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구판절판


2번째 읽었다. 2004년 이후로 오랜만.
밑줄 긋기나 리뷰를 옮기지 않아서_



뭐 희미해진 건 그의 이름만이 아니다. 습기가 그려놓은 그 벽화 아래서 우리가 나누었던 얘기들, 지나고 보니 지독히 가벼웠던 맹세들, 새끼 원숭이들처럼 서로를 핥으며 맛보았던 짭조름한 땀의 미각, 사랑하고 다투고 다시 사랑했던 그토록 달콤했던 투쟁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도 이 사진처럼 제 색깔과 촉감을 잃어버린 기억 저편에서 나리꽃 빛처럼 몽롱할 뿐이었다. 필름을 망가뜨린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지독했던 습기 탓일 것이다.
(…)
존재의 의미를 재는 내 속의 저울 눈금을 조정하고 나자 찾아온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10~11쪽)쪽

생의 밑그림은 불안과 모호함과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란 걸 잠시 잊고 살았다. 어둡고 추운 거리를 오래 걷다보면 불 켜진 모든 창 안은 순결한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지. 손톱으로 긁어내기 전엔 밑그림은 보이지 않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운명의 문신이 내 어깨 어딘가에 새겨져 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견고한 지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30쪽)쪽

그랬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로 이루어진 게 인생이었다. 그 말은 발포정처럼 내 머리 속에서 거품을 내며 천천히 풀어졌다. 약효를 기다리는 연약한 환자처럼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 내게 카메라는 이제 보이는 세상을 기록하거나 숨겨진 피부 한 꺼풀 아래의 장기를 찍는 것에서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과 부딪히고 필살기의 에너지를 방어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되어줄 것이다. 한때는 내 영혼을 성장시켰고 이후엔 더운밥이 되어주었으며 이제 가파른 벼랑에서 추락하려는 내 생을 붙들어줄 사진.-(37쪽)쪽

맨발로 폭우가 쏟아지는 벌판을 달려 나가는 짓 따위는 영화 속에서 볼 때에나 근사할 뿐, 따라 했다간 찢긴 발바닥과 독한 신열과 상한 기관지를 쓰다듬으며 후회하게 된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교집합이 없이 산다면 그토록 평화로운 일상을 구태여 서로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흘리고 몸 어딘가에 유탄을 박은 채 살아가려 하는 걸까. 지루해지면 게임 오버 버튼을 누르면 되는 컴퓨터 게임처럼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전쟁놀이를 하면서 진검을 휘둘러 피를 보는 건 그야말로 바보일 뿐인데.
(61쪽) 사람 사이의 어떤 정서가 물질보다 더 가치 있으며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믿기에는 내 지난 상처의 항체는 여전히 유효하다.-(58쪽)쪽

시의 주변이 아니라, 세상의 주변이 아니라, 더듬는 언어가 아니라, 어쩐지 폐활량이 부족한 듯한 연약함이 아니라, 미약한 전화기 속의 목소리로도 세상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그런 강인함을 획득하고 싶었을 뿐이다.
(…) 살아가면서 피와 땀과 찢어지는 가슴 한 조각의 레슨비를 제 스스로 지불해 가며 깨달아야만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어쨌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낫다. 알게 되면 고칠 수도 없는 제 지병의 흔적을 더듬으며 끝없이 자책하는 일만 남게 되므로.-(66~68쪽)쪽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망각에도 가속도는 붙으니까. 그 재빠르게 비워버린 기억의 공간 속에 사람들은 무엇을 담고 싶은 것일까.-(82쪽)쪽

술과 담배가 사람에게 유익한 건 아니다. 다만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목발이 필요하듯, 영혼이 아픈 어느 순간에 술과 담배가 목발이 되어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의 어느 한때, 근원적인 허무주의자인 내게 술과 담배는 나의 목발이 되어주었다.
(…) 그의 기록에는 극도의 절제와 결코 절제할 수 없는 과잉된 정서가 행복하게 불화하고 있었다.
(…) 그의 사랑은 너무도 견고해서 일생을 끌로 긁어도 닿지 않을 바위 같았으므로.
(…) 그러나 그 글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Y가 아니라 M이다. Y와 M은 아득히 먼 두 지점에 있는 존재였으며 온도계의 가장 먼 곳에 위치하는 두 지점이었다. 하나는 그에게 구심력으로, 하나는 우울한 원심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주현이라는 우주의 대척점에 둘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인생에 두 개의 윤리가 있음을 그에게 가르쳐준 상반된 존재였다. 간단히 말해서 Y는 그에게 차갑고 멀어지고 싶은 낡은 행성 이니셜이었다.-(91~93쪽)쪽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끝내 찾을 수 없는 몇 개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인생은 생각이 있는 놈이기라도 한 듯 종종 숨겨진 현실을 일깨워 주곤 한다. 문제는 그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
(…) 이건 제 팔에 스스로 칼을 꽂은 자의 비명이 가득한 기록. 스스로 그 비명을 즐기는 자의 기록일 뿐이었다. 온몸의 수분이 말라버린 듯, 무릎이 입 안이 어깨가 눈알이 파삭거리며 함부로 발굴된 미라처럼 한순간 삭아 내렸다.
그 밤부터 죽은 숙주 속에서 살아가는 에일리언처럼 가려움이 유선의 몸속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96~97쪽)쪽

인생은 당신이 공부한 교과서와는 다른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두껍다 한들 몇 권의 의학 서적으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전부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아요.
(127쪽) "…밤이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살의 충동을 이기기 위해 글을 쓴다고요. 존재와 창작의 고뇌 때문에 그는 안개 낀 새벽의 강가로 달려간 게 아닐까요."

-(101쪽)쪽

사람은 모든 불행이 자신을 비껴갈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그런 열등한 운명의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란 결코 나나 내 주위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결국은 확률의 문제일 뿐이라는 걸 모르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에 대해 고통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 그러므로 긴 고통의 이면에는 부끄럽다는 느낌이 포함된다. 지상의 삶에 무능한 인간이라는.-(155쪽)쪽

"난 누구에게도 어린 시절의 내 행복하지 못했던 날들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 없어.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긴 하지만 가까이 하려 하진 않아.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의 밝고 빛나는 기운을 훔쳐가거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걸 알아. 피하는 거지."-(185쪽)쪽

"…살면서 서로 주고받는 폭력을 낱낱이 드러낸다면 그 공포감 때문에 지레 죽어버릴걸. 이 바닥에서 살아나가려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견뎌내야 하는 거야."
(…) 만약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자신의 앞에 놓인 어떤 사건이 나머지 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갈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럴까. 누구든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지구의 자전축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대개 자신의 운명에 결정적인 일일수록 그것에 대해 전혀 무력하다. 확실한 것은 없다.
나는 물어보지 못할 것이며 물어보지 않을 것이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기억의 회로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까지다.-(193~194쪽)쪽

"넌 언젠가 개미를 닮고 싶다고 말했지. 그들은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다고. 패배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지난 시간의 일로 상처받지도 않는다고. 개미를 닮고 싶은 네가 나쁜 게 아냐. 널 개미를 닮고 싶도록 만든 누군가가 있었어."-(198쪽)쪽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의 한 컷에서 특별한 의미를 읽어낸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
"… 그저 찍고 또 찍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떤 불꽃같은 장면이 나와 주리라 기다리면서. 우리 업계에서는 그걸 ‘야마 신’ 이라고 부르는데. 살인, 폭력, 배신, 뭐 그런 거 말고도 지독히 일상적인 삶의 풍경 그 자체가 전율을 주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
"인정받는 것과 지속할 수 있는 건 다른 문제거든요. 내가 원하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지속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돈 문제죠. 이런 작품이야 아르바이트 죽자고 해서 모든 돈으로 어떻게 되는데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면 액수의 차원이 달라지니까. 파워를 가진 쪽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그런 고민이 있어요. 우선 시작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끌려들어 가서는 작가적 욕망과 자본의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딪치게 되는 거죠."-(215~218쪽)쪽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로 그믐도 되고, 그런 거 같아요."-(243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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