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신현정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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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부는 더 빨리 걷지 않는다 / 신현정
 
 
 
 
우체부가 지나가니까 들국이 소담하니 핀다
 
개똥지바퀴가 우는가 하면
 
어느 담 밑에 늦은 과꽃은 세 번을 벨을 가장해 울기도 한다
 
저 우체부 아저씨 조금만 빨리 걸으시면 안 되나
 
늘 그 걸음이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항시 그 걸음이다
 
아예 자전거는 옆구리에 모시고 다니신다
 
염소에게 글을 가르치시나
 
담배 한 대 더 태우고야 엉덩이를 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나도 기다림이 된지 오래다
 
오늘은 유난히 행낭이 불룩하시다
 
하, 새끼 기러기 몇 마리 목을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걸음이 더 빨라지지 않는다
 
그 걸음으로 저기 저 달까지 무난히 갈 것을 내 믿는다
 
 
최근 세상을 떠난 신현정 시인이 세상에 남긴 시편 중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세상 보는 눈이 맑고 투명해질 수도 있을까요. 시인은 우편 행낭을 가지고 마을길을 지나고 있는 우체부를 노래합니다. 마냥 느린 걸음으로 마을 길을 가고 있는 우체부와 들국과 개똥지빠귀와 과꽃 같은 대상들이 아주 친숙한 친구들이 되어 있습니다. 마을 골목어딘가 염소에게 글까지 가르치면서, 자전거는 아예 끌고서 서서히 서서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처럼 세세한 우체부 묘사를 통해서 세상이 그냥 무심히 존재하는 게 아니란 걸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유관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유감하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자, 이제 여러분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당신께 오는 ‘반가운 사연’을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우체부를 가 천천히 당신께 오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문화저널21 이건청주간 munhak@mhj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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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 박남준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사는 일도 어쩌면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지

후드득 눈물처럼 연보라 오동꽃들,

진다 덧없다 덧없이 진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없다

 

모진 바람 불고 비,

밤비 내리는지 처마 끝 낙숫물 소리

잎 진 저문 날의 가을숲 같다

여전하다 세상은

이 산중, 아침이면 봄비를 맞은 꽃들 한창이겠다

 

하릴없다

지는 줄 알면서도 꽃들 피어난다

어쩌랴, 목숨 지기 전엔 이 지상에서 기다려야 할

그리움 남아 있는데 멀리서,

가까이서 쓴다

너에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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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시와 사랑 이야기 진경문고 3
고형렬 지음, 이혜주 그림 / 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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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씀 한 마디,

“백 사람이 읽어도 그 모습이 다 다른 추억과 꿈들을, 시는 불러내어 줄 테니까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시를 짓고 느낄 수 있는 마음, 시의 마음〔詩心〕이 있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의 마음을 발견하고 건드리고 일깨우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시의 마음이, 시 속의 마음을 저절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시를 잘 읽는 일은,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 내는 일”이며, “시를 쓰는 사람들, 시를 읽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해석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결국 각자가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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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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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시 한 편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_최영미, 「나의 여행」 중에서 

 정복이라는 말이 시에서 나온 게 뜬금없다. 세상이 정복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왜 떠나느냐는 질문에,

'귀찮지만 나를 재생산하는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64쪽)'라고 이야기한다 

일상의 노동에서 벗어나는 여행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런 노동을 우습게 여기는 그녀의  심사가 들어있는 듯해서 불편하다.  

 고흐가 살았던 마을을 다녀와서는 고흐를 자신처럼 불쌍한 영혼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오만함을 느끼는 내가 삐딱한 것일까    

지극한 우월감과 한없는 열등감 사이에서 길을 잃은 그녀의 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진짜 삶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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