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Angels Fear to Tread (1905).
줄리언 반즈가 포스터와 관련해 자신의 "전향"이 이 소설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포스터의 데뷔작. 포스터의 다른 작품들은 젊은 시절 읽고 싫어했지만, 이 소설은 읽은 적이 없었는데
60대에 뒤늦게 오페라를 사랑하게 되고 어느 날 친구와 오페라가 등장하는 소설들에 대해 얘기하다가 친구가
이 소설을 언급한다. 시골 마을 오페라하우스의 장면이 이 소설에 있다. <마담 보바리>에 등장하는 바로 그 오페라가
이 소설에도 등장한다.
찾아보니 다행히도 그리 길지 않아 읽기 시작했으며
바로 1장부터 놀랐다는 것이다. 재기 넘치고 풍자적이며, 영국 풍습과 영국식 속물주의의 미세한 해부가 여기 있었다. 오페라하우스 장면으로 가면, 주석을 달기 위한 연필을 손에 쥐게 할 다음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나쁜 취향엔 장엄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건 뭘 모르는 나라의 나쁜 취향이 아니다. 영국의 안달하는 상스러움도 아니고 독일의 눈감은 상스러움도 아니다.
그건 아름다움을 똑바로 보지만 그냥 지나가기를 택한다. 그건 (그러면서 그건), 아름다움의 당당함에 도달한다."
(There is something majestic in the bad taste of Italy; it is not the bad taste of a country which knows no better; it has not the nervous vulgarity of England, or the blinded vulgarity of Germany. It observes beauty and chooses to pass it by. But it attains to beauty's confidence).
이 문장들 인용한 다음 반즈의 질문이: Where is that fusty, musty, dusty writer I imagined Forster to be?
그러게 저 인용된 문장들, 비범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의 But it attains to beauty's confidence. 풍습이란 걸 미세하고 깊이 보는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읽기가 청년 시절의 즐거움이고 필요라면
다시 읽기는 노년의 즐거움이고 필요다." 이게 반즈의 첫문장이고, 끝날 때에는
청년이던 내가 싫어했던 작가의 작품을 나이들고 나서 좋아하게 되는 일. 내가 틀렸음을 알아보는 일은
진정한 즐거움일 수 있다....... 이런 얘기들을 한다. 내 경우엔 아주 늙기 전에도 (30대에도), 다시 읽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데... 늙어도 늙어도 언제나 전부 처음 읽는 책들 뿐이면 안되는데... 이런 안달 하던 때 있었다. 다시 읽을 일이 없을 것임을 확신하며 읽는 책들, 그런 책들이 그렇지 않은 책들보다 훨씬 많다면 나쁜 일일 텐데. 이런 일조차도 뜻대로 할 수 없다니. 정규직, 정규직 되자.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정규직 되면.
반즈가 길게 자세히 칭송하는 건 <하워즈 엔드>인데
포스터의 책들 중, 소설로는 내가 읽은 게 아마 이게 유일.
(대학원에서 시험 준비하던 때, 다른 것도 읽었을 수도 있다).
포스터는 내게도 "쿰쿰하고 퀴퀴하고 케케묵은 작가"였는데, 그런데 그런가 하면
<하워즈 엔드> 읽던 때 내내, 아 이 사람.. 이 사람도 참 decent human being. 재미는 없어 하지만
참 좋은 사람 같다. : 이런 인상 떠나지 않았음. 예를 들면, 아이리스 머독을 읽을 때 그런 인상 받지는 않는다.
이블린 워도. 조지 오웰은 비슷한 인상 받았던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