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기억 속으로 매드 픽션 클럽
엘리자베스 헤인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스릴러 :

 

 

이 호칭은 영화에서 비롯되어 연극·방송·소설 등에서도 쓰인다. 넓은 의미에서의 서스펜스드라마의 일종으로 요괴·괴기극, 범죄·탐정극 등에 많으나 공포심리만 묘사된다면 구태여 이를 장르에 넣을 필요는 없다. 공포감을 주는 쪽보다도 공포감을 느끼는 쪽이 빠져들어가는 과정 표현에 주체(主體)가 있다. -네이버 두산 백과

 

 

 

 일상적인 사건에서의 공포. 낯설게 보이는 어떤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스릴러는 그렇게 속삭인다. 그 안에는 연민과 성찰, 반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 알 수 없어서, 혹은 알기 때문에 인간은 '무섭다'고 말한다. 어떻게 될지는 알지만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일들. '어두운 기억 속으로'는 그런 감정에의 초대장이다.

 

 

 

강박과 불안. 장애와 극복. 아는 남자와 모르는 남자. 알 수 있는 일상과 모르는 사건.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다는 불안을 엘리자베스 헤인스는 스릴러의 외피와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으로 펼쳐 보인다. 4년 전의 여자와 4년 후의 여자는 다른 사람이다. 4년 전의 독자와 4년 후의 독자가 다른 사람이듯, 이 속에서 변함없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여자를 쫓는 '리' 밖에 없다. 법정에서 시작하여 현관문에서 끝난다. 현관문에서 이어지다가 낯선 벌판에서 끝난다. 흠집을 보고도 넘어가는 자의 오만함. 다른 차원의 사랑을 보이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완벽한 로맨스에서 시작해서 데이트 폭행으로 치닫고 한 사람의 세계를 부수는 것으로 전개된다.

 

 

 

 

 

 

데이트 강간을 피하기 위해 제시되는 방법으로는 첫째 평소 자기의사를 분명히 표현하는 태도를 지닐 것, 둘째 남성 우월인 태도를 지녔거나 상대의 행동과 생활을 지배하려는 남성, 신체적·언어적으로 공격적인 남성, 술을 지나치게 마시거나 술을 마신 후의 행동이 형편없는 남성과는 데이트하지 말 것, 셋째 상대를 잘 모를 경우 남성의 집에 가거나 자신의 집에 초대하지 말 것, 넷째 성관계를 갖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함께 숙박업소에 가지 말 것, 다섯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잘 모르는 곳에서는 데이트하지 말 것, 여섯째 상대를 잘 모르면 상대의 차를 이용하지 말 것, 일곱째 데이트를 할 때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말고, 자신의 술은 스스로 따라 마실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찾아본 데이트 강간의 정의 중 데이트강간을 피하는 지침.

 

 

 

 

 

 

 엘리자베스 헤인스는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자들이 왜 도망치지 않는지 생각하다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실제 그녀의 의문은 작품 속에서 캐시가 읊조린다. '그냥 뚜벅뚜벅 걸어나가면 되는데, 왜 그러지 않지?' 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그녀들이 하던 말을 떠올린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그다음 자신도 말한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고. 의사를 표현했지만 술을 마신 후 리를 막을 수가 없었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사랑에 빠졌으므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낯선 곳으로 가지 않았다. 이미 깊이 사귄 후 차를 타고 함께 나갔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에 있다. 분명 자신이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녀가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다른 친구와 연락을 하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느 순간 그녀의 방탕함,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시켰다는 책망이 될 때, 즉, 도덕적 기제가 다른 의미로 적용될 때 그녀는 길을 잃는다. 그녀는 'then'과 'now' 사이에 있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롯은 독자로 하여금 그녀가 무엇을 잃었는지에 주목하게 한다. 즉, 소설의 핵심 중 하나-궁금하게 만들기-를 다른 구조-낯설게 하기-를 통해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독자는 그녀가 무언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게 된다. 그 둘 사이의 간극. 지구와 달까지의 거리.

 

 

 

 

 OCD(OBSESSIVE COMPULSIVE DISORDER)가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 헤인스는 그녀가 현관문을, 창문을 몇 시간 동안 점검하고 살갗이 벗겨져 나갈 때까지 샤워도 아닌 샤워를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은 관찰력의 힘이다. 관찰이라 함은 곧 대상을 들여다보는 힘에서 비롯되는 것. 즉 이 모든 것은 허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 있는 일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는 일. 혹은 일어났음에도 부정하는 일.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여 머릿속을 장악하고 행동을 지배하는 일. 어쩌면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남자와 여자는 일종의 폭력을 데이트 상대에게 휘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배려와 존중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는지를 궁금해하는 독자를 위한 엘리자베스 헤인즈의 묘사. 상대방이 없는 빈집에 들어가는 일. 물건의 위치를 바꾸어 놓는 일. 상대에게 완전히 집중하는 일. 그것이 도를 넘는 일. 이것은 상대의 기분에 달린 일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그에게, 그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부당한 일을 참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한다고 하여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

 

 

 

 '어두운 기억 속으로'의 캐시가 한 일은 무엇일까? '리'를 만났다. 무언가 조금씩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움을 요청하고 거부하고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의사를 다시 표현하려고 했을 때, 그녀가 모든 것을 '다시' 하려고 했을 때 다른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네가 틀렸어, 그 사람의 세계는 단지 저 안에서만 존재해. 데이트 폭력이 데이트 강간으로. 만약, 생각해 본다. 그녀가 폭행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그저 그가 그녀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조금 조심하는 것 뿐이라고, 형용사와 부사가 가득한 비난 혹은 반대의 말을 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데이트 폭력을 겪는 여자는 폭행을 당하지 않고서는 주위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없을까. 길가다가 수시로 뒤돌아보고 현관문을 몇번이고 점검하고 전화번호를 바꾸어도 신체상의 손상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그저 기분의 문제에 그칠 수도 있지 않은가. 저문 날의 오후에서 박완서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서야 남편의 의처증에서 헤어난 여자의 이야기를 썼다. 십여년 전 한국의 고등법원에서는 평생 남편의 학대와 폭력에 시달려 남편을 고소한 여자에게 '백년해로 하시라'며 기각을 했다.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같은가. 이 폭력 앞에서 사람은 얼마나 허물어지고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러나 모든 여자가 착각하게 되는 일. 그것은 어쩌면 캐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역사-그녀에게 집중하지 않는 남자들을 만나는 것-에서 비롯된 정반합의 과정에서 리를 만났다면, 그 결말은 곧 스튜어트가 된다.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그 요약하지 않은 그 부분을 보면 리와 스튜어트, 곧 데이트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와 미친 것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정신과 의사 스튜어트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다른 이름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의 그 어느 부분도 나는 허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일부일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놀라운 묘사. 현실을 뛰어넘지 않는 객관화. 피해자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배려심. 가해자의 히스토리가 간과된 것이 아쉽지만(단순한 면이 없잖아 있다) 그의 논리를 조금씩 독자를 애태우며 보여주는 필체. 새로운 주제의 새로운 접근과 관찰이 눈부시다.

 

 

http://www.womensaid.org.uk/messages.asp?topicid=61635§ion=00010001000800210001

-Women's aid의 'into the darkest corner'관련 포스팅

 

 

Elias String Quartet live in Montpellier, France, 19th July 2010
Mendelssohn String Quartet op80, first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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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2-10-1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이 책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가 아니다..라는 것이 더 끔찍하죠.

Jeanne_Hebuterne 2012-10-19 09:1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정말.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 불필요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스테판 비알 지음, 이소영 옮김 / 홍시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어떤 책의 표지는 다른 책의 표지보다 아름다운지, 왜 어떤 회사의 휴대전화는 다른 회사의 제품보다 사용감이 좋은지, 왜 저 자동차는 다른 자동차보다 날렵한지 궁금했다.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아홉 가지 흉을 가리는 일일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고 마이클 잭슨의 성형처럼 다른 자아 소유의 문제일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디자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스스로 말한다. 동시에 홀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 묘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서로 취급받기도 하고 단순히 '예쁘게 만드는 것'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기술과 함께 혁신을 이룬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그 발전의 계단을 오르게 하는 원동력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독일 모든 국민에게 보급하기 위해 제작을 지시하여 만든 폭스바겐 비틀은 그 자체가 혁신이었다. 수용 불가능한 차체에 수용해야만 하는 모든 기술을 넣은, 엑스선을 투과했을 때 일 인치의 빈 공간도 없는 혁신은 디자인의 모든 단계가 정직하게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그 과정을 에코 불에서 강의하는 프랑스 철학자 스테판 비알은 세 가지 단계로 나눈다. 사람들의 필요를 관찰하는 단계, 실험 단계, 실행 단계.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고 아이디어로 만들면서 배운다. 구상은 결코 실현 '이전에' 오지 않고 실현 '이후에' 온다. 실행 단계에서 디자인은 능동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디자이너가 하는 선택에 모두가 관여하게 된다. 무엇을 구상했다 한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디자인의 영역에 있다. 모든 사물이 아니라 모든 것이. 디자인은 모든 역설과 현상의 총합이었다. 단지 공기같이 당연하게 느껴져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스테판 비알은 이 역설을 설명하고 디자인에 대해 고찰을 하기 위해 먼저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어원, 디자인의 역사를 이 책에서 설명한다. '구별되는 기호로 나타내다, 선으로 그리다, 가리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지금 생각하는 이 개념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태어나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고안되었으며 미국에서 구현되었다. 무엇이든 만들기 좋아했던 영국의 관리 헨리 콜이 '기능'과 '장식', '지능'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공업 생산 원칙을 확립하고 예술의 위대함과 기계의 능숙한 솜씨를 결합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국 공산 박람회(흔히 만국 박람회라고 일컬었다)를 개최한다. 그 후 윌리엄 모리스는 장식미술에 관해 '나는 내 삶의 물질적인 틀이 쾌적하고 아름다우며 너그럽기를 요구한다.' 라고 1884년의 저술에서 말하였고 독일에서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한 바우하우스가 수공업과 미술에 중심을 두고 두각을 드러낸다. 미국에서는 산업 디자인의 형태로 25년의 세월에 걸쳐 그 틀을 형성했다. 이 짧은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디자인은 산업에 맞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산업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디자이너는 자본주의와 공범 의식을 느끼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필요한 것처럼 포장했다는 소비를 부추겼다는 죄의식을 떠안고, 때로는 사회 체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마저 안고 있다. 




앞 장에서분명히 보았듯이 마케팅 디자인은 현실이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현실이며, 명확히 규정되는 현실이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여기서 마케팅 디자인이라는 말로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시장을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파악하는 디자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디자인에 윤리가 있다면, 이 윤리는 "단순한 수단이자 도구, 과정의 역할로, 즉 여러 수단 중 하나로 시장을 제한해야 하며 시장을 결코 목표나 목적, 의도로, 다시 말해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원리에만 기반을 둘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칸트 식으로 만든 다음 명령을디자이너의 도덕률로 세울 것을 제안한다. "그대가 사용자들에게 제공하는 디자인 프로젝트에서만큼이나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그대의 사람됨에서도 언제나 시장을 결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행동하라." 이것이야말로 디자이너의 정언 명령이다. 이것이 없다면 디자인은 맹목적인 성격을 띠고, 디자이너는 전반적인 무책임과 역설적인 광기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가 되고 만다. 디자이너의 윤리성이라는 문제는 디자인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의 일부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분야가 시작될 때부터 디자이너는 마치 원죄를 회개하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활동을 끊임없이 정당화해온 것이다.-57페이지




 디자이너는 스스로 윤리적 입장을 정해야 한다. 동시에 디자이너의 시니피앙은 소비자의 시니피에를 넘어서야 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발생하는 것이다. 디자인은 형태와 기능의 합치, 본질로의 환원, 기능과 단순함의 결합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활동은 디자인의 도덕적 토대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했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목표는 자본을 넘어서 사회를 조각하는 작업을 하는 일이라고 스테판 비알은 주장한다. 사회를 구현하고, 우리가 숨을 쉬는 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나타날 수 있는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아이디어, 이것이 진정한 디자이너의 목표이다.



'디자인적 사고'라는 말은 정확히 말해 "디자인을 하나의 생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 표현은 디자인에 고유한 사고 절차를 의미하는 '디자인 사고 프로세스'의 약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암시하는 바는, 디자인은 철학 활동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의 실천이거나 사유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주체가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ㅈ어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디자이너다"가 된다는 말이다. 이 때, 디자인은 데카르트의 자아처럼 생각하는 주체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디자인은 특히 "생각하는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130페이지




 



 

 벨리브는 일정금액을 예치금으로 두고 연간 29유로를 내고 30분 내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파리의 자전거 이용 시스템. 자전거와 주차대의 군더더기 없는 형태, 파리 시민이 도시를 이동하는 방법을 변화시킴으로써 형태조화 효과와 사회조형 효과, 경험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그 이전에 또다른 디자인 효과는 아름다움의 효과를 가장 먼저 가져온다. 공간, 입체, 구성, 조형, 섬유,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디자인의 첫번째 효과는 형태적 아름다움의 효과. 이 즐거움을 하찮은 것, 없어도 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정신이 아니던가. 사람은 모든 존재를 유용하게 여기고 잘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 디자인을 필요로 한다. 장식 이전의 아름다움을, 기능을 통해 장식의 의미와 정당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필립 스탁의 '라 마리' 의자는 순수함, 가벼움, 유동성을 지닌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사용자의 편리한 이용을 도모하며 사물의 유동성을 고려했다. 우아한 선, 섬세한 윤곽, 입체의 순수함, 덩어리의 균형, 테두리의 사정, 드로잉의 완벽함, 시각적인 유혹, 그래픽의 매혹. 스테판 비알은 이런 조건을 형태조화의 조건으로 규정한다. 






 사람은 사물 속에서 살아간다. 무언가를 만지거나 활용한다. 살아가며 느끼고, 경험하는 무엇을 디자인은 돕는다. 더 나은 디자인은 더 좋은 경험을 낳는다. 사용자는 사물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그 사물이 우리 자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은 앞에서 언급한 아름다움, 형태조화, 경제성, 사회조형의 효과를 넘어서고 이 개념들을 합치시키는 '경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유려한 미관, 일체의 통일감, 이런 최초의 시각적 흥분을 넘어서면 맥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활용 콘텐츠 접근성, 공간 절약성을 통해 경험치를 가중시킨다. 본체가 모니터 안의 공간으로 사라진 이 기기를 사용하는 이는 필시 공간을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가구를 배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실내 구도를 바꿀 수 있다. 디자인은 이 모든 조건을 아울러 매 순간 우리를 끌어당긴다.  



 디자인을 미학적 가치를 담은 활동의 결과물로 보자면, 모든 미학적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떠한 활동과 사물을 통해 내가 무엇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로 무엇을 느꼈고 어떤 것을 새롭게 일구어냈는가? 이것으로 하여금 나의 무엇이 달라졌고 나는 어떤 의미를 얻었는가? 디자이너와 디자이너의 제품을 사용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가 날마다 살아있는, 살아가는 삶의 영속성과 일치하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일상의 사물을 재구성하고 활용하며 삶의 각도를 재단하고 사물을 의미 있게 활용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디자인의 가치와 혁신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드러날 것이다. 




디자이너는 기법과 용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그 자신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사용하는 물건에 우아함과 시적인 정취를 불어넣고, 삶의 매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그저 찻잔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도 가능하다. 또 식기를 사용하면서도 가능하다. 그리고 자동차 문을 밀면서도 가능하다. 우리의 직업은 이 모든 순간을 양질의 순간으로 만드는 일, 물건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반대로 우리 안에 있는 더 나은 것을 드러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파트릭 주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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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10-0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책도 읽으시네요. (제가 안 읽으면 남들도 안 읽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스런 놀라움!) 디자인은 그저 만들기에 불과한 활동이 아니군요. 산다는 게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듯이... 디자이너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꽤 생생한 느낌일 것 같아요. 오랜만에 들려봅니다 ''

Jeanne_Hebuterne 2012-10-05 12:3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제가 안읽으면 남들도 안읽을거라 생각하는 습관이오! 디자인이 궁금해서 읽었는데 쉽고 재미있어요.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많은 면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어요. 왜 사람들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면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상세히 알려준답니다.
추석 잘 보내셨지요? 이제 가을이에요!
 
폴리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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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머리가 내려와서 신경 쓰였다. 라는 글.

 나라고 신경 안 쓰이는 줄 아나. 라는 한 마디는

 다음 페이지의 '한국말. 어렵다'로 이어진다.

 

 

 어떤 날 썼던 일기.

 

 

 

투박한 듯 날렵한 그림. 함축되어 일상이 되는 대화. 소녀가 자라서 다시 어린 소녀와 만나기까지의 길. 



 

그날의 마음을 설명하지 못해 손을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이유로 '오늘은 비가 내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는 분명 후자의 경우다. 2007년 데뷔한 이 젊은 작가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거창한 꼬리표를 붙이고 있다. 2012년 만화비평가 협회(ACBD) 대상, 2011년 만화 전문 서점상, '르푸앙' 선정 2011년 올해의 책 20선, '르푸앙' 만화상 최종 후보작. 2009년 <염소의 맛>으로 앙굴렘 세계 만화 페스티벌 '올해의 발견 작가상'. 여기까지가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의 독자 앞에는 '폴리나'와 '염소의 맛'이 놓여있다. 만화라고 쓰고 그래픽 노블이라고 일컫는다. 불면 날아갈 듯한 막막함을 전깃줄에 맺힌 빗방울로 풀어내는 작가다. 일상을 카페인 몇 모금과 줄임표로 웃음과 눈물, 한숨을 대체할 줄 아는 작가. 이 작가의 그림과 글 속에는 귀 기울여야 들리고 유심히 보아야 보이는 귀뚜라미 소리와 매미 소리, 저녁 노을의 번짐과 연습실 조명의 떨림이 함께 섞여 있다. 여름을 겨우 넘기고 투정 부리는 어린 여자 아이의 흰 낯빛도.



 

춤이 어렵지, 이런 건 어렵지 않아. 라고 말하는 소녀를 만났다.

그런 그녀의 모든 말과 동작은 이 가라앉은 이야기와 그림으로 엮인다.

 

 

 연속되는 동작들 속에서 시선과 리듬을 꺼낸다. 무용수가 힘들어하면 관객은 괴로운 무용수를 볼 뿐이라는 말. 공간 속에 양감이 있는, 의미 있는 움직임을 초 단위로 만들어내는 것. 폴리나는 발레 학교 입학 후 까다로운 선생님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것은 발레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 선생님이 필요한 학생의 이야기. 당시에는 읽지 못했던 뜻을 시간이 흐른 다음에 꺼내어서 곱게 써내려가 보는 이야기.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전 손톱을 정리하고, 머리를 다듬고, 길을 걸어가서 깨끗한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게 되는 그런 이야기. 붓끝은 농담을 툭툭 던진다. 처음 보면 그 뭉툭한 끝날이 오히려 가벼워 마음을 매섭게 치곤 한다. 아무리 들어도 모를 것 같은 말. 결국, '선생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는 학생. 틀리는 일만 남았는데 그것이 두려운 사람. 폴리나의 표정, 손목과 발목의 움직임, 시선의 끝, 심지어는 그녀가 입은 연습복의 질감까지도 제외하고 나면 한 사람이 남는다. 그때 나는 비로소 폴리나를 알 수 있었다.

 

 

 가르침은 어긋나고 그때의 폴리나와 지금은 폴리나는 다르다. 분명 어제 내 손을 잡았던 그 스승과 오늘 내 손을 잡는 스승이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박자가 엉킨다. 파드두도 어렵다. 링바링도 안된다. 

 느낌을 담아, 의미를 실어서, 손끝까지 표정을 넣어서. 중력과 반대되게. 타고난 우아함을 살려서.

 그러게 그때에는 그렇게 그 이름을 불렀을 것을 왜 부르기를 그만두었을까.

 그러게 그때 그만두지 말았어야 했을 일.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흘러 다시 손을 잡았을 때 남아있는 어떤 가르침. 맞아떨어지는 호흡.


 

 눈빛이 날카로웠을수록 흐뭇했어야 할 일이다. 스승이 제자를 진심으로 대했다는 것. 

 곧, 지금의 제자에게도 진심 가득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폴리나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컴퍼니에 들어가고 패스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마음 깊이 남아있는 보진스키의 말들을 느끼기에 그만둘 수밖에,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머리를 써야 하고 노력을 해야 했지만 그런 식으로 갖는 것은 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알고만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목소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어떤 것이 된다.

 

 

 지나간 모든 것은 어떻게 남게 되나. 앞으로 올 모든 것은 어떻게 변했던가. 어제의 걸음이 오늘과 다르고 오늘의 수업이 내일과 다르다. 과거는 이미 미래가 되었고 우리는 결국 모두 매일 다짐을 하게 된다.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까를 망설이는 어린 사람들에게 힘이 될 이야기.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소리. 여유를 가지고 도약하지 않으면 아무리 높이 도약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마지막에 끄집어내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발레 슈즈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의미를 지닌 무엇이 된다.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고 곧게 해야 할 것은 처음 가졌던, 그리고 처음 찾았던 우리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목소리를 잊지 않는 일.



제목은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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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9-19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에서 나오는 만화는 계속 관심을 갖고 보고 있어요. 소재가 발레여서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소다 마사히토의 스바루.는 아주 몰입해서 봤지만,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죠.

Jeanne_Hebuterne 2012-09-20 15:08   좋아요 0 | URL
미메시스의 만화를 지켜보고 계셨군요. 저는 폴리나가 처음이었습니다. dreamout님이 몰입해서 보았다는 스바루가 궁금해집니다. 폴리나는 소재와 무관하게 자라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었어요. 저부터 먼저.
 
고통
앙드레 드 리쇼 지음, 이재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Oh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to hold the gun

I know more than I knew before
I didn't rest I didn't stop
Did we fight or did we talk

Oh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to hold the gun

I love you more
I don't know what I knew before
But now I know I wanna win the war

No one likes to take a test
Sometimes you know more is less
Put your weight against the door
Kick drum on the basement floor
Stranded in a fog of words
Loved him like a winter bird
On my head the water pours
Gulf stream through the open door
Fly away
Fly away to what you want to make

I feel it all, I feel it all
The wings are wide, the wings are wide
Wild card inside, wild card inside

Oh I'll be the one to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be the one who'll break my heart
I'll end it thought you started it

The truth lies
The truth lied
And lies divide

-fist, I feel it all.




 

 고통을 읽을 때는 두 개의 선율이 떠올랐다. 파이스트의 맑은 가사와 피아졸라의 어떤 멜로디. 다 떠나가도 무언가 남아있을 거라고, 나를 파괴할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 그러나 다 떠나가면 무슨 소용인가. 라고 그림자를 바라보는 듯한 피아졸라의 눈빛. 고통은 그런 책이다. 어두운 방,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책의 모서리가 역광에 꽤 날카로워 보인다. 



 어찌할 수 없을 때. 내 손으로 나의 굳은 어깨를 쓰다듬어야 할 때. 무심결에 창밖을 보았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전깃줄이 위태로워 보일 때. 저 선이 끊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 횡격막이 놀라 딸꾹질을 할 때처럼 사람들이 딸꾹질 할까. 문 닫은 카페의 고양이와 개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버린 내 속의 마음은 어떻게 웅크리고 있을까. 



 어느 날 양로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세상에, 자신의 부고를 신문에서 접했단다. (아마도 격분하여) '나는 죽지 않았다' 라는 자전 에세이를 발표했다. 프랑수아 모리앜, 앙드레 지드, 장 콕토가 그의 친구였고 전직 고등학교 철학교사였다. '고통'은 그의 첫 소설. 사회적 금기를 깨지 않았다면 첫 소설에 수여하는 프리 뒤 프리미에 로을 탔겠건만 자극적이고 파격적인 묘사와 주제로 수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시 상황에서 프랑스인 여자와 독일군 남자의 육체관계라는 설정 때문이라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2012년 8월 파리 좌안 어느 주택가의 옆집 남녀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금기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것.



 

두 사람의 피는 숲 속 오솔길에서 사냥꾼에게 쫓기는 한 마리 짐승처럼 동맥 속을 흘러다녔다. 어두운 숲과도 같은 육신은 살갗에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닫혀 있어 오직 사랑만이 뚫고 들어가 빛을 밝힐 수 있었다.-23페이지





 저물녘 조용히 앉아 저녁 기도를 올리며 잠자기 전의 키스를 잊지 않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조용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조금씩 마을 사람들과 비슷해져 어느 날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어머니. 세계의 모든 것이 한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갈 때, 그 존재가 대다수 사람들이 택한 것일 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모범적이라고 부른다. 앙드레 드 리쇼의 이 이야기는 첫 장만 읽어도 그 전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아이 엠 러브의 엠마, 안나 카레리나, 보바리 부인, 같은 사람 아닌가. 우리는 단지 이 존재가 어떻게 몰락해가는지 테레즈의 그 길을 지켜볼 뿐인다. 타이타닉이 빙산에 걸려 자멸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구명정을 덜 실었다면 인명피해는 덜했을지도 모른다. 세계기록 경신을 위해 최단 루트를 택하지 않았더라도 빙산은 아예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빙산을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자각할 수 없는, 레 미제라블.





어떤 사랑이든 자기 마음을 인정하느라 보내는 최초의 시간은 축복받은 시간이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존재들에게는.-84 페이지




 여인의 파우더 브러시 끝이 살짝 그 여자의 얼굴을 스친 다음이라 해서 공기 중에 파우더 가루가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잊는다. 그 속을 떠다니는 감각적인 공기는 어찌할 것인가. 독일군 장교가 그녀에게 남긴 포도는 어찌할 것인가. 그 흐르는 과육을 입안에서 혀로 느끼지도 않고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를 공기 중에 멀겋게 내버려둔다. 포도는 그 사이 그 과육을 잃고 만다. 혀끝에서 맴돌았어야 할 과육이 자멸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타인의 살결을 만질 때 그 살결은 손끝에서 생명을 새롭게 얻는다. 피부가 육화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순서가 아니던가. 공간을 허용하는 일. 의미를 만드는 일. 그리하여 좁혀지는 거리. 사람들이 뒷말하는 것은 모른척 한다. 알든 모르든 그것이 중요하기나 한 일인가. 이미 가진 것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했던 어머니와 아들은 점차 다른 촉각을 감지한다. 생체기가 나았고 다른 멍이 들었다. 바람이 불 때 아마 무심히 머리카락을 넘겼을 어머니가 고개를 뒤로 젖혔을 것이다. 소년의 우주는 어머니의 블랙홀이었다. 





갖가지 수단을 써서 아들의 영혼을 휘어잡았던 그녀는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자기 양심에게 묻고 있었다. 외로움으로 고통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조르제가 그런 고통을 맛보기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55페이지




 열린 문은 닫혀야 하고 닫힌 문은 열어야 한다. 창문을 반쯤만 연다는 것은 소용이 없다. 향수 냄새. 손끝을 스칠 때 느끼던 촉각. 모자를 벗을 때 흔들리는 표정. 치맛자락을 쥐고 사뿐 걸을 때 테레즈의 발걸음. 아이가 잠들 때까지 기다릴 때 어둠이 내리는 그 느리디느린 속도. 확인해야만 할 때의 가쁜 숨소리. 



 앙드레 드 리쇼는 '다 알고 있잖아?' 라고 능청스레 말하듯 이 타올랐다가 한순간에 더 맹렬해지는 감정과 육체를 밤의 책에서 펼쳐낸다. 그것은 때로는 탐스러운 포도처럼 도발적이고, 집에 쓰인 욕설처럼 수치스럽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듯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마을 사람들의 자명한 웃음. 빵집 주인의 친절하지 않은 친절한 인사. 다를 것이 없다는 데에서 나오는 패배주의적 동료애. 다 같이 겪는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는 듯한 시궁창 같은 행복. 어깨동무하고 싶지 않았던 여자. 테레즈 들롱브르는 남편이 전사한 후 어린 아들 조르제와 함께 마을에 이사온 여자였을 뿐이다.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고 여느 사람과 같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죄가 있었다면 그것은 독일군 오토와 밤마다 만난 것이 아니라 그 남자와 만나고 싶었던 마음을 드러냈다는 데에 있다.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하나는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가벼운 죄의식을 느꼈지만 그것은 아들에 대해서였지 남편의 추억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오토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 누워있던 처음 몇 밤 그녀는 감미로운 고통을 느끼며 생각했다. '넌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야.'-114페이지





 애착의 대상이었던 아들이 오토로 옮겨간 다음, 오토가 떠난다 해서 다시 그 대상이 아들일 수가 있을까. 그것은 꼭 돌을 끓여 녹이겠다는 생각과도 같다.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사랑은 금방 피어나지만, 이미 시들었던 대상에의 집착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사그라져 무덤덤한 무엇을 다시 의미있는 어떤 존재로 싹 틔우기는 불가능할뿐더러 테레즈는 그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생각. 고민. 궁금함. 답답함. 갑갑함. 그녀는 과거를 파고들고 아이는 미래에 몸서리친다. 이것은 모자 관계가 아닌 두 세계의 충돌이다. 충돌할 때의 그 모습은 테레즈가 볼 수 있는 자신의 가장 밑바닥의 모습. 진짜 두려운 것은 집에 누가 써둔 욕설이 아닌, 다른 사람 같은 자신을 만나게 되는 일. 차마 거기까지, 그 밑바닥까지는 내려갈 수 없다고 무의식중에 테레즈가 하는 생각이 '넌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 보고 싶은 유혹, 몸을 있는 대로 숙이고 땅을 파고 들어가 깊숙한 그곳에 도달했을 때 그녀가 만난 것은, 자기 자신을 끌어당기면서도 끔찍한 어떤 존재였을 것이다. 결국, 스스로가 자신을 파괴하는 사람이 된 다음 남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녀 스스로만이 알 수 있어서, 남에게 쉬이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단숨에 읽어내려가야 그 구조가 더 잔인하게 드러나는 책. 독일군, 프랑스 여인, 포도밭, 어둠, 촛불, 피난민 소녀. 어머니의 연인. 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틈은 독자가 그의 눈으로 메꾸어야 할 부분들이다. 집필 당시 민감한 주제였으나 이제는 덜 민감해진 설정, 어머니와 아이가 서로 대하는 시선,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기민함(나는 마지막의 그 결말이 차라리 그녀 자신도 몰랐던 그녀의 밑바닥 기민함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 틈새는 읽는 이만이 채울 수 있는 부분. 앙드레 드 리쇼는 독자의 자리를 겸손하게 비워두는 작가다. 카뮈를 창작으로 이끌기도 한 작품.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훌륭한 책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경험해서 아는 것들, 즉 어머니라든가 가난이라든가 아름다운 저녁 하늘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해 처음으로 나에게 이야기해준 책이다. 습관대로 하룻밤새 그 책을 다 읽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었을 때, 낯설고 새로운 자유를 가슴에 안고 나는 머뭇거리며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책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망각과 심심파적만이 아니라는 교훈을 터득한 것이다. 나의 집요한 침묵, 정체를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기묘한 이 세상, 내 가족의 고결함과 가난, 나만 알고 있는 비밀 등, 이 모든 것이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고통'이라는 책으로부터 나는, 지드가 장차 나를 유인하여 끌어들이게 될 창작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막연하게나마 우선 엿볼 수 있었다.-카뮈







         





책장을 덮었을 때에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고 이런 선율이 감은 눈을 채웠다. 

괜찮다. 그 바닥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라고 말하듯. 

그래서 괜찮지가 않았다.




제목은 '너와 함께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 없이 살 수도 없다'라는 뜻의 프랑스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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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8-2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와 과육이란 단어를 본 순간 이 책을 읽으며 터질듯한 긴장을 느꼈던 바로 그 부분이 생각났어요. 네, 그 관능적인 포도를 발견하는 순간이요.

Jeanne_Hebuterne 2012-08-29 23:18   좋아요 0 | URL
감정의 절정은 이런 은유를 통해 더 명확해지는 듯 합니다. 아이 엠 러브에서 엠마가 새우를 입 안에서 천천히 씹는 장면같은 것. 그것이 사랑의 절정은 아니지만 서로의 살갗을 서로가 어루만져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일. 그런 일에도 절정이 있다면, 이 포도의 표현은 탁월했어요. 기울기 직전의 달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읽다가 아, 다락방님이 왜 냉장고에 포도 없어서 슬펐는지 알 것 같았어요. 손에 잡히는 그것이라도 있으면 내 마음에 바람이 덜 불 것 같아서요.

레와 2012-08-3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 페이지 정도 읽었을때, '아! 나는 이 책을 백프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마 그녀라면 (여기서 그녀는 당신이라오.) 백이십프로 이해하고도 남을거야.' 라는 생각을 했어요. 역시!

쥬드가 이 책을 빨리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과 안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했더랬는데.. ^^

Jeanne_Hebuterne 2012-08-30 19:46   좋아요 0 | URL
저라고 하여 어디 백프로 이해했겠습니까마는,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아, 알 것 같다'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검은 책이 아니었다면 구태의연했겠지만,


파도가 너무 높아요, 레와님.
 
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여자와 아이의 얼굴. 여자의 정면과 아이의 옆 얼굴. 이 얼굴과 이 눈빛을 넘어서 책 표지의 날개를 들추어 보면 미국(그럼 그렇지), 오렌지 상 수상작,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가디언, 저널리스트, 옥스팜, 나이로비, 방콕, 이런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널리스트와 소설가를 병행하는 사람의 글이라. 현재까지 10여 편의 소설을 썼고 예술학을 공부했다 한다. 



 이런 단어의 조합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적어도 맞춤법은 안 틀릴 것이다(저널리스트 후광효과). 감성의 근거를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예술학). 이방인이자 현지인일 것이다(나이로비, 방콕, 미국), 여성문학의 무언가를 보여줄지도 모른다(오렌지 상 수상). 해리엇 헤이스팅스가 디렉터로 있는 오렌지 상은 해마다 다섯 명의 여성 비평가 패널이 영국 내 출판물 중 여성 작가의 픽션 중 한 편을 선정하곤 한다. 최근에는 2009년 맨부커 상 수상작가인 Byatt와 마찰이 있었으나 여전히 '우리는 오렌지상이 여성 작가의 픽션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러한 기대에 걸맞게 상대주의와 인류학, 모성과 부성, 부모와 자식, 액션과 리액션, 신호의 전달과 수신에 대한 한글 번역본으로는 육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이 바로 이것. 틸다 스윈턴 주연의 영화로 작년 개봉(한국에는 올해 팔월 개봉)하기도 했다.




 이것은 모든 어머니의 악몽이다. 책에서 관찰한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에바는 결코 아이를 환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는 네가 없었을 때 더 행복했어!'라고 여섯 살이 된 케빈의 기저귀를 갈며(그때까지 대소변을 가리지 않았다) 소리쳤다. 그녀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이를 사랑하기가 어려웠다.

사랑할 수 없는 아이였다.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였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



 에바의 행동은 케빈의 반응으로 이어진다. 케빈의 반응은 에바의 감정을 건드린다. 두 사람은 그리하여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채 서로에게 익숙해져 간다. 사랑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받기를 포기했고 사랑받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멈추었다. 그러나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끝내 이것을 모성에 관한 이야기만으로 남기지 않으려 애쓴다. 즉 에바 캇차두리안은 동정만 하기에는 복잡한 사람이다. 케빈은 사람을 학교에 가두어 놓고 석궁으로 하나씩 쏘아죽인 다음 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지만 에바만은 죽이지 않는다. 왜 그랬냐는 말에는 '이전에는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라고 답한다. 이 모든 행동은 단 한 사람을 향한 것이다. 그것이 꼭 사랑의 감정은 아닐지라도, 어찌되었든 그것은 강렬한 신호이다. 나 여기 있어요. 여기에. 




"넌 안 그래?" 내가 물었어. "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어깨를 으쓱하더군. "당신은 안전하고 건전한 곳으로 피했잖아, 안 그래? 하나도 긁히지 않고."

 "내가?" 내가 물었어. "그럼 어째서 난 죽이지 않은거지?"

 "진짜 공연에선 관객한테 활을 쏘지 않으니까." 그 애가 술술 말을 꺼냈어. 오른손에 뭔가를 돌리면서.

 "날 죽이지 않은 게 최고의 복수란 말이니?" 이미 우린 무엇을 위한 복수인가라는 주제에서 훌쩍 벗어나 있었어.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네가 싫어 돌아버릴 지경이다. 라고 말하는 아이의 눈빛. 너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발걸음. '디 오레고니언'은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또 자식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 책을 선택할 수는 있다.'라고 이 작품에 헌사를 보냈다. 옳은 말이다. 어머니 없이 태어나는 자가 없다고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수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죽도록 사랑받고 싶어했으나 사랑받지 못한 그루누이에게도 어머니는 있었다. 그 대상이 눈에 보이든 모이지 않든, 한때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있음을 통해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게 뭐야?" 내가 물었지. "뭘 갖고 있는 거야?"

 살짝 교활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애가 손바닥을 펼쳐 부적을 보여줬어.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구슬들을 수줍지만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것처럼. 내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바닥에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떨어졌지. 어떤 물체를 볼 때 그것 역시 날 보고 있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다신 꺼내지 마." 내가 목쉰 소리로 말했어. "그럼 다신 여기 오지 않을 거야. 절대로. 내 말 듣고 있어?" 




 '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여동생에게 화장실 세제를 부어 얼굴을 태워버리고, 학교 선생님의 경력을 끝장내고, 석궁으로 사람을 죽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당신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

 네가 없었을 때 난 더 행복했다고 말하고 제때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본위로 해석하고 모든 걸 아는 눈으로 꿰뚫어보고 언제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엄마의 아이로 살아간다는 것.




 물론 서로는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무리 보아도 잘못한 것이 없다. 단지 에바는 에바대로, 케빈은 케빈대로 가장 자신에게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있을 뿐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케빈의 행동은 어떤 마음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물론 그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자이기는 하지만 그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늘 에바였다. 사건사고가 있으면 그곳으로 늘 에바가 다가온다. 그녀는 그가 꿰뚫어본 단 하나의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어긋나는 관계의 핵심은 이것이다. '너 그거 했지?','너 그런 마음이지?' 라고 단정 짓는 것.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단정 짓기는 늘 위험하다. 틀렸을 때에도 맞추었을 때에도 그 행동 자체가 관계의 종말을 불러일으킨다. 그 후 아무리 `아니야,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괜찮아. 알 것 같아.'라고 말한들 무엇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부정은 긍정의 모든 속내를 꿰뚫어버렸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걸 그애도 알았던 것 같아. 내 말은 그 애한테 표면상 지독하게 성가신 '아줌마'의 방문을 떼어낼 수 있는 부적을 제공한 셈이었는데, 그날 이후 셀리아의 유리 눈이 내 눈 앞에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게 된 건 내 생각에,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온다 걸 그 애가 좋아한다는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떤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옹졸하고 비겁한 일이다. 에바 캇차두리안의 모든 행동은 그런 의미에서 빈틈을 자주 보인다. 이것은 모성이야말로 그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지쳐서 욕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이는 그저 가장 그 아이 자신답게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수백 번 반복되는 상황에 지친 엄마가 욕을 하면 그것은 아동학대가 된다. 뚱뚱해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걸 두려워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언제부터 모든 사람이 타인을 위해 이렇게 헌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해야만 정상인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나. 




 에바 캇차두리안은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지느냐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이유가 중요한 일이 타인에게는 결과가 중요한 일로 탈바꿈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도 않다고 스스로 말한다. ('내가 발견했던 내 모성애에 대한 대중의 옹호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설사 있다 해도 그건 날 화나게 만들 뿐이었지."-609 페이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머릿속 내재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필터를 거쳐 보는 케빈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육백여 페이지에 걸쳐 읽었으나 케빈이 아닌 에바 캇차두리안의 아들이 그녀의 어떤 행동에 고마워할지조차 의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에바의 머릿속에 있는 불문율이었다. 손을 뻗어 겨우 닿을 것 같은 옷자락을 여미며 가는 듯한 케빈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아주 조금은, 추측할 수도 있다. 그의 어머니를 향한 태초부터 지속하여 온 적대감은 그녀의 마음의 모든 평화를 깨뜨린다. 이때 독자는 '왜'냐고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라고 물어야 옳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이야기는' A는 B이다.' 라는 식의 단정을 피한다. 당연해 보이는 모든 사실로 감정과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생각을 흔들리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호흡을 끊어놓는다. '케빈에 대하여'는 앞서 말하였듯이 어머니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튼튼한 관계의 견고한 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직 모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엄마가 아이를 어떤 방식으로 키웠다.

엄마가 아이를 이렇게 길렀다.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



 결국,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이런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신체를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는 듯하지만 사실 저 말에서 신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여전히 모든 정신의학자가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는 문제,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땠는가'는 이런 슬픈 사실을 담고 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이를 담는 그릇일 뿐이니까. 




 몰락과 화해, 가능성의 이야기. 부엌에서 아이의 간식을 만들었는데 '난 피망 안먹어'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에바 캇차두리안의 이야기. 어긋난 대화의 원류를 바로잡으려 무척 힘겹게 강 위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독자는 결국 이 엇갈리는 소통에서 구토와 복통,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날씨를 겪고 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드라마틱하다. 케빈 그 자신과도 같이 그 사건이 너무나도 거대하여 할 말을 잃게 되고 모든 희망과 절망이 스며든다. 이 상실감은 결국 상대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케빈에 관해 이야기해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자신이 가장 마주치기 두려운 자기 자신의 다른 모습, 자신의 자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자신과도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모르는 사람. 그 모습을 직시할 때에야 화해는 가능할 것이다. 

 

 

 

화해를 하고 나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있을까. 모를 수 있을까. 그들은 그렇게 속삭였다.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이지만 케빈이 없는 에바는 있을 수 없고 에바가 없는 케빈은 있을 수 없다. 아이 없는 엄마가 있을 수 없고 엄마 없는 아이가 있을 수 없듯 두 사람은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발췌:케빈에 대하여 602~60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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