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헤밍웨이가 쓴 가장 짧은 단편 소설이라 전해져 온 6단어 소설. 

<미국 단편 소설> 주제 강의가 있어서 들어보는 중. 단편 소설을 정의하고 그에 보태어 "미국" 단편 소설을 정의하는 대목에서, 이 전설적인 6단어 소설에 대한 긴 논의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헤밍웨이는 친구들과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누가 가장 짧은 소설을 쓸 수 있나 내기를 하게 된다. 나는 6단어로 쓸 수 있어. 그가 말했고 냅킨 위에 쓴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더 짧은 소설은 나오지 않았고 그는 판돈 전부를 가져갔다.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많은 편집자들과 작가들이 (특히 아서 C. 클라크) 반복해 말해 왔다. 그러나 아니다. 저 6단어는 실제로 광고로 나온 적이 있는 6단어이고 그 광고에 대한 (이건 얼마나 우리 가슴을 치는 광고인가...) 글들이 헤밍웨이의 소년 시절 이미 나와 있었다. 헤밍웨이를 이 6단어 소설의 원작자로 보고 싶어하는 미국 대중의 욕구는, 이 6단어 소설을 근본적으로 미국적인 소설로 보겠다는 욕구다. 여기 담긴 내용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미국적이기도 하다. 자비를 향한 호소,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있다. 특히 20세기 전반 삶의 불확실성이 있다. 만일 가장 미국적인 작가로 추앙받은 헤밍웨이가 실제로 이 6단어 소설을 썼다면, 이 짧은 소설은 "patina of native genius"를 갖게 된다. 



새벽 캄캄할 때 별도 보고 하늘도 보면서 강의 듣는 건 제정신 유지에 가장 도움되는 활동이다. 오늘 새벽엔 위에 적은 저 내용에 특히 감탄했다. 오늘을 위한 제정신이 그렇게 확보되었. 


"patina of native genius" 이 구절은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patina, 구리 등 금속 물건의 표면에 생기는 녹색의 녹(?). 오래 아끼며 쓴 물건의 표면이 갖게 되는 윤기. 세월의 증거. 기억된 세월의 증거. 


"미국 원산 천재성의 은은한 증거"? 


어쨌든 "patina of native genius" 이것을 갖겠다는 게 얼마나 어디서나 사람들의 영원한 욕망인가. 이것을 찾고 규정하고 추앙하겠다는 그 욕망. 너무 자주 왜곡되거나 잘못 이용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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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오면 평소 산책 경로는 다니기 어렵게 된다. 숨어 있는 공터. 숲 속의 작은 길. 제설 작업 하는 분들 없음. 나 말고 다른 산책자들도 덜 나오심. 이른 새벽에는 무섭고 위험해짐. 동네에 조금 멀지만 아주 넓은 운동장(공연장 겸하는)이 있는데 여기가 대안. 여긴 눈, 비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그런데 지금 시설 보수 진행 중이라 입장 못하게 막아 놓았고 나는, 그래도 운동 하는 분들 있을 테니 그 분들 틈에서 (혹시 걸려도 같이 걸리면....) 생각으로 눈 많이 온 며칠 전 가보았는데 발자국은 많이 나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발자국이 있다는 건 나도 들어가도 된다는 것. 들어가서 걸었다. 걸을 만큼 걷고 나서 나오려고 하는데, 내가 가는 방향으로 차가 진입해 정차했다. 운동장을 채운 조명들이 있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 차를 마주 보면서 걸어가기가 뭣해진 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걷기 시작했고 그리고 메아리치는 (메아리는, 쌓인 눈 때문에?) 남자의 외침을 들음. 어 거기, 저기요. 이 쪽으로 나가세요. 이 쪽. 


그게 마치 위의 사진 속 같았음. 

스릴러, 호러 영화에서 많이 본 어떤 장면 같았음. 

내가 가던 방향에 정차했던 그 남자는, 차문을 열고 내려와 서서 소리치면서 나갈 방향을 알려주고 탄식했다. "아이 C" (C까지는 아니었겠지만 한숨이 강하다보면 그럴 수 있겠지). 





어제 다시 가보았는데  

차량에 근거하여 같은 분인 것으로 짐작되는 그 남자와 다시 마주침. 이어폰 꽂고 걷는데 갑자기 남자가 나타남.  

내가 먼저 말했다. 저 조금만 걷다가 갈게요. 눈이 많이 와서 걸을 데가 없어요. 

그러자 그는 이 분이 그 때 그 분과 같은 사람인 거 맞는가, 세상 다정하게 말했다. 네 걸으세요. 라고. ㅎㅎㅎㅎㅎ 

비아냥, 반어적. 이런 게 아니었. 순간 세상이 달라지게 하는 다정함이었. 

그리고 그는 빗자루를 꺼내 와서 눈을 쓸기 시작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눈을 쓸었다. 그리고 나는 걸었. 근처에 눈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무섭지 않고 좋았다. 





그러니까, 어떤 도덕적 충격, 도덕적 패배가 

한국의, 한국인의, 경험이었나. 이것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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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3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문단 문단 읽어나가면서
무서움 만큼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

목소리,,,
저기요 ㅎㅎㅎ

마지막 라스트 씬은
요네스뵈의 스노우맨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

몰리 2022-12-23 08:38   좋아요 1 | URL
그 남자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ㅎㅎㅎㅎㅎ
<사이코> bgm. 혹은 스크림.
요네스뵈. 그가 노딕 느와르 부흥을 이끌었다는 칭송 듣고나서
장바구니 담아, 담아는 두었는데, 아 노딕!!! 눈!!
 




내가 산 건 이것과 표지가 다르지만, 23년 달력과 다이어리 위해 11월에 주문했던 책. 

크리스틴 스몰우드의 데뷔작 <정신의 삶>. 스몰우드는 컬럼비아 대학 영문학 박사다. 책은 자전 (극히 자전) 소설. 소설 주인공은 박사 학위 후 비정규직으로 근근히 살고 있다. 동거하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귀찮지도, 그렇다고 집 안의 가구같지도 않은 사이. 둘을 묶는 육체와 정신의 분명한 연결이 있지만 그것의 정체는... 


발자크가 끝나면... 제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3-40 페이지는 읽은 거 같다. 이 도입부에, 웃긴 장면, 웃긴 문장들이 연달아 나온다. 이제 이런 것도 주제화되는구나. 이런 문장을 이제 누가 기어코 써내는구나. 정신의 삶, 그것의 정체다, 이것이. (...) 감탄하면서 저런 생각 하기도 했다. 뱃살이 찌고 있고 그밖의 여러 이유로 집 안에 있는 상하로 긴 거울이 부담스러워진 그녀는 거울을 좌우로 길게, 벽의 상부에, 건다. 이제 거울은 그녀의 얼굴만 (목까지?) 비춘다. 거울 위치가 바뀐 후 귀가한 남자 친구는 그 점을 건조하게 지적한다. 이런 게 웃겼던 대목. 


소설을 평가할 때 "---를 위해, --가 출현해야 했던 것이다" 유형 문장들. --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 필요했다. 스몰우드의 이 소설도 그런 말들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이전에 본 적 없는 유형의 인물, 문장, 감정, 사고가 연속 등장하는 책. 걸작, 고전으로 남을 거 같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오래 기억할 거 같은 책. 







범죄문학 강의에서 길게 논의되던 이 소설. 

이 소설도 갖고는 있고 앞의 1 페이지 읽음. 침대에 같이 누워 있을 때 남편이 아내의 머리, 머리카락을 쓰다듬. 아내의 생각은, 그의 손가락은 나의 두개골/해골의 윤곽을 확인하려는 거 같다.......... 이런 내용이 그 1페이지에 있다. 


이때도 잠깐 감탄했었다. 이제 이런 것도 주제화되는구나, 이런 문장이 마침내 쓰여졌다. 

그래놓고 그 1페이지로 끝. (시간이 없음. 발자크 제한....) 


질리언 플린의 아버지는 영화과 교수였고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히치콕 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히치콕 영화를 사랑했다. 사촌들과 모여 놀면 사촌들은 왕비, 공주가 되고 싶다고 할 때 그녀는 마녀, 살인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함. 아버지가 영화과 교수이고 집에서 영화를, 히치콕 영화를 매일같이 보고 또 볼 수 있으며 아버지에게 히치콕 영화에 대해 들을 수 있다는 건, 그러니까 그런 환경은, 어떻게 결정적으로 정신을 형성하는가. 


SF 고전 강의에서 교수는, 어슐러 르귄의 부모가 둘 다 저명한 인류학자였다는 점에 대해 말하고 인류학자로 그녀의 부모가 남긴 작업이 그녀의 소설에서 어떻게 계승되나에 대해서 상세히 말하기도 한다. 인류학자로 사유하기. 르귄은 말을 배우듯 그걸 배웠다. 


말을 배우듯 그걸 배운다는 것. 그걸 태어난 집에서 할 수 있다면 아주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이 있는 것. ㅎㅎㅎㅎㅎ 그렇. 책이 있고 책 말고도 여러 경로들이 있고. 그것의 일부가 될 무엇을 내가 (너와 내가) 하게 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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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1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 아부지는 곤충 학자!^^
줌파 라히리 아부지는 대학 도서관 사서!^^


몰리 2022-12-21 13:41   좋아요 1 | URL
부모가 노동 (지식 말고 육체 노동) 계급인 작가는 누가 있나요. ㅎㅎㅎㅎㅎ 누구 한 두 명, 그런 작가의 대표격으로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남. 발자크는 지금 찾아보니 부친이 장인 계급의 후손(이자 그 자신 장인 계급). 디드로는 부친이 cutlery, 의료용 포함해서 칼, 등등 철물 제조업. 아 그래도 지식인의 자식 중에서는 또 버지니아 울프, 아버지라는 거인을 쓰러뜨린 거인!

scott 2022-12-21 14:08   좋아요 1 | URL
카버
디킨즈
체호프
까뮈
마르케스
움베르토 에코
아니 에르노

샐리 루니
요렇게 노동계급
줄리안 반즈 아부지 교사
이언 매큐언 아부지는
군인
인데도
인터뷰 할때면 자신들 부모 세대가 노동계급 이라고
 




하인라인은 이를테면 미래의 역사학자로서 미래의 연대기를 작성했다고 한다. 2600년까지. 

그의 시대에서 2600년까지, 시대별로 있게 될 기술적 발명, 사회적 변화, 정치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각 시대를 배경으로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 적어두었다고. 


그 자신이 이 연대기를 참고하면서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동료, 그리고 후대의 SF 작가들이 여기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없어? 하인라인의 연대기로 가봐. 


SF 고전 강의에서 교수는, 이게 얼마나 (허황한 게 아니라) 진정 놀라운 재능의 표현인 것인지 내 말을 듣는 네가 온전히 이해할 거 같지 않아서 두렵다... 는 투로 저 얘기를 해주었다. 지금 저는 아주 놀라고 있습니다. 매우 깊이 놀라고 있습니다. (알수록) 더 놀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  


교수에 따르면 하인라인은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했다. SF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썼으므로 받지 못했다. 하인라인이 받지 못한 노벨 문학상을 헤밍웨이는 받았는데, 헤밍웨이는 SF를 쓰지 않았다.  




butcher paper (정육점에서 고기 포장용으로 쓰는 질긴 종이)에 작성했다는 그의 미래사 연표. 각 시대마다 써야 하는 소설들의 구상. 구글 이미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바로 찾아지지 않는다. 꼭 보고 싶다면, 작정하고 이잡듯이 찾아야 할 듯. 


이런 얘기들에서 짐작하게 되는 것. 하인라인 소설들에는 작가에게 특별한 용기를 주는 면모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이제 더는 두렵지 않다... 차원. 그 차원 외의 차원으로도. 그런 책들이 책을 쓰게 하는 책들인 것인데, 그런 책들로 벽들을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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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산책 경로 중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가 있다. 

꽤 넓게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엔 산도 있고. 어둠 속에서 집들에 켜진 불빛이 점점이 반짝임. 

크리스마스 카드 속 silent night. 그 위치에 몇 단으로 구성된 넓은 데크도 있어서 거기서 오르락내리락 빙빙 돌기도 한다. silent night, holy night. 노엘. 노엘. 캄캄하다가 동이 트기 시작할 때까지. 하늘 색이 서서히 변하는데 그 검푸름, 그 색을 특히 좋아하는 화가도 있을 거 같은 그 색. 



<미들마치>가 영문학에서 유일하게 어른을 위한 소설이다. 

저 말에 특별한 진실이 있겠지만, 그 진실 밀어두면 (그보다는 하찮은 의미에서든 아니든) 어른을 위한 소설, 책들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어른을 위한 책일 거 같고 요즘 특히 궁금한 책으로는 이것도 있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by James M. Cain



올해 들었던 강의 중 <미스테리와 추리, 범죄 문학 걸작들> 이런 강의가 있는데 

거기서 추천된 책이기도 하다. 갖고 있는 책인데 아직 읽지 못함. 갖고 있은지 5년은 된 거 같은데 앞의 두어 페이지 넘겨본 게 다다. 그 두어 페이지는, 하....... 이런 어른의 세계, 느낌이었다. 착한 아이에게 금지되는 것으로서의 어른의 세계. 발자크가 추리 소설의 효시로 여길 수도 있는 소설을 썼다니 그걸 읽는 게 먼저다. 그게 아니어도 발자크가 끝나야만 .... 추리 소설의 걸작들 세계로 갈 수 있다. 





정말 무궁무진하다. 이 책도 아주 궁금한 책. 이 책도 두어 페이지 ㅎㅎㅎㅎㅎ (그걸 읽었다고 말해야 하나) 읽으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인상 받았었다. SF 고전을 다루는 강의도 있는데, 이 강의를 한 미시건 대학 영문과의 노인 백인 남자 교수는 하인라인을 깊이 사랑하는 분이었. 그런데 "노인 백인 남자"이며 하인라인을 사랑한다, 그러면 바로 연상될 무엇들이 있겠지만 그것들을 연상시키는 분은 아니었다. 하인라인 소설들을 너무도 좋아하지만 그것들을 넓고 깊이 읽은 독자. 역사, 사회 안에서 철학적으로? 이 교수에 따르면, 하인라인 소설들 중 특히 이것은 한 시절 미국 대학생들 모두가 읽은 책이었다. 



아 그러니까. 필독서. 한 시대의 필독서. 하인라인은 충분히, 다른 걸작을 낳게 정신을 자극했을 필독서였을 거야. 

좋은 책들. 어른을 위한 책들은 반드시 다른 책을 쓰게 하는 책들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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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2-18 0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편부는,, 그 책은 별로 어른을 위하는 것 같지 않아요,,,ㅋㅋㅋ 저 그 책 무척 기대하고 읽었는데 저처럼 나쁜 어른에겐 기대 미달..ㅎㅎㅎㅎ

몰리 2022-12-18 12:02   좋아요 0 | URL
교수가, 이걸 어떻게 어디까지 말하지? 약간 망설이면서, Cain 소설은 각색이랑 같이 보면 좋다고, 원작이 못한 걸 각색이 하는 걸 볼 수 있으니까 특히 <이중배상 Double Indemnity>은 챈들러가 어떻게 각색했나 보라고... 그럴 때, 음 ㅎㅎㅎㅎ 원작은 아닌데 각색이 걸작이라는 뜻 같네요?

그랬었는데, 정말 그런가 봐요. 그런데 제목이, <우편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이 제목, 완전 제목이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