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시대의 희망, 영화
열화당영상자료실 / 열화당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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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는 영화를 알리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영화를 배급, 홍보하는 쪽의 생각이고, 관객의 입장은 약간 다를 수 있다. 잘 된 포스터는 영화 홍보 효과도 월등하지만, 그 자체로 심미적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 잘 된 포스터라 함은 그 자체로 마치 하나의 회화 같은 인상을 주는 포스터다. 이런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영화마저도 보고 싶어진다.

■이 책은 1950년대 우리 잡지에 실린 영화 광고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런 책이 나와 있다는 사실을 그 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적이다. 옛 신문을 가끔 자료 조사 차 들춰볼 때도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곳은 신문 하단의 영화 광고 부분인데, 이처럼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서, 나 같은 사람과 눈이 맞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비록 50년대, 잡지라는 영역에 한정된 자료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책이 아닐 수 없다.

■ 책제목이 말해주듯 50년대라면 ‘궁핍한 시대’라는 두 마디 말로는 궁핍함의 정도를 헤아릴 수 없는 시기였을 것이다. 전쟁으로 고통받던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는지를 이해하는데 영화만큼 좋은 자료가 있을까.

50년대 포스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한 가지는 선전 문구에 뻥튀기가 다고 생각되지만, 50년대 포스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지금 통용되는 외국인명 표기 체계와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친숙한 몇 사람의 50년대 당시의 표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설적인 여배우 마르렌 디트리히의 이름은 ‘마리-네 디트리ㅅ히’로 되어 있다. 장음, 단음을 구분하기 위해 하이픈을 삽입하고, 받침은 독립된 한 자로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받침을 독립시킨 것은 시각상의 배려내지 포스터 제작상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말론 브란도는 ‘마-릉 부란드’, 에바 가드너는 ‘애바 카-드나’, 알란 라드는 ‘아란 랏드’, 킴 노박은 ‘캄 노박’ 등등. 영화 제목도 마찬가지다. 워터 프론트는 ‘워-타 후론트’, 피터팬은 ‘피-타판’ 등등... 그리고 또 한 가지. 글씨체도 인쇄체가 아니라, 연필체, 붓체가 만연하고 있다. 아마 이 점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유치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한자를 많이 섞어 쓰고 있다는 점 역시 특징적이다. 따라서 단 번에 영화 제목을 알아보기가 용이하지 않다. 또 그림보다는 선전 문구를 통한 광고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사진 한 두 컷 넣은 포스터에 손으로 빽빽이 쓴 문구가 포함된 포스터가 지배적인 경향이다.

■ 대충 이 정도가 영화 포스터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어떤 영화들을 우리 선조들을 보고 즐겼을까? 국적만으로 따지면 지금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것같다. 헐리우드 영화가 주류이고, 한국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만큼은 안되지만 꽤 되고, 이태리, 프랑스, 홍콩 영화는 다 합쳐도 10%가 안되는 것같다. 르네 끌레망의 <금지된 장난>, 펠리니의 <길>, 샘 우드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히치콕의 <나는 비밀을 안다>, <다이알 M을 돌려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백경>, <사브리나>, <오케이 목장의 결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 프런트> 등등은 개중 지금도 ‘음 그 영화!’ 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이 당시 수입된 영화의 대부분은 드림팩토리라 불리는 헐리우드산 뮤지컬이나 로맨틱 멜로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 이런 책이 나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 행복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별 생각 없이 펼쳐놓고 바라보며, 50년대와 호흡할 수 있다니... 50년대를 생각할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는 고은의 심정의 일단을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조금 엿본 것같다. 60년대, 70년대도 계속 발간되기를 바라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역시 헛된 바램으로 끝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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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관계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58
긴조 기요코 지음, 지명관 옮김 / 소화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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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나 설이 찾아오면 지방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싫으나 좋으나 고향을 찾아간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그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진정 그리움에 사무쳐 고향땅을 밟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무의식적 처벌 공포에 짓눌려 그 길위에 서게 된다 물론 가족들을 만난다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여유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부담스런 일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걱정과는 달리 무난하게 넘긴 명절이긴 하지만 언제나 명절 맞이 고향길의 부담에서 벗어날지는 알 수 없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난 한 권의 책을 넣어갔다. 긴조 기요코의 <가족이라는 관계>. 이왕 떠나는 길에 그 길의 목적에 부합되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같다. 내가 가족에 대해 다룬 책으로 처음 읽어본 건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다. 어느 정도 연배는 한번쯤 읽어봤을 이 책은 지금 생각하면 다소 고고학적이고 결정론적이란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운동권 교재치고는 맑스 저작에 비해 덜 딱딱했고, 엥겔스 특유의 리얼리즘적인 문체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주로 부부간의 문제를 가족법을 중심으로 풀어쓴 책이다. 굳이 이 책이 아니어도 괜찮을 만큼의 상식적인 수준을 보여주는데 나같은 초심자에겐 그동안 여성계에서 제기해왔던 문제들이 가족법을 중심으로 귀일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저자는 새로 부부관계를 시작하는 남녀를 위한 지침서로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인데, 일본 역시 우리와 비슷한 가부장제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관계의 핵심인 남녀관계의 진정성을 고민하는 이들에겐 일말의 깨우침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때론 다른 문화권의 시각을 빌 때 우리의 문제가 더 잘 보이는 경우가 있듯,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기에 우리에겐 참조의 효과가 큰 듯하다. 그런 탓에 비슷한 문제를 다룬 경우 일본의 경우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편이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남녀관계의 평등주의라는 측면에서 이상적인 국가로 제시되는데, 그들의 사례를 다룬 책들이 의외로 없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출판문화가 편중돼서 소중한 경험들이 사장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여성학 계통 출판기획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런 측면에서 노력해주었음 한다.

가족은 사회로부터 상처입은 자들의 최후 보루이자 그들이 가진 상처의 기원으로서, '가족'은 우리 시대의 아포리아처럼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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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일 수 없는 자유
막달레나 쾨스터 외 엮음, 김경연 옮김 / 여성신문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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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삶이 지겨울 때면 모든 걸 잊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누구에게나 일상은 지겹지만 막상 그 일상을 벗어나면 매 순간을 채우던 그 일상이 오히려 그리워서 예정된 날짜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때도 있다. 그리고 짧은 시간 일상을 벗어나 만끽하는 여행의 즐거움도 순간의 해방감만을 줄뿐, 근본적으로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다만 그 짧은시간의 해방감과 허무함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뿐이다.

예정된 휴가 여행보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 여행의 본질에 좀 더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통이 머무는 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그곳만 아니라면 다 좋은 곳으로 떠날 때 우리는 고통에 대한 해답을 바라지만, 내면으로의 여행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 여행은 어떤 해답도 주지 않은 채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 프랑스, 인도와 네팔로 돌아다니며 고통을 치유하고자 몸부림치던 <면도날>의 주인공의 깨우침처럼 구원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구원이란 것이 낙타가 면도날 위를 걸어가는 것만큼 요원한 것이라는 깨우침은 내면적 구원이 평범한 인간에겐 얼마나 요원한 바램인가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여성들에게 있어 여행이란, 더군다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여성들이 남편, 아이들을 버려 두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떠나는 여행이란 요즘에도 상상하기 힘든 모험이다. 웬만한 뚝심이 아니라면 순수하게 자신만을 위해 가정을 버리고 길을 나서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죽음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자는 죽을 때까지 한 가정의 아내, 어머니라는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침묵의 관습이 철저한 사회에서는 여성의 자유의지는 숨쉴 수 없다. 그래서 <4월의 유혹>의 여성들이 이탈리아 여행에 그렇게 가슴이 달떴을 것이다.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온전히 수긍하는 사람이 없듯 나 역시 내 삶에 대한 회의가 가끔씩 찾아와 괴롭힌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 꾸려질 삶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선택만으로 채워질 삶이라는 걸 알지만, 틀을 벗어난 상상은 왠지 공상으로만 느껴지고, 그 상상은 다시 제 자리로 맴돌기 마련이다. 아마 나에겐 자유에의 용기가 부족한 건지 모른다. 사회와 가족이 부여한 기대와 의무를 벗어버린 삶이 나에게 안겨줄 시련이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의 여성들이 나에게 보여준 당당한 모습들이 나에게 용기를 심어 준다. 특히 자신을 세상과 고립된 아웃사이더이자 고아라고 생각했던 이자벨레 에버하르트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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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미학 - 혼돈과 질서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47
아시하라 요시노부 지음, 민주식 옮김 / 소화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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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학이나 예술 개론서에서는 건축이 당대의 미적 감각을 선도해서 여타 회화나 조각, 문학, 음악 등의 감각 변화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을 강조하곤 한다.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20세기 중반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세기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미적 감각은 건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인데, 이런 학설은 나처럼 건축 쪽에 대해서는 도무지 구별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한국처럼 건축이 실용적 감각으로 일관된 나라에 살면 생활 감각적으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서울 거리 어디를 둘러 봐도 미적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건축물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건축은 소박하게는 주택 건축에서 넓게는 한 도시의 미적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그 용도나 가치면에서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 면모가 정해지기 마련이나 우리처럼 건축문화에 무감각한 곳도 드물지 않을까.

도시공간의 관점에서 도쿄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세계적인 부국 일본의 심장부로서 그 구성원들이 경제발전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엄청난 지가 때문에 정작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고 설령 자기 집을 가진 경우도 대체로 그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이방인의 관점으로는 도쿄 시민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을 것같은데, 그것은 행복한 삶이란 경제적 여유뿐만이 아니라 공간적 여유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이란 사적인 공간인 집에서는 그 크기와 상관없이 바깥으로 보호받는다는 안온함을 느끼기 마련이지만, 도시는 주택같은 사적 공간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 역, 도서관 등의 공적 공간과 공존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이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여유롭고 조화롭게 배치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내 집이 잘 정돈되고 가꾸어져 있다 하더라도 거리가 혼돈투성이라면 주택내에서의 행복감은 일시에 파괴될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책에서 제일 주목할 만한 부분은 거리 문화를 다루고 있는 2장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건물마다 가득 들어찬 간판, 곳곳마다 늘어선 전신주,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도로와 주택가, 근린 공원,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광고전단지 등등. 저자는 간판이나 전신주(전선)가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간판 설치를 제한하고 우리의 하늘을 장악하고 있는 전선을 땅에 묻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교통난, 주차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차량 생산 제한, 소유 제한, 운행 제한 등을 제안한다. 간판, 전선 문제는 그럴 듯하나, 차량 문제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도 설득력있는 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한데, 이것은 도쿄나 서울이나 마찬가지로 좁은 땅에 수많은 인구가 거주한다는 특성때문인 것같다.

그런데 한 가지 그의 혜안이 번뜩이는 것은 광고 전단지 문제이다.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에는 항상 광고전단지가 상당한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 누구나 그렇지만 광고전단지들은 신문을 들자마자 바로 버려지게 마련이다. 독자로선 쓰레기밖에 되지 않는 광고전단지는 생산을 위해 소비되는 나무에서 비롯해서 하나의 광고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순전한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문지국의 경영상의 이유로 끊임없이 유용한 자원과 노동력이 낭비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광고전단지를 끼워넣는 신문에 대해 구독 중지 운동을 벌이는 방법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서울도 도쿄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문제들로 시달리고 있다. 주택난, 교통난, 주차난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지만, 서구 도시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쉴 수 있는 광장이나 공원이 많지 않다는 사실 역시 서울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누구나 여유롭게 찾아서 필요한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도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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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짝사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0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지음, 김환기 옮김 / 소화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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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일본소설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등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고 그 외 요시모토 바나나같은 이들의 작품이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지만, 내 경우에는 이들 젊은 세대의 작품들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고, 오히려 나쓰메 소세키같은 지금으로 따지면 거의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소설가들의 작품이 흥미로운 대상이다. 나쓰메 소세키로 말할 것같으면 동시대 우리 소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사유의 깊이와 문장력이 큰 매력으로 이광수 정도에 비길 바가 못된다.

그리고 데카당티즘적 세계를 보여주는 다자이 오사무나 유미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들에서는 김동인류보다 한층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비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은 이상하게도 흥미가 덜한데,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오리엔탈리즘류의 서양적 환상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지금부터 거의 한 세기 내지 반세기 전을 비교 시점으로 설정한다면 일본 소설에는 동시대 우리 소설에서 볼 수 없는 깊고 강렬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 소설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가급적 동시대 일본 소설보다는 그 전 소설들을 읽는 게 흥미로운 일이 되고 있다.

무샤노코지 사네아쓰의 <한심한 짝사랑>은 이러한 계기로 뒤적여 본 것인데 이 책에는 <사랑과 죽음>, <한심한 짝사랑>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무샤노코지는 흔히 시라카바파라 불리는 ‘白樺’ 동인으로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白樺’는 우리로 따지면 ‘創造’ 정도의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동인으로서 초창기 우리 문단에도 정신적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다소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긴 하지만 소재 자체는 대중적인 측면이 강하다.

<사랑과 죽음>은 소설가 무라오카와 그의 선배 노노무라의 여동생 나쓰코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우연한 계기에 사랑을 싹 틔운 두 사람은 무라오카의 프랑스 여행을 앞 두고 혼인 약속을 하고 무라오카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가 귀국할 날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나쓰코가 유행성 감기로 돌연사함으로써 둘의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작품은 길이에 비해 단순한 느낌을 주는데, 구성이 그들이 주고 받는 편지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성 형식은 우리 초창기 근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심한 짝사랑>은 쓰루라는 여자를 놓고 펼쳐지는 주인공 ‘나’의 공상적 러브스토리이다. 주인공은 소심한 탓에 쓰루를 만나 실제로 연애를 하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마치 그녀를 애인인 것처럼, 아내인 것처럼 상상하며 지내는데, 결국은 쓰루가 다른 사람과 결혼함으로써 스토리는 끝을 맺는다.

이처럼 스토리나 플롯면에서 이 작품들은 대체로 단순한 면을 보인다. 요즘 소설처럼 뒤틀어짐이나 기괴함을 발견하기 힘들다. 단지 주인공의 내면의 추이를 시간적 흐름에 따라 충실히 추적하고 있는데, 복잡한 구성에 익숙한 요즘 독자로서는 지겨울 수도 있다. 그리고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남녀간의 사랑의 순결성이라는 주제도 요즘 생활 정서에는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내면을 묘사하는 섬세한 문장 하나만은 깊게 음미해볼만하다. 푸코가 말한 바 있고 가라타니 고진이 패러프래이즈한 바 있듯 자기에 대한 고백을 제도화함으로써 근대가 탄생했다고 할 때 일본 소설의 고백체 문장은 근대의 탄생을 알리는 문학적 신호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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