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구판절판


2번째 읽었다. 2004년 이후로 오랜만.
밑줄 긋기나 리뷰를 옮기지 않아서_



뭐 희미해진 건 그의 이름만이 아니다. 습기가 그려놓은 그 벽화 아래서 우리가 나누었던 얘기들, 지나고 보니 지독히 가벼웠던 맹세들, 새끼 원숭이들처럼 서로를 핥으며 맛보았던 짭조름한 땀의 미각, 사랑하고 다투고 다시 사랑했던 그토록 달콤했던 투쟁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도 이 사진처럼 제 색깔과 촉감을 잃어버린 기억 저편에서 나리꽃 빛처럼 몽롱할 뿐이었다. 필름을 망가뜨린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지독했던 습기 탓일 것이다.
(…)
존재의 의미를 재는 내 속의 저울 눈금을 조정하고 나자 찾아온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10~11쪽)쪽

생의 밑그림은 불안과 모호함과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란 걸 잠시 잊고 살았다. 어둡고 추운 거리를 오래 걷다보면 불 켜진 모든 창 안은 순결한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지. 손톱으로 긁어내기 전엔 밑그림은 보이지 않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운명의 문신이 내 어깨 어딘가에 새겨져 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견고한 지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30쪽)쪽

그랬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로 이루어진 게 인생이었다. 그 말은 발포정처럼 내 머리 속에서 거품을 내며 천천히 풀어졌다. 약효를 기다리는 연약한 환자처럼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 내게 카메라는 이제 보이는 세상을 기록하거나 숨겨진 피부 한 꺼풀 아래의 장기를 찍는 것에서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과 부딪히고 필살기의 에너지를 방어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되어줄 것이다. 한때는 내 영혼을 성장시켰고 이후엔 더운밥이 되어주었으며 이제 가파른 벼랑에서 추락하려는 내 생을 붙들어줄 사진.-(37쪽)쪽

맨발로 폭우가 쏟아지는 벌판을 달려 나가는 짓 따위는 영화 속에서 볼 때에나 근사할 뿐, 따라 했다간 찢긴 발바닥과 독한 신열과 상한 기관지를 쓰다듬으며 후회하게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교집합이 없이 산다면 그토록 평화로운 일상을 구태여 서로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흘리고 몸 어딘가에 유탄을 박은 채 살아가려 하는 걸까. 지루해지면 게임 오버 버튼을 누르면 되는 컴퓨터 게임처럼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전쟁놀이를 하면서 진검을 휘둘러 피를 보는 건 그야말로 바보일 뿐인데.
(61쪽) 사람 사이의 어떤 정서가 물질보다 더 가치 있으며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믿기에는 내 지난 상처의 항체는 여전히 유효하다.-(58쪽)쪽

시의 주변이 아니라, 세상의 주변이 아니라, 더듬는 언어가 아니라, 어쩐지 폐활량이 부족한 듯한 연약함이 아니라, 미약한 전화기 속의 목소리로도 세상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그런 강인함을 획득하고 싶었을 뿐이다.
(…) 살아가면서 피와 땀과 찢어지는 가슴 한 조각의 레슨비를 제 스스로 지불해 가며 깨달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어쨌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낫다. 알게 되면 고칠 수도 없는 제 지병의 흔적을 더듬으며 끝없이 자책하는 일만 남게 되므로.-(66~68쪽)쪽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망각에도 가속도는 붙으니까. 그 재빠르게 비워버린 기억의 공간 속에 사람들은 무엇을 담고 싶은 것일까.-(82쪽)쪽

술과 담배가 사람에게 유익한 건 아니다. 다만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목발이 필요하듯, 영혼이 아픈 어느 순간에 술과 담배가 목발이 되어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의 어느 한때, 근원적인 허무주의자인 내게 술과 담배는 나의 목발이 되어주었다.
(…) 그의 기록에는 극도의 절제와 결코 절제할 수 없는 과잉된 정서가 행복하게 불화하고 있었다.
(…) 그의 사랑은 너무도 견고해서 일생을 끌로 긁어도 닿지 않을 바위 같았으므로.
(…) 그러나 그 글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Y가 아니라 M이다. Y와 M은 아득히 먼 두 지점에 있는 존재였으며 온도계의 가장 먼 곳에 위치하는 두 지점이었다. 하나는 그에게 구심력으로, 하나는 우울한 원심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주현이라는 우주의 대척점에 둘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인생에 두 개의 윤리가 있음을 그에게 가르쳐준 상반된 존재였다. 간단히 말해서 Y는 그에게 차갑고 멀어지고 싶은 낡은 행성 이니셜이었다.-(91~93쪽)쪽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끝내 찾을 수 없는 몇 개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인생은 생각이 있는 놈이기라도 한 듯 종종 숨겨진 현실을 일깨워 주곤 한다. 문제는 그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
(…) 이건 제 팔에 스스로 칼을 꽂은 자의 비명이 가득한 기록. 스스로 그 비명을 즐기는 자의 기록일 뿐이었다. 온몸의 수분이 말라버린 듯, 무릎이 입 안이 어깨가 눈알이 파삭거리며 함부로 발굴된 미라처럼 한순간 삭아 내렸다.
그 밤부터 죽은 숙주 속에서 살아가는 에일리언처럼 가려움이 유선의 몸속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96~97쪽)쪽

인생은 당신이 공부한 교과서와는 다른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두껍다 한들 몇 권의 의학 서적으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전부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아요.
(127쪽) "…밤이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살의 충동을 이기기 위해 글을 쓴다고요. 존재와 창작의 고뇌 때문에 그는 안개 낀 새벽의 강가로 달려간 게 아닐까요."

-(101쪽)쪽

사람은 모든 불행이 자신을 비껴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그런 열등한 운명의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란 결코 나나 내 주위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결국은 확률의 문제일 뿐이라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해 고통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 그러므로 긴 고통의 이면에는 부끄럽다는 느낌이 포함된다. 지상의 삶에 무능한 인간이라는.-(155쪽)쪽

"난 누구에게도 어린 시절의 내 행복하지 못했던 날들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 없어.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긴 하지만 가까이 하려 하진 않아.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의 밝고 빛나는 기운을 훔쳐가거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 피하는 거지."-(185쪽)쪽

"…살면서 서로 주고받는 폭력을 낱낱이 드러낸다면 그 공포감 때문에 지레 죽어버릴걸. 이 바닥에서 살아나가려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견뎌내야 하는 거야."
(…) 만약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자신의 앞에 놓인 어떤 사건이 나머지 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갈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럴까. 누구든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지구의 자전축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대개 자신의 운명에 결정적인 일일수록 그것에 대해 전혀 무력하다. 확실한 것은 없다.
나는 물어보지 못할 것이며 물어보지 않을 것이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억의 회로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까지다.-(193~194쪽)쪽

"넌 언젠가 개미를 닮고 싶다고 말했지. 그들은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다고. 패배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지난 시간의 일로 상처받지도 않는다고. 개미를 닮고 싶은 네가 나쁜 게 아냐. 널 개미를 닮고 싶도록 만든 누군가가 있었어."-(198쪽)쪽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의 한 컷에서 특별한 의미를 읽어낸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
"… 그저 찍고 또 찍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떤 불꽃같은 장면이 나와 주리라 기다리면서. 우리 업계에서는 그걸 ‘야마 신’ 이라고 부르는데. 살인, 폭력, 배신, 뭐 그런 거 말고도 지독히 일상적인 삶의 풍경 그 자체가 전율을 주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
"인정받는 것과 지속할 수 있는 건 다른 문제거든요. 내가 원하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지속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돈 문제죠. 이런 작품이야 아르바이트 죽자고 해서 모든 돈으로 어떻게 되는데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면 액수의 차원이 달라지니까. 파워를 가진 쪽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그런 고민이 있어요. 우선 시작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끌려들어 가서는 작가적 욕망과 자본의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딪치게 되는 거죠."-(215~218쪽)쪽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로 그믐도 되고, 그런 거 같아요."-(24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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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31

한국 비보이의 대중적 도약을 시험하는, 초유의 비보이 음반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며 전통의 강호로 군림해온 익스프레션과 갬블러 출신의 멤버들이 2004년 9월 새로이 결성한 맥시멈 크루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과 만 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활동 기간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맥시멈 크루라는 이름으로 거둔 성과들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2006년 8월,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히는 캐나다 몬트리올의 코미디 축제인 'Just For Laugh'의 'The Battle- Just For Laugh'에서 미국과 캐나다를 대표하는 30팀 이상의 쟁쟁한 팀들을 뛰어넘어 배틀 부문과 퍼포먼스 부분에서 2관왕 차지, 이는 국내 최초로 비보잉의 본고장 북미에서 얻어낸 우승이기에 더욱 값진 성과였다. 비보이 배틀 대회의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12월에는 갬블러와의 연합팀 '수퍼코리아'를 결 결성 프랑스의 '배틀 올림픽 투루즈'에서 역시 우승을 거머쥐며 물오른 실력을 과시한 바 있다. 세계 정상의 스킬을 뽐내온 그들이지만, 마음 한 켠에는 비보이이기에 겪어야 하는 아쉬운 상황들이 남아있었다. 다름 아닌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성립할 자신들만의 음악이 없다는 점과 가수나 래퍼에 비해 항상 무대 뒷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약간의 소외감이 바로 그 것이다.
음반 녹음의 초짜인 그들의 부족한 실력을 보완하고, 가사의 다채로운 소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앨범의 코디네이터가 필요했다. 많은 논의 끝에 015B의 객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실력파 래퍼 버벌 진트(Verbal Jint)와 마스터플랜의 프로덕트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택틱스(Tactics)를 프로듀서로 영입하게 됐다. 타이틀곡으로 낙점된 'To The Maximum'은 비보이를 처음 시작하면서 기성 세대로 부터 받았던 차별과 멸시를 꿈과 노력을 통해 정상의 자리에서 보상받는다는 자전적 내용을 담은 곡으로 젊음을 담보로 목표를 갖고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돌진하자는 맥시멈 크루의 진취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택틱스와 버벌진트의 황금 콤비가 만들어낸 훵키한 트랙으로 소울, 훵크 밴드 세렝게티(Serengeti)의 리얼 연주와 비보이 출신의 특급 뮤지션 디제이 렉스(DJ Wreckx)의 스크래치, 거친 보이스의 소유자 바스코(Vasco)의 Shout Out이 더해져 다이나믹한 사운드를 완성했다. 초기 녹음 버전에서는 가창의 비중이 컸었으나 무대를 통해 주전공인 화려한 비보이 퍼포먼스를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 랩의 부분을 최소화하였다.
수록곡중 가장 먼저 작업한 'Battle'은 비보이 퍼포먼스 보다 랩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주안점을 맞춰 녹음한 곡으로 랩에 있어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웨이컵과 타조의 주고 받는 래핑 속에는 비보잉의 전문적인 용어들이 등장하며 이목을 끈다. 또한 해외 투어를 통해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된 스케쥴원(Schedule 1)의 스크래치가 곁들여졌으며 버벌진트가 주전공인 랩 대신 보컬로 참여한 'Maximum Party'는 매일밤 연습과 함께 펼쳐지는 자연스러운 프리스타일 배틀의 소소한 일상들을 파티로 묘사하여 표현한 곡이다. 'Hustlin' pt.2'는 특급 뮤지션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가 제공한 퍼포먼스를 위한 테마이다. 맥시멈 크루는 추후에 발매할 음반에도 자신들의 오리지널리티를 부각할 퍼포먼스용 비트들을 최고의 디제이들과 함께 작업하여 수록할 예정이다.


To The Maximum _ 비보이 맥시멈크루.
랩/힙합
200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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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순 2007-06-26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2년이라는 짧은 핸드캡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잘 하고 있는 우리 맥시멈크루 아마 모두다 열심히 하는 거일거다.앞으로도 팀이 전원 한마음으로 한뜻으로 잘뭉쳐서 세계정상을 잘지키기넘넘좋아
 



2006.09.24

http://www.bandprana.com/
프라나(내 귀에 도청장치)

1. Go
2. 유리꽃(Title)
- 노래 듣고, 감동에 잠시 멍했다.
아아, 혁이 씨. 무심결에 입술이 들렸다가 부르르거리고, 우물거렸다, 방황했다.
3. 천국
4. Angel
5. 만질 수 없는
6. 한번만 더
7. Feel
8. Space
9. E-mail
10. Magic Man
11. Animal
12. 유리꽃(Inst.)

* 유리꽃 - 블로그 배경음악.
Space - 싸이 배경음악.

노래 듣고 울 뻔한 건, 12012의 Orion이후로 오랜만이었다.
가사로 인해서가 아니라, 공감 가능한 보컬 능력에 의해서였다.

 

CD, 꼭 사고 싶다-------!

 

+ CD 겨우 장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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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뷔똥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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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기억하고 있다. 여자는 마술을 다시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약을 안 먹고도 정신이 말짱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미쳐가는 학교 같은
이 세상을 조각조각 내서 다시 맞춰보고 싶다고도 했다.
남자는 그때 그 영화의 팸플릿을 지금도 갖고 있다. 부에나비스따 소셜클럽,
변방의 나라 쿠바의 늙은 음악가들, 구두를 닦고 복권을 팔면서도 궁기 없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그 음악들, 여자는 아바나에 가서 직접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담벽에 써 있던 ‘혁명은 영원하다’ 는 낙서가 아직도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도 했다.-(72~73쪽)쪽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인가. 이제 곧 학교에 들어갈 딸아이는 또 어떤
세상을 보게 될 것인가.-(111쪽)쪽

갑자기 한 녀석이 손을 번쩍 든다.
"선생님, 윤봉길 의사가 진짜 의사 맞죠?"
그 녀석은 전에도 문익점이 화약을 발명한 사람이 맞다고 박박 우기던 녀석이다.
왜 자꾸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
<- 당시 음울했었는데, 살짝 웃을 수 있었던.
-(128쪽)쪽

세상이 죄지, 이놈의 세상한테 한판 붙어야지, 그러지 않곤 참을 수가 없다.
이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가 늘 세상에 지는 기분이다. 바람이 차다.
저놈의 개는 왜 저리 짖는 건가.
P.M. 9:00
토요일 하루가 이렇게 다 갔다. 바람은 차고 갈 길은 멀다.-(148~149쪽)쪽

새로운 것에 대한 매혹은 집착으로, 강박으로 계속 이어졌다.-(166쪽)쪽

가장 큰 자산은 냉철하게 현실을 저울질하는 감각이었다.-(193쪽)쪽

세상은 역시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이 세상의 벽이 켜켜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도 모른다.-(207쪽)쪽

내가 고모를 믿는 건 고모가 세상에 널린 가짜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고민이나 욕심을 짜내는 게 아니란 얘기다.-(225쪽)쪽

그때 고모의 표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다. 내 어휘력의 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고모가 너무 뚫기 어려운 정제된 감정과 사고로 무장한 강적이기 때문이다.-(228쪽)쪽

바이러스처럼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발병해서 식구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라 딱히 예측할 수도 없었다.
(…) 그때 할머니의 그 끔찍한 살기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알았다. 고모만 병든 게 아니라 우리 집 전체가 같이 앓고 있다는 걸, 세상은 우리 집과 상관없이 잘 굴러가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굴러가는 세상에 만족도 못하면서 태연한 척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더 비겁한 거라고 엄마인가 누군가가 말했었다. 나는 비겁한 사람들과 이 세상이 결국 한통속인가 생각해보았다.-(233쪽)쪽

상처가 아무는 것에도 본인의 의지가 필요하다.-(235쪽)쪽

최소한 자기가 떨려난 데 대한 분풀이, 애증, 자기합리화 등이 냉소적이든 희화적이든 드라마틱하든 뭔가 보여야되는 것 아닌가.
(…) 재연 아줌마도 고모가 한때 되게 뻣뻣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융통성이나 상상력이 결핍된 이들에겐 흔한 증상이라 생각한다. 즉, 바탕이 착해도 미필적 고의로 남을 다치게 할 수 있다.-(236쪽)쪽

도대체 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숨기고 싶은 게 그렇게 많을까. 천재꼬마라고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고모에 대한 그 많은 궁금점과 한국사회의 모순과 겉 다르고 속 다른 이 세상의 많은 논제들을 다 피해가고 너도 크면 알게 될 거라는, 가장 성의 없는 대답을 어쩜 그리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걸까. 그동안 숱하게 내 견해를 경청하고 격려하고 첨삭해주던 것은 다 뭐였나.-(237쪽)쪽

고모의 발언 - 삼류인 줄 알았던 영화가 언제부턴가 컬트가 돼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아줌마의 반박 - 그런 논리 자체를 폐기해라. 너나 나나 도덕적 우월감, 순결성이나 붙들고 박제가 될지 모른다. 너 빼고 다 변절이라니, 너 진짜 악질이냐?
고모의 주장 - 모르겠다. 시대가 변하면 나도 변해야 되나. 어느 정도 자책하고 죄의식 갖고 괴로워하면 우리의 전사(前史)는 그럴듯하게 포장되니까?
아줌마의 일갈 - 넌 남에게 관심이 없다. 그건 예전과 변함이 없다. 다른 삶은 관심 가질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 돌도 안 맞으니까. 무섭게 스스로 최면을 걸어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시간이 멈춰버리도록!-(241쪽)쪽

어쩌면 나와 교감했던 고고하고 완전한 보루였던 고모는 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난 고모의 사상은 모른다. 그러나 고모가 이념의 퇴락 때문에 지금 저렇게 된 건 아니라고 본다. 그건 회한이다. 거기에 내가 알 수 없는 플러스알파가 보태졌을 것이다.
중간 생략(242쪽은 밑줄 긋고 싶은 문장 가득.)-(242쪽)쪽

기억은 경험한 자만의 소산이란다. 그게 아니면 얼마나 더 살아야 이런 게 머릿속에서 술술 풀리게 될까. (…)그러나 내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고모가 살았던 그 시대는 다시 겪을 수 없다. 그저 나보다 어린 아해들에게 나이를 무기로 더 아는 척이나 하게 되겠지.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리고 세상은 단순한 사람이 살기 편한 게 확실하다. 이러고도 계속 이런 세상에서 살아야 되나.-(243쪽)쪽

아빠는,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 가장 아빠답지 않은 희한한 격려사를 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 왜 그렇게 어른들은 쉽게-쉽게 잘 잊고 사는 건지, 그냥 그렇게 고기 굽는 연기 속에 다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건지, 내 고까운 감정들도 그 속에 섞어 날려 보내야 하는 건지 결단을 내릴 수 없는 가운데, 덕담과 덕담이 오가며 밤은 깊어갔다.-(261쪽)쪽

윤 선배와 달리 나는 오빠가 어디서 사기를 당하거나 속은 게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오빠는 역사를 새로 만들어보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자기 스스로 역사 자체가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미라나 화석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오빠를 이해하려면 아직도 멀었다.-(29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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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뷔똥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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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리뷰.

 

2002년 11월에 구입했다. 2번째 읽은 셈이다. 책장을 훑어보다가 밑줄 긋기나 리뷰로 옮기지 않은 책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그게 상당하다;), 새로이 읽기 시작했다, 25일 취침 전 잠깐부터. 단편 하나하나 차례로 거듭 읽을수록 신선한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집이 있는데, 딱 이 책이었다. 다소 거슬렸거나 가벼운 흠이 있다면, 편집과정에서 착각을 한 건지 띄어쓰기 틀린 부분이 더러 발견되었고, 문법에 어긋난 부분도 간혹 보였다는 점이다. 책 표지의 띠지에는 작가 소개가 조금 과장이다 싶게 언급되어 있다. ‘제1회 창.비 신인 소설상 수상 작가’ 그 밑에 (경쾌한 호흡, 세련된 감성이 뿜어내는 싱싱한 재미)라고. 딱 눈에 띄었을 때, 너무나도 거창하고 비행기 태워주기 식 평이 아닐까 싶어 구깃구깃 종이를 접은 듯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싱싱한 재미라고 하기에, -몇 가지 단편소설은 빼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경쾌한 호흡이라 하기엔 대체 어디가?, 구시렁거리며 읽었던 것이다.(뭐, 내 주관적 입장이 포함되었겠지만)어쩌다 문장의 연결이 뚝뚝 끊기듯 갈기갈기 찢긴 느낌이 나고, 텅텅 빈 연상이다 싶은 문장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우선, 전체적인 소설집의 단면을 한 마디로 풀이하자면, 독특한 자의식의 주인공을 선별하듯 그리면서 실험적 형상화 방법을 활용하여 구성을 짰다. 구성적 요소에서 표제작과 [철가방 추적 작전]이란 단편 두 가지가 꽤 구미당기는 편이었다.
[유리동물원]이란 단편은, 주인공의 실종에 주변인물의 진술이 중심 뼈대였고, 차례차례 진술을 토대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관계 맺기 방식을 선택한 소설이었다. 나름대로 성실하고 똑 부러지는 직장인에다 겉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등장인물들이)판단했던 주인공이, 신경쇠약과 만성우울을 앓는 복잡한 내면의 소유자이고 여러 가지 혼란을 겪는 동안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흘린 바가 있고, 그야말로 사라졌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암시를 바탕에 깔아두고 있다.

 

[음치 클리닉에 가다]와 [풍납토성의 고무 인간], 두 단편은 생생하게 영상이 그려지는 소설이었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 같다. 뉴스에 사건 보고하듯 리포터처럼 내게 장면 전달을 해주는 듯 느껴졌다. 부르짖는 소리가 귓가에 착 달라붙고, 끔찍하다 싶은 광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주인공들의 의지 문제를 떠나서, 다시 되돌리고 싶지 않은 과거일 수밖에 없다.
[거머리]는 다단계 판매를 소재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한 그 화제와 소설 주인공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었다. 특별히 이끌리거나, 그렇게 좋았던 표현도 여럿 발견 할 수 없었던, 아주 담담하게 읽었다. 자본주의의 집요함이 느껴지고, 곳곳에 돈을 향한 광기의 흔적이 역력하고, 더 나아가 선함과 악함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두 개의 평행선과 같이) 주제 의식이 드러나지만, 딱히 기억하고픈 소설은 아니었다. 이렇다 할 주인공의 성격 변화가 없었고, 대개 자신이 처한 환경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발상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도 그 요인이 될 수 있지만, 어떤 일에든 수동적 대응을 하는 것도 꽤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격동적인 흐름에 맞추기 어렵고, 그렇다면 환경 탓만을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거머리]와 [그때 그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나], 두 소설은 시점이 분산되었기에 혼란을 안겨주었다. 방향을 잃고 떠도는 난파선 같은 영상. 역효과가 나서 산만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공간에 갇혀서 구출되기만을 기다리는 의지가 약한 자아가 가득했지만, 당돌한 화자가 인상적이었던 [비밀의 화원]이나 능동적이었다고 기억하는 주인공과 호흡이 짧아 스피디하게 읽을 수 있었던 개인적 취향의 소설이었던 [철가방 추적 작전]은 오래도록 씁쓸하기도 한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이 작가는 재능보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자료 수집도 많이 했고, 이미 자리를 잡은 요소들을 바탕으로 그 위에 덧씌우듯 소설을 탄생시켰다는 생각을 한다. 군더더기를 넘어 개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느슨한 문장이 아쉬웠다. 계단을 오르고 내려가듯, 차츰차츰 단계를 밟아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4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소설집 [타잔]을 구입할 계획을 세우면서, 부족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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