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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가족들 특유의 개성이 살아있는 <고령화 가족>이다. 48세 중년의 남자이자 이 책의 주인공인 오감독은 한때 충무로의 감독을 꿈꾸며 비상했지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도 없다' 처럼 완전히 바닥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이제 그는 힘없고 나약한 중년의 아저씨였다. 더이상 팔아 넘길것도 없이 내일은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그는 엄마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원치 않았지만, 구제불능이고 멧돼지 같은 그의 형 오함마와 함께 살게 된것이다. 그래도 처음은 무난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일류대학에서 공부한티를 줄줄 흘리고 다녔지만, 진정한 지식인은 되지 못했다. 마음의 나약함이 독처럼 퍼져서 그를 집어 삼켜 버린것이다.
그의 사람의 첫인상은 딱 한마디로 단정지어진다. '생활력' 이라든지 '싸가지'라든지 말이다. 정작 자신은 뭐라고 말할까. 그의 세상에서 가족의 자리는 아주 협소하고 비좁았던것 같다. 그가 살던 가족사에서 그는 중심이였을 테니, 아마 아쉬울것도 그다지 나쁠것도 없었을 것이다. 오함마에게 죽지 않을만큼 맞고 쫓겨다닌것을 빼면 말이다. 이 가족들은 다들 하나같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의 엄마, 형, 자신, 여동생, 거기에 조카까지. 다들 자신의 아픔이라든지 과거와 직면하지 않으려고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언제 파도에 휩쓸려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을. 오함마가 인생의 낙오자가 된 이유 그건 아픈 과거에 있었다. 엄마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고령화 가족은 새로운 파국으로 치닫는다. 엄마의 과거뿐만 아니라 다른 파국도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절대 기억속에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 내면서 출혈을 일으키게 된다. 아픈 상처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사를 그대로 묻어 두고 잊어버린것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잊혀지는것이 아니다. 우리의 머리속은 복잡하면서도 굉장히 단순하다. 어떤 버튼을 누르면 자신도 몰랐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언제 어느 순간에 그 버튼이 눌러질지 모른상태에서 우리는 무참히 당하게 되는것이다.
고령화 가족도 치명적인 연타를 맞게 되지만, 조카의 가출로 인해서 모든 상황이 일단락 종료되는 듯 했다. 연쇄살인범이 그 주변을 떠돌아 다니고 어린 소녀들이 죽어 나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지만, 다행이도 조카는 아니였다. 그동안 구제불능에 식충이로만 여겨졌던 오함마가 조카가 집을 나간것에 반성하며 집나간 조카를 데리고 온다. 어느 순간인지 오함마과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오함마는 아마도 과거의 일로 인해서 자신을 많이 책망하고 망가뜨리기 위해서 살았던것 같다. 오함마의 인생에도 영화를 찍을 만큼의 반전의 인생 탈출구가 생긴다. 그 일로 인해 오감독이 죽지 않을만큼 맞아서 강가에 널브러지지만 말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이 제일 치명적이라던가, 죽을것 같다던가 하는 그런순간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한번쯤 찾아올지도 모른다. 여러번 찾아오면 그건 바로 '인생이 다큐멘터리' 이겠지 싶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뭘 해도 안된다, 힘들다, 죽겠다 싶으면 정말 죽을맛일것이다. 고령화 가족 역시 심각한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이 사는 방식이 소파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노인들네게 씹고 또 씹어도 좋은 껌이지만, 그들에겐 죽을만큼 힘든일이다. 소파에 앉아서 <고령화 가족>을 씹는 노인네 분들중에도 어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중 한 할머니의 막내 아들도 가막소에 갔다고 한다. 상근 할머니 왈 ' 갸가 도둑질을 한 게 아니고 워낙 친구를 좋아해서 따라다니다보니께 으트게 가막소까지 따라가게 됐다고 내가 말안했어." (50쪽) 말하신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찌나 웃기던지 정말 배꼽빠지는 줄 알았다. 남의 이야기는 씹긴 좋지만,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려한다. 아무리 죽일놈이네 해도 자신의 아들은 귀하고 소중한 법이다. 그것이 부모 자식간의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관계인것이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운명적인 사랑등 부모 자식간의 만남처럼 극적이고 알수없는 운명이 있을까? 오직 하늘이 맺어준 인연, 이것이야 말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고령화 가족>도 거대한 폭풍후가 지나고 잠잠한 바다처럼 보인다. 자식들을 말없이 받아주시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직도 폭풍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인생인것을. 한집에서 살았던 가족들이 이제 뿔뿔히 흩어지면서 그들의 아픔도 이젠 그냥 기억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도 아픈것은 똑같다. 나이를 먹는다고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파묻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나이들면 사랑도 안하는거라는 착각에 빠져서 그분들을 바라본다. 우리야말로 이제 나이를 먹고 늙어갈텐데 말이다. 자신의 뒤통수도 못보는 나인데 무엇인들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오함마가 노인과 바다를 읽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낚싯바늘에 입이 꿰여 고통에 몸부리치다 곤봉에 맞아 끝내 아름다운 몸체를 뒤틀며 숨을 거둔 물고기, 고깃배에 매달린 채 상어들에게 살점을 묻어뜯기고 피를 흘려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던 바로 그 청새치, 그러다 마침내 온몸의 살점이 모두 떨어져나가 거대한 뼈만 남은 채 돛대에 수치스럽게 매달린 청새치...... 그게 바로 나야. (148쪽)
저자가 헤밍웨이를 좋아하나보다. 헤밍웨이를 거론한 이야기가 꽤 나오는걸 보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읽다가 정말이지 종을 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