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미디어 지식인의 언행 불일치, 좌파 지식인의 사이비성을 비판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투구하는 강준만에 대해 나는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동업자 의식으로 똘똘 뭉친 교수 사회, 지식인 사회에 대해 그만큼 솔직한 이야기를 쏟아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를 놀라게 하는 점은 그가 보여주는 엄청난 필력이다. 양도 양이거니와 그의 글이 보여주는 비판의 방식 즉 상대방의 장점을 사심없이 인정할줄 알면서도 때로는 인정하는 척 능청을 부리다가 그걸 빌미로 역전의 화살을 날리는 그의 방식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출세를 위해 유학까지 갔다 온 평범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솔직함은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까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준만에 대한 나의 지지는 어디까지나 그가 수행하고 있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한 지지일 뿐, 그의 인간됨됨이나 도덕성에 대한 지지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고약한 습관이 하나 있다. 지식인론만 하더라도 강준만의 지식인론은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지식인론 못지않게 새겨들을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글에 무의식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게 마련이다.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글은 원론이고 강준만의 글은 현상 분석론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데,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와 강준만을 겹쳐 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르트르나 리오따르만 읽고 강준만을 버리는 일은 적잖은 문제다. 이걸 지식 사대주의 현상이라고 하는 걸 게다. 여기에는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도 한몫하는데, 점잖게 학문적 용어를 쓰는 글을 적당히 구어체를 섞어가며 쓰는 글보다 우위에 두는 습성도 지식 사대주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여하튼 강준만은 세인이 습관처럼 생각하는 것보다 새겨들을 구석이 많다. 물론 엄청나게 써대는 글을 따라가며 읽는 일이 버겁긴 하다. 그리고 내용 상 중복되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괄호 치고도 새로운 구석이 많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식인 행세 하는 이들의 새로운 면도 알게 되고,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바쁜 탓에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지나친 사람들의 못된 행동, 비겁한 행동도 보게 된다.

<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는 미디어 행위에 참가하는 지식인들의 위선, 허위, 무지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흔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지식인도 강준만에게 걸리면 한 소리 먹기 마련인데 임지현, 박노해, 손호철같은 이들이 그 예이다. 꼴보수, 극우적 논리를 가진 이들이야 새삼 더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지식인들은 평소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사람들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강준만의 이야기 중 제일 귀에 아프게 들려오는 건 실명비판 공포증 이야기이다. 사이버공간 상의 커뮤니티에서 가끔 논쟁이 벌어질 때가 있는데, 여기엔 실명(사이버 공간에서는 아이디) 비판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실명비판이나 적어도 지명비판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 네티즌은 무덤덤하다. 그건 다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동업자들끼리의 실명비판은 여간 부담스런 일이 아니다. 특히 종종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라면 실명비판은 인간 말종이나 할 법한 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명비판의 부재는 진정한 비판, 책임지는 비판의 부재로 이어지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 동업자 사회를 말아먹는 일로 발전하기도 한다. 문학계에서 한때 문학의 위기가 운위되었을 때 그 위기는 솔직히 말하자면 위기와 동근원인 비평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근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등장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일 텐데, 적어도 문학과 관련해서 이제 진정한 비평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같다. 해마다 이런 저런 비평가들의 탄생 소식이 들려오지만 그들의 명은 짧아서 결혼도 하기 전에 주례사나 써대는 노년의 냄새를 풍길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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