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당신의 무렵.


 그래도 9월이라서 하늘은 구름을 경작하고.

 9월이라서 오늘은, 9라는 이름을 생각합니다.


 그건 마치

 세상을 향해 나올 준비를 마친 아홉 달 태아를 닮았지요.

 10에서 하나 모자란 수라기 보다 

 완성을 향해 가는 가능태.

 미완의 아름다움이 9에는 있습니다.


9로 말하자면 '무렵'이라는 말에 가까운 수죠. 

그러고 보니 9월은 '메밀꽃 필 무렵'입니다.


 9월은 또 여름과 가을의 사이라서

 이 세상의 무수한 '사이'에 대해 생각합니다.

 밤과 아침의 사이, 벽과 벽의 사이,

 당신과 나의 사이......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여름과 가을, 계절의 이 '사이'를 간절기라고도 부르지요. 

 '간절'이라는 말에는 어쩐지 

 건너가려고 하는 간절함이 배어있는 것 같은데요.

 당신에게 건너가려고 합니다.

 이 절룩이는 말들이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은 접속사 같았으면 합니다.


-허은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잠을 자다 무언가 편치 않아서 깨는 때가 많다. 아니, 무언가 편해서 깨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잠들기를 한밤에 너덧 번. 이것이 코골이의 흔적인가 싶어 어쩌다 친구나 가족과 같이 잠을 잘 때면 물어보곤 했는데, 늘 그러지는 않는단다. 한 달에 두어 번, 몸이 지독히 녹진 거릴 때만 그런다니 세계 2차 대전 가스실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들어가야 하는 독일군들이 쓸법한 마스크는 쓰지 않아도 될 일. 그러나 늘 잠을 자다 깼을 때 내 옆의 공기가 생경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럴 때면 침대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다. 호랑이 무늬 고양이 칼리가 침대 아래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다. 고양이들도 잠을 자는 한밤, 뭔가 불편하다. 그럴 때면 조용히 마룻바닥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창밖을 내다본다. 반짝거리는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느껴지면 종종 발목에 고양이가 살갑게 꼬리를 슬쩍 스치며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스탠드 불 하나를 켜놓고 책을 읽거나, 작은 소리로 음악을 듣거나 하다 보면 더러는 잠이 오기도 한다. 잠이 온다는 경상도 말투를 나는 참 좋아한다. 어떻게 그것이 내게로 오는 것일까. 

 어릴 적 읽은 커다란 계몽사 동화책에서는 잠의 요정을 찾아 달걀 모양 기구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박사가 나왔는데, 나의 달걀 모양 기구는 책이나 음악인 셈이다. 조용한 소리도 너무 크고 큰 소리는 더욱 조용한 불빛 같은 밤. 






 

 


 허은실 작가의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이 책에 관해 좋은 말, 싫은 말이 많이 생각난다. 이렇게 쉽게 스미는 감성을 지녔다니. 우리 말을 이렇게나 예쁘고 곱게 쓸 수 있다니. 긴 이야기를 짧게 풀어내는 시인의 글씨가 참 부러웠다. 

 그러나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이렇게 책을 쏟아내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그 성과를 가늠하기가 힘들다는 쪽에 슬쩍 손을 들어 본다. 그것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십만 원짜리 DVD로 풀렸을 때 느꼈던 그런 종류의 마음이었다. 그에 반해 일종의 하드코어 방송을 진행하는 김영하 작가의 경우, 그래. 그 양반 팟캐스트는 설마 오디오북으로 팔리진 않겠지. 정도의 생각을 하는 데서 그쳤달까.





뒤에서 안아주는 것을 좋아한다. 귀지 파주는 것을 좋아한다. 고양이의 관능과 무심함을 좋아한다. 무신경하고 무성의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다움과 슬픔과 리듬을 믿는다. 꽃보다 나무, 서슴서슴한 사귐을 좋아한다. 영롱보다 몽롱. 미신을 좋아한다. 집필 오르가슴을 느낄 때 충만하고 잎사귀를 들여다볼 때 평화롭다. 한 생은 나무로 살 것이다. 병이 될 만큼 과민한 탓에 생활의 불편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예민함은 스크래치 기법의 뾰족한 칼끝 같은 것이라고. 그것으로 검은 장막처럼 칠해진 어둠을 긁어내는 것이라고 우기며 위로한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지 않지만 상상하려 애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애쓰는 일로 절반의 삶을 쓰고 싶다. -책 앞날개, 작가소개 글에서.



 


 구부정한 당신의 등, 뒤척이는 밤들, 간신히 있는 것들에게 보내는 이 오프닝. 펼치면 나타나는 앞선 글 중에는 9월에 바치는 글이 있다. 10에서 하나 모자란 수, 무렵으로 존재하는 달. 여름과 가을의 사이. 무수한 '사이'의 글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그 서슴서슴한 말 앞에서는, '그래, 이 사이 당신은 오데를 갈라고 여기에 섰나' 하는 민요의 한 자락이 떠오른다. 이 책을 읽다가 창밖 너머 달님을 본다. 얼마 전 추석 이후 이제 기울어갈 달님. 은희경의 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달을 보지 않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 가는 것을 알지?'라고 말했더랬다. 일본 소설 '종이달'에서 달은 늘 초승달. 앞으로 부풀어가고 점점 차오를 그 가짜 달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 순간을 남기곤 했다. 그렇다면 지금, 추석도 지나 슈퍼 문이라는 정말 대단해 보이는 그 이름도 지나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리던 그 달이 지금의 이 달과 다를 것은 무엇일까.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하지요? 이상하게 당신과 있으니 이렇게 되어요.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 일은 이상하게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종이달을 지나왔다 생각하는 이가 떠오른다. 구부정한 등, 그의 뒤척이는 밤. 그가 간신히 보아온 것들에게 바쳤던 헌사. 

 이렇게 말하며 비밀을, 과거의 일을, 기억과 추억과 악몽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날 그와 나 사이에는 매콤한 호박 맛이 나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추출은 더디고 손길은 바쁘다. 단어는 쉴 새 없이 떨어지고 말들은 물결을 이룬다. 그 비밀과 거짓말 앞에서 나는 좀 숨이 가빴던 것도 같다. 언젠가 시차가 적응 안 되어 며칠 잠을 못 잔 상태에서 꽤 무거운 스웨이드 코트를 입어보며 한숨을 내쉬던 때처럼. 비밀은 늘 발성하는 그 순간 가벼워지고 과거는 생각하는 순간 가장 에로틱한 곳으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젠 누가 내게 비밀을 말해주겠다 하면 말하지 말라고, 혼자 간직하는 편이 더 빛날 거라고 말하는 나이가 되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요. 들어줄게요."


속에도 없는 말을 한 대가로 온종일 낱말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허기가 느껴진 그 날은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내 조용히 끓는 물을 붓고 3분을 기다렸다. 이걸 못 기다려서 면이 익었나 확인해보던 날이 있었고 자판기 종이컵을 빼낼 타이밍을 보느라 허리를 숙이고 기웃거리고, 시간 아끼느라 화장실도 못 가던 때가 있었는데...이젠 아주 여유롭게 노래 하나를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허기를 달래려 기다린다. 

 그와 나 사이. 컵라면과 나 사이. 그 많은 낱말을 겪고 난 다음, 그는 나와 더 가까워졌다며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만 나는 왜 컵라면이 더 좋았던 걸까. 매콤하고 단 맛이 어우러진 묘한 커피를 자학의 심정으로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비밀을 건네는 자의 마음은 늘 종이달을 지나간 자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 단어와 낱말, 목소리와 내음, 그림자와 소나기가 지나가는 그런 풍경. 

 나는 사람들이 슈퍼문이라 부르는 달의 앞면과 내가 그 날 들은 달의 뒷면을 조용히 맞대어 본다. 밤은 흐른다. 어쩌면 몰랐어도 좋았을 뒷면. 그러나 뒷면 없이 있을 수 없는 달의 앞모습. 달도, 그 사람도, 파니 핑크의 오르페오도 다 한통 속. '어쩜 남들은 다 아는데 너만 몰랐어. 어떻게 거길 안 가볼 수가 있니.'라고 말하는, 인생의 어둡고 그럴싸한 공간을 스쳐 지나온 이들의 속삭임. 





 나는 아직 멀었다. 

 9월, 달빛이 밝아 어둠 속에 눈이 부시다. 

 종이달은 아직 멀었다고 달님이 조용히 말해 주었으면. 









How come I'm so alone ther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I went up to a window
Lightning banging on the cymbals
I ripped into the night
Came storm into your eyes



My horse had worked the fields too long
My bear had lost its innate calm
It's true enough we're not at peace
But peace is never what it seems



Our love is not the light it was
When I walk inside the dark I'm calm
Where we look for where we went
It's only echoes in the melody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We waste time on blame and weak revenge
Waste energy and projections
We're living proof, we gotta let go
And stop looking through the halo



We carry on as if our time is through
You carry on as if I don't love you
And so we find the way is out
To cut the heart out of the doubt now



The room's full but hearts are empty
Like the letters never sent me
Words are like a lasso
You're an instrumental tun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How come you never go there?
How come I'm so alone there?


-feist, 'how come you never go there?'-metals 수록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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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30 17: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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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1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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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30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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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17: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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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2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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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4 06: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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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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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4 07: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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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5 1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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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7 1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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