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연출디자인의 원류 프레데릭 J.키슬러
야마구치 가쓰히로 지음, 김명환 옮김 / 미술문화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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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미술의 아웃사이더 키슬러를 ’건축가’라는 말로 단정지을수 있을까?

그는 극장설계, 무대장치, 실내디자인, 디스플레이, 회화, 조각, 제품디자인, 가구디자인등 순수미술에 걸쳐 폭넓게 전개되었다. 전문화와 분업화를 외치며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로써는 한가지만 해내기에도 벅찬것이다. 그렇지만, 키슬러는 이 모든것을 소화해내었다.

예전의 예술가라 불리우던 사람들은 여러 방면에 뛰어난 역량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많았다. ’건축가’의 의미가 사람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액자틀과 같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대 일수도 제한적일 수도 있다.

설계를 할때 공간의 의미는 단지 네모박스는 아니다.

무엇을 설계할지에 따라 그 공간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키슬러가 근대기능주의를 부정한 이유는 기계생산 시스템 및 자본주의 구조를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인간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략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는 기계기술문명의 모순을 직시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현실’의 구축을 목표로 했다.

즉 사회적 인본주의적 도덕관에 바탕을 둔 사상적 제안이었다.

 






<앤드리스 극장 모형과 단면도 평면도>
연극이 아닌 극장공간에 대한 변혁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전의 극장은 군주제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상류층의 좌석을 무대 전방에 배치하고 그밖의 좌석을 차지한 관객들은 연극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장내의 어떠한 장소에서도 완벽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앤드리스 극장>을 통해서 연속되는 곡면의 공간 속에서 역학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하였다. 구형의 건축물 내부의 공간 및 그 안에서 자유롭게 전개되는 드라마가 바로 그가 구상한 이상적 형태의 연극이였던 것이다.  

 

나는 살아 숨쉬는 건축을 꿈꾸고 있다. ’공간도시’ . 그리고 기능적인 건축을!  건물은 ’생태기능’에 자유자재로 접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키슬러의 공간전시의 새로운 생각, 그는 화랑을 디자인하면서 그림을 전시만 하는 공간이 아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 주목하고 다양한 장치를 고안한다. 그림이 벽에 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지지물을 만들어 그림을 고정하거나 관람객을 위해 책장과 비슷한 그림장과 그림을 놓을 수 있도록 이동 가능하게 설계된 일종의 ’픽쳐 스탠드’를 고안한다. 얼마나 멋진 계획안인지.

 

 위의 사진처럼 앉아서 편안하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에 가면 좋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음에도 지루함을 느낀다. 액자의 틀에 갇혀서 벽에 고정되어 있는 그림이 일반인 눈에 멋지게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났다 생각된다. 전시 공간이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는다.

 

 



<프리-포름>의 컨셉 드로잉과 <푸리-포름>18가지 기능에 관한 스케치

 

키슬러는 건축이든, 디자인이든, 조각이든 제작자의 사고방식을 수용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사용자, 수용자, 보는 사람들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리포름>은 미술관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인 관객의 피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며, 동시에 인간의 신체적 조건에 적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프리포름>의 디자인이야말로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객의 입장을 반영한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앤드리스 하우스 1층, 2층 평면도>

 





<앤드리스 하우스 실내 디자인 제 1안의 드로잉과 제 1안의 모형>

 

키슬러의 작품에 등장하는 각체구조는 달걀이나 조개껍질 등에서 볼 수 있는 곡면의 연속적인 구조와 같은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초기작품인 <엔드리스 극장>의 계획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연속적인 구조체의 원리에 입각한 나선형 구조의 원리를 <앤드리스 하우스>에 적용한다.

<앤드리스 하우스>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도 말했듯이 태어나기 전이였던 어머니의 뱃속이 우리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라 말한다. 앤드리스 하우스는 연속되어 있으면서도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주택은 단절의 공간이 아닌 대화의 장으로써 각자 개인의 쉼터이기도 하다.

 

 앤드리스 하우스를 통해서 우리와 가까운 곳에 ’인공적 우주’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살기 쉽게 하기 위한 장치’ 따위는 필요하지않았다. 대신에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각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작용하고 있는 우주의 힘이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켜 물질적으로, 감성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한하게 발전시켜 줄 것이다.

 

 키슬러는 1890년에 태어나 1965년 12월에 생을 마감한다.  그가 해온일들은 ’건축가를 위한 건축’이 아니라, ’거주하는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였다. 기존의 건축가들은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의 건축물들은 마천루를 보고 있는듯 하다. 거대하고 무서울정도로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편리함과 고도의 전문화된 솜씨로 금방 지어지는 건축물을 볼때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환경에 동화되지 못하는 초건축물이 안타깝기도 하고 우리는 무엇때문에 높이 쌓기 경쟁을 하는지 모르겠다. 편리함에 젖어 네?? 아닌지. 그걸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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