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했던 겨자색 재킷이 사라지고 나서는, 바람 없이 서늘한 그곳의 공기가 사라지고 나서는, 무인 순환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문을 나섰던 그 이후 느꼈던 마음의 소용돌이가 우박처럼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일주일 전 오늘 우리는 필레 미뇽을 굽고 내가 가진 값비싼 포도주를 꺼내 환송회를 벌였다. 웃고 떠들고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다 잠들었고 그로부터 이틀 후, 나는 공항에서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그는 천천히 사라졌고 나는 천천히 무너졌다. 사람들 그림자가 허깨비 같았고 사방이 텅 빈 것만 같았다. 지독한 환지통이었다.




 햇빛을 한가득 받으며 산책하기.

 그의 것까지 같이 커피를 주문하기. 

 군중 속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LGBT  퍼레이드가 이곳에서는 꽤 대중적인 행사이다) 구경.  

 유람선 타기. 

 집에서 스테이크 구워먹기. 

 아껴둔 와인을 따기. 

 항의편지 쓰기. 

 관광명소 둘러보기. 

 동양사 박물관 가기. 

 등산. 

 지도를 보고 길 찾기. 


 


 그 여름, 이 여름, 


 나는 그를 위한답시고 참 안 하던 일을 많이 했다. 그는 나의 가장 절친한 벗이자 나의 소중한 손님이었으니, 그가 보고 싶은 걸 많이 보여주고, 먹고 싶어 하는 걸 많이 차려주고, 내 집에서 머무는 동안 최대한 편안히 머물렀으면 하고 바랐다. 내 마음이 부담되었는지 그는 내 집에 오고 난 딱 사흘 후부터 일주일간을 앓아누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먹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그를 내 고양이들만 무심한듯 살뜰하게 보살폈다. 그가 기운을 차린 후부터는 어디에 가고 싶으냐, 무엇을 보고 싶으냐, 먹고 싶은 것이 없냐고 닦달해댔고 일어난 첫날 그는 육개장이라고 말했다. 쇠고기를 삶아서 알맞게 뜯어 넣고, 얼큰하게 갖은 양념을 하여 끓인 국. 그는 한 숟갈 뜨고 몸을 회복했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아스라한 모래바람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서걱서걱 불었다. 예쁜 거리도 보여주고 싶었고 내가 즐겨가는 가게의 커피도 맛보게 하고 싶었다. 지나고 나니 모두가 다 내 욕심이었던 것들.




 "무슨 술 마실까? 너 맥주 좋아하지?"

 "맥주는 사귀던 걔가 좋아하던 거야."

 "너는 걔 이야기 빼면 남는 게 뭐야?"

 "없는 것 같아."

 



 나는 이럴 때 잘 스미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그저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을 뿐.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고양이 봐라! 너무 예쁘지 않냐? 나날이 귀여움을 갱신한다! 이런 나의 말에 지청구처럼 '같이 가자! 불출산!' 이라고 말해주는 그의 재주가 부러웠다. 마음이 텅 비었다는 말에 난 머리까지 텅 빈 것 같다는 답을 했다.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 어리고 여리던, 교복을 입고 같은 반 교실 책상에 앉아있었던 너와 내가 이렇게 한 달을 같이 보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당시에도, 지금에도 스미는 재주는 없는 사람인 채로 남았을 뿐, 동동 뜨다 보니 여기까지 떠밀려 와버렸다고 서로 보며 웃었다. 





 산책, 커피 주문. 비용 대 효율 따져보기. 헤어진 사람 이야기 하기. 서로에 대해 이야기 하기.


 "집 안에만 일주일 있었는데 핏빛을 찬 손목과 비교해보니 이렇게 살갗이 탔어." 


 "네가 주문해 볼래? 외국 나오면 이런 게 기억에 남더라."

 "그건 너 같은 인간이나 해당하는 말이고, 난 이 나라 말 못해. 네가 주문해."

 "사이즈는? 얼음 양은? 샷은 몇 개? 우유는 무슨 종류로 해?"

 "나한테 왜 그런 걸 다 물어보냐! 저기 메뉴판에 있는 대로 할래! 난 서브웨이 주문도 귀찮아."


 "저기 바다 건너 내가 구경해 보고 싶은 데가 있어!"

 "가볼래? 기왕 왔으니까."

 "입장권이 생각보다 비싸. 그 돈 주고 왜 거기에 가냐!"

 "가보고 싶었다면서!"

 "입장권 가격 알기 전 이야기지!"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 너와 하는 일들, 좋은 고기를 사와서 집에서 구워 먹기, 좋은 와인을 곁들이기, 함께 밤늦게까지 이야기하기는 전부 다 헤어진 걔와 하고 싶었던 것들이야."

 

 나는 그에게 이런 답을 한 적이 있다.


 "너와 나는 좋아하는 것도, 취향도, 성격도,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나는 네가 하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어. 아마 너도 그렇겠지."



  

  그가 내 집에 머무는 동안의 중간 즈음, 우리는 숲을 산책했다. 등산이라고 하기도, 산책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무엇을 함께 했다. 산장 초입에서 방문객 틈에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주문한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 내가 말했다.

 "나도 이런 데서 커피 내리고 싶어."

 산장, 사람들이 한 번 왔다가는 곳. 공기는 차갑고 바람은 서늘한 곳. 어쩌면 곰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곳.

 그러자 그가 깊이 수긍하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여기서 커피 내리고 싶다. 물 반 고기 반이네."




 산에 가면 사람이 착해진다는데 몇 년에 한 번꼴로 산에 왔으니 착하지 않은 날이 태반일 것이다. 고소공포로 손에 땀이 축축해진 내 손을 잡아주고, 아래를 보지 말고 자기 얼굴을 보라고 말해주고, 부지런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를 보다 생각했다. 아마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높은 산중에서 '저 앞에 먼저 가던 사람 중 하나 당뇨 걸렸나보다. 서울에서 유명한 병원은 어디라는데....' 하던 그의 말이 쓸데없이 떠오를 것 같다고. 

 꼭,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블루'에서 교통사고의 순간에 '자, 이제 딸꾹질을 해 봐'라고 말하던 남자처럼. 그래서 그 순간이 왔을 때, 이상하게 남은 것은 그가 남긴 낱말 몇 조각, 경쾌한 억양,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이, 집사가 왜 이렇게 늦었나?'하며 고양이 셜록의 앞발을 잡고 있던 그의 모습 같은 것. 나이가 들면서 이별이 자주 다가온다. 오늘 헤어지면서도 겉으로 인사하지 않고 마음이 물러나곤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가 떠난 다음, 그는 내 방에 물건 하나 남겨두지 않고 흡사 여기 다녀가지 않은 듯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다가 세면대의 가그린 병 하나를 보고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제목은 김행숙 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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