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오면 평소 산책 경로는 다니기 어렵게 된다. 숨어 있는 공터. 숲 속의 작은 길. 제설 작업 하는 분들 없음. 나 말고 다른 산책자들도 덜 나오심. 이른 새벽에는 무섭고 위험해짐. 동네에 조금 멀지만 아주 넓은 운동장(공연장 겸하는)이 있는데 여기가 대안. 여긴 눈, 비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그런데 지금 시설 보수 진행 중이라 입장 못하게 막아 놓았고 나는, 그래도 운동 하는 분들 있을 테니 그 분들 틈에서 (혹시 걸려도 같이 걸리면....) 생각으로 눈 많이 온 며칠 전 가보았는데 발자국은 많이 나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발자국이 있다는 건 나도 들어가도 된다는 것. 들어가서 걸었다. 걸을 만큼 걷고 나서 나오려고 하는데, 내가 가는 방향으로 차가 진입해 정차했다. 운동장을 채운 조명들이 있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 차를 마주 보면서 걸어가기가 뭣해진 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걷기 시작했고 그리고 메아리치는 (메아리는, 쌓인 눈 때문에?) 남자의 외침을 들음. 어 거기, 저기요. 이 쪽으로 나가세요. 이 쪽. 


그게 마치 위의 사진 속 같았음. 

스릴러, 호러 영화에서 많이 본 어떤 장면 같았음. 

내가 가던 방향에 정차했던 그 남자는, 차문을 열고 내려와 서서 소리치면서 나갈 방향을 알려주고 탄식했다. "아이 C" (C까지는 아니었겠지만 한숨이 강하다보면 그럴 수 있겠지). 





어제 다시 가보았는데  

차량에 근거하여 같은 분인 것으로 짐작되는 그 남자와 다시 마주침. 이어폰 꽂고 걷는데 갑자기 남자가 나타남.  

내가 먼저 말했다. 저 조금만 걷다가 갈게요. 눈이 많이 와서 걸을 데가 없어요. 

그러자 그는 이 분이 그 때 그 분과 같은 사람인 거 맞는가, 세상 다정하게 말했다. 네 걸으세요. 라고. ㅎㅎㅎㅎㅎ 

비아냥, 반어적. 이런 게 아니었. 순간 세상이 달라지게 하는 다정함이었. 

그리고 그는 빗자루를 꺼내 와서 눈을 쓸기 시작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 눈을 쓸었다. 그리고 나는 걸었. 근처에 눈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무섭지 않고 좋았다. 





그러니까, 어떤 도덕적 충격, 도덕적 패배가 

한국의, 한국인의, 경험이었나. 이것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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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3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문단 문단 읽어나가면서
무서움 만큼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

목소리,,,
저기요 ㅎㅎㅎ

마지막 라스트 씬은
요네스뵈의 스노우맨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

몰리 2022-12-23 08:38   좋아요 1 | URL
그 남자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ㅎㅎㅎㅎㅎ
<사이코> bgm. 혹은 스크림.
요네스뵈. 그가 노딕 느와르 부흥을 이끌었다는 칭송 듣고나서
장바구니 담아, 담아는 두었는데, 아 노딕!!!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