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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Zu der Zeit, als ich noch auf Baeume klettertelang, lang ist's her, viele Jahere und Jahrzehnte, ....
오래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 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하늘은 낮게 깔리었던 늦은 오후, 나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손에 넣었다.
내 주먹보다도 작은 청회색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야옹, 하고 울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찌익 짹 꺄앙 하고 우는 작은 아기 고양이였는데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온 계기는, 길에 혼자 앉아있어서였다. 우연과 우연의 조합이건만 우주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을 것이었다. 필연이라고 추측한 나는 마음대로 새끼 고양이를 쓰다듬고 따뜻한 수건에 싸서 잠을 재우려다 마침내는 어머니에게 꾸지람과 온갖 잔소리를 듣고서 본래의 장소에 되돌려 놓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기 고양이는 아마 어미 고양이가 꽁꽁 수풀 속에 숨겨둔 것이었을 것이고 동물의 습성에 대해 몰랐다고 하는 것조차 지금은 제대로 된 변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었으며, 하물며 당시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어미 고양이는 아기를 숨겨둔 채 사냥을 나갔다가 자기 냄새가 아닌 낯선 인간 냄새를 갖춘 자기 아기를 버려두고 떠났을 수도 있고, 다행히도 새끼로 인지하고 데려갔을 수도 있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는 잘못을 저질렀다. 잘못했다는 이 간단한 말을 간결하게 내뱉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조용히 지켜보고 숨죽인 채 듣다가 마지막에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끝까지 억누른 채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그 한마디를 위해 수없이 변죽을 울리고서야 기필코 하고야 말게 되는 사건도 있으니, 좀머 씨 이야기가 그렇다.
오래전의 더 오래전, 키와 신발 사이즈와 날 수도 있었을 만큼 가벼웠던 몸을 이야기한다. 쥐스킨트의 묘사는 독일어의 전형이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 이 실오라기 하나 더 입히고 덜 입힌 사람의 마음과 현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독일어만큼 적합한 언어가 없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비유, 은유, 직유를 거치지 않는 낱말 하나의 무게를 쥐스킨트는 철로 된 공으로 만들어 가볍게 공중에서 떨어뜨리니, 이 모든 것이 낱말과 쉼표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엔 좀머 씨의 느낌표 하나로 끝맺는 짧고 강한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악수가 비위생적이어서 하지 않으며 누구든 자기 거처와 근황을 조금이라도 누설하는 자와는 연락을 끊고 낡은 풀오버를 계속 걸치고 사는 작가, 심지어 입술에 손가락을 댄 사진마저도 초판본에 실렸다가 아마도 작가의 요청으로 쇄를 거듭하면서는 삭제한 저자, 인터뷰를 위해 헬기를 타고 가서 사적인 모든 것은 극비로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제한된 인터뷰를 하는 사람의 소설.
재독의 긴장감. 또렷한 기시감과 줄거리를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는 여유, 묘사를 더 즐길 자유.
이것을 누리며 바람이 휘몰아치는 오전, 멀리서 선물 받은 수국 커피를 내리고는 첫 장을 펼쳤다.
이야기는 어떻게 말을 걸까?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아이가 아이였을 때를 이야기하는 빔 벤더스의 계보를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날지는 않은 아이의 설명으로 시작한다. 나무타기를 즐기고, 몸이 가볍고, 아버지와 빗길을 뚫고 경마장을 간다. 짝사랑하는 아이가 월요일에 집이 가자는 말을 한 것으로 그 아이에게 보여줄 것을 계획하고, 두근거리며 마음 설레하다가 불발되자 풍경이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고까지 말한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은 또 어떠한가. 아직 자기 몸에 맞지 않고 익숙지 않아 자전거를 타려면 좌우 앞뒤에 아무도 없어야 하고, 지나가기만 해도 사납게 짖는 테리어도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에게 역경이 닥친다.
아홉 살 소년에게 닥친 역경은, 어른에게 평화로운 오후이면 족하다. 산책하는 사람들, 앞에 뭔가 지나가면 짖는 개, 그저 시간에 맞추어 와서 완벽한 연습물을 내보이는 교습생을 원하는 미스 풍켈, 그리고 하필이면 건반에 들러붙은 코딱지!
그러나 이것은 어떨까.
지팡이를 메트로놈처럼 땅에 부딪히며 쉴 새 없이 어디론가 떠밀려 가는 좀머 씨가 있다.
그는 아버지와 소년이 폭우와 우박 속에서 마주친 사람이고, 짝사랑에 빠진 소년이 풀이 죽었을 때 규칙적으로 또 그 소리를 들려주며 조그마한 점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행인이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이 자살을 감행하려 할 때 하필 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무언가를 먹고 마시다가 얼른 일어나 다시 걸어가 버린 사람이며, 마지막엔 호수 속으로까지 걸어 들어간다.
한마디로, 그는 언제나 소년이 겪는 가장 극심한 질풍과 노도의 순간에 등장하여 무심히 떠밀려 간다. 죽자. 죽어버리자. 하고 가장 고뇌에 찬 고민을 할 때에 나타난 그는, 아마 아무도 본 적이 없었을 사람 같은 광경까지 보여준다. 즉, '내'가 '나'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사람, 객관화를 시켜주는 이야기 속의 타자이다. 읽어가며 이런 멋대가리 없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이 책이 굳이 1992년 한국에 번역본으로 나왔다가 2020년 다시 예쁜 장정으로 다시 나올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있지 않을까?
소설책이 세상에 나오는 덧없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는 자성과 자각이 있지 않을까.
여러분, 책을 읽읍시다. 반성 좀 합시다. 그리고 우리 좀 더 사람답게 살아봅시다. 라고 마음에 1밀리미터도 와닿지 않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침을 좀 더 세련되게 당의에 싸서 내어놓는 일. 그것이 소설가가 하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평화로 덧칠된 행복한 유년 속 역경을 떠올리며 섬세한 묘사에 감탄할 수도 있고, 상뻬의 능란한 삽화에 반하며 훑을 수도 있다. 작가의 펜을 떠난 단어들은 그 자체로 유기체가 되어 물고기의 밤 노래를 하게 되니까. 즉, 읽기와 감상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진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 아름다운 풀숲 속에 숨겨둔 지팡이 하나 정도는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이야기가 누릴 수 있는 지복이 아닐까.
숨어 있는 죽음 하나.
화자의 아버지는 좀머 씨에게 외친다.
Sie werden sich den Tod holen!
당신 그러다 죽겠어요!
그러고는 그 유명한 한마디가 나오나니,
Ja so laßt mich doch endlich in Frieden!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아직도 숨겨진 죽음 둘.
Mann ... der sein Leben lang auf der Flucht war von dem Tod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
그리고 마침내 좀머 씨가 사라지기 전 드러나는 세 번째.
Schau, da geht Herr Sommer. Er wird sich den Tod holen!
저기 좀머 아저씨 간다. 저러다가 죽겠다!
이 책 속에서 좀머 씨의 이름이 반복되고 그의 기이한 걸음걸음이 다양하게 변주되는 동안, '나'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이유를 만들어주는 일, 시간의 정황상 그는 전쟁의 광휘에 휘말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타당하다. 변죽을 울려야만 짤막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 억누르고 있는 마음 속 진실을 풀어놓는다는 것마저도 아니라고 말해야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임이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반복될 때, 다시 선연히 그 외침이 침묵으로 다가온다.
책 읽기가 주는 기이한 공감각. 읽는 자와 읽히는 글자의 대화.
그리하여 그를 보는 순간 걸음걸음마다 '나'의 호흡은 사실 극적인 비일상, 실망, 비애였다가 마지막에는 하나의 정물처럼 무관심이 될 때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 남자를 무엇이라 보아야 좋을지는, 읽는 사람마다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