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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일의 엘불리 - 미슐랭★★★, 전 세계 셰프들의 꿈의 레스토랑
리사 아벤드 지음, 서지희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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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메이저 신용카드로 계산 가능.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점심, 저녁 식사 가능. 가격대는 비싼 편. 로즈 가이드에서는 20점에 17.5점 기록, 미슐랭에서는 계속 1위. 스타일은 모던. 지금은 요리연구소로 변모한 스페인의 레스토랑, 엘 불리.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문객의 모국어로 인사하는 서버가 테이블을 안내해준다. 와인은 선택할 수 있지만, 요리는 선택 불가하며 코스 구성은 50여 종. 한 입, 한 입, 입 안에서는 놀라운 경험이 펼쳐진다. 물론 어떤 레스토랑에서는 명함을 소스에 찍어 먹으라는 서버의 안내에 당황한 적도 있고(명함은 감자 전분으로 만든 것으로, '미각에의 새로운 경험'이라는 글귀가 찍혀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달지 않고 짭짤해서 놀란 적도 있었다. 계란인 줄 알았는데 캐러멜 소스를 입힌 아이스크림과 마멀레이드여서(노른자 깨진 것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후문) 재미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귀, 눈, 코, 손끝, 입술, 혀끝.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다다르는 새로운 경험. 음식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음식에 대한 경험이 없을 수는 없다. 엘 불리는 '평범한' 단순한' '상상할 수 있는' '상식적인' 모든 선을 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는 그 한 자락이 여기 이렇게 리사 아벤트의 취재로 드러났다.


 


 

엘 불리를 이끌었던 페란 아드리아는 돌가루도 흥미롭다면 요리 재료에 활용했을 인물이다. 거리낌이 없고 막힘도 없다. 단, 자기 자신을 모방하는 것이라 해도 모든 모방은 진부하다. 정작 반응은 시들했지만 페란 자신이 시즌 동안 좋아했던 요리 중 하나가 장미꽃잎 아티초크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에 굶주린 사람이다. 천성이 직관이고 창조가 직책이다. 아이스크림은 왜 달콤해야 하는가? '적당히'는 없다. '어머니의 손맛'은 그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분자요리라는 명칭을 정작 페란은 싫어한다지만 로마 시대에서 출발한 그 개념을 현대에 들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이가 바로 페란 아드리아이다.

 

 

 

 그렇다면 분자요리란 무엇일까. 그 기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철저하게 분석, 연구한다는 개념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재료의 질감, 조직, 화학, 물리 작용까지 분석하여 변형하거나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바로 분자요리이다. 두산 백과에서 찾아보니 올리브 오일도 액화 질소로 순간냉각을 거쳐 아이스크림으로 만들면 전혀 다른 새로운 맛과 질감이 생겨난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는 송아지, 돼지, 양, 닭을 마트료쉬카 처럼 만들어 서빙했고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천연재료를 고무, 껌 등과 같은 비천연적인 재료로 융합하여 케이크를 산처럼 쌓아올리는 세트피스를 활용했다고 한다. 어떠한 법칙도 근거가 필요한 법. 본격적인 분자요리는 물리, 화학과 함께 등장했다. 라부아지에의 맑은 육수, 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 마이야르의 마이야르 반응. 이들이 소개한 것은 음식의 화학 작용과 반응이었다. 마이야르 반응만 하더라도 고기를 구우면 탄수화물과 아미노산이 고온에서 결합, 아로마 분자를 발생시킨다는 학설이다. 생화학과 물리, 분자생물학은 그 미세한 부분을 파헤쳐 새로운 길을 연다. 1988년에는 에르베 티스(프랑스, 화학자)와 니콜라스 커티(헝가리, 물리학자)는 시칠리아에서 요리를 물리, 화학적 측면에서 분석하는 심포지엄을 갖는데 여기서 바로 분자물리학 요리, 즉 분자요리가 그 이름을 갖게 된다. 요리에 대한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들은 계량하고 관찰하고 분석한다. 이론과 관찰, 분석과 집중을 요구하는 현대의 새로운 요리의 절반은 이 심포지엄 이후 더욱 공고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칙과 고집. 경험과 상상. 패기와 열정. 끈기와 노력. 짝으로 이루어서 더 완전해지는 조합이 있다. 엘 불리는 이 모든 조합을 그러모아 창조를 하는 요리 연구실이었다. 레스토랑을 들어서는 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일깨워준다. 모든 것이 구태의연하고 케케묵어도 엘 불리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살아있다면 먹어야 하고 먹어야 한다면 새로워야 한다.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은 실은 태초의 도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화학과 물리. 상상력과 직관. 페란 아드리아의 레스토랑 엘 불리에서는 음식이 새로운 경험이 된다. 요리는 낯선 곳으로 가는 문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180일간의 중노동과 엄격한 규율이다.

 

 


 

 엘 불리는 일 년 중 180일만 문을 연다. 매년 실습생을 바꾸는데, 그들은 모두 무보수로 일한다. 케모, 케모를 외치며 군대와도 같은 엄격한 곳에서 180일을. 별 다섯짜리 주방에서 일하던 이도 있고 생화학 석사도 있다. 엘 불리 앞에서 텐트를 치고 뽑아달라고 애원하여 들어간 이도 있다. 그리하여 모인 이들이 하는 일은 토끼 귀 손질하기, 장미꽃잎을 데쳐서 아티초크 모양으로 만들기. 말미잘 촉수 제거하기. 우유에서 굳은 우유 단백질을 걷어내기(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걸로 요리를 한다). 옥수수 다듬기. 손상 없이 굴 껍데기 까기. '자, 이제 창조를 시작할 거야'라는 페란의 말에 모두가 아이디어를 내기도 한다. 물론 그중 아주 극소수만 채택되거나 변형된다. 

 그리하여 나오는 메뉴는 다섯 시간에 걸쳐 오십여 가지로 나뉘어 서빙한다. 칵테일은 우메보시와 소금으로 만든다. 크림에 버섯을 3밀리가량 두께로 썰어 붙여 민트와 함께 서빙한다. 안초비는 요구르트와 함께 낸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든 조합이 엘 불리에서는 가능하다. 물론 이 메뉴는 늘 다르고 늘 변한다. 같은 것은 없다. 

 


 

 

 주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뛰지 말 것. 두 번 이상 지각하면 곧장 해고. 요리 맛은 이미 다 정해진 것이니 테이스팅 스푼은 필요 없다. 맛도 볼 필요 없다.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 것이므로. 메뉴는 분과 초 단위로 정확히 시간을 지켜 조리한 다음 서빙할 것. 청결히, 효율적으로, 빨리! 그래서 리사 아벤드의 시선을 빌어 엿본 엘 불리에서는 쉴 새 없이 '케모, 케모' 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본래의 스페인어와는 다른 의미로 케모는 주의, 비켜주세요, 뒤에 사람 지나가요, 서빙중입니다, 빨리, 빨리. 등등 모든 의미가 된다. 효율성의 극대화. 주관의 배제. 엄격, 깐깐함. 매와 같은 시선. 아, 나는 주방이 이렇게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 앤서니 보뎅의 키친 컨피덴셜에서는 페이스트리 담당이 전날 마약과 술에 찌들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대신 누군가 반죽을 해야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제이미 올리버의 학교급식 개혁 다큐멘터리에서는 주방 직원을 놀렸다가 학교 강당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스타 세프 제이미 올리버가 등장했다. 고든 램지의 헬스 키친에서 고든 램지는 끊임없이 고함을 지르며 욕을 했다. 그 모든 케이스를 '요리사들은 개성적이다'라는 명제 아래 다루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각자 개성의 표출, 작업의 방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페란의 주방은 공기가 가라앉고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실험의 공간이었다. 뉴욕 타임즈니까 특별히 2년만 기다리게 해주겠다든지, 자기 자신조차 모방하지 말라는 페란 아드리아의 말은, 그의 특징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옳다. 같은 라비올리를 만든다 하더라도 제이미 올리버와 고든 램지, 앤서니 보뎅과 페란 아드리아의 라비올리는 제각각 다를 것이며 개성과 구조, 아이디어와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런 각자의 스타일이 신선하게 와 닿는다. 우리는 이것을 요리라고 부르고, 미식이라고 하지만 끼니를 넘어선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모든 개성은 훗날 한 줄기를 이룰 것이다. 

 





메뉴란 한 편의 영화와 같아서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일 년 후 나를 다시 찾은 이에게 같은 영화를 보라고 할 수는 없다. 

-페란 아드리아

 


 



주방을 이야기하는 리사 아벤드의 시선에는 환상도 과장도 없다. 말없이 보고 과장없이 전한다. 엘 불리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에도 억눌리지 않는다. 페란 아드리아의 카리스마에도 억눌리지 않는다. 서른 명 실습생의 이야기를 다룸에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과장과 거짓이 없는 시선은 그 자체로 충직한 무기이다. 요리에 대한 애정과 결핍을 일부러 꾸미지 않는 그녀의 시선을 글로 읽다 보면 사진이 거의 없는 이 책이 전혀 아쉽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이다.


 

 





-영화 '엘 불리'의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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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회화의 혁명 - 도미에에서 샤갈까지
게오르크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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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조각, 건축, 공예. 내가 보는 어떤 사물, 대상. 손으로 만지고 책에서 보고 모니터에서 들여다보고 안다고, 혹은 모른다고 생각했던 영상. 발을 내디뎠던 공간. 그것은 책 속에만, 모니터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나친, 쌓아나갈 아름다운 어떤 것. 이러한 맥락에서 먼저 스스로 묻는다. "미술"은 무엇이며, 무엇이 "미술품"인가. 미술을 보는 시선은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미술품을 바라보았는가? 그리고 근대 미술의 출발점을 언제로 보아야 할까. 그리고 그 까닭은?

 

과연 미술(Art) 이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보자면 한자로는 美術 로 공간(空間) 및 시각(視覺)의 아름다움을 표현(表現)하는 예술(藝術). 회화(?), 조각(彫刻), 건축(建築), 공예(工藝)를 일컫는다. 그런가 하면 독일어로는 Kunst 라 적으며 예술, 미술, 문예, 예술 작품 이라고 번역하며 재주, 기술, 기예, 숙련, 솜씨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미술의 사전적 정의가 이러하다면 "사람이 만들어낸 무엇" 이라는 조건에 대입한다고 보았을 때, 미술품은 "사람이 만든 아름다운 것" 이라는 명제도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이 미술이라는 단어의 관념은 과거 수만 년 전에도 같았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술은 저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의 말을 빌리자면 미술은 곧 존재하는 관객, 혹은 언젠가 존재할 관계에 대한 반응이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 과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근대에 와서야 가능해졌다. 서양 미술에서 20세기 이전의 미술은 정복자를 위해, 교회를 위해, 전제군주를 위해, 후원자를 위해 존재했다. 지위가 낮았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존재, 미술가는 당연히 자신의 개성보다는 지켜야 할 법칙을 따랐으며 그것을 위해 기술 습득을 해야 하는 존재였다. 자유 확대, 각종 산업, 과학의 발달로 미술가는 이제 개인의 느낌을 그릴 자유를 얻었으며 미술품은 반드시 무언가를 "재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변화의 시작점에서 출발한다. 게오르크 슈미트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10회에 걸쳐 도미에, 시슬레, 고흐, 고갱, 마티스, 칸딘스키, 세잔, 브라크, 클레와 샤갈과 같은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들려주었으며 그것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출간한 지 사십 년이 훌쩍 넘은 이 책의 원제는 "Kleine Geschichte der Modernen Malerei", 즉 근대 회화의 작은 역사이다. 이제 '근대 회화의 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왔다.

 

글에도 첫인상이 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의 글에 대한 느낌은 클라이브 벨과 로저 프라이로 대표할 수 있는 형식주의와 다른 느낌이다. 사회의 분위기와는 거리를 두고 미술 그 자체로서의 형식미를 찾으려 했던 그들과는 달리, 야우스와 잉가르텐이 주장한 수용미학으로서의 해석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닫힌계" 로서의 미술품이 아니라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주는 자세. 저자는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작업에 대한 아르아드네의 실을 풀어준다. 그 실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라비란트의 입구가 펼쳐진다. 아름다운 말이 왜 아름다운지, 아름다운 말에 적용하는 미의 규칙과 아름다운 꽃에 적용하는 미의 규칙이 왜 달라야 하는지를 밝힌다. 물고기의 밤 노래가 세이렌의 밤 노래와 다른 까닭이 있다. 그런 모든 이유가 그 화살촉을 겨누는 한 점, 그 점에 대해 게오르크 슈미트는 조용히 천천히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초콜릿의 단맛을 느끼기 위해 미뢰의 어느 부분이 작동해야 하고 특정 주파수의 소리를 듣기 위해 청신경이 활동해야 하듯 흐르는 것이 아닌 쌓이는 것으로의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회화 열 점을 골라 소개하고 미뢰와 청신경이 작동하도록 감각을 깨우도록 하고 있다.

 

 

여기 이 책에서 소개한 작가들의 작품, 네 점의 그림이 있다. (작품은 될 수 있으면 바젤 미술관에서 이미 발행한 원색판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경제적 이유로 선정, 제한되었다는데 나는 여기서 다른 작품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이 네 점의 그림을 보면서 이 작품을 보는 관람객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작품 중에 가장 익숙한 작품은 무엇이며 어떤 점이 훌륭한가? 그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리는 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게오르크 슈미트의 의도에 따라 답을 하자면 어쩌면 이 그림을 보면서 나는, 우리는 서양미술의 한 단면만을 보아서는 명확한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 서양미술사 책(H.W 잰슨 & A.F 잰슨)의 책을 따라 서양 미술을 네 시기로 나눠 보자면 첫째는 "콘트라포스토" 라는 위대한 발견을 거쳐 뛰어난 사실주의를 완성한 그리스 시기로. 둘째는 지오토의 공간개념의 혁신과 함께 교회의 권위, 신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던 중세. 셋째로는 여러 미술적 표현기법과 예술가의 위치를 격상시켰던 이른바 3대 거장(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이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 르네상스와 그 뒤를 이은 바로크, 로코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넷째로는 신고전, 그와 대척점을 지니는 낭만을 거쳐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는 시기인 근현대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흐름 속에서 각자가 어떻게 현대 미술을 열고, 그 의미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각자 공평하게 왜 다루어져야 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 작가가 책에서 소개한 첫 화가는 오노레 도미에(Honor? Daumier, 1808 ~ 1879) 이다. 강렬한 풍자로 시대를 날카롭게 보여준, 도미에는 "엄격한 명료성"을 반대하여 낭만주의적 화풍을 구사한 들라크루아(1798~1863)와 동시대 인물이며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사실주의(잰슨의 말에 따르면 쿠르베는 realism 이라는 단어를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와 유사한 개념으로 인식했다고 하였다.)적 회화를 구사한 쿠르베(1819~1877) 와도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게오르크 슈미트는 이 네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화가로 도미에를 등장시켰다. 과연 왜일까 

 

 

 

 

 

 

도미에  :    <가르강튀아>             /              <삼등열차>

출처 http://www.artble.com/artists/honore_daumier/more_information/biography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가 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개인의 재산축적이 가능해지는 시기. 지금 내가, 혹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사는 시기의 토대가 마련된 시기. 잉여물이 생기고 자본주의의 토대가 만들어진 시기. 거꾸로 말하자면 부자와 더 가난한 자가 생긴 시기. 계급 대신 사슬이 생긴 시기. 바로 도미에는 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자신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술가는 누군가에게 봉사하거나 무엇을 미화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도미에는 시대를 그것을 보고 진실을 기록하며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근대 회화의 문을 열었고 게오르크 슈미트는 도미에의 날카로운 눈과 손을 우리에게 얘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남긴 삽화에는 계층과 군중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실었는데 단순하고 거칠고 미완성인 듯한 묘사는 삼등 열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단점이야말로 도미에의 특징이며 장점으로 다가온다. 그 까닭은 그가 나타내는 진정한 휴머니티에 있다.

 

도미에가 보았던 시대의 렌즈 속에서 등장하는 계층과 군중을, 시간과 시간 사이 존재한 수많은 이들의 존재를 게오르크 슈미트가 소개하는 나머지 화가들-시슬레, 고흐, 고갱, 마티스, 칸딘스키, 세잔, 브라크, 클레와 샤갈-의 회화에서 어떻게 발견하고 읽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말한다. 보이는 대로 볼 것. 그러나 주의 깊게 볼 것. 그러는 한편 역사성을 잊지 말 것. 기왕이면 몇 가지 기준-선원근법, 색채원근법, 물체성, 재질성, 해부학적 비례, 대상색, 대상의 발언-을 가지고 읽어내고 느껴보라고 말한다.

 

이제 서양미술사로 너무나도 유명한 E. H. 곰브리치가 말했던 세 작가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보자. 곰브리치는 <19세기 후반,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라는 장에서 세잔, 고흐, 고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세잔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균형과 질서의 감각이었다. 반 고흐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만 집착하여 빛과 색의 광학적 성질만을 탐구한 나머지 미술이 강렬할 정열을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다. 고갱은 그가 본 인생과 예술 전부에 대해 철저하게 불만을 느꼈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불만의 감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 세 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554-555)

 

각각 입체주의(Cubism), 표현주의(Expressionism), 원시주의(primitivism) 로 흐르게 되는 이 세 명의 작가들이 현대 미술에 기여한 바는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슈미트 또한 이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그는 세잔, 고흐, 고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잔은 새로운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대상의 발현을 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사과나 식탁보, 유리컵, 나뭇잎,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는 이미 대상으로서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인상파의 경우에는 상으로서의 관심이 비록 약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세잔에서는 그것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세잔이 그의 형태를 자에서 얻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만, 그 형태를 자연에서 독립시키고 있는 것 또한 의심할 바 없습니다. (144p)

 

... 고흐가 색채 표현에서도 크게 발전하여, 색채의 '글자 그대로의 진실'에 대해, 즉 자연주의적인 대상색에 대해 (그의 말대로) '거짓을 저지르고', 대상 색과는 별개로, 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 이상으로 진실하게 될 때, 그때 반 고흐의 성숙함이, 그의 전모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반 고흐에게 색채는 물질로서의 성격과 표현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조되면서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찬송가와 같이 현실 긍정을 표현하는 색채로 됩니다. 하지만 인상파의 낙천주의와 성숙된 반 고흐의 현실 긍정은 처음부터 다른 것입니다. (59, 64p)

 

시슬레나 고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갱의 그림에서도, 회색이나 갈색의 색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체가 색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갱 역시 고흐처럼 인상주의를 통과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고흐가 그의 '자장가'에 대해 "하나의 조그만 색채 음악의 시도"라고 한 말을 기억하실 테죠. 순수한 색채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 이것은 고흐뿐 아니라 고갱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악기 또한 인상파 화가들의 그것처럼 스펙럼의 6원색, 즉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로 조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순수한 색채의 멜로디를 산문적인 회색이나 갈색에다 섞을 필요가 조금도 없는 것이죠. 노래로 부르는 오페라를 언어로 말하는 연극으로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72p)

 

잠시 고흐의 해바라기를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흐의 해바라기. 누군가가 그린 해바라기가 있다면 그 해바라기가 왜 눈앞에 펼쳐진 것과 다른 '특별한' 해바라기가 되는 것일까? 화가는 무엇인가를 그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고백이며 약간의 과시가 섞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작품은 시대 속에서 어떻게 호흡하는가? 예술 발전의 일정 시기에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개인으로 존재하는 화가와 집단으로 존재하는 관객이 맺는 관계는 어떻게 나타날까? 어떠한 선택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선택의 척도를 살펴보는 작업이 회화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임을 게오르크 슈미트는 일러준다. 시간이 이루어낸 역사 속에는 필연적으로 연결 고리가 있기 마련이다. 홀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고리.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고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개인의 시간마저 바꾸는 유일무이한 어떤 것. 게오르크 슈미트는 그런 '어떤 것'을 찾아 관객에게 소곤소곤 전한다.

 

새로운 어떠한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저자에게도 고흐는 현존하는 기법과 완벽히 다른 미술가였다. 빛 대신 어둠만을 보기. 투명하지 않고 끈적한 흙덩이 같은 바람. 해부학상으로 완벽한 손이 아닌 일하는 손을 그린 화가. 게오르크 슈미트는 고흐에게 중요한 것이 언제나 그림의 가장 내적인 토대였음을 지적한다. 그의 회화가 지나치게 어쩌면 개인 중심적이어서 도리어 회화사에서 고갱보다 뒷전인 것을 고려하면 기법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균형 감각이 느껴지는 선택이다.

 

회화는 홀로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산업과 정치. 산업화와 민주주의.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역사는 개인의 자유 취득의 역사이다. 누구나가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 정반합과 작용 반작용의 시간. 결국, 각종 사조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서로 섞여 지금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지금의 모던 아트, 근대 회화의 시작에 고흐, 고갱, 세잔이 있었다. 고흐의 진실에의 집중, 고갱의 아름다움에의 집중, 세잔의 형태에의 집중, 이들의 작업이 바로 근대 회화의 시작이었다면 그 시작 이후 또 다른 시작은 없을 것이다. 게오르크 슈미트는 "우리는 더는 새로운 '히바 오아'를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본문96 페이지)"이라고 전한다.

 

 

마티스 <붉은 화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표현성이다. ...... 그러나 내가 말하는 표현성이란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내게 '표현적'인 것은 그림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배열 방식이다. 즉 사람이나 물체, 그들 주위의 텅 빈 공간, 비례 등 이 모든 것이 각각 표현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앙리 마티스

 

지금 우리가 보는 회화의 새로운 기법의 틀을 마련한 화가로 저자는 마티스를 소개한다. 초록색 풀잎의 붉은 반점, 주황색 건물의 청색 그림자, 파란 하늘의 주황색 구름, 건물에 비치는 가장 밝은 노란색, 보라색으로 보이는 나무의 그림자 등으로 보색대비를 통해 색채의 회화를 구현한 시슬레와 모네는 회화의 기법적인 측면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화가들이다. 반면 도미에, 고갱이 사회적인 면을 강하게 부각했다면 마티스는 초기의 인상주의를 끝까지 끌고 나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묘형의 세부에 있어서는 고갱도 고흐도 인상파에 비해 다시금 더 엄격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노린 것은 사물 그 자체였지, 빛과 색채에 의한 사물의(외적인) 현상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앵그르와 같은 고전파 미술의,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세부적 묘사의 충실성에 비교한다면, 고갱이나 고흐의 데셍은 표현상으로나 조형상으로나 전례없이 대담한 본질적인 것으로의 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이 묘형을 조형상 본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야말로 마티스가 가장 절실히 수행했고 따라서 장대한 효과를 거둔 것입니다. (100p.)

 

마티스가 지닌 미완성의 재주는 곧 보색대비를 이용한 색채의 회화를 이룩한 인상파와는 정반대로 색감의 변화를 최대한 억제하여 평면과 입체의 틈을 보여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세잔이 하지 못한 장식적인 표면 효과를 마티스는 선 몇 개와 유기적인 각각의 요소가 이루는 관계로 이룩해낸 것이다. 야수파의 마티스가 이루어낸 파급 효과가 고흐와 고갱의 영향까지 아울렀다면, 그를 초월한 칸딘스키는 근대 미술의 문을 지나 추상 미술의 세계를 연다. 대상의 발현을 높이고 대상에서 비대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던 사람. 슈미트는 몬드리안과 함께 추상의 시대를 연 칸딘스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칸딘스키 <구성>

 

1910년 칸딘스키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가, 그의 붓을 아예 붓 자체에 맡기고 선과 색채로는 어떠한 대상도 묘사하지 않을 정도가 됩니다. 말하자면 선과 색채 그 자체를 조형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지요. 우리가 마티스와 함께 앞에 서서 머뭇거리던 그 문이 밀쳐져 열린 것입니다. ...... 칸딘스키는 '자유로 가는 문이다' 하고 환성을 질렀지요. (119p)

 

'자유로 가는 문'은 어느 날 한순간에 열린 것이 아님을 게오르크 슈미트는 지적한다. 이미 회화에서는 추상 미술로의 변화가 조금씩 일고 있었다. 1908년의 칸딘스키의 작품에서는 대상이 색채와 선을 위해 존재하다가 1910년에는 추상을 향한 움직임을 서서히 드러낸 것이다. 이는 후기 상징주의의 장식미술 분야에서 먼저 나타났으며 아폴리네르는 입체파가 비구상 미술을 가능케 하여 추상을 향한 첫걸음을 마련했다 평하기도 한다. 한편 게오르크 슈미트가 전하는 칸딘스키의 작품은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붓의 착상으로서 모든 것이 끝 가는 데 없이 풍부하다. 바우하우스 시대의 칸딘스키, 비대상 미술의 위대한 입법자.

 

게오르크 슈미트는 각 작가의 작품의 유기적인 성질을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회화의 알레고리, 유기적인 연결고리, 새로운 의미 구조, 화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해내는 생각의 과정을 독자는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는 브라크를 이야기하며 정물과 추상의 울림이 들려주는 리듬을 소개한다.

 

 

 

브라크 <음악가의 책상>

 

인상파가 자연의 광선을 분해하여 스펙트럼의 요소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림에 순수한 멜로디를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큐비즘은 대상의 자연적인 형태를 분해하여 입체기하학적인 요소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림에다 순수한 리듬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상파 회화에서 순수한 색채를 보는 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또 순수한 리듬을 보는 법에 익숙해질 수 있겠지요.

 

그제서야 우리는 브라크의 정물화를 보면 볼수록 그 풍부하고 기품 있는 울림으로부터 떠날 수 없을 것이며, 몇 겹이고 겹쳐진 형태관계를 추적해도 싫증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음악가의 책상]이라는 표제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 실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큐비즘이라는 것은 결코 파괴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음악의 정신에 의한 회화의 재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1912년에 브라크가 그린 [음악가의 책상]과 흡사한 구조를 가진 또 한 폭의 그림이 [요한 세바스찬 바흐에의 경의]라는 표제로 된 것을 알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163p)

이 설명을 읽다 보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이 책에서 클레를 소개하지 않았다면 서운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목으로 화가가 그 의미를 은유성을 관람자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화가. 인간의 어리석음. 기계화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자신이 창조해낸 기호로서의 회화 언어가 보는 이로 하여금 의미와 인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랐던 화가. 냉소, 불안, 노골적이면서도 은근한 유머와 아이러니의 화가. 서늘한 회색으로 색채의 울림을 더한 화가. 게오르크 슈미트가 소개하는 클레는 멜로디를 운반하는 화가이며 가장 음악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미술사에서 클레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온갖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얘기하는 클레는 회화 언어가 드러내는 주제가 대상의 특징에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 대상 체험의 수문을 연 화가이기도 하다. 슈미트의 관점에서 볼 때 브라크가 바흐의 언어를 그렸다면 클레는 리듬과 멜로디의 기능을 자신의 엄격한 형식 속에서 나타낸 색채의 화가였다.

 

클레는 색환에 배열된 순수한 색채를 가능한 모든 뉘앙스, 모든 멜로디로 엮어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기 속에 다시금 따스한 갈색조와 서늘한 회색조를 포함시킵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는 색채 면에서도  정당성 띠게 됩니다. 즉 단순한 기하학적인 윤곽 속에서 그들 색채가 한결 순수하게 울립니다. 그뿐 아니죠. 스스로 멜로디적인 것이 되기 위해 그의 색채는 멜로디를 짊어진 자로서 단순한 기하학적인 평면의 리듬을 구합니다. 그 때문에 클레의 간결한 '직사각형의 그림'은 가장 멜로디적인 것이 됩니다.(179p)

회화는 때로 이렇게 흥얼거린다. 눈을 감고 책 속에 소개된 열 점의 회화를 떠올려보면 시슬레에게서는 드뷔시가, 고흐에게서는 베토벤이, 고갱에게서는 마리아 칼라스가, 브라크에게서는 바흐가, 클레에게서는 R.E.M이 들린다. 이들은 모두 연결되어있으면서 제각각 목소리를 지닌다. 게오르크 슈미트가 소개하는 이들의 회화는 각각의 대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통을 계승한다. 부정하거나 강화한다. 이 화가들의 회화에 게오르크 슈미트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는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저 스스로 호흡하는데, 그 호흡을 이끌어낸 이는 작가라 하더라도 호흡을 지켜보는 이는 현재의 관람객일 것이다. 어떤 그림을 어떻게 보고 읽어야 할까. 그 아름다움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까닭으로 어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발현의 문제이다. 원래 그런 그림은 없다. 관람방법에야 지구에 현존하는 인구보다 많은 방법이 있겠으나 어떤 의미가 있는 그림을 어떻게 볼지, 심미성에 눈길을 둘지 사회성에 마음을 둘지 그림 값에지갑을 둘지는 보는 이의 기준에 달렸을 것이다. 게오르크 슈미트가 제안하는 방법은 미술사의 한 단계에서 특색이 있는 그림들을 예술 발전에서 이루어진 걸음, 계단을 따라가는 것. 그리하여 그 변화를 읽어 보자고 그는 권유한다.

 

여기 등장하는 10명의 화가.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던 도미에서부터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을 기록하려는 환영성을 제거하고 우리 눈이 그대로 지각하는 대상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던 인상주의자들의 노력, 이후 현대미술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세잔과, 고흐, 고갱. 1905년 열렸던 살롱 도톤느 전에서 격렬한 색채의 혁명(그뿐만 아니라 전통적 공간개념파괴)을 시도하며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열었던 마티스, 추상의 문을 연 칸딘스키, 사물의 분해와 재현을 통해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브라크, 입체주의와 오르피즘을 섞어 또 다른 울림을 만든 클레,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꿈꾸는 세계를 보여준 샤갈에 이르기까지. 표면상으로 보면 불과 몇 십 년이라는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작가들과 그들이 남긴 기록이지만 미술사의 흐름에서 보면 모두 큼직한 발자취  지닌 작가들이다. 그들의 언어를 보다 읽기 쉽게, 수용자의 편에 서서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Kleine Geschichte der Modernen Malerei(근대 회화의 작은 역사)"에서 회화가 어떻게 이전 시기의 문턱을 넘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회화를 이야기하는 그의 음성은 전공 개론서에서는 듣지 못했던 친근하고 다정한 높낮이다.



 

[fugue no.1 BWV 846]

 

Prelude and Fugue No. 1 in C major, BWV 846.

from the Well-tempered Clavier by Johann Sebastian Bach. Played by Friedrich Gulda; recorded 1972, MPS-Tonstudio, Villinge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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