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걸작, 어떻게 이해할까? 미술문화 inter/ART 어떻게 이해할까 16
토마스 R. 호프만 지음, 심희섭 옮김 / 미술문화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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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해할까? 명화걸작의 첫장을 펼치면 지도가 나오는데 거기에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미술관과 나라가 함께 표시되어있다. 이부분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이 그림들을 보러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이 책을 통해 명화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것이 기쁘다. 왠지 실제로 명화들을 보면 어떤 감동에 빠져들런지.

그 누구처럼 그림의 강력한 이끌림에 빠져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그림들은 실제인물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나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무언가 말을 하는것 같기도 하다. 여행을 다니면 건축적으로도 뛰어난 미술관과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관건은 어떻게 명화를 바라볼까? 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살펴볼까?

이 작품은 도미니크 교단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의 식당 북쪽 벽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림속 공간이 완벽한 비례를 이루고 있고, 그로 인해 13명의 인물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무대 같은 공간이 완벽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녕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하리라"라고  한 말에 대해 각기 다른 감정적 동요를 보이고 있다. 또 소실점 투시도법에 따라 전개된 공간은 식당이라는 "실제공간"을 벽면 너머까지 연장해주고, 이를 위해 레오나르도는 식당에 흘러 들어오는 자연광의 조명까지도 철저히 염두해 두었다.  이 작품의 크기는 대략 폭 90m 높이 5m로 직사각형 형태의 식당 정면 벽전체, 약 50에 이르는 벽면을 덮고 있다. 그러니까 18평정도 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어머어마 하다. 책으로 보던 이 작품을 실제로 무지 보고 싶어졌다. 복구에 돈을 많이 들였다는데 원상태로 보존하기는 매우 힘이 드는것 같다. 
아마 지금가서 본다면 예전에 섬세한면까지 보지 못해 안타깝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이 그림의 유명세는 무엇일까? 20대 중반의 여인이라고 믿기지 않을정도의 연륜이 묻어나는 미소.이 여인은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자 델 조콘도 이다.
그림안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녹여냈다. 이 유명한 기법이 스푸마토이다.

즉 윤곽선을 희미하게 처리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 같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프란스 스니더스, <메두사의 머리>


바로크 시대는 전 유럽에서 회화의 양상이 아주 다채롭게 전개됐던 특징적인 시기이다.

감정의 영역은 하나같이 장렬한 스펙타클을 전개할 수 있는 주제였고 이렇게 장관을 연출하는 그림들은 강렬한 색채와 웅장한 구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그림은 나에게 아주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막 튀어 나올것 같은 눈동자와 메두사 머리의 꿈틀거리는 뱀들은 흡사 손에 잡힐듯 하다.

메두사의 목이잘린 낭자한 피의 강렬함~  

 



 

얀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하녀> : 일상의 마력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였겠지만,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였겠다.

빛의 환한 느낌이 느껴지는 옐로우 계통과 대조적인 블루계통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빛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분위기의 표현과 빵과 빵조각의 약간은 포토샵에서 이미지가 깨진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뚜렷하지 않으면서도 빛이 반사되는 점들이 작은형태로 반짝거린다.

 



  

앙투안 바토의 <피에로>
 

이 그림을 하반신을 보지 않았을때는 자살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의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팔과 몽롱해 보이는 표정을 보면 그가 허공에 떠있는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에로는 인물의 비례가 완벽하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의복의 주름과 주변과는 대조되는듯한 느낌을 준다.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뭉크의 절규를 볼때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곤 하였다. "악 어떻하면 좋아."

그 사람의 절규가 나에게 느껴지기도 하고 영혼이 빠져나가버린것 같기도 하다. 이 그림을 보면서 종종 따라해보곤 하는데 정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절규는 뭉크가 그린 그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떄문이다. 그리고 단순화한 절규와 어디로 흘러들어갈지 모르는 소용돌이속의 외침이 강하게 와닿는다. 


그림을 보는 즐거움, 알아가는 즐거움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대마다의 특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짧지않았던 어떻게 이해할까? 명화걸작은 그림에 대한 나의 안목을 높여주었다.

그동안에 어렵다고만 여겨져왔던 그림과 내가 가까워진것 같아서 즐겁다. 그리고 더  알고싶은 호기심이 마구 일었다. 누군가는 그림이나 음악을 해석하려고만 든다면 진정한 그림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멍하니 바라보는것 보다는 앎을 바탕으로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것이 좋다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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