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연인』을 읽지 못했다. 대신 덜 부담(?)스럽게 느껴진 『동네 공원』과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읽었다. 짧지만 긴 호흡으로 읽게된 소설이다.여전히 '연인'이 망설여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화에 대한 잔상이 너무 강해서.일수도 있겠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끝내 리뷰로 남기지 못했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만, 도저히 독후감으로 남길수 없어서, 한줄평 정도 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기억이 있다.(세세한 줄거리는 벌써...)


"보통과 빠르기의 간극, 그 틈새를 채우려던 '사랑'이란 함정에 길을 잃기보다는, 두 속도 사이에서 위태롭게 살아갈 운명일지도~"


뒤라스를 읽으며 나는 균열과 닮은 무언가를 이미 한 줄로 적어두었던 셈이다. 그래서 『나를 균열내기』라는 제목이 반가웠다. 그런 이유(?)로 뒤라스 편을 읽다가 『태평양을 막는 제방』이 유독 읽고 싶어진 것 같다.(이 소설말고도 언급된 작품들은 있었지만) 왠지 뒤라스 소설이 시작되는 지점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평양을 막으려는 여자와 그가 쌓은 제방을 매번 무너뜨리는 바다. 내게는 이 이야기가 하나의 신화 정확히는 실패한 신화처럼 읽힌다. 이렇게 실패한 신화는 우리의 삶에 두 가지 방식으로 남는다.우리를 괴롭히거나 우리를 형성하거나 뒤라스에게는 양쪽 다였던 듯하다.어머니와 바다는 평생 그를 괴롭혔고 또 그를 형성했다.어머니와 바다가 없었다면 그 둘의 광기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뒤라스의 문학이 존재했을까. 오해는 없길 바란다. 뒤라스의 문학을 만든 것은 광기를 응시했던 그의 시선이지 광기 그 자체는 아니다"/18쪽


영화로 본 '연인' 속 엄마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오버랩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나를 균열내기>에서 언급된 소설 가운데 태평양...을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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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 - 가족 이야기
마이라 칼만 지음, 한정원 옮김 / 윌북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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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사물이 읽혀지는 순간이 나는 즐겁다. 언제부터 이런 발견(?)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추상과 초현주의 작품들을 애정하게 된 어느 시점으로 마냥 추정할 뿐. 책 표지를 열자 마음으로 내가 하던 생각을 읽었다.


"정물화와 실내화 속에는/ 과일이 담긴 그릇과 /꽃병 그리고 방 안 여기저기/ 흩어진 사물들 사이에/어느 정도 회한이 숨어 있어야 한다//  '깊은 후회' 부분 



그림에세인줄로만 알았던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냥 가볍게 넘겨볼 그림에세이가 아니었던 거다. 물론 그림에서 어떤 사물들이 보여지긴 한다. '아버지와의 저녁식사'에서 '아버지'란 단어를 보자마자 시선이 그림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그런데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톨스토이의 수염에서도 그랬다. 수염 하나에 인생의 고민이 이렇게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타인의 이야기에서 조차 찰나처럼 지나가는 묘한 전율.난해하다고 생각한 말러와 카프카의 모습을 상싱하는 이미지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보면서는 슬프지 않았는데, 화려한 꽃들이 담긴 화병을 보면서는 오히려 눈물이 살짝 나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느낌이었다. 매번 슬픔 속으로만 침잠하지는 않는 느낌.

그런데 진짜 놀라웠던 건 따로 있었다. 남들의 이야기에 웃고 울다 보니, 어느새 인생에 대해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물들 사이에 회한이 숨어 있어야 한다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작가는 그림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슬픔 속에 숨은 행간을 찾아 보면 눈물만 보이지는 않을 거라고,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던 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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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1
크리스타 볼프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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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남긴 몇 줄의 기록 속에서 카산드라는 예언자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녀가 왜 예언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나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를 읽으며 알았다. 그녀가 왜 예언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물론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신화를 여성의 시선으로 상상한 결과였기에 가능한 스토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카산드라는 전쟁을 증언하는 사람이자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예언자라는 의미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볼프의 카산드라가 가진 힘은 신비로운 능력이라기보다, 남들이 보지 않으려는 현실을 똑바로 보는 용기에 가깝다.

바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그리스와 트로이의 싸움만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폴론과 아가멤논이 카산드라에게 한 일도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아폴론은 그녀를 뜻대로 하지 못하게 되자, 그녀의 말에서 힘을 빼앗았다. 아가멤논은 그녀를 전리품으로 삼아 자기 소유로 끌고 갔다. 이것은 분명 한 사람의 몸과 목소리를 빼앗으려는 공격이라고 본다.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묻는다. 왜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라고. 


신화 속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카산드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사람들은 진실에 귀를 막는다는 사실을 알았고,그래서 카산드라 같은 사람이 또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아무도 충고를 듣지 않으려 할 때에도 누군가는 말해야, 진실은 사라지지 않고 남을 수 있을 테니까.카산드라의 말은 트로이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말했기에, 그 전쟁이 영웅들의 영광이 아니라 거짓과 죽음이었다는 기억이 남게 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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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아주면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겠다고 했다. 이에 동의한 카산드라는 예언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녀는 아폴론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의 아이를 낳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폴론은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게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단지 "공허한" 또는 "믿을 수 없는 말" 지껄이는 "예언자가 되어버린 것이다(...)"/166쪽









언젠가는 읽게 되는 날이 오겠지 싶은 마음에 선물로 받아 놓았던 <그리스 비극>을 마침내(?) 읽게 되는 날이 왔다. 여러 그리스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손이 잘 가지지 않았었는데 '카산드라'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스 비극>을 꺼내 보았다. 내 생각대로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그리스 작품은 두 편 정도인 듯하다. 그리고 내가 잠깐 엘렉트라와 카산드라를 혼동했던 이유가 아가멤논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스 비극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만나는 것도 재미나게 읽을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을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를 읽으면서 알았다.


"이제 나는 신이 정해준 운명을 이해했다. 그대는 진리를 말하지만 아무도 그대를 믿지 않으리라. 마땅히 내 말을 믿어야 하지만 아무것도 믿지 않았기에 나를 믿을 수 없었던 아무개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는 그 아무개가 여기 서 있었다.

나는 아폴론 신을 저주했다" /182쪽









신이든 인간남자였든, 자신을 범한 이의 아이를 낳고 싶은 여자사람이 있을까... 아이러니한 건 아폴론의 저주(?)로 카산드라의 예언을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지만, 바로 그 지점이 카산드라가 존재한 이유가 아니였을까 생각했다. 전쟁을 증언하고, 끝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자.. 인간은 애초에 진실을 말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하는 마음이 있지 않던가.. 그녀의 충고를 듣게 된다면 지금 세상이 전쟁으로 고통 받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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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 씨의 불안
니콜라 바랄 지음, 김모 옮김, 페르난두 페소아 / 이숲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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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다시 읽으면서,페소아의 책을 이번에는 진짜 읽어봐야 겠다 다짐했다.클래식클라우드 시리즈에서 페소아 선생을 만났을 때도, 이번에는 꼭.. <불안의 서>를 읽겠노라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그런데 아직까지 읽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손이 가는 페이지에 잠깐 머문 적은 있다. 그러니까 완독 하지는 못했지만, 전혀 읽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리고 시집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를 읽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려웠지만, 순간순간 공감했던 시들이 있어서 뿌듯한 마음으로 갈무리했다는 독후감이 있어 어찌나 반갑던지...



'수많은 이름'을 가진 작가라는 벽에 마침내 균열의 츰이 생긴 것 같은 기분으로 읽었다. 그동안 페소아 책이 힘들었던 건 그가 만들어낸 문장보다 그의 이름이 수십 개나 된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안에도 많은 내가 살고 있지 않은가? 페소아는 그 수많은 이름을 불러주고 세상 밖으로 꺼내놓은 것이 아닐까.그리고 나는 비로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페소아의 입을 빌리자면 자신을 숨겨둘 껍질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역설적으로 살기 위해(책에서는 불안으로 표현되는) 이명을 만들어 숨을 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누군가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다 이네 침묵한다. 반쯤 잠든 상태 찾지 않고도 들을 때만 그 목소리는 희망을 속삭인다. 잠든 아이처럼 우리는 그 소리에 미소 짓는다/44쪽


이제 <불안의 서>를 한달음에 완독하기보다 마음이 복닥거릴 때마다 곁에 두고 펼쳐보며 위안을 얻을 생각이다. 페소아가 불안을 문학적 예술로 만들어낸 덕분에 '불안' 이란 단어가 이제는 마냥 무겁고 두려운 감정으로만 느껴지진 않을 것 같다. 페소아가 아닌 다른 이의 시선으로 페소아를 만난 덕분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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