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옹! 에에에옹!"
아까처럼 잦아들겠거니 하며 다시 눈을 감아 보았지만, 새끼고양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옆집에서도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려가 봐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믿기지 않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네!!! 내 야구 빠따 어디 갔어! 내 이 도둑고양이 새끼들 다 잡아 죽여버릴라니!"
자리에서 90도로 로보트처럼 삐끄덕 하고 튕겨져 일어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엌에 씻어 놓은 햇반 그릇 하나와 간식 캔을 호주머니에 넣자마자 문을 잠그고 파자마 바람으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며 새끼고양이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건물 1층 주차장에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오도카니 건물 현관을 등지고 앉아 울고 있었다.
... 순간 묘하게 뒷덜미가 서늘했다. 이상한 느낌에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얼마쯤 떨어져 있는 어둠 속에서 아저씨 하나가 비틀비틀 약주를 거하게 한 모양새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온."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을 말과 판이하게도 다르게 아저씨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물체가 나를 소리 없이 경악케 했다.
"나비야. 나비 시키. 이 도둑괭이 새키. 어디갔어. 이리 나와 봐!"
아저씨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붉은색 벽돌 한 개였다.
인연과 묘연이 엉키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잠시 맡아만 봤다가 입양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양이 넷을 맡은 것이 올해 5월이 되면 이제 채 2년이다. 엄마 고양이 하나와 새끼 셋, 그중 엄마 고양이는 입양처가 생겨 중성화 수술을 한 다음 보냈고, 새끼 셋은 지금도 나와 함께 지낸다. 얼마 전 동물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고 몸무게를 재어보니 그나마 제일 큰 수놈 셜록이 4킬로그램, 암컷 칼리가 3.6킬로, 님부스가 3.1킬로그램.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난다. 세 마리의 이름을 지었다고 했을 때 지인 하나가 '너 그러다가 못보낸다'라고 한 말대로, 임시 보호 기간이 끝나고도 나는 셋을 보내지 않고 데리고 있기로 했다. 그래서 잠시 여행을 결심했을 때 셋을 함께 케이지에 넣어 같이 여행을 다닌 다음부터는 아예 여행을 포기했다.
포기한 것은 아래와 같다.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포기한 것=
고양이 털 안묻은 검정 옷
고양이 털 안묻은 흰색 옷
여행
외박
반면 삼남매와 함께 살면서 하게 된 일들은 아래와 같다.
=내가 삼남매 칼리, 셜록, 님부스와 함께 살면서 하게 된 일=
고양이 화장실 청소(매일 2회, 화장실 살균소독 주 1회)
집안 환기(매일)
바닥 청소(진공청소기, 진드기 퇴치제 살포 주 2회)
캣사료, 캣 모래 구입
고양이용 음식(주로 닭가슴살, 새우, 가끔씩 연어) 상비
귀여우면 됐지 뭘 더 바래?-김칼리, 1년 10개월, 암컷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냥?-셜록 딩글베리, 님부스 이천(1년 10개월령, 수컷, 암컷)
아무리 보아도 득보다 실이 많은 이 관계인데, 이들이 눈을 맞추며 내게 말을 걸고, 침대에서 곁을 파고들고, 내게 놀자고 장난감을 물고 올 때면 예상치 못한 만족감이 스민다. 이들은 간섭하지 않고 공감한다. 종종 내가 집을 오랜 시간 비우면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린다. 고양이는 장소를 섬길 뿐, 주인을 모른다니. 개처럼 충성스럽지도, 머리가 좋지도 않다니. 원래 길에서 사니까 버리고 가도 된다니, 역시 '신비롭다'는 말의 어원은 '모른다', 내지는 '관심 없다'가 아닐까.
윤소해의 '커피 타는 고양이'는 고양이에 관심 없으면 지나치기 쉬운 책이다. 책의 언어는 뜨겁고 종종 집사의 마음이 글의 리듬을 앞질러가서 정돈되지 않은 듯 보일 수도 있다. 어쩌랴. 지나친 애정은 불출산 맑은 공기를 불러올 수밖에. 어쩌면 전의 고양이 키우는 집사들과 2017년 지금 고양이 키우는 집사들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1990년대 초반 정도만 하여도 고양이를 돌볼 수 있는 동물병원도 드물었고, 길고양이를 보살피는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동물 보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나만 빼고 다들 고양이 있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이 키우고, 많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고양이들 42마리와 윤소해가 만든 풍경이 '커피 타는 고양이'라는 캣카페이다.
길고양이들과 유기된 고양이들을 구조하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순간이 있다. 도둑고양이에게 또 밥을 주면 망신당하게 할테니 각오하라거나 죽여버리겠다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듣는 순간도 아니다. 오랜 시간 밥을 챙겨주며 멀리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가 누군가의 잔인함과 서슬 퍼런 외면 때문에 보란 듯 처참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아니다.
가난한 살림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병원비에 허덕이며 비어있는 통장 잔고를 매번 확인하는 순간도, 가족과 친구에게 왜 그러고 사냐며 한심하다는 핀잔을 듣는 순간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이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는 걸, 내가 이 아이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직감하는 그 순간이다.
왜 하필 고양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까. 그저 나 자신보다 더 작고 약한 존재, 자신을 챙길 수 없는 존재를 보살피는데 왜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 라는 질문에 '그럼 당신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에 반대합니까?'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최근에는 '너는 왜 그렇게 도둑고양이 밥을 주고 다녀?'라는 질문에 '그러면 너는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책임질 수 없으면서 모든 생명을 떠안고 데려와 내버려두는 것이 애니멀 호더라면, 나는, 혹은 저자 윤소해는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어떤 친구는 차라리 독거노인이나 기아난민을 도우라는 말을 들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왜 틀린 일,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보통 죄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왜 약한 존재를 보살피는 사람에게는 그가 한 일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고 종용할까.
지하철역 부근에서 성인 남자에게 빗자루로 두들겨 맞다가, 꽁꽁 묶은 쓰레기 봉지 속에 버려져서, 이민 간다고, 여행 간다고, 결혼한다고, 들였다가 알레르기가 있거나 다른 이유로, 임신해서, 줍냥했다가 부모님이 반대해서, 싫증 나서.
42마리의 사연이자 흔히 접하는 사유.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한 나라의 국격이 보인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저자의 희망은 그래서 카페 문을 닫는 것이다. 더는 버려지는 고양이가 없어서 카페 문을 닫는 것. 자생하기 위해 영업하는 곳. 생명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을, 무지가 무관심으로, 혹은 폭력으로 번지는 것에 반대하는 곳.
거대한 담론보다 한 마리의 고양이. 커피 타는 고양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로 언젠가의 쉼터를 준비하고 싶다. 동물이 가족이라고 하면 이해 못 하는 시선이 있어도 좋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아직도 도둑고양이가 표준 국어로 등재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저자가 후기에 썼듯이, '어느 날 불현듯 만난 고양이가 지금의 성격과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과 이유가 궁금해지고 그 이유를 알게 되거나 느끼게 되는 때. 바로 그 순간 내가 '움직일 이유'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반드시 받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왜 카페를 하시는 거에요? 이렇게 힘든데."
그러면 한참 부연 설명을 들려준 뒤 마지막에 대답한다.
"카페를 그만두기 위해서 카페를 합니다."
사람들은 고양이 카페에 대한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양이 카페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은 거의 대부분 품종묘이다. 그 아이들은 숍에서 사왔거나(나는 이 표현을 굉장히 싫어한다. 숍엔느 어떻게 아이들이 오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가정에서 분양받아 데려왔거나.
애초에 고양이 카페의 존재 자체가 슬픈 일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고양이들을 제대로 케어한다면 고양이 카페는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다 빚만 떠안고 망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카페가 영업을 종료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많든 적든 카페의 고양이들은 당장 갈 곳이 없어진다. 품종묘라 하여도 몇 개월 몇 년 동안 입양처가 구해지지 않는 것이 태반인데 하루아침에 그 많은 고양이들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더 이상 버려지는 고양이들이 없어서 카페 문을 닫는 것. 이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