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공격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3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빛소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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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공격'이란 단어는 '전쟁'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방앗간 공격' 이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벌어진 가운데 요새(?)가 되어 버린 방앗간. 졸라 선생은 묻는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역자 후기를 읽으면서,'방앗간 공격'을 쓰게 된 동기를 알았다.


'방앗간 공격'을 포함해서 총 다섯 편이 실렸다. 서로 다른  이야기인 동시에 '전쟁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관통한다. '방앗간 공격' 처럼 실질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사랑에 몸부림 치는 전쟁, 삶이 곧 전투인 전쟁의 형태까지... 굳이 이렇게 연결 지어 생각할 의도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갔을 뿐이다.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가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전쟁이야기 인줄 알았으나(물론 전쟁 상황도 그려진다..) 전쟁보다 사람 사이의 전쟁이 더 눈에 들어온 탓이다. 에밀 졸라의 단편집에서도 실질적인 전쟁이야기는 '방앗간 공격' 뿐이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졸라의 또 다른 장편 <패주>가 떠올랐는데, 역자의 후기에서 그에 관한 설명을 읽었다.(곧 '패주'를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을 죽게 만드는 전쟁이야기 '방앗간 공격' 그런데 총을 겨누지 않은 전쟁 같은 삶은 더 잔혹하지 않은가 싶다. 미쿨랭 영감의 폭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정에서의 폭력이 전쟁이란 괴물로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의 죽음이 인과응보로 끝나게 된 것 같아 통쾌함 마음도 들었지만,나이스 미쿨랭은 투안과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다섯 편 가운데 가장 덜 힘들었던 이야기는 '샤브르 씨의 조개'와 '올리비에 베카유의 죽음'이었다. 물론 내용이 마냥 웃음짓게 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뤄지는 전쟁 가운데 가장 야비한 것이 불륜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장면은 좀 씁쓸했던 샤브르...( 저들 나름의 그럴만한 이유는 분명 있었지만..)사랑이 전쟁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슬픔이 다시 행복으로 가기 위해 죽음의 시간과 마주해야 한다면, 가슴 쿵..하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라는 걸 명쾌하게 들려준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탄핵의 시간을 지나고 있지 않았다면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과, 세잔을 알퐁스 도데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히 흥미로웠을 이야기 '수르디 부인'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읽게 된 기분이다. 맥베스 부인이 연상된 거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화가 남편 페르디낭을 잠식해 버리는 여인..졸라 선생도 그녀를 '괴물'이라고 묘사하지 않던가.. "그가 보기에는 아델이 페르디낭을 먹어 치웠다.끝이었다"/227쪽 괴물은 그를 결국..잡아 먹었다.(소리소문없이..)  우리는 왜 전쟁을 하는 걸까 라는 질문이 도돌이표처럼 따라왔다. 권력을 갖고 싶은 자,야망을 품은 자들에게 전쟁은 필연적이란 사실. 누군가를 죽이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전쟁은 훨씬 더 무섭다.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말이 모순인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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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9
이디스 올리비어 지음, 김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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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목소리가 사그라지고 다른 존재와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로"/15쪽



소설은,엄마의 장례식이 막 끝난 상황으로 시작된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소환된 건, 그녀가 온전히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감정 상태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럴수 있는 상황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다.무튼 뫼르소가 엄마가 죽고 나서,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상황을,애거사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둘이 만나게 되었다면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까..혼자 잠깐 상상해봤다.엄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그녀가 <이방인>을 읽었다면,어릴적 자신이 만들어 냈던 상상의 인물을 가져오지 않았을지도. ...현실의 시간으로 그녀는 돌아오지 못했다. 상실의 기억을 찾아(?)냈고..그녀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진짜 목소리가 아닌,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로.. 적어도 처음 읽는 (지금의) 나는 그렇게 밖에 이해되지가 않는다. '공황' 이란 단어가 언급되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애거사는 모호하게 대답했다.공황이 서서히 밀려왔다.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클러리사가 점점 더 수습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28쪽


엄마와 둘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딱히 엄마와 사이가 좋았던 것 같지도 않았다는 그녀의 고백.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과거속 아이는, 애거서가 만들어낸 또 다른 애거사가 아니였을까... 숨은 행간을 해석하기가 벅차서,그렇게 밖에 이해되지 않았고,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생아'는 결국 자신을 향한 말은 아니였을까? 어릴적 그녀가 의유부단하지 않았다면, 현재를 살아내려고 노력했다면,엄마의 죽음이란 상실을 또 다른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생아'라는 단어가 그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였을까? 데이비드의 존재는 그래서 또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던 것 같다.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애거사는 상실을 극복해내지 못한 인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상실을 잘 극복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시절이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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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작가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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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를 읽으면서,로버트 해리스 작가가 궁금해졌다.나만 몰랐던, 이미 유명한 작가였다는 사실은 이제 놀랍지 않다. 차근차근 찾아 읽어가면 되니까. 제목에서 이미 상상할 수 있는 느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금했다. 절묘한 타이밍에 정치인들의 자서전 회고록..이 알라딘에서 검색되는 것도 재미난 우연이다 싶었고. 앞서 '콘클라베'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을 뭔가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작가에게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유령작가라는 위치가 출판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내 이름을 전면에 드러낼 수 없는 작가의 고통..작가라고 말할수 있는걸까 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뛰어 넘는(?) 소설이었다.그런데 탄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상황이라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부인을 만난 건 그분께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부인이야말로 진정한 정치 열정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죠.게다가 지식도 있고 당의 배분도 있고요.각하께서 전진할 목표를 제공해주신 게 부인일 겁니다(...)"/240쪽


"(...) 그는 애덤이 아내의 조언 없이는 어느 것도 결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애덤은 총명한 정치 세일즈맨에 불과했고 전략가는 늘 루스였다(...)"/402쪽



퇴직한 정치인의 회고록을 쓰고 있던 유령작가가 사망했다.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의구심이 드는 건 뻔하다. 맥아라의 죽음에 의심을 품게 된 현재의 유령작가는 질문하게 된다. 물론 질문을 해서도,애덤에 대한 어떤 내용도 비밀로 함구해야 한다는 건 불문율이다. 그런데 ..유령작가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걸 알게 된다(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가 맥아라를 죽였는가? 보다 더 흥미를 끈 건 정치매커니즘이었다.물론, 탄핵의 시간을 거치고 있지 않다면 총명한 정치인이라 생각했을 거다.탄핵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지 않았다면 루스가 전략가라는 말에 소설적 상상력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설로 누군가 쓰게 된다면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상상했는데...<유령작가>에서 그런 모습을 만난 것 같다.


"인터넷이 편집증 환자의 꿈을 실현해주는 쓰레기 공장에 게걸 들린 잡식성 귀신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인터넷에선 이들 정보가 푸른 리본의 하이퍼링크로 묶여 하나의 거대한 음모를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편집증환자란 온갖 사실로 넘쳐나는 사람'이라는 옛말도 있다"/295쪽


유령작가의 고통은 단순히,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는 정체성의 한계에만 있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맥아라의 죽음은 그래서 너무 예상되는 바였는데, 마지막의 반전이 그럴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섬뜩했다. 바로 이런 것이 음모론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그런데 정말 루스..는 그런 야망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확증이 음모론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걸 잘 알면서...이 와중에 출판사는 베스트샐러를 꿈꾼다.


"불법적인 행동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추는 건 도덕적중립이 될 수 없어요.범죄행위죠"/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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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아르노 네바슈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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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브랑쿠시의 작품을 만났지만, 예술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 유명한 '새' 사건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로댕 밑에서 작업을 했고, 발자크 동상을 만드는데 손을 거들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물론 '이것이 새입니까'에서 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런데 커다란 발자크 동상 자체보다, 이 작품이 협업(?)으로 이뤄졌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면, 온전히 로댕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따라 올 수도 있겠다.


  뒤샹을 통해 미국 브루머갤러리에서 브랑쿠시의 작품이 전시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미롭다는 말을 하기에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흥미진진하다. 작품이 배에서 내려지고, 세관원들이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걸까 궁금했는데. 바로 '세금'이 문제였다. 예술작품이 아닌,산업용 물품이라고 규정해버린 탓이다. 어디에서도 '새'를 떠올릴 법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해서 이 작품으로 인해 재판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 봐도 새를 떠올렸다면,애초에 이런 재판은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그러나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청동을 보면서,'공간 속의 새'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이제 질문은 이것은 예술인가, 산업용 물품인가..에서 예술작품인 이유를 밝혀야 한다. 우선 온전히 예술가의 손으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는가, 복제품이 있는가 없는가,그런데 청동을 주조하는 과정에서 예술가가 아닌 주조공이 했는가?연마기기가 사용되지는 않았는가를 따진다.브랑쿠시는 저들이 새에 대한 이해부터가 되어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나무 한 그루가 마치 새처럼 보인건, 나의 기분탓일수도 있겠지만..예술이란 무엇이다.라고 정의 내릴수 없는 거라 생각한 입장에서, 새처럼 보이지 않아서, 새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했다.심지어 재판부가 아닌, 예술가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내야 한다는 아이러니 제목 자체보다 예술 작품에 집중했다면 저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새다' 라는 명제를 사법부에서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한듯 하다. 다만 예술가에 대한 개념(?)에 입각하여, 브랑쿠시의 작품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새다' 라고 언급하기 보다 "본 법정은 이 물품이 면세 대상임을 판결합니다" 라고 집행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모든 마무리 작업은 제 손으로 했습니다.다른 모든 작업과 마찬가지로 연마 역시 제가 직접 했습니다. /연마기는 물론 그 어떤 기계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그냥 줄과 아주 고운 모래 종이로 청동을 닦았어요.점점 더 매끈해지도록 아주 오랫동안...아주 오랫동안요"/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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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영화 특별판) - 신의 선택을 받은 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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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덕분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맙게도 도서관에 <콘클라베>가 있어,빌려와 읽었다. 종교는 없지만, 콘클라베의 큰 의미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해 전 영화 '두교황'도 재미나게 보았더랬다. 소설은 서문에,허구라고 밝혔지만,카톨릭에 대한 이해도가 충분하지 않은 입장에서도 허구(?)로 읽어낼 수 없는 '의심'과 질문의 지점들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탄핵의 시간을 지나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무튼,무엇이 되었든, '권력'앞에서는 음모와,배신이 보인다. 그러니까 진실이란 것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거다. 단순히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과정을 문화사시선으로 그려냈다면 흥미가 덜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긴장감도 느껴졌다. 권력이란 화두를 부여잡고 읽었더니,여러 퍼즐들이 보인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교황이 정말 되고 싶은 자와,그렇지 않은자,양심,진실,추악한 비리 등등..그런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신기한(?)경험을 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냥 자연스럽게 찾아온 질문이었다. 어쩌면 나의 무지덕분에 찾아온 의외의 기쁨일수도 있겠다. 남자만이 교황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콘클라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녀들의 역활이 너무 소모품처럼 보이게 된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읽다보니, 카톨릭 국가에서 여전히 낙태문제가 뜨거운 감자인 이유에는, 여성을 온전히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작용하는 건 아닐까 생명존중이란 이름 아래 숨겨진 그림자 같은 "여자 문제라면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다.대화하지 말라.단 한 마디도 이 세상에 여자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아무리 가까운 친구사이라 해도,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절대 상의도 하지 말라. 이 진리야말로 내 성직 초기에 가장 심오한 불변의 가르침이었다"/174~175쪽 로멜리의 종교적인 의지조차,여성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낙태와 성추행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소설은 다소 작위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처음 부터 내가 했던 질문에 응답 받은 기분이 들어서 혼자 살짝 전율했더랬다. 작가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이들에게 짜릿한 환타지를 선물해 준 것 같은 기분..현실에서는 요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소설에서라도 가능하게 만들어 보자... 콘클라베를 읽는 동안 카톨릭 내 여성인권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지난친 반전이라 생각했겠지만, 소설이라 가능했을 교황 선출 결과에 대한 결말은 2% 아쉬운 통쾌함이 있었다. 영화를 좀더 재미있게 보고 싶어 읽었는데, 결말을 알아버렸으니, 긴장감은 사라졌다. 대신 콘클라베 진행과정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로버트해리스 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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