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읽은 <미학이론>의 "사회"에
통속(the vulgar)이 전면화하면서 비극성(the tragic)이 청산되었다... 는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애호하는 통속의 원형은, 치약 광고 속의 활짝 웃는 미인이라고.
이 시대에 비극(비극성)의 의미, 역할에 대해 월터 카우프만이 쓴 글들이 있고
<비극의 탄생> 말고 이 주제로 내가 읽은 건 그 글들이 전부일 텐데, 그런데 아도르노의 저 한 문장이
카우프만의 글들은 주지 않았던 강력한 무엇을 주는 것 같다. 사실 어디서 똑같은 얘기를 이미 몇 번 본 거 같기도 하다.
이 통속의 시대에 비극이 웬말이냐........ 같은 얘기. 김수영도 했을 거 같고.
아도르노는 비슷한 얘기를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특히 "문화산업" 장에서 한다.
이 전면 관리시대에, 인간에게 인간의 개성으로 남는 건 치약 광고 속의 하얀 치아, 냄새나지 않는 몸 정도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할 일은 성공의 요구를 수행하는 장치로의 자기 변신이다."
그의 말들도 훼손없이 인용하기 참 쉽지 않다. 어쨌든 이 모두가
"주체의 청산"을 말하기 위함이고 주체의 청산은 정신(지성)의 청산이며 그건 반드시 감정의 청산도 포함함에 대하여.
"사랑은 언제나 더 사랑함이다." "그의 사랑은 그가 자신을, 그리고 타인들을 정복할 능력이 없음의 증거다. 이것이 그에게
사랑의 충족을 막을 충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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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지금과 달라야 한다는 흔들림 없는 희망 같은 것.
그것이 없는 '지성'은 지성이 아님. : 이런 게 아도르노 입장이기도 해서
그에게 지성은 도덕의 범주이기도 하지만 감정의 범주이기도.
*'관리사회'에서 감정, 지성, 지배.... 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던 포스트인데
언제나 그렇듯이(그러듯이) 나중에; 이어서 쓰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