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 평전
김학동 지음 / 새문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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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의 부조화를 뼈저리게 느끼며 객사한 이상을 기억할 것이다. 이상은 천재이되 그가 산 시대보다 항상 몇 발작 앞서 있었기 때문에 불운한 존재였다. 그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를 비난했다.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로 점철된 <오감도>가 신문에 실리자 해당 신문사에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나 뚝심 좋은 상허 이태준이 사직을 결심하고 버티지 않았다면 그의 시는 그 한편으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이태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상 없는 이태준이 존재했을리도 만무하다.

사람들은 이상에게서 묘한 아우라를 느낀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백열등처럼 빛나는 그의 투명한 피부, 그리고 퇴폐와 절망이 눅진히 묻어나는 그의 어투, 그것은 어찌보면 이 땅의 문학 교육이 만들어낸 신화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화적 존재 이상의 옆에 김기림이라는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문학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죽음을 얼마 앞두고 동경에 체류하던 이상이 간절히도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은 그의 어머니도 형제도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김기림이었다.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이상이 얼마나 김기림을 갈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상에게 있어 김기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는 이상 사후 발표된 김기림의 추모 시나 글을 읽어보면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 경쾌하고 명랑한 근대성의 향유자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비통해한다. 경쾌하고 날렵하던 그의 언어는 갑자기 깊은 고뇌를 이끌고 무겁고 둔중한 울림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김기림의 그 어느 글보다 진한 감정이 묻어나며, 구구절절이 비탄의 절조를 뽑아낸다.

그동안 문학연구자들은 김기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어왔지만, 정작 그의 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거나 무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김기림이 북한 출신이며 전쟁 중 납북되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김학동 교수의 지난한 열정의 덕을 입어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기림의 생애가 정리되었다. 이 책이 의미가 있다면 정확히 이 부분일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기림의 누이의 편지에 근거해 재구한 기림의 생애는 애처로운 것이었다. 그가 그토록 과학을 강조했던 것도 알고 보면 출생과 성장 과정을 지배했던 슬픔과 우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일터다. 자기를 억누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런 것 하나쯤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직후의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좌우의 편가르기 앞에서 그의 심중을 짓눌렀을 고뇌의 한 자락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후의 생애는 밝혀진 것이 없다.

기림의 누이는 그와 어릴 적부터 무척 깊은 애정을 나눠왔음을 술회하는데, 미국으로 건너갈 적에도 기림의 시집과 책을 챙겨가 그가 그리울 때면 펴보곤 눈물짓는다 한다. 그리고 말뿐인 통일에 분통을 터뜨리며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그의 생존여부만이라도 확인하고픈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 편지가 88년께 보내진 것이고 보면 기림과 그 누이는 지금쯤 하늘 나라에서 애끓는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기림이 전쟁 당시 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문학은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의 역량이나 태도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사정은 이상도 마찬가지이다. 김기림과 이상, 그것이 그들의 천명이라면 할 수 없지만 시간을 격해서 그들을 바라보는 후세인으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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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토마스 소벅 외 / 거름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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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련 서적을 일견해보면 몇 가지의 유형 분류가 가능하다. 저자의 국적별 분류도 그 중 한 가지 방법이겠는데, 영화의 본질론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개론서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종류가 의외로 적고, 그것도 대부분 외국 저자의 번역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때 영화 개론서로 가장 유명한 책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라는 책이었다. 영화 열풍이 불어닥쳤던 90년대 초반 너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을 넘겨봤을 책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광풍이었다. 20세기부터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극장에 걸리고 주말이나 휴일이면 사람들은 영화 보기로 감동과 재미를 한 묶음으로 간편하게 챙기곤 했다. 그 흐름은 역사의 격변기라고 해서 달랐던 것은 아니다. 정국이 어수선할 시절 가투의 주무대였던 종로거리에는 영화를 보러 나온 사람들과 가투 참가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광풍의 내적 동력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세계사적 격변과 산업적 발전이 결합하며 생겨난 우연같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VCR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해 영화는 극장이라는 공간적 제약, 특정한 시간이라는 제약을 벗어나 마음만 먹으면 비디오 테이프로 알뜰하게 몇 번이고 챙겨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몇 번이고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영화에 대한 비평적 욕망을 증폭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진보적 운동의 정당성과 활동성이 쇠퇴되면서, 그동안 인간의 의식을 자본주의적 공세로 세뇌시키는 저급한 오락물이라는, 영화에 씌워진 오명이 벗겨졌다. 이념과 영화를 마치 상반된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그 의식은 지금으로 봐선 우스운 것이었으나 그 당시는 그것이 무시 못할 금제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는 대학생들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는데, 지금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의 상당 부분은 적어도 그 시절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영화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 그 자체뿐만 아니라 관객의 감수성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된다. 소벅 부처의 <영화란 무엇인가>는 자네티의 책 이후 번역된 가장 훌륭한 영화 개론서이다. 자네티의 책이 영화사와 영화 기술에 대한 치밀하고 분석적인 해설에 치중하고 있다면, 소벅 부처의 이 책은 영화를 하나의 미학적 구성체로 보고, 영화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미학적 틀 내에서 영화를 조망하고 있다. 그리고 논의의 설득력이 더해져 영화 서적 특유의 지루함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영화 입문을 위한 스터디 교재로 사용한 바 있는데, 참가자들도 대체로 좋은 평가를 보였다. 영화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권쯤 책장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보면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영웅>을 둘러싸고 이데올로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겠지만, 그 한편에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에게 영화는 현란한 스펙터클과 적당한 이야기가 골고루 반죽된 일회적인 볼거리이다. 영화는 영화 이외의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며, 관객들에게 만연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열렬한 옹호자가 다름 아닌 영화 관련 업자들이라는 사실을 한번쯤 상기해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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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전집 5 - 소설, 희곡, 수필
김기림 지음 / 심설당 / 198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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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한국 문학에서 모더니즘을 얘기한다면 김기림을 제대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의 영토를 벗어나 모더니즘을 논의하던 10여년 전 풍경을 되돌이켜볼 때, 김기림 붐이라고 할 정도로 김기림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거기서부터 한국문학의 모더니즘 논의는 출발했고 김기림으로부터 분화되어 다양한 논의의 장이 마련되었다.

그는 이론과 과학의 지반이 척박한 식민지 조선 땅에 단순한 심정과 감성의 시가 아닌 과학과 이론의 지반을 가진 문학을 논의한 선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문학의 근대성을 사유한 최초의 인물이면서도 그의 근대성은 근대 문명에 대한 단순한 향수에 기반한 표피적인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었다. 그 이후 다양한 학계에서 근대성이 운위되면서 논의의 폭과 깊이가 어느 모로 보아 심화되었다고는 하나 적어도 문학에 있어 김기림은 문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수많은 모더니스트의 감성의 원초적인 형태를 배태하고 있는 원뿌리로서 김기림은 주목을 요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김기림은 더 이상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북한 출신의 수많은 문학인들이 그렇듯 그는 차츰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남한 출신의 변변치 않은 문학인조차 끊임없이 후광을 씌우며 부각시키는 요즘의 세태와 비교해보면 부당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김소월처럼 북한 내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과 평가를 얻고 있는 문학인과도 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 김기림은 6.25당시 반동분자라는 명목으로 납북되었고, 그 이후 북한 문학사 그 어디에도 김기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절친한 문우 이상이 동경 하숙방에서 불시에 싸늘한 시체로 돌변했을 때 이상을 시대를 잘 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라고 묘사했듯이 김기림 그 역시 시대와 끝내 화합할 수 없는 시대의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기림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왕성한 창작물을 내놓았다.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그는 정말 많은 글을 써냈다. 잡문일 수도, 습작물일 수도 있지만 지금 놀라운 것은 그가 그처럼 왕성한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내적 동력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글이란 글 쓰는 이의 자의식과 연계짓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하찮은 글 속에서도 우리는 작가를 움직이는 미세한 감정과 의지같은 것을 발견해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기림이 그에 못지 않은 소설, 희곡, 수필을 써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못 시사적이다. 물론 소설과 희곡은 습작물의 성향이 짙으므로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그의 수필은 문제적이다. 그는 대도시로 변모해가는 서울의 풍경을 책과 영화를 통해 길러낸 감수성으로 향수한다. 그에게 있어 대도시는 비판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향수의 영역이라는 성격이 짙고, 거기에 비판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향수를 해칠 정도로 확대되지 않는다.

따라서 김기림은 근대화된 도시를 바라보는 고독한 산책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표층을 뚫고 깊은 곳에 탐지침을 내리지 못하는 표층의 유랑자에 머문다는 사실을 가지고 그 자신의 얕음만을 문제삼을 수는 없을 듯하다. 그보다 좀 더 깊은 곳을 본 이가 있다면 이상 정도라고 할 것이다. 시간의 갭을 괄호쳐 놓고 본다면 지금 우리의 감수성과 김기림의 감수성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나치며 보게 되는 거리 풍경들에 적당히 유혹당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그것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취하며 바라보는 태도, 즉 유혹과 거리의 태도는 대도시의 보편화된 감수성일 것이다. 김기림의 수필들은 그처럼 유혹과 거리의 긴장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그가 놓인 위치와 우리의 위치가 의외로 멀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 감수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서울 재발견의 경험이자 자신을 바라보는 또다른 경험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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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5
박병상 지음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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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복제를 둘러싼 최근 소식들을 접하면서도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황당한 사건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라엘리언 무브먼트니 하니 유사종교 집단의 황당한 모습까지 덧대어져 인간 복제는 심각한 이슈가 아니라 인간을 가지고 벌이는 하나의 유희 같은 인상마저도 심어 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이전에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채식주의 관련 서적들, 그 외 <가타카>나 <A.I>같은 생명공학의 문제성을 다룬 영화들을 봐 왔지만 읽거나 볼 때 외에는 사실 그 전과 큰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거기에는 유전공학, 생명공학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 생명공학이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생명공학에 걸었던 막연한 기대가 말 그대로 막연한 기대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지금보다 조금 느린 삶이 맥락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되었다.

생명공학이 결국 자본의 잉여가치 창출과 과학기술자의 명예와 욕심에 기여하는 비윤리적인 과학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저자는 강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주장은 다소 편협해 보이고 부정적인 면을 침소봉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또 다른 그의 말마따나 사회 전반의 막연한 기대감의 거품을 빼자면 이와 같은 침소봉대는 전략적으로 필요한 전술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이 책 한 권을 통해 새로 정립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릇 좋은 책이란 읽는 이의 경험과 사유에 새로운 지평을 마련해주고, 종합적인 비전을 마련해주는 책일 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앞으로 첨예화될 이슈에 접근할 비판적 시각을 제공해주는 좋은 지침서라 하겠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든가, 그가 들인 공력에 치하의 염을 품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서는 감사와 치하를 아끼지 않고 싶다. 저자가 계속 정진하여 이 분야에서 흔들림 없는 파수꾼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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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지배 동문선 현대신서 67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용숙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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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지배라는 테마는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꾸준히 문제 제기되어 온 사회학적 테마이다. 현실 사회의 질서가 남성 중심적으로 재편되어 있다는 명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굳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이제는 진부한 느낌마저 드는 영역에, 남성 사회학자가 개입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부르디외라는 저명한 사회학자의 이런 개입은 그 자신의 진보성을 충분히 신뢰하는 독자 측의 입장으로 봐도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지배 질서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지배 질서 내에 존재하는 입장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숲 한 가운데에서 숲 전체를 조감할 수 없다는 사실, 어느 특정 시대 안에서는 그 시대의 특성을 제대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사실과도 비슷한 논리다. 그렇게 볼 때 남성 지배라는 테마는 적어도 지배 질서 내의 수혜자(비록 그 정도가 약하겠지만)인 남성이 개입하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한 그 무엇임이 틀림없다.

부르디외는 이 책에서 남성 지배라는 테마를 카빌 사회의 제식(ritual) 전통을 근거로 해서 한 사회의 상징적 질서 내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이 어떻게 상징적 위임을 떠맡으면서 배제되는지를 추적한다. 특히 성별에 따른 노동의 구분과 의미 부여의 전통은 비단 특정 시대의 특정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보편성을 갖는 상징 질서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성별에 따른 위임과 배제의 원칙이 한 사회의 제식 활동을 통해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는 부르디외의 이런 주장은 최소한 그 어느 곳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제사 의식만 보더라도 남성과 여성은 제사 노동에서 명백히 구분되고 있다. 남성은 지방을 쓰고 여성은 음식을 만든다. 그리고 남성은 세살 짜리 손자조차 제사 의식에 참여하지만 여성은 한 집안의 대모라 할지라도 제사 의식에서 명백히 배제된다. 이런 현상은 그 속에서 남성 지배라는 상징적 위임과 배제의 논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재생산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 관해서 페미니즘이 제기해야 할 문제는 제사 노동, 즉 음식 장만이라는 수준에서 제사라는 의식의 상징적 폭력을 인식하며 제사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제사 폐기 주장은 엄청난 반발을 가져올 것이 분명한데, 이것은 어찌 보면 궁극적인 대립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리라.

이처럼 성별 위계를 강화하는 상징적 위임과 재배치는 제식 문화를 통해 완강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언어를 통해서도 강화되고 있다. 특히 '여성적'이라는 형용사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수단이다. 이 말에는 다양한 상징적 폭력이 개입해 들어간다. 여성은 사회 속의 지위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여성적'이라는 형용사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굳이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제식 전통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성 지배의 패러다임은 우리 모두가 경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고용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영역에서의 수치적 평등을 통해서 이뤄질 수는 없다. 수치적 평등은 하나의 전술적인 주장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상징 질서이며, 그것을 떠받치는 상징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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