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대한 우리의 체험적 의식에서 -- 그리고 그에 대응하여, 우리 자신의 존재의 역동적 속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서 -- 우선 "단단한"과 "부드러운"을 적용하지 않는 한 무엇도 이해될 수 없다. 더 풍요하고 더 미묘한 인상들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의 광대한 영역이, 이를 뒤따른다. 하지만 물질의 언어에서, "yes"와 "no"는 "부드러운"과 "단단한"으로 번역된다. 물질의 어떤 이미지도 초대와 배제의 이 변증법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In our experiential awareness of matter -- and correspondingly, in our knowledge of the dynamic attributes of our own being -- nothing can be understood unless we first apply the terms hard and soft. Thereupon follow richer and more subtle impressions, the vast realm of intermediate sensation. But in the language of matter, yes and no are translated as soft and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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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그리고 의지의 몽상> 1장 첫문단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정말 이 책 전체, 바슐라르의 시학서들 전체가 아도르노가 철학에게 다루라고 주문했던
비개념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 사소한 것. 그런 것들의 탐구. 혹은 해석되어야 했으나 해석된 바 없는 것들의 해석.
처음 읽을 때, 이 문장들이 알게 하는 바, 아니 심지어 "yes"와 "no"도 한국어로 번역불가다.
"예"와 "아니오"는 위와 같은 문장들에서, yes (oui), no (non)을 대신할 수 없지 않나. 둘 중 "아니오"는 그래도
"no"일 수 있는데, "예"는 "yes (oui)"가 되지 못하는 이것 말고도 수많은 사례들을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례들에선, "예"가 아니라 "응"(.......) 혹은 "네"를 써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 이런 생각 했었다.
얼마 전 <불의 정신분석> 끝내고 요즘 매일 읽는 바슐라르는 이 책인데, 다시 읽으면서
같은 생각 하게 된다. 한국어의 "예"와 "네"는 지배와 복종을 배경에 두고 있는 말. 불평등이 번역불가의 이유.
그렇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