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 대해 

그 정도 인종차별이 제도화되어 있던 곳이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온전하게 성장하기 힘들 것..... 같은 편견 막연하게 있었다. 

그러다 어제 데이빗 커키호퍼 인터뷰 들으면서 어쩌면 아닐 수 있겠다 쪽으로. 

한국의 사정으로 바꾸면, 그게 누구 어떤 사람이든 중요한 주제로 오래, 열정적이고 방대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이들은 드문 게 맞다면, 그게 그 자체로 이 사회가 어떤 곳인가 

말하는 바 있다 보겠다.  


마사 누스바움과 사울 레브모어(*시카고 대학 로스쿨 재직한다고. 누스바움의 동료)가 

Aging Thoughtfully 제목의 책을 공저했다 함. 17년 출간. 이 책 주제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여러 생각들이 들었고 무려 깨달음도 있었지만 

데이빗 커키호퍼 인터뷰 들으면서 들던 비슷한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는 지금 65세다. 예전 시대면 노인에 속했을 것이다. 

지금이라 해도 전성기는 지난 나이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나는 조금도 내가 약해진 거 같지 않다. 물론 약화는 시작할 것이고, 나의 아이들이 

지금 나를 재미있어 하듯이 90세의 나도 재미있어 할 거 같지는 않다. (.....)" 


"나의 아이들이 지금 나를 재미있어 하듯이." 

성년인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노년의 (노년으로 진입하는) 부모.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래야 마땅하다, 삶은 여기에 있다.... 인 것인데,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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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더 잘 수 있었다. 잘 잔 건 아니었으나. 

다시 자고 일어나서 오늘 폭염주의보가 내렸으며 최고기온 32도가 예상된다니 

얼른 5천보라도 채우려고 나갔다 옴. 


위의 저자가 위의 책 주제로 얘기하는 거 들음. 

저자, 데이빗 커키호퍼는 남아공 출신이며 박사 학위는 벨기에 루뱅 대학(내겐 정운영의 모교로 기억하게 되는 그 학교)에서 받았다. 박사 전까지는 남아공에서 공부했다. 아파트르하이트 이후 남아공에서 국가재건 원리("founding principle")는 "인간 존엄성"이었다. 그 원리와 함께 그는 요하네스버그 대학 철학과에 재직했다. 이후 호주 카톨릭 대학으로 이직했다. 


찾아보니 아직 젊던데 

"인간 존엄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방대하게 할 말이 많고 잘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 말 들을 때, 거의 자동적으로 "왜 우리는....?" 하게 된다. 왜 우리 중에서, 이러는 사람을 

보고 듣게 되는 일이 드문가. 그게 무슨 뜻인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순수히 학문적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타락한 버전으로 이것저것 절충하며 아무말 함. 

거의 둘 중 하나이지 않나. 우리 중 누가 "인간 존엄성" 같은 주제에 말한다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는 게 


만일 당신이 지금 여기에서 지옥을 살고 있다면 

그 지옥의 기원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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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어느 저녁에 품게 되는 우주 발생론이다. 밤마다 몽상가는 우주를 다시 빚기 시작한다. 

낮 동안의 온갖 염려 따위에서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독이 지닌 저 모든 힘을 

몽상에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주를 빚을 줄 아는 고유한 기능을 몽상에 복원시켜 준다. 

그는 밀로슈의 말이 얼마나 진실된가를 느낀다. "온 우주가 그야말로 우리 육체 속을 관류한다." 




<공기와 꿈>에 은하수의 상상력에 바쳐진 아주 짧은 장이 있는데 

저런 문장들로 시작한다. (한국어판 번역이다). "은하수의 상상력"은 부정확한 표현이겠고 

은하수가 자극하는 상상력. 은하수의 상상. 상상된 은하수. 영어로는 "imagination of the Milky Way" 구절에 

이 모두가 포함될 수 있겠지만 저 구절을 "은하수의 상상력"으로 옮길 수는 없는 거 같다. 


극히 바슐라르적 문장들이고 

이런 문장들이 좋아야만 바슐라르를 읽게 되고 

바슐라르를 중요한 사상가로 보게 (볼 수도 있게) 될 텐데 

..... 그 자신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이런 문장들에 반응하는 이는 극소수인 거 같다. 

몽상과 우주발생, 우주기원, 우주형성을 연결함. 처음엔 말장난 아니면 심한 과장으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여기.......... 이런 얘기 쓰면서 고심하다가 서재 들어옴. 



오늘도 일어날 때가 아닌데 일어났다. 

아니 어제 일어났다. 저녁 7시에 누웠고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시계를 보니 10시 40분경이었다. 

7시에 누웠지만 처음엔 책을 보고 다음엔 오디오북을 타이머 설정 없이 틀었으므로 

실제 잠에 든 시간은 두 시간 조금 넘을 거 같다. 


재난이다. 

오늘은 또 어떻게 늦게 자기에 성공하냐. 아마 낮에 자게 되지 않을까. 

자정 무렵, 다음 잠은 어떻게 잘 잘 수 있을까 근심한다. 이번 잠은 실패했어도 다음 잠부터 잘 잔다면

출구가 더 잘 보일 터인데. 근심은 두 시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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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영어. 

아버지와 영어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 

아버지에게서 영어에 대해 배운 것. 

이런 얘기를 하는 글도 에이미스의 에세이집에 있던데 

그의 부친 Kingsley Amis는 저런 책을 남기기도 했다. "the King" 이건 그가 유일하게 

기꺼워했던 별명이라고. 위 표지에는 없는데 부제가 A Guide to Modern Usage. 


글의 첫문장에서 현실 웃음 웃고 맘.  

"킹슬리 에이미스는 느슨한 아버지였다. 그의 양육 스타일은, 그가 아버지이던 초기 시절엔, 우호적으로 미니멀리스트라는 말로 가장 잘 설명되며 달리 말하면 내 어머니가 모두를 했다." 


Kingsley Amis was a lenient father. His parental style, in the early years, can best be described as amiably minimalist -- in other words, my mother did it all. 




어제 자기 전 저 문장 보고 끌끌끌 웃다가 

그러니까 단 두 단어로, 두 단어에 담긴 별 것 아닌 비꼼으로 

세상이 잠시라도 달라지는 이런 일은 


하루에 적어도 일곱 번은 일어나야 하는 일 아닌가. 

많으면 일곱 번씩 일곱 번도. 언젠가 그런 세계에서 살았던 거 같은데? 


이거 조금 미스테리다. 

아마, 어설프게 웃길 수 없을 때 

진짜로 웃길 수도 없는 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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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에세이집에 

히친스가 타계하기 전, 그러나 투병 중이었고 그가 쓰는 글들이 "죽기 전 쓰는 부고"처럼 

읽히던 때 히친스와 우정을 회고하는 내용 에세이가 있다. 


특히 와닿은 건 

히친스가 타고난 반항아였다는 대목. rebel. 이 유형이 흔할 거 같지만 극히 드물고 

에이미스 자신은 그 유형으로 히친스 포함 (그 자신은 제외) 단 세 사람만 알았다고 한다. 

반항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일단 정의한다면: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자동적인 존중이 없는 사람. 

이들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굽히지 않으며 심지어 예의도 갖추지 않는다. 이건 

말할 필요 없이 명백하겠고, 이들은 그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도 굽히지 않으며 심지어 

예의도 갖추지 않는다. (*예의로 번역한 단어는 "civility". 이렇게 옮겨 보니 원문 의미가 약간 비틀리는 

느낌이다. 실제로 글 전체를 번역한다면 다르게 번역해야... 아무튼 "그래야 한다면 무례할 수 있는" 정도로...) 


에이미스는, 도덕성의 출발이 매너인 건 당연하고 히친스가 

평소 대단히 매너가 뛰어난 사람이긴 했지만, 히친스의 매너는 언제나 

사안 자체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반항아의 방식이다. 


이런 반항아 곁에서 

평범한 인간은 진화가 덜 된, 덜 떨어진 인간으로 보인다. 

평범한 인간은 흔적 기관같은 편견과 신념, 공경, 잠재의식과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금기와 억압, 군중 본능, 이것들을 

불안하게 통제하며 살아간다. 두려움 없이 편애(편가르기)도 없이, 아무 내면의 북소리도 듣지 않으며, 말하고 글 쓴다는 것. 그러는 이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소중하다




특히 저 마지막 문장. 

To speak and write without fear or favor (to hear no internal drumbeat): such voices are invaluable. 


내면의 북소리. 이게 없는 사람. 

한국에선 누가 그런 사람인가? 


아도르노가 특히 <부정 변증법>에서는 

정신의 자율성. 인식의 객관성. 의미의 구속력. 이렇게 정리할 만한 세 사항을 

연결, 탐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 사항 모두가 한국에서 극히 허약하지 않나. 

여러 미묘한 차이, 뉘앙스를 담아내는 형용사들이 많다. 노랗다 하나가 아니고 노르스름, 노르께, 노릿노릿 등등. :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 받지 못한 이유로 어휘들의 번역불가성 말하면서 나오던 저런 얘기. 


저런 얘기가 지목하는 건 "인식론적 재난" 아닌가? 

정신의 자의성만 (자율성이 아니라) 존재하며, 해서 인식의 객관성이 부재하고 

의미 구속력도 허약하다는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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