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다면, 엠마는 눈의 힘으로
샤를을 창 밖으로 던졌을 것이었다." <마담 보바리>에서 이 문장 오랜만에 생각하다 보니
이 비슷한 일이 우리에겐 항상 일어나는 일 아닌가는 생각이 듬. 미국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정한 무엇이 오갈 때라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공기 벽, 혹은 공기 공 같은 것이 거리를 유지시키는 데
반해 여기서는 다들 사람에게 스파이더맨. ; 이 사람에겐 내 편에서 어느 정도의 '막 대함'이 가능한가, 이게
우리가 자주 하는 판단. 다음 거미줄 던져서 옭아매거나, 옭아매고 던지거나. 옭아매고 끌어오거나. 던진 다음
끌려 가거나.
양인들 중에서도 교양인(.....)들에게, 정말 저럴 거 같다.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울프처럼 심지어 부부도, 그랬을
것 같다. 그들에게 물어본다면 뭐라 답할까. 특히 추운 곳에서,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곳에서 더 저런 경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가 하면 잉마르 베리만의 끈적(끈끈... 아니고)했던 여성편력은 이게 다
쓸데 없고 하찮은 생각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또 그런가 하면, 뉴욕타임즈 서평 팟캐스트, 브래드 리스티의
작가 팟캐스트.. 로버트 해리슨의 Entitled Opinions는 물론이고, 이들 긴 시간 대화하는 형식 팟캐스트들
오래 들어오면서, 이들이 저런 방식 대화를 저렇게 잘할 수 있는 이유 중엔 '언제나 유지되는 거리'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화 참여자들이 진지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사실은 남들이기 때문.
만일 '우리가 남이가'라면, 상대에게 흡수됨, 상대에게 '맞춰줌'이 끝없이 일어나지 않을까.
리처드 로티 타계 후
그를 알았던 철학자들이 쓴 추모의 글들도 이 지점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개성과 그의 삶, 그의 철학을, 객관적으로 회고하는데 그러나 자기 기준, 자기 요구에 따라 그러기.
자기를 거치는 객관성. ; 어떤 외적 압박(로티를 이런 사람으로 보이게 하라... 는 압박. 로티는 이런 사람이었다... 고 말하는 압박)도 부재하는 글들. 한국에서 이런 추모의 글은 드물게만 쓰여지지 않나.
그러니까 심지어 학자들 중에서도
자기 기준, 자기 요구에 따라 탁월한 작업 하는 사람 있으면
... '비난'을 하기도 하지 않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는 사람이 살고 있을 지옥을 잠시 상상해 봄. 얼른 나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