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전 

맥주를 사러 가면서 다동이 집 앞을 지나가는데 

다동이가 나를 보더니 바로 입맛부터 다셨다. 혀가 한쪽으로 말리면서 좌우로 오감. 

혀를 수직으로 늘어뜨리기만 할 줄 아는 줄 알았더니. '개저'된 다동이.


오며 가며 다동이에게 간식 주고 사온 맥주를 다 마심. 

많이 마신 건 아니고 더 마시고 싶기도 하지만 그만 마시고 자기로 하고 

자기 전의 포스팅을 하기로 했다. 


Six Feet Under에서 루스의 저 대사는 

장례식장 가업이 너무 힘든 네이트가 "이 일이 힘들지 않아 엄마? 이 일이 세상을 어둡게 보게 만들지 않아? 

하다 보면 이것도 좋아질 때가 오긴 해? 이 우울함은 사라지는 거야?" 이런 질문 했을 때 답으로 나오는 말이다. 


It gets better, but it never goes away, no.  


어쨌든 이 드라마가 걸작의 최소기준은 훌쩍 통과한다는 게 이런 대사까지도 

어김없이, 해당 인물의 개별 상황만이 아니라 '인간조건'에 대한 코멘트로 보이게 함. 

나는 참 모든 순간에 감탄하고 울고 웃으면서 여러 번 봤다. 2000년대는 식스핏언더의 연대. 


한 20년 뒤에도 건강하고 살아 있다면, 그리고 글을 쓰고 쉽게 발표할 수 있다면 

이 드라마를 추억하고 옹호하는 글을 그 즈음 연달아....... ㅋㅋㅋㅋㅋㅋㅋㅋ 한 20부작 

쓰면 좋지 않겠냔 생각이 지금 막 듬. 상들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평가된 편이기도 하고 

그런데 문학사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듯이, 지금 이것보다 고평가되는 어떤 드라마들보다 20년 뒤라면 

이것이 더, 걸작으로 남을 것 같단 생각도 든다. The Sopranos를 예로 들고 싶어졌는데 ... 그러게 어떨까. 20년 뒤라면. 



아마 핑크 플로이드의 매력과 비슷한 면 있을 것이다. 

로버트 해리슨에 따르면 핑크 플로이드는 "청소년기의 앙스트(angst of adolescence), 이것을 가장 잘 포착한 밴드." 


식스핏언더는, 세대 성별 인종 계급 불문.............  

살아 있음의 긴장, 살아 있음의 불안... 을 가장 잘 포착한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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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다면, 엠마는 눈의 힘으로 

샤를을 창 밖으로 던졌을 것이었다." <마담 보바리>에서 이 문장 오랜만에 생각하다 보니 

이 비슷한 일이 우리에겐 항상 일어나는 일 아닌가는 생각이 듬. 미국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정한 무엇이 오갈 때라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공기 벽, 혹은 공기 공 같은 것이 거리를 유지시키는 데 

반해 여기서는 다들 사람에게 스파이더맨. ; 이 사람에겐 내 편에서 어느 정도의 '막 대함'이 가능한가, 이게

우리가 자주 하는 판단. 다음 거미줄 던져서 옭아매거나, 옭아매고 던지거나. 옭아매고 끌어오거나. 던진 다음 

끌려 가거나. 


양인들 중에서도 교양인(.....)들에게, 정말 저럴 거 같다.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울프처럼 심지어 부부도, 그랬을 

것 같다.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뭐라 답할까. 특히 추운 곳에서,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곳에서 더 저런 경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가 하면 잉마르 베리만의 끈적(끈끈... 아니고)했던 여성편력은 이게 다 

쓸데 없고 하찮은 생각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또 그런가 하면, 뉴욕타임즈 서평 팟캐스트, 브래드 리스티의

작가 팟캐스트.. 로버트 해리슨의 Entitled Opinions는 물론이고, 이들 긴 시간 대화하는 형식 팟캐스트들 

오래 들어오면서, 이들이 저런 방식 대화를 저렇게 잘할 수 있는 이유 중엔 '언제나 유지되는 거리'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화 참여자들이 진지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사실은 남들이기 때문. 

만일 '우리가 남이가'라면, 상대에게 흡수됨, 상대에게 '맞춰줌'이 끝없이 일어나지 않을까. 


리처드 로티 타계 후 

그를 알았던 철학자들이 쓴 추모의 글들도 이 지점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개성과 그의 삶, 그의 철학을, 객관적으로 회고하는데 그러나 자기 기준, 자기 요구에 따라 그러기. 

자기를 거치는 객관성. ; 어떤 외적 압박(로티를 이런 사람으로 보이게 하라... 는 압박. 로티는 이런 사람이었다... 고 말하는 압박)도 부재하는 글들. 한국에서 이런 추모의 글은 드물게만 쓰여지지 않나. 


그러니까 심지어 학자들 중에서도

자기 기준, 자기 요구에 따라 탁월한 작업 하는 사람 있으면 

... '비난'을 하기도 하지 않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는 사람이 살고 있을 지옥을 잠시 상상해 봄. 얼른 나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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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가는 건 무섭고 싫은데 

겨울은 얼른 왔으면 좋겠으니 

............. (한숨) 


작년 여름 

36도 이런 날들 어떻게 살았을까. 

에어컨 튼다 해도. 사람이 바깥을 체험을 아예 안 할 수도 없고. 

하여튼. 



애초 자주 (늘) 하던 생각이긴 한데 요즘 특히 더 

내 형제들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관리 사회에서 감정, 지성, 지배' 이 주제로 생각한다면 

무한한 예들을 가까이에서 주는 이들. ; 엘리프 바투만이 보여주는 것같은 유머, 아이러니와 함께 쓸 수 있다면 

웃기고 슬프거나, 쓰라리게 웃길 여러 대목들의 원천이 되어줄 이들. 


사실 저 주제로 계속 생각하고 싶고 

"지성은 감정의 범주다: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아도르노의 감정 복권" 

제목은 달라지겠지만 대략 저 방향으로 페이퍼도 써야겠다 생각 하기도 했는데 

(.....)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에게 공감하지 않더라도, 이거 실은 그냥 '백퍼' 진실일 거 같은데

감정과 지성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언젠가부터 뭘 읽을 때, 저자의 감정 세계를(감정의 '프로파일'이라고 

허세스럽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여튼 그 세계도) 체험하고 감안한다. 가령 이글턴은, 얕고 기회주의자.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기회주의'가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걸까? 

(...........) 온갖 '늪'들이 이 주제에도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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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읽은 <미학이론>의 "사회"에 

통속(the vulgar)이 전면화하면서 비극성(the tragic)이 청산되었다... 는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애호하는 통속의 원형은, 치약 광고 속의 활짝 웃는 미인이라고. 


이 시대에 비극(비극성)의 의미, 역할에 대해 월터 카우프만이 쓴 글들이 있고 

<비극의 탄생> 말고 이 주제로 내가 읽은 건 그 글들이 전부일 텐데, 그런데 아도르노의 저 한 문장이 

카우프만의 글들은 주지 않았던 강력한 무엇을 주는 것 같다. 사실 어디서 똑같은 얘기를 이미 몇 번 본 거 같기도 하다. 

이 통속의 시대에 비극이 웬말이냐........ 같은 얘기. 김수영도 했을 거 같고. 


아도르노는 비슷한 얘기를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특히 "문화산업" 장에서 한다.  

이 전면 관리시대에, 인간에게 인간의 개성으로 남는 건 치약 광고 속의 하얀 치아, 냄새나지 않는 몸 정도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할 일은 성공의 요구를 수행하는 장치로의 자기 변신이다." 


그의 말들도 훼손없이 인용하기 참 쉽지 않다. 어쨌든 이 모두가 

"주체의 청산"을 말하기 위함이고 주체의 청산은 정신(지성)의 청산이며 그건 반드시 감정의 청산도 포함함에 대하여. 

"사랑은 언제나 더 사랑함이다." "그의 사랑은 그가 자신을, 그리고 타인들을 정복할 능력이 없음의 증거다. 이것이 그에게 

사랑의 충족을 막을 충분한 이유다." 



세상이 지금과 달라야 한다는 흔들림 없는 희망 같은 것. 

그것이 없는 '지성'은 지성이 아님. : 이런 게 아도르노 입장이기도 해서 

그에게 지성은 도덕의 범주이기도 하지만 감정의 범주이기도. 




*'관리사회'에서 감정, 지성, 지배.... 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던 포스트인데 

언제나 그렇듯이(그러듯이) 나중에; 이어서 쓰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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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6-1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 몰리님,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데미 무어가 맡은 역할 이름이 ‘몰리‘인데요, 혹시 몰리님 닉네임은 거기에서 온건가요?
@.@

몰리 2017-06-16 15:24   좋아요 0 | URL
아 아뇨 ;; ㅎㅎ ;;
제 닉네임은 Ulysses에서 몰리 블룸이 출전.
Yes, yes, yes, Yes! 그러는 몰리. 짧고 쓰기 좋은 닉네임;;
 



(75년판 The Stepford Wives에서 캐서린 로스. 

셔츠나 바지가 둘 다 완전히 요즘 스타일이다. 띠용; 이 영화에 놀라운 이미지들 가득한데

찾아보면서 이걸 올리고 싶어지게끔, 놀랍다.....) 


스텝포드의 여자들은 남자들에 의해 로봇으로 교체되는 거지만 

그래서 강제로 사고를 중단 당하는 거지만, 이 영화가 보여준 기계인 인간들의 오작동.... 

그 이미지가, 자발적으로 사고를 중단한 사람들의 경련하는 듯한 혹은 발작하는 듯한 

'예측불허', 혹은 '난데없음' (심리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대로 닮아 있다는 생각을 

나는 174번쯤 한 거 같다. 


살면서 그런 '경련' 혹은 '발작'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늦어도 대학 시절부터는, 천천히 곰곰히 내밀하게 혼자서라도 이것저것 오래 

생각하고, 생각을 확장하고 심화하고...: 이런 습관을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니냔 생각도 든다. 


"Attention is the rarest and purest form of generosity" 시몬 베유의 이 말에서 "attention"

은 "thinking with another person" 같은 의미가 아니었을까는 생각도. 그 뜻이어도 그대로 말이 된다고. 

다른 사람과 같이 생각하기. 이거야말로 그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주기"인 경우 많을 거라고. 


기준이나 지향이 없거나 아니면 그것들이 부패했기 때문에 

'사고무능'인 사람들, 도처에 있지 않나. 정말 작정하고 주변을 돌아보면

진정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 아닌가. 


흐으. 예화를 들고 싶으나 픽션에서 가져올 예화라면 <마담 보바리>의 샤를 정도가 전부. 

현실에서 가져올 예화들은 모두, 명예훼손에 근접. 


그런데 하긴 샤를 정도면, 무궁무진 얘기해볼 수 있겠다. 그의 무엇이 우릴 심란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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