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뷔똥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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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기억하고 있다. 여자는 마술을 다시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약을 안 먹고도 정신이 말짱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미쳐가는 학교 같은
이 세상을 조각조각 내서 다시 맞춰보고 싶다고도 했다.
남자는 그때 그 영화의 팸플릿을 지금도 갖고 있다. 부에나비스따 소셜클럽,
변방의 나라 쿠바의 늙은 음악가들, 구두를 닦고 복권을 팔면서도 궁기 없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그 음악들, 여자는 아바나에 가서 직접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담벽에 써 있던 ‘혁명은 영원하다’ 는 낙서가 아직도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도 했다.-(72~73쪽)쪽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인가. 이제 곧 학교에 들어갈 딸아이는 또 어떤
세상을 보게 될 것인가.-(111쪽)쪽

갑자기 한 녀석이 손을 번쩍 든다.
"선생님, 윤봉길 의사가 진짜 의사 맞죠?"
그 녀석은 전에도 문익점이 화약을 발명한 사람이 맞다고 박박 우기던 녀석이다.
왜 자꾸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
<- 당시 음울했었는데, 살짝 웃을 수 있었던.
-(128쪽)쪽

세상이 죄지, 이놈의 세상한테 한판 붙어야지, 그러지 않곤 참을 수가 없다.
이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가 늘 세상에 지는 기분이다. 바람이 차다.
저놈의 개는 왜 저리 짖는 건가.
P.M. 9:00
토요일 하루가 이렇게 다 갔다. 바람은 차고 갈 길은 멀다.-(148~149쪽)쪽

새로운 것에 대한 매혹은 집착으로, 강박으로 계속 이어졌다.-(166쪽)쪽

가장 큰 자산은 냉철하게 현실을 저울질하는 감각이었다.-(193쪽)쪽

세상은 역시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이 세상의 벽이 켜켜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지도 모른다.-(207쪽)쪽

내가 고모를 믿는 건 고모가 세상에 널린 가짜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고민이나 욕심을 짜내는 게 아니란 얘기다.-(225쪽)쪽

그때 고모의 표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다. 내 어휘력의 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고모가 너무 뚫기 어려운 정제된 감정과 사고로 무장한 강적이기 때문이다.-(228쪽)쪽

바이러스처럼 잠복해 있다가 갑자기 발병해서 식구들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라 딱히 예측할 수도 없었다.
(…) 그때 할머니의 그 끔찍한 살기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알았다. 고모만 병든 게 아니라 우리 집 전체가 같이 앓고 있다는 걸, 세상은 우리 집과 상관없이 잘 굴러가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굴러가는 세상에 만족도 못하면서 태연한 척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더 비겁한 거라고 엄마인가 누군가가 말했었다. 나는 비겁한 사람들과 이 세상이 결국 한통속인가 생각해보았다.-(233쪽)쪽

상처가 아무는 것에도 본인의 의지가 필요하다.-(235쪽)쪽

최소한 자기가 떨려난 데 대한 분풀이, 애증, 자기합리화 등이 냉소적이든 희화적이든 드라마틱하든 뭔가 보여야되는 것 아닌가.
(…) 재연 아줌마도 고모가 한때 되게 뻣뻣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융통성이나 상상력이 결핍된 이들에겐 흔한 증상이라 생각한다. 즉, 바탕이 착해도 미필적 고의로 남을 다치게 할 수 있다.-(236쪽)쪽

도대체 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숨기고 싶은 게 그렇게 많을까. 천재꼬마라고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고모에 대한 그 많은 궁금점과 한국사회의 모순과 겉 다르고 속 다른 이 세상의 많은 논제들을 다 피해가고 너도 크면 알게 될 거라는, 가장 성의 없는 대답을 어쩜 그리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걸까. 그동안 숱하게 내 견해를 경청하고 격려하고 첨삭해주던 것은 다 뭐였나.-(237쪽)쪽

고모의 발언 - 삼류인 줄 알았던 영화가 언제부턴가 컬트가 돼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아줌마의 반박 - 그런 논리 자체를 폐기해라. 너나 나나 도덕적 우월감, 순결성이나 붙들고 박제가 될지 모른다. 너 빼고 다 변절이라니, 너 진짜 악질이냐?
고모의 주장 - 모르겠다. 시대가 변하면 나도 변해야 되나. 어느 정도 자책하고 죄의식 갖고 괴로워하면 우리의 전사(前史)는 그럴듯하게 포장되니까?
아줌마의 일갈 - 넌 남에게 관심이 없다. 그건 예전과 변함이 없다. 다른 삶은 관심 가질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 하면 돌도 안 맞으니까. 무섭게 스스로 최면을 걸어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시간이 멈춰버리도록!-(241쪽)쪽

어쩌면 나와 교감했던 고고하고 완전한 보루였던 고모는 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난 고모의 사상은 모른다. 그러나 고모가 이념의 퇴락 때문에 지금 저렇게 된 건 아니라고 본다. 그건 회한이다. 거기에 내가 알 수 없는 플러스알파가 보태졌을 것이다.
중간 생략(242쪽은 밑줄 긋고 싶은 문장 가득.)-(242쪽)쪽

기억은 경험한 자만의 소산이란다. 그게 아니면 얼마나 더 살아야 이런 게 머릿속에서 술술 풀리게 될까. (…)그러나 내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고모가 살았던 그 시대는 다시 겪을 수 없다. 그저 나보다 어린 아해들에게 나이를 무기로 더 아는 척이나 하게 되겠지.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리고 세상은 단순한 사람이 살기 편한 게 확실하다. 이러고도 계속 이런 세상에서 살아야 되나.-(243쪽)쪽

아빠는,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 가장 아빠답지 않은 희한한 격려사를 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 왜 그렇게 어른들은 쉽게-쉽게 잘 잊고 사는 건지, 그냥 그렇게 고기 굽는 연기 속에 다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건지, 내 고까운 감정들도 그 속에 섞어 날려 보내야 하는 건지 결단을 내릴 수 없는 가운데, 덕담과 덕담이 오가며 밤은 깊어갔다.-(261쪽)쪽

윤 선배와 달리 나는 오빠가 어디서 사기를 당하거나 속은 게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오빠는 역사를 새로 만들어보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자기 스스로 역사 자체가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미라나 화석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오빠를 이해하려면 아직도 멀었다.-(29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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