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와 수잔의 두 이야기를 읽었다. 수잔은 전남편 에드워드가 보내온 원고, 토니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어가는 상황. 두 이야기가 아주 다른 톤의 문장과 어휘로 자신의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묘하게도 수잔의 이야기 속에 자리 잡은 토니를 만나는 게 아니라 독자인 나는 수잔과 동등한 입장에서 따로 토니를 만난다. 그러니 자연스레 수잔의 행동과 싼티나는 말투에는 박한 평가를 내리면서 토니의 이야기 몰입을 방해하는 수잔에게 짜증이 나기도 한다.

 

원고를 읽고 수잔은 현실로 돌아와 남편 아놀드의 행동거지와 그의 의뭉스런 계획에 넌더리를 내면서 원고를 보내온 전남편의 의도를 고민해본다. 그는 왜, 이제서야, 이 소설을 보냈을까? 복수? 무엇에 대한? 깔끔하거나 노골적인 연결점은 보이지 않는데, 그저 관심과 시간을 잡아두었다는 것만 의도했다기엔 너무 착하잖... 가만히 토니를 따져본다. 어쩐지 초반부터 공식대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아, 싫은데 끌려가서 읽고 있는 나와 수잔. 앞이 보이는 소설인데도 손끝이 움찔거리게 무서...운데 툭 수잔이 끼어든다. 하지만 초반 그녀의 설레발이 신경에 거슬리기도 하고. 그 정도는 아니잖아? 왜이래, 처음 스릴러 읽는 사람처럼. 난 별로 겁 안 먹었거등?

 

공식을 따라가는 소설인데도 토니는 특이하다.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을 잃을까, 앞을 못 내다볼까 걱정한다. (가족을 잃어서 그는 정말 슬프고 괴로운가, 그는 진짜 피해자일까, 의심할 정도로) 그는 범죄 현장에서도, 사건 후 집에 돌아와서 친척이나 동료, 학생들을 상대할 때도, 계속 주저하고 고민하다 마지못해 행동에 나선다. 반면 레이와 형사 엔더스는 곧바로 행동한다. 토니는 고민을 할 때도 혼자 있지 못한다. 부인 로라를 불러내고 딸 헬렌을, 그리고 형사나 레이를 불러내서 계속 묻는다. 어째야 할까, 어떻게 다음 행동을 해야할까. 이게 '나' 인가. 독자에게 사인을 계속 보내는 토니.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주문처럼 되뇌이며 자신을 잃지않으려 애쓰지만 그가 결단을 내려 행동에 옮기는 순간, 챕터는 끊기고 공백이 생긴다. 그 공간에 독자가 들어선다. 그렇지, 내가 대신 해줄게, 너의 복수, 너의 욕망, 그리고 너의 비겁한 고백을. 하지만 쉽지 않게 수잔도 끼어든다. 실은 자기가 더 알고있는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있다고. 그는 쫌 아니 많이 별났다고. 그의 이야기가 예전엔 후지고 유치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를 계속 읽게 냅두라고.

 

마지막까지 휘둘리는 토니는 무얼 보고, 보지 못하고 사그러지는 걸까. 이야기의 틀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주인공 토니. 그가 복수의 칼을, 아니 총을 휘두루는 건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것에 대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대. 어둠 속에서 토니는 미친 형사와 미친 여자들, 그리고 멍청한 양아치들에 맞섰다. 그리고 속으로 외웠지, 내 이름은 토니 헤이스팅스, 수학과 교수. 내가 복수라고 부르니까 이건 복수의 잔치야.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게 소설 읽기의 의미일까. 책을 덮어 책장에 꽂는다. 당분간 '한낮에' 다른 이야기를 읽을 때라도 토니 헤이스팅스, 수학과 교수가 생각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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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4-0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보다 <녹터널 애니멀즈>라는 영화가 비주얼
적인 면에서 더 소설 속의 영화, 영화 속의 영화
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영화는 미처 다 보지 못했네요...

유부만두 2018-04-05 16:5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런데 영화는 예고편만 봐도 무서워서 엄두가 안나네요. 소설은 꽤 좋았어요. 별 다섯 개 주기에는 조금 꺼려지고 제가 작가의 트릭 혹은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한 듯 하지만 ... 좋은 독서 경험이었어요.

목나무 2018-04-05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은 안 읽고 <녹터널 애니멀즈> 영화만 봤더랬죠.
영화는 음~~ 첫장면부터 충격적이었고.....ㅎㅎㅎ;;;;;
끝까지 보기가 참 힘들어서 겨우겨우 봤던 영화로 기억이.....;;;;;
영화때문이라도 원작은 볼 생각은 못했는데.. 음음... 볼까 말까나.... 고민이...

유부만두 2018-04-05 16:57   좋아요 0 | URL
소설은 꽤 재미있게 여러 생각도 하면서 읽었어. 추천. ^^
물론 무섭지... 영화도 끔찍하겠더만... 그대는 쎈 독자니까 감당할거야.

psyche 2018-04-1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 책이 별로더라구. 읽고나서 빨책도 들었었는데 내가 작가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유부만두 2018-04-16 07:48   좋아요 0 | URL
전 수잔 부분은 너무 뻔하고 싼 티나서 싫었어요. 토니 부분도 너무 무섭고.
그런데 토니의 캐릭터와 서술이 색달라서 읽는 동안엔 몰입해서 읽었어요.
작가의 의도 .... 그런 게 있었겠죠? ;;; 저도 모름.
 

표지 속의 저 두 아이는 누굴까, 계속 생각한다. 저자의 의도대로 이야기의 첫부분, 우정의 시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이 지긋한 할머니 작가 Ferrante를 상상한다.

 

죽으면 늙어야지, 혹은 믿지고 하는 장사, ...옆에 '할 말을 다 하지 않았다' 라는 뻔한 문장을 적어보겠다. 되풀이하고 되새기고 덧붙이는 이야기로 책은 몸집을 불리고 독자의 시간을 잡아먹고 독자의 상상력에 울타리를 두른다. 티나, 이야기에서 페란테는 나의 호감을 잃었다. 이런 식의 '장기말 취급'은 잔인하고 싫다. (허걱 놀라고 화가 치솟는다.)

 

어쩌면, 이라는 내 상상은 이 모든 이야기가 릴라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랬는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둘이었을까? 혼자였을지도 모르지. 셋 아니면 넷이었거나. 하지만 이런 '진짜 이야기 찾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생을 이렇게 서술해낸다는 것, 폭력과 무지, 애증의 세월을 책으로 읽는 경험은 나도 모르게 내 어린시절과 이런저런 추억 혹은 웬수들을 불러냈다. 즐거웠고, 과했다. 레누, 이제 그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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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3-28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편부터 폭력성과 잔인함이 보여서 그만 읽기로 했어요.
그러고 났더니 이 책에 대한 글이 있어도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네요~~~`.^^;;;

유부만두 2018-03-29 09:02   좋아요 0 | URL
네. 그냥 1권만 읽어도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인생....그런데 어쩐지 비슷한 삶....
문학은 뭘까, 고민도 (조금) 했지요.

psyche 2018-03-2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의 초반의 책들만 좋다는 걸로 이해하면 될까요?

유부만두 2018-03-29 09:03   좋아요 0 | URL
네 1권은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요. (제가 폭력성에 라로님보다 둔해서;;;;)
그런데 각 권이 끝날 때 감질나게 해놔서 다음권을 보게 만들어요.
하지만 4권은 정말 과하다...싶었어요. 누가 말려도 읽고 싶으면 읽는거지만요. 저처럼. ㅎㅎ
 

이십대의 레누와 릴라의 삶이 그려진다. 어쩐지 릴라의 미친 행보를 한 박자 늦게 따라가는 듯한 레누. 노조와 사회주의 운동, 페미니즘에 목소리를 더하고 함께 고민하지만 절대 휘둘리지 않는 릴라와 어쩐지 모두를 편한대로 이용하지만 아닌척, 속으로는 온갖 고민과 열등감, 혹은 욕망과 엉뚱한 망상을 끌어안은 레누.

 

외.완.니. 외도의 완성은 니노, 라는 새 공식을 배웠다. 농부 니노, 여러 여인들과 사랑하는 니노, Like father, like son.

 

사건과 인물들이 티나게 계산적으로 배치되어서 3권은 레누와 릴라, 그리고 니노 외의 다른이들은 역할을 위해 놓인 인형 같고 덜 생생하다. 주말 드라마 속 인물들 처럼 저들끼리 얽히고 섥혀서 '아, 옛날이여'를 반복하며 관계와 욕심들이 꼬인지라 자꾸 발이 걸려 넘어질 것만 같다. 이제 남은 삼십 년 동안의 세월 동안 다시 레누와 릴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던진 것들을 수습하고 (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상처 주며 다치겠지. 그 누구보다 시뇨르 페란테를 기다리고 있다.

 

많이 힘들게 읽었다. 인물들이 이기적이고 짜증나도록 제 욕심을 남탓으로 돌린다. 폭력과 무지함, 뻔뻔함과 억지가 넘친다. 그 상황들이 지금 내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겹쳐지기도 해서 섬찟하다. 게다가 이태리, 그것도 나폴리 이야기인데 음식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어서 읽는 맛이 없다.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시는데 그게 어떤 맛인지 좀 나눠주질 않아. 레누의 사람에 대한 인상도 외모 평가로만 반복되어서 그녀에 대한 내 의리가 무너진다. 키가 크고 옷 잘입고 머리결이 좋아야만 사람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피에트로 처럼 공부를 잘해야 하는건가요. 야하고 아슬아슬한 장면도 뭐 그닥 아름답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의 육아 스트레스와 고난에 동감했기에 4권은 읽어야겠지. 그런데 벌써 부담으로 다가오는 책, 이라면 읽지 말까.

 

1, 2권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리 망가지다니,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나폴리 피자 대신 비빔국수를 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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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8-03-05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3권을 잡았어요. 이왕 잡았으니 내용이 궁금해서 읽긴 읽어야 하는데 목이 넘 아파요ㅜㅜ
주인공들의 얽히고 설킨 감정들이 이젠 좀 벌써 피곤해져서 잡았다가 다른 책 좀 읽었다가~~ㅋㅋ

비빔국수 아침인데도 군침 넘어가네요^^

유부만두 2018-03-05 09:57   좋아요 1 | URL
3권 읽으면서 늙은 기분이에요. ㅎㅎㅎ

비빔국수에 맥주 마셨더니 아침에 퉁퉁만두가 되었어요.

단발머리 2018-03-05 10:09   좋아요 2 | URL
전.... 레누 때문에 좀 그랬어요.
왜 이렇게 릴라에게 매달리는지 잘 모르겠구요. 자꾸 제가 레누가 되서는 릴라를 미워하곤 했습니다.
두 분의 나폴리 일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4권은 비닐포장임을 다시 한 번 안내드리며~~~
그나저나...

외. 완. 니.
외도의 완성은 니노. 이거 어쩐답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18-03-05 14:3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맞아요. 레누 땜에 속도 터지구요, 얘가 왜이리 엉뚱하게 구는지 납득이 안돼더라구요. 그리고 레누가 은근 속물이쟈나요.

외.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팩트 같아요. 비니루에 싸여있다는 4권도 그걸 확인해줄거 같아요. 아 그런데 너무 지쳐서 좀 다른 이야기들로 쉬었다가 읽을래요. 나폴리 사람들 느무 쎄요.

공쟝쟝 2022-09-0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는 아직 다 읽진 않았고 현재 레누-니노 잤습니다. (레누에게 완존 이입해서 그럴 수 있다고 계속 생각하다가.... 결국 잤잤...ㅜㅜ 되니까 으아아.. 대체 니노 나도 맛좀보자ㅋㅋㅋ 엥?ㅋㅋㅋㅋ) 좀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란 그런 거 아니겠스빈까?ㅋㅋㅋㅋ
 

 

이렇게 계속 만나고, 끌리고, 잊지 못해 뜨거운 망상을 키우는 상대라니. 니노는 과연 그럴만한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이제 겨우 챕터 20 이지만 3권도 역시나 정신없이 독자를 몰아댄다.

 

2005년에 레누가 만난 릴라는 어떤 상태인건지. 작가 강연회에 나서고, 첫 책을 향한 쓰고 매운 리뷰를 대하는 레누의 마음은 어떤지. 니노. 아, 니노. 널 어쩌란 말이니. 릴라가 뜨거웠고 특별했다고 생각했는데. 릴라는 그저...

 

니노와의 만남 후에 서둘러 서점에서 푸코의 '성의 역사'를 사는 레누. 얼마전에 그 4권이 프랑스에서 나왔다는데. '육체의 고백'. 그건 중세 종교와 성, 그리고 육체에 관한 논술이라니 어쩌면 더 레누의 전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레누의 첫 책과도.

 

http://www.gallimard.fr/Catalogue/GALLIMARD/Bibliotheque-des-Histoires/Les-aveux-de-la-chair

고백하자면 난 푸코의 원서를 완독한 게 없다. 늘 발췌만 그것도 영어나 우리말 번역의 도움으로 읽었을뿐. 그 현란하고 길게 꼬인 문장은 어렵고 미웠다. 아니 더 들여다 보기가 싫었어. 푸코를 입에 달고 살던 니노 (닮으려 애쓰던) 같은 선배들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번에 나오는 성의 역사 4권은 유고집으로 그 특유의 복잡한 문장은 덜하다고. 릴라같은 선배도 있었는데, 그 선배는 지금 어디 있는지. 과방의 그 고만고만한 니노와 릴라, 레누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레누, 당신의 첫 책은 진정한 소설이었을까요? Art of the Fiction 에서 작가가 절대 쓰지 말아야 할 걸 당신이 쓴건 아닌가 싶어요. 당신이 열정에 들떠 무엇에 씌운듯 쏟아낸 게 과연 소설이었을까요. 캐릭터와 저자의 경험, 목소리 사이 그 경계선이 흐릿한 건 많은 이들의 눈에 보였을거에요. 그런데 내가 읽고 있는 이 3권은 작가가 캐릭터에 손을 많이 댄 것 같아요. 캐릭터들이 어쩐지 다른 캐릭터를 특별한 의도로 불러내 등장하거든요. 마음이 급했나요? 혹시 독자들이 3권을 읽으며 지칠까봐? 아니면 당신이나 릴라, 아니 레누를 덜 사랑할까봐? 그 반지, 피에트로가 준 반지, 정말 예쁘네요. 불안할만큼. ... 뭘 걱정하나요. 안그래도 돼요. 나폴리 피자와 (포도주 대신) 맥주, 그리고 음악. 푸코는 잠시 잊고 (니노도 잊고) 당신의 이야기를 읽을 준비는 되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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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2-2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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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8-02-27 08:08   좋아요 0 | URL
좋네요. 이번엔 릴라가 많이 나와서 흥미진진 (이라지만 괴로운 마음도 더해서) 읽고 있어요. Me Too 상황 넘치는 소설 속 이야기가 아프네요.

psyche 2018-02-27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의 역사는 한국어로도 이게 뭔 말이냐 했었던 기억이....
그것보다 피자에 맥주가 눈에 더 들어오네 ㅎㅎ

유부만두 2018-02-27 08:09   좋아요 0 | URL
맛있었어요. 저 맥주. 과일향도 나고 너무 달지 않아요. 이름을 못외움;;;;
성의 역사는 ...그렇죠. 우리말로 읽어도 이게 뭐여?! 하는 책! ㅎㅎ
 

소설쓰기, 문예창작 실용서를 읽었다. 소설 쓰기를 과연 배울 수 있는가? 라는 큰 질문 부터 시작하지만 배우고 고쳐야 좋은 소설이 나온다는 믿음으로 주요한, 그리고 매우 실용적인 기술을 열거하고 끝엔 연습문제를 달아놓았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이 넘치는 교본이다. 소설을 많이 읽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감히 소설을 쓰겠노라고 까불지 말라고 (은근히) 말하고 저 옛날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 세익스피어로 부터 현대의 여러 실험적 소설들의 특징을 예로 들고 있다. 친근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플로베르는 당당하게 한 분야를 맡아 소설쓰기의 중요한 부분을 가르친다. 포우는 반짝반짝 빛나는 작가였고 멜빌의 지성은 본받아야한다. 책만 사놓은 포크너를 드디어 만나야하고, 도널드 바셀미와 윌리엄 개스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다만 미국의 소설쓰기 강의를 위한 책이라 현대 소설 작가의 예가 미국에 제한되어 있고, 문장의 리듬에 대한 부분은 영어가 아니면 그 효과에 대한 공감이 어렵다.

 

플롯짜기, 인물과 배경, 시점을 정하고 속도를 조절하기, 고전을 이용하기 등 유용한 조언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신념, 심미안에 대한 것이다. 작가가 세상과 인류를 바라보는 시선이 소설에 배어나온다. 도덕적으로만 쓰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살고 싶게 만드는' 소설을 써야한다고. 해서 안될 말이면 하지 말라고. 그것이 싸구려 소설(도 아닌) 나부랭이와 다른 점이라고 했다. 그래도 저자가 못 가르치는건 바로 소설의 결말. 어떻게 갈등과 고민이 해결, 혹은 파국을 맞는지, 그건 쓰는 과정에서 결정되기에 절대 남이 공식으로 말해줄 수 없다고. 책 읽기의 기쁨,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흥분이 다 합쳐져서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교향악이 되는 장편소설의 결말은 특히나. 아, 다시 깨달았다. 나는 소설을, 단편도 장편은 더 사랑한다. 소설 읽을 생각에 이렇게 가슴이 뛴다. 안경을 닦고 커피를 내린다.

 

 

 

 

안경선배, 나도 이 안경 있어요. (영미영미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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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2-27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소설을 많이 읽고 사랑하는 사람은 감히 소설 쓰겠다고 까불어도 되는 건가요? ㅎㅎ
이건 농담이고 소설을 읽을 수록 아 나도 소설 써볼까 라는 생각은 티클만큼도 생길 수 없더라는...

유부만두 2018-02-27 08:11   좋아요 0 | URL
까불다가 이 책의 저자에게 혼날걸요? 사랑은 기본, 노력은 더 기본, 이런 기분이 들어요.
언니 말에 공감 백만배. 소설을 읽을수록 쓴다고 까불수가 없죠. 그만큼 엉터리 소설을 만나면 화도 더 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