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9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 동문선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지성의 천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가 인문학의 가치가 대중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과 평가를 받으며 그것을 자기네의 문화적 자존심으로 삼는 정신적 풍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매스미디어에 기생하는 우리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네들의 풍경은 부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이 저자 부르디외는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이다. 꼴레쥬 드 프랑스는 학생은 없고 교수만 있는 학교로 유명하다. 교수는 일 년에 몇 번 대중 강의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가 완수되고, 나머지 시간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에 맡겨진다. <텔레비전에 대하여>도 부르디외가 지식 대중을 향해서 행한 강연을 묶어놓은 책인데, 학문적 장에서 맺어진 성과를 대중을 향해 개방한다는 측면에서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들은 최고의 권위와 찬사를 얻게 마련이다.

매스미디어에 대한 원칙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이용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노골적으로 매스미디어에 아부하거나 친화적인 자세를 보이는 지식인들이 많은 한국사회에서 부르디외의 텔레비전론은 경청할 만한 구석이 많다. 아니 참조나 타산지석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착각을 준다.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강준만 교수는 지식인과 교수가 우리 사회를 망친 일 주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수 사회에도 엄밀한 차이가 있다. 매스미디어를 청중과 대화자로 삼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학생과 동료 학자를 그 상대로 삼는 교수도 있다. 매스미디어 친화적인 교수들은 학문적 장 안에서의 경쟁보다는 대중사회 안에서의 지지와 찬사에 더 연연한다. 이런 모습은 부르디외적 기준에서 볼 때 교수 일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갈수록 다른 장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매스미디어, 특히 텔레비전의 강제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대개의 교수들은 매스미디어에 대해 강할 수 없다. 학문적 권위를 갖는 한 분야의 석학이라 할지라도 매스미디어 앞에서는 한없이 따분하고 평균화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애써서 그런 기회를 포착하려는 노골성마저 드러내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학문, 예술, 정치, 경제는 그 장의 법칙에 따르는 자율성이 있다고 얘기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가 못하다. 모든 장이 다른 장에 의해 침식되어 타율적이고 종속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스미디어는 다른 장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주체처럼 보이지만 매스미디어 역시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즉 매스미디어의 순화, 개혁이 해결책으로 나설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부르디외는 매스미디어와 지식인 사회가 힘을 합쳐 해결책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썩 내키지 않는 현상유지론 내지 무책임론의 변종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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