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부는 더 빨리 걷지 않는다 / 신현정
 
 
 
 
우체부가 지나가니까 들국이 소담하니 핀다
 
개똥지바퀴가 우는가 하면
 
어느 담 밑에 늦은 과꽃은 세 번을 벨을 가장해 울기도 한다
 
저 우체부 아저씨 조금만 빨리 걸으시면 안 되나
 
늘 그 걸음이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항시 그 걸음이다
 
아예 자전거는 옆구리에 모시고 다니신다
 
염소에게 글을 가르치시나
 
담배 한 대 더 태우고야 엉덩이를 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나도 기다림이 된지 오래다
 
오늘은 유난히 행낭이 불룩하시다
 
하, 새끼 기러기 몇 마리 목을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걸음이 더 빨라지지 않는다
 
그 걸음으로 저기 저 달까지 무난히 갈 것을 내 믿는다
 
 
최근 세상을 떠난 신현정 시인이 세상에 남긴 시편 중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세상 보는 눈이 맑고 투명해질 수도 있을까요. 시인은 우편 행낭을 가지고 마을길을 지나고 있는 우체부를 노래합니다. 마냥 느린 걸음으로 마을 길을 가고 있는 우체부와 들국과 개똥지빠귀와 과꽃 같은 대상들이 아주 친숙한 친구들이 되어 있습니다. 마을 골목어딘가 염소에게 글까지 가르치면서, 자전거는 아예 끌고서 서서히 서서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처럼 세세한 우체부 묘사를 통해서 세상이 그냥 무심히 존재하는 게 아니란 걸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유관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유감하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자, 이제 여러분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당신께 오는 ‘반가운 사연’을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우체부를 가 천천히 당신께 오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문화저널21 이건청주간 munhak@mhj21.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