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명의 면면을 규정하는 여성혐오. 

그것은 남자들이 부정했으며 그러므로 알 수 없는 것,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제도화된 두려움과 증오다. 여자들이 살고 있는 그 야성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주는 깊은 충족감을 알고 나면

이해하지 않음, 이해를 거부함을 특권으로 아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되지 않나. 


심정적으로는 어디서도 신분제 척결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너도 나도 은밀히든 명백히든, 이해를 거부함("부정함")을 자기 권리로 삼으려 애쓰지 않나. 

그래서, 남자들의 거의 전부, 갑들의 전부가 언제나 저런 태도이지 않나. 


교수들 중에도 참 많은데 

저런 사람이 한다는 공부가, 공부이긴 한가. : 이런 생각을 하며 보게 되던 교수들. 


몰라도 됨, 모르겠음이 특권이 되면 (갑들 사이에서 더더욱 그렇다면) 

평가의 객관성, 공정성... 같은 건 아예 성립할 수 없지 않나. ;;;; 네. ;;;; 


"탁월함"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 (통상적인 기준과 다르다.. 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 경험을 통해 사유되고 축적된. 정도의 의미에서), 이거 있는 사람 극히 드물지 않나. 

그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기준이 부재할 때, 천경자 작품 위작 판결이 무시되고 

멋대로 진품 판정 내리는 인간들이, 그래도 되는 줄 아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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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 르네상스"라고 하면 오글거리기도 하고 

사실 과장이기도 할텐데 어쨌든 오래 절판 상태였던 그의 책들이 하나씩 재간되고 

연구서들도 연달아 나오고 있어서, 어떤 책들이 새로 나왔나 미국 아마존도 찾아보고 아마존 프랑스에서도 

가끔 찾아본다. 그러다 위의 책 발견.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입문>. 이자벨 위페르의 그 무슨 영화였나, L'avenir, 이게 불어제목. 영어 제목이 Things to Come? 그녀가 고교 철학교사로 나온. 몇 번 봤고 연달아 여기 포스트로 썼음에도 지금, 감감. 감감. 감감. <다가오는 것들>! 이게 한국어 제목. 적으면서 기억에 성공했다. 토탈리콜! 파셜리콜! 이 영화에서 그녀 제자가 <미니마 모랄리아>에 대한 책을 쓰는데, 본격 연구서기보다 입문서로 짐작되는 책. 


하여튼 그 책이 바로 연상되었다. 108쪽. 얇다. 영어로 이런 책, 가벼운 분량 <미학이론> 입문서는 아직 없는 듯. 

<미학이론> 영어판에 "서론 초고"가 있는데 이게 책 끝에 배치되었다. 이 "서론 초고"에서 시작해서 하루에 1/3 쪽 정도 읽는 걸 그러니까 지금 몇 년째 하는 중인데 지금 와 있는 쪽이 186쪽. 한국어판과 같이 보는데, 한국어판으로는 283쪽이고 아주 많이 진도 나가보인다. 거의 얼마 남지 않아 보임. 영어판으로는 중간 지점. (한국어판에, 독어판에 있지만 번역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미학이론> 정말 엄청난 괴작이라서, 그런데 내 경우 조금씩이지만 매일 읽는 정도로 (초기엔 독어판도, 문법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단어를 모르면서 찾아보았고) 지속적으로 투자해왔다보니, 이 괴작에 남들은 무슨 얘기 하는지 쉽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해지기도 하는 책. 위의 책을 바로 도서관에 구입신청함. 


어설프게만 아는 외국어로 책을 읽는 일에, 사실 그 자체에 매력이 있긴 하다. 

얼마나 많은, 새로운 단어들이 여기 있을까! 이런 게 자극하는 기대, 있지 않나. 이해라는 섬에 가기 위해 

해결이라는 무수한 돌들로 다리를 놓아보는 과정. 하여튼 그런 것. 그렇긴 한데, 그 섬이 가까워지거나 해결이 아주 빨라지거나. 그랬으면 해서, 비교문학 전공 학부 시절 1년 동안 문걸어잠그고 불어와 독어 공부했다던 로버트 훌롯-켄터처럼 공부할 수 있음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본 순간이 있던 저녁이었다. 


*원래 쓰려던 게 이런 내용이 아닌데 어쩌다 여기 와 있나 어리둥절하면서, 그만 쓰기로 함. 

남아 있는 하고 싶은 말은 다음 포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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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막대한 양의 작업을 해냈고 

새로운 방식의 날카로운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었으며 

어둠에 맞서 영어라는 언어의 빛을 조금 더 밀었다. 


이것들은 사실이다. 울프 같은 예술가의 묘비명을 

속된 정신이나 아니면 쉽게 슬픔에 압도되는 사람은 쓸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쓰려고 시도할 것이고, 아니 이미 시도한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써낸 말들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작가로서 그녀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보는 것이 더 현명하고, 더 안전하다. 고상하게도 "역경"이라 불리는 것에 맞서 그녀는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고 그녀의 승리는 실제적인 의미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전리품을 가져왔다. 가끔 내게 그녀의 작품이

한 줄로 세워진, 반짝이는 은잔들로 보이곤 한다. 그 잔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이 우승컵은 정신이, 자신의 

적이자 친구인 물질에게서 (물질에 맞서, 이기고) 받은 것이다. These trophies were won by the mind from matter, its enemy and its friend." 



울프가 타계했던 해 41년에 케임브리지의 유명한 Rede Lecture에서 

포스터가 울프를 주제로 강연했다. 위에 옮겨 온 건 그 강연 마지막 문장들. 


나도 포스터는 "쿰쿰하고 퀴퀴하고 케케묵은" 작가라 생각하다가 저 강연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었다. 

저 문장들이 딱히, 대단히 재치있거나 하여튼 독자의 관심을 확 끌 문장들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표현이 개인적일 뿐이지 담긴 생각들은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문장들 포함해 강연 전체가 적어도 기존 울프 비평들보다, 그들 다수보다 낫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사람은 울프의 작품들을 진짜로, 가장 모호하고 도전적일 대목들까지 전부, 이해하며 깊이 읽었다... 고 느껴진다. 이 강연 처음 읽을 때 내겐 그게 참 놀랍기도 했다. 한국의 남자 영문학 교수들 중 울프를, 이해는 고사하고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아마 1인도 없을 텐데? : 이런 생각도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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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Angels Fear to Tread (1905). 


줄리언 반즈가 포스터와 관련해 자신의 "전향"이 이 소설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포스터의 데뷔작. 포스터의 다른 작품들은 젊은 시절 읽고 싫어했지만, 이 소설은 읽은 적이 없었는데 

60대에 뒤늦게 오페라를 사랑하게 되고 어느 날 친구와 오페라가 등장하는 소설들에 대해 얘기하다가 친구가 

이 소설을 언급한다. 시골 마을 오페라하우스의 장면이 이 소설에 있다. <마담 보바리>에 등장하는 바로 그 오페라가 

이 소설에도 등장한다. 


찾아보니 다행히도 그리 길지 않아 읽기 시작했으며 

바로 1장부터 놀랐다는 것이다. 재기 넘치고 풍자적이며, 영국 풍습과 영국식 속물주의의 미세한 해부가 여기 있었다. 오페라하우스 장면으로 가면, 주석을 달기 위한 연필을 손에 쥐게 할 다음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나쁜 취향엔 장엄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건 뭘 모르는 나라의 나쁜 취향이 아니다. 영국의 안달하는 상스러움도 아니고 독일의 눈감은 상스러움도 아니다. 

그건 아름다움을 똑바로 보지만 그냥 지나가기를 택한다. 그건 (그러면서 그건), 아름다움의 당당함에 도달한다." 

(There is something majestic in the bad taste of Italy; it is not the bad taste of a country which knows no better; it has not the nervous vulgarity of England, or the blinded vulgarity of Germany. It observes beauty and chooses to pass it by. But it attains to beauty's confidence). 


이 문장들 인용한 다음 반즈의 질문이: Where is that fusty, musty, dusty writer I imagined Forster to be? 

그러게 저 인용된 문장들, 비범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의 But it attains to beauty's confidence. 풍습이란 걸 미세하고 깊이 보는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읽기가 청년 시절의 즐거움이고 필요라면 

다시 읽기는 노년의 즐거움이고 필요다." 이게 반즈의 첫문장이고, 끝날 때에는 

청년이던 내가 싫어했던 작가의 작품을 나이들고 나서 좋아하게 되는 일. 내가 틀렸음을 알아보는 일은 

진정한 즐거움일 수 있다....... 이런 얘기들을 한다. 내 경우엔 아주 늙기 전에도 (30대에도), 다시 읽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데... 늙어도 늙어도 언제나 전부 처음 읽는 책들 뿐이면 안되는데... 이런 안달 하던 때 있었다. 다시 읽을 일이 없을 것임을 확신하며 읽는 책들, 그런 책들이 그렇지 않은 책들보다 훨씬 많다면 나쁜 일일 텐데. 이런 일조차도 뜻대로 할 수 없다니. 정규직, 정규직 되자.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정규직 되면. 


반즈가 길게 자세히 칭송하는 건 <하워즈 엔드>인데 

포스터의 책들 중, 소설로는 내가 읽은 게 아마 이게 유일. 

(대학원에서 시험 준비하던 때, 다른 것도 읽었을 수도 있다). 

포스터는 내게도 "쿰쿰하고 퀴퀴하고 케케묵은 작가"였는데, 그런데 그런가 하면 

<하워즈 엔드> 읽던 때 내내, 아 이 사람.. 이 사람도 참 decent human being. 재미는 없어 하지만 

참 좋은 사람 같다. : 이런 인상 떠나지 않았음. 예를 들면, 아이리스 머독을 읽을 때 그런 인상 받지는 않는다. 

이블린 워도. 조지 오웰은 비슷한 인상 받았던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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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radio3 팟캐스트 중 The Essay도 있는데

대단히도 문학적인 팟캐스트. 이거 거의 (대담하게, 수치심없이) "고급문화." 

radio3 70주년 기념으로 역시 올해 70세라는 줄리언 반즈가 쓴 5편의 에세이를 연재했다. 

그렇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쩌면 당연히) 읽는 사람도 줄리언 반즈. 

제목이 다 한 단어: Memory, Words, Politics, Books, Time. 


Words가 주제인 업로드에서 

사전에 매혹되었던 유년기, 형제들 사이에 어떤 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쓰는가 

등을 놓고 싸움이 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말들을 담고 있고 그 말의 정확한 의미와 용법을 볼 수 있는 책으로서  

사전의 정당한 권위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으므로, 사전으로 달려가 싸움을 해결했던 일.. 이런 얘길 하다가 


"그러다 성에 눈뜨는 사춘기가 왔고, 나는 

저 하늘과 이 땅 사이에 사전이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말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I discovered there are more words in heaven and earth than are dreamt of in our dictionary." 


그가 이 말 할 때, 바로 그 순간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와"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그의 의사는 모르므로. 그"에게"가 더 정확하겠.) 

앞으로 더, 열심히 읽고 열심히 말장난합시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 Howards End는 

Books 주제였을 때, 그가 젊어서는 싫어했으나 늙어서 좋아하게 된 작가로 E. M. 포스터에 대하여 

그리고 특히 저 책에 대하여, 감동적인 얘기를 한다. 그 얘기에 대해서도 쓰려고 했던 포스트인데, 이건 

나중 포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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