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김원영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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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휠체어 밑에 깔고 앉던 책은 한 권씩 늘어났다. 바지를 크게 입는 전략은 나중에는 '무재해' 벨크로와 플라스틱 파일 커버로 다리를 아예 조형하는 방법으로 발전했다.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을 가고, 직업을 얻고, 내게 주어진 무엇을 해내든 나는 그것이 프리데만의 멋진 신발이나 모자처럼 우스꽝스럽고 어색해보이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내 삶은 진정한 생의 의지를 억누른 채 허약한 가상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게 아닐까?

 몸을 온전히 드러내고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춤을 추기로 한 것은, 말하자면 정면승부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깨. 춤을 춘다는 건 인권, 평등, 교양, 문화 등의 이름으로 구저화된 삶의 밑바닥을 가장 노골적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나는 장애를 주제로 삼아 꽤 그럴듯한 글을 쓰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강의를 할 수도 있다, 이 활동들이 가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장애가 있는 몸을 진실로 긍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320p)

 

휠체어에서 내려와 공연하는 몸이 되기도 하는 작가는 지루하고 흥미로운 연습시간을 지나기도 하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밀어가는 몸과 글과 말이 여기에 와서 또 다른 순간을 만들어낸다.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접촉 즉흥(Cntact improvisation) 두 사람 (또는 세사람 이상이)  신체의 한 점을 접촉한 채 상대의 몸에 반응하며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춤이다. 접촉하는 지점은 어디든 가능하다. 서로 손가락 끝을 연결하거나 머리를 맞대거나 등을 맞붙이거나, 필꿈치나 팔뚝을 맞댈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손가락과 상대방의 이마가 만날 수도 있다. 그 상태로 각자 자유롭게 윰직이면 된다. 유일한 규칙은 접촉한 면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춤의 원리를 정립하고 접촉  즉흥이라 이름을 붙인 미국 안무가 스티브 팩스턴(1939-2024)은 1960년대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른바 '68혁명' 가운데 무용수로 활동했다. 유럽이 전쟁으로 퍠허가 된 동안 미국은 춤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문화적 용광로에서 미국인 이사도라 덩건이 유렵에서 새로 시작한 새로운 춤의 사조, 모던 댄스가 정점에 이르렀다,. 권위와 전통, 엄격한 규율에 맞서며 탄생한 모던 댄스는 어느덧 또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전통이자 권위가 되어 있었다.(325p)

 

 더 평등한 춤을 원했던 팩스턴은 춤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는 민주적인 춤의 공동체를 지향했다,

모든 사람이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춤의 지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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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 한 법의학자가 수천의 인생을 마주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이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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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법의학자로서 불법체류자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죽음앞에서조차 인종과 국적을 중요시하고 구분한다. 하나의 사건을 처리하는 데서 끝낼 일이 아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시스템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의학자도 사회 문제를 공부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나와 타인, 나와 사회를 분리하고 대상화하는 공부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의사로서 진료실에 오는 환자, 내 앞에 와 있는 환자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료실에 오지 않는 환자, 오지 못한 환자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잘못된 시스템과 구조 때문에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의사가 인체가 아닌 인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245p)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좋은 어른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호 선생님의 생각을 실천하려고 할 듯하다.
좋은 작가가 아니라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셔서 감사하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 길은 편가르기와 혐오로는 불가능하다. 혐오라는 독을 멈추기 위해 이호 선생님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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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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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들린 밀러의 <키르케>에서 키르케가 처음으로 연정을 느꼈던 글라우코스와의 대화를 마지막에 놓아두고 싶다. 글라우코스는 나이를 먹으면 아버지에게 독립해 자기 배와 자기 집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 불을 지필 거라고 말한다. "당신을 위해 항상 피워놓을 거예요. 허락만 해 주신다면." 그 말을 듣고 키르케는 이렇게 말한다. "그보다는 의자를 항상 준비해 놓았으면 좋겠구나. 찾아가서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사랑은 불을 피우는 일인 것 같지만 그보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항상 의자를 준비해 놓는 일이다. 당신이 지금껏 의자를 당계 내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준 모든 시간들과 그 안의 마음에 감사한다. 나도 계속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331p)

작가의 이야기를 잘 들었다. 이야기에 나온 그림과 책과 시들 덕분에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고, '키르케'를 펼치고, 시를 소리내어 읽어 본다. 세상에서 마녀라고 손가락질 받는 존재라도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의자가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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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거짓말 창비시선 512
장석남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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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청하다

난로 위 주전자에게 노래를 청하니
끓고
커다란 벽 담쟁이에게도 노래를 청하니
느리게 느리게
푸르렀다

접시에게도
사과에게도
노래를 청해보았다
접시에서누 청색 난초 무늬가 돋아나왔고
사과는 시들어갔다
시듦의 노래로 그 저녁
평화로웠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노래를 청하러 다니는 자
하나 누가 나에게도 노래를 청한다면 얼굴이 붉어지겠지
그것이 나의 노래
나는 망설이다가 한마디 하려네
그 모두가 나의 노래, 뗏목
앓는 사랑이라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노래라는 뗏목을 타고 사랑에게 가는 사람이 시인일까?
시인은 시듦의 노래를 듣고도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 평화를 엿듣는 시간도 평화에 가까웠다고 전해주고 싶은 날이다. 눈이 내리는 2월. 지금 노래에 가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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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 금서기행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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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라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불화의 방향은 소수의 권력자가 탈취한 이념이었다. 금서의 작가들은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독자에게 자유를 선물하고자 했다. (15p)

누구보다 이 책은 아내 강수진의 절대적인 배려로 가능했다. 아내는 모든 글의 첫 번째 독자였다. 먼 미래에 내 책장에 꽂힌 책의 의미를 알게 될 딸아이 김서인이 훗날 이 책을 펼치는 순간을 상상하며 한 줄 한 줄 썼음을 미리 밝혀둔다.
(21p)


여러분에게도 책과 관련된 추억이 하니쯤은 있지 않나요.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세상 속의 영혼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듯이 한 줄씩 밑줄을 그으면서 자주 '책바보'가 되었던 저로서는, 이 책저럼 독서의 본령을 일깨우는 작품 앞에서 겸허해집니다. <화씨 451>은 우리가 책을 손에 쥘 자유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해주는 명저입니다. 책장에 꽂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책입니다. (194p)

책을 읽을 자유도 있고, 읽지 않을 자유도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누리는 자유는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 그 깊이와 넓이를 깊이 탐사하고 나서 쓴 책이다.
작가에게, 그 작가의 첫번째 독자인 아내에게, 그리고 미래에 읽을 딸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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