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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나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2월
평점 :
잔머리가 내려와서 신경 쓰였다. 라는 글.
나라고 신경 안 쓰이는 줄 아나. 라는 한 마디는
다음 페이지의 '한국말. 어렵다'로 이어진다.
어떤 날 썼던 일기.
투박한 듯 날렵한 그림. 함축되어 일상이 되는 대화. 소녀가 자라서 다시 어린 소녀와 만나기까지의 길.
그날의 마음을 설명하지 못해 손을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이유로 '오늘은 비가 내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는 분명 후자의 경우다. 2007년 데뷔한 이 젊은 작가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거창한 꼬리표를 붙이고 있다. 2012년 만화비평가 협회(ACBD) 대상, 2011년 만화 전문 서점상, '르푸앙' 선정 2011년 올해의 책 20선, '르푸앙' 만화상 최종 후보작. 2009년 <염소의 맛>으로 앙굴렘 세계 만화 페스티벌 '올해의 발견 작가상'. 여기까지가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의 독자 앞에는 '폴리나'와 '염소의 맛'이 놓여있다. 만화라고 쓰고 그래픽 노블이라고 일컫는다. 불면 날아갈 듯한 막막함을 전깃줄에 맺힌 빗방울로 풀어내는 작가다. 일상을 카페인 몇 모금과 줄임표로 웃음과 눈물, 한숨을 대체할 줄 아는 작가. 이 작가의 그림과 글 속에는 귀 기울여야 들리고 유심히 보아야 보이는 귀뚜라미 소리와 매미 소리, 저녁 노을의 번짐과 연습실 조명의 떨림이 함께 섞여 있다. 여름을 겨우 넘기고 투정 부리는 어린 여자 아이의 흰 낯빛도.
춤이 어렵지, 이런 건 어렵지 않아. 라고 말하는 소녀를 만났다.
그런 그녀의 모든 말과 동작은 이 가라앉은 이야기와 그림으로 엮인다.
연속되는 동작들 속에서 시선과 리듬을 꺼낸다. 무용수가 힘들어하면 관객은 괴로운 무용수를 볼 뿐이라는 말. 공간 속에 양감이 있는, 의미 있는 움직임을 초 단위로 만들어내는 것. 폴리나는 발레 학교 입학 후 까다로운 선생님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것은 발레를 하는 사람의 이야기. 선생님이 필요한 학생의 이야기. 당시에는 읽지 못했던 뜻을 시간이 흐른 다음에 꺼내어서 곱게 써내려가 보는 이야기.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전 손톱을 정리하고, 머리를 다듬고, 길을 걸어가서 깨끗한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게 되는 그런 이야기. 붓끝은 농담을 툭툭 던진다. 처음 보면 그 뭉툭한 끝날이 오히려 가벼워 마음을 매섭게 치곤 한다. 아무리 들어도 모를 것 같은 말. 결국, '선생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는 학생. 틀리는 일만 남았는데 그것이 두려운 사람. 폴리나의 표정, 손목과 발목의 움직임, 시선의 끝, 심지어는 그녀가 입은 연습복의 질감까지도 제외하고 나면 한 사람이 남는다. 그때 나는 비로소 폴리나를 알 수 있었다.
가르침은 어긋나고 그때의 폴리나와 지금은 폴리나는 다르다. 분명 어제 내 손을 잡았던 그 스승과 오늘 내 손을 잡는 스승이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박자가 엉킨다. 파드두도 어렵다. 링바링도 안된다.
느낌을 담아, 의미를 실어서, 손끝까지 표정을 넣어서. 중력과 반대되게. 타고난 우아함을 살려서.
그러게 그때에는 그렇게 그 이름을 불렀을 것을 왜 부르기를 그만두었을까.
그러게 그때 그만두지 말았어야 했을 일.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흘러 다시 손을 잡았을 때 남아있는 어떤 가르침. 맞아떨어지는 호흡.
눈빛이 날카로웠을수록 흐뭇했어야 할 일이다. 스승이 제자를 진심으로 대했다는 것.
곧, 지금의 제자에게도 진심 가득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폴리나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컴퍼니에 들어가고 패스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마음 깊이 남아있는 보진스키의 말들을 느끼기에 그만둘 수밖에,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머리를 써야 하고 노력을 해야 했지만 그런 식으로 갖는 것은 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알고만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목소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올 어떤 것이 된다.
지나간 모든 것은 어떻게 남게 되나. 앞으로 올 모든 것은 어떻게 변했던가. 어제의 걸음이 오늘과 다르고 오늘의 수업이 내일과 다르다. 과거는 이미 미래가 되었고 우리는 결국 모두 매일 다짐을 하게 된다.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까를 망설이는 어린 사람들에게 힘이 될 이야기.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소리. 여유를 가지고 도약하지 않으면 아무리 높이 도약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마지막에 끄집어내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발레 슈즈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의미를 지닌 무엇이 된다.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고 곧게 해야 할 것은 처음 가졌던, 그리고 처음 찾았던 우리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때 들었던 목소리를 잊지 않는 일.
제목은 '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