딱 빼앗아가는 홀림의 순간을 거쳐 서서히 본질을 알아차리고 지적, 의지적 반응과 결단을 보이는 순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좋은 시는 우선, 그저 좋다. 왜 좋은가는 그 다음이다. 좋은 시는 먼저 읽는 이에게서 생각이란 걸 빼앗아갔다가는, 천천히 되돌려주는 것 같다. 잃었던 정신을 차리고 느낌과 뜻을 골똘히 되짚어 수습하도록 만드는 그 짜릿짜릿한 수용 과정을 ‘홀림-떨림-울림’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4쪽)
그러면서 시인의 마음을 빼앗은 시 몇 편을 소개한다. 김종삼 시인의 ‘물통’이나 이면우 시인의 ‘동물왕국 중독증’ 같은 시 앞에 아연해진 모습을 고백한다. 시인을 홀린 시이니 과연 대단하다 하겠다. 또 떨림을 넘어 깊은 울림을 일으키는 시 앞에 먹먹해진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김광규 시인의 ‘묘비명’을 읽으며 부와 권력에 붓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단언하는 모습에선 결기가 느껴진다.
천한 것이 언제나 더 세게 욕망한다. 역사는 아무 것이나 다 기록하지 않는다. 시인에게는 무덤이 필요 없다. (133쪽)
송경동 시인의 시에 대해서 그는 벼린 단칼로 양단해버리듯 섬뜩하게 선을 긋는다.
싸움을 사랑과 평화라 굳게 믿는 그는 감옥을 나와 또 ‘현장’에 있다. 목발을 짚고 걷는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들려올 때, 나는 내가 성한 다리로 절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과격하지 않다. 과격한 것ㄴ 저 투명한 ‘관계’다. 저것은 관계가 아니다. (152쪽)
마지막 대목에서 시인은 앞으로 어떻게 시를 써야 할지 단호히 밝힌다. 두보의 시를 빌어 자신의 시론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시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멈출 수 없다며 결코 말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과 사명을 얘기하고 있다.
하여 만만히 보고 덤볐다 자못 심각해져 시란 무엇인지, 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숙고하게 되었다 할까. 울림이 밑바닥까지 닿아 길게 이어지는 떨림에 한동안 정신 못 차리고 흠뻑 빠지게 만든 시선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