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출판사 독서 코칭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25  <박수근의 바보 온달> 깊이 읽기

 

박수근 그리고 박인숙 다시 씀

 

고구려 이야기가 만들어지기까지

6·25 전쟁이 끝난 뒤 박수근은 창신동에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며 입을 것, 모든 것이 부족한 때였습니다. 박수근은 어려운 생활에 굴하지 않고 창신동 집 쪽마루에서 많은 작업을 해냈고 이 집에서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박수근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책한 권을 사 주기도 어려웠습니다. 박수근은 신문에 난 기사나 연재소설 등을 스크랩해서 아이들에게 읽을거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아예 수채 물감으로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책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버지 박수근이 자녀들을 위해 손수 그림을 그리고 부인이 정갈하게 글씨를 써서 한 권의 책을 완성했습니다.


박수근이 남긴 책에는 이야기 일곱 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 ‘아버지를 찾는 유리 소년’,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외에도 ‘천합소문 장군’, ‘활 잘 쏘는 주몽’,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장군’ 이야기가 원래 책에는 실려 있습니다.


『박수근의 바보 온달』은 총 일곱 편의 이야기 가운데 이야기성이 풍부하고, 장면이 넉넉한 이야기 세 편을 골라 새롭게 구성한 것입니다. 『박수근의 바보 온달』에서 소개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비교적 짧은 이야기들로, 이야기마다 그림이 한 점씩 그려져 있습니다.


박수근이 남긴 그림책을 보고, 우리는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박수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박수근은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이름에 매여 이 책을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소박한 마음으로 이 책을 대하면 그 바탕에 있는 아버지로서의 박수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읽을거리를 직접 만들어 주는 자상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만나는 순간,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돋보일 겁니다.


박수근이 남긴 그림책은 현재 강원도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박수근미술관에 가면, 박수근의 여러 그림과 함께 그림책의 원본을 볼 수 있습니다.

 

화가 박수근과 그의 가족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박수근이 결혼 전에 부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박수근은 결혼 전에 아내에게 약속한 대로, 좋은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6·25 피난 이후, 박수근은 창신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창신동 집은 아이들이 뒹굴고 노는 곳이었고, 아내에게는 집안일을 하는 일터였고, 박수근에게는 하나뿐인 작업실이었습니다. 그 집은 이웃이 일손을 내려놓고 쉬어 가는 곳이며, 박수근의 그림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박수근은 아내를 친정 엄마가 딸을 아끼듯이 아꼈고, 자녀들에게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 남겨진 가족을 걱정하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박수근은 평생 동안 개인전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죽은 뒤에야 뒤늦게 지인들의 도움으로 유작전이 열렸습니다. 살아생전에는 큰 성공을 얻지 못했던 화가 박수근. 하지만 그의 그림은 지금까지 우리 곁에 남아서 그처럼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습니다.

 

그림 / 박수근

1914년 양구에서 태어나 1965년에 생을 다했습니다.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여 고유한 예술 세계를 완성했으며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단순한 선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민의 삶을 그렸으며, 마치 돌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울퉁불퉁한 질감이 드러나는 화풍으로 유명합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기 위해 일생을 바쳤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빨래터>, <나무와 두 여인>, <아기 업은 소녀> 등이 있습니다.

 

글 / 박인숙

화가 박수근의 큰딸입니다. 세종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하고 미술 선생님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다가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현재 양구 박수근미술관의 명예 관장이며,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화가입니다. 아버지 박수근이 남긴 그림책의 글을 오늘날 어린이들이 읽기 좋게 다듬고 새로 썼습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서 아버지와 보낸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 몹시 행복했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계절출판사 독서 코칭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24 <그 집 이야기> 깊이 읽기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 존 패트릭 루이스 글 / 백계문 옮김

 

매혹적인 그림책 속에 재현된 백 년의 역사
여기, 20세기의 새벽에 새로운 삶을 얻은 낡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그 집은 1900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무렵, 모험을 나온 아이들의 눈에 띄게 되면서, 새 삶과 새 가족을 얻게 됩니다.


『마지막 휴양지』에서 팀을 일구었던 로베르토 인노첸티와 존 패트릭 루이스가 다시 한 번 뭉치어 꾸려낸 매혹적인 그림책, 『그 집 이야기』는 오래도록 버려졌다 다시 생명을 얻게 된 낡은 집이 20세기, 백 년을 지나오면서 자기 안에 품었던 자연과 사람, 삶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한여름이 연둣빛 드레스 입고 들러리 설 때,
언덕 집 아가씨는 앞날을 꿈꾸며
아랫마을 벽돌장이 청년의 손을 꼬옥 잡는다.
혼례를 치르는 동안, 삶은 잠시 숨을 멈춘다.
-1915년의 시

 

이 그림책에서는 짤막한 4행시와 작은 그림과 큰 그림이 짝을 이룬 형식이 열다섯 번 반복되어 보여집니다. 작은 그림이 그 해가 어떠했는지, 사람들에 포커스를 맞추어 보여주고 난 다음이면, 시가 그 다음 역할을 건네받습니다. 시는 이 그림책에서 '그 집'이 하는 말입니다. 이 리드미컬한 목소리는 때로는 장중하고 때로는 상큼하게, 그 해의 분위기를 전달해 줍니다. 우리는 시를 통해서, 그 해의 날씨가 어땠는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강의 이야기를 알고 책장을 넘깁니다. 책장을 넘기면 나오는 큰 그림은 화면을 꽉 채울 만큼 시원하고 커다랗습니다. 커다란 그림 속엔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해 보입니다. 꼭 '내가 더 자세히 말해 줄게.'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열다섯 점의 그림이 이끄는 이야기 속으로

'나는 그림을 그리는 내 일을 아주 즐거워합니다. 내가 그리는 각각의 그림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한 편의 이야기를 꾸려 내는 겁니다.' - 로베르토 인노첸티

 

마치 정해진 스텝을 밟듯, 작은 그림과 시, 큰 그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집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전체 그림이 그려질 듯합니다. 대체 이 낡은 집에서 백 년 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요?

 

1905년, 삶의 시작
1900년,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이 발견한 집은 1901년 사람이 살기에 알맞게 고쳐지고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낡은 집은 그림의 오른쪽에 붙박여 계속 등장하게 되지요. 1905년, 작은 그림이 담고 있는 건, 대가족의 식사 풍경입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큰 그림을 보니, 이들이 낡은 집에 이사를 온 모양입니다. 침대 머리맡에 놓는 철제 헤드며 돌돌말린 이불, 아기와 성모를 그린 그림 액자며 의자 같은 살림살이들이 여기저기에 부려져 있습니다. 1901년에 흰 소 두 마리가 갈던 밭에는 이제 연한 초록색을 띤 밀이 자라고 있습니다. 흰 소는 여기서도 등장합니다. 이번엔 이삿짐을 옮기는 짐수레를 끌고 왔던 모양입니다.


1915년, 한여름의 결혼식
결혼식 피로연이 한창입니다. 만돌린을 튕기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연주자들 앞에서 사람들이 민속춤을 추고 있습니다. 1905년에 이삿짐 수레를 끌고 왔던 흰 소들은 사진사가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수레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뿔 쪽에는 빨간 꽃 장식을 달고 있는데요.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걸까요? 이 소들이 끄는 수레가 현대의 웨딩카 같은 역할을 하게 될까요? 아무튼 모두들 즐거운 분위기인데, 이 해의 작은 그림은 사뭇 이상해 보입니다. 신랑 신부가 사진을 찍으려고 포즈를 취한 모양인데, 신랑은 군복을 입었습니다. 어디로 떠나려는 걸까요? 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시작된 걸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이제 이 농가에도 전운이 감돌 모양입니다.


1916년, 아기의 탄생
밀밭이 연둣빛을 띠고 있는 걸 보면 다시 봄이 돌아온 모양입니다. 작은 그림에서,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사제와 복사 아이들은 이 아기를 축복하러 집을 방문했을 겁니다. 수레를 끄는 흰 소가 있던 자리에는 사제 일행을 태우고 온 모양인 듯, 당나귀 수레에 앉아서 축복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부가 있습니다. 1905년, 일가족의 삶이 시작된 이래, 그 집에서 결혼식이 올려지고 이제 아기가 태어난 겁니다.


1918년, 남편의 죽음
1915년의 작은 그림에서 군복을 입은 신랑의 모습이 보였었지요. 1918년의 작은 그림에서 부인은 왜 울고 있는 걸까요? 부인의 옆에는 전사통지서처럼 보이는 편지가 놓여 있습니다. 1918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입니다. 남편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지의 여부는 미루어 짐작할 따름입니다만, 그가 죽은 건 확실해 보입니다. 아내에서 과부로…… 슬픔에 잠긴 부인은 온통 흰 눈이 내려와 덮인 집 밖에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배웅합니다. 굴뚝으로는 시커먼 연기가 올라옵니다. 아이들을 배웅하고 난 다음에 부인은 무얼 할까요?


1936년, 수확
남편의 죽음은 서서히 잊혀지고 농가의 평화로운 삶이 이어집니다. 이제 밀을 수확하는 날이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밀단을 꾸리고 밀알을 골라내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작은 그림을 보면, 표정이 굳어 보이는 아이들이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요. 무슨 유니폼일까요? 아이들 뒤편으로 보이는 글자, EREMO는 무슨 뜻일까요? 당시의 이탈리아는 파시스트가 지배하던 나라였습니다. 파시즘, 독재가 팽배하던 나라였지요. 국민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모든 일이 국가의 통제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림의 아이들이 입은 유니폼은 바로 파시스트 소년단(balilla)이 입었던 유니폼입니다. 여덟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어린 아이들이었지요. 몇 년 전, 짚가리 위에서 평화로이 놀던 아이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 겁니다. EREMO는 이탈리아 어로 '은신처'를 뜻합니다. 이 글자는 무얼 가리키고 있는 걸까요?


1942년, 전쟁의 불길
이 그림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이탈리아에 대해 조금 알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참혹한 전쟁이었지요. 이탈리아는 일본, 독일과 함께 2차 대전의 침략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 모두가 그러고 싶었을까요? 이탈리아의 많은 국민들은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독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요. 그들이 원하는 건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국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파르티잔(유격대)으로 활동하거나 파르티잔의 활동을 도왔습니다. 이들은 낫과 삽 대신 총을 들고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를 처단하고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합군의 승리를 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르티잔으로 몰리거나 도와준 혐의를 받는 바람에, 독일군에게 마을 전체가 몰살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1942년의 두 작은 그림은 독일군에게 핍박받는 주민과 농민 출신 파르티잔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에 집은 전쟁의 핍박에 쫓겨 온 수많은 난민들의 은신처가 됩니다. 앞선 1936년의 그림 속 글자 EREMO는 바로 이러한 일을 암시했던 건 아닐까요?

 

1958년, 떠나는 아이들
어머니는 의연히 우유를 붓고 음식을 만들지만, 오늘 아들네가 이사를 나가는 날인 모양입니다. 흰 소가 끄는 짐수레가 있던 자리,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있던 자리, 연합군의 탱크가 있던 자리에 아들네의 이삿짐을 올린 자동차가 보입니다. 아들네가 왜 떠나는지 그림책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들고 날 때의 허한 마음이 전해져 올 뿐입니다. 이제 이 집에 남은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요?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노인이 남아 마을을 지키는 우리네 농촌을 떠올리는 풍경입니다.

 

1967년, 여주인의 죽음
손녀에게 밀짚모자를 만들어 주던 이 집의 여주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네의 이삿짐을 옮기던 자동차가 있던 자리에 조화를 단 검은색 자동차가 서 있습니다. 애도를 하려고 모인 사람들은 이제 집의 문을 굳게 잠그고 떠날 채비를 합니다. 집은 이제 가정을, 사람을, 삶을 잃었습니다.

 

1999년, 새로운 집
집은 새 주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새 것이 꼭 좋은 건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1999년의 작은 그림에는 도로를 닦는 불도저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마을이 개발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집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른 집이 되어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집에는 수영장이 있고, 경비견이 대문을 지키고,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와인저장고는 차고가 되어 있고, 1905년에 일가족의 이삿짐 수레가 있던 자리에, 현대식 이삿짐 트럭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친숙한 물건이 눈에 띄는데요. 마치 장식처럼, 철망 울타리에 붙어 있는 붉은 수레바퀴를 보세요. 혹시 1905년 이삿짐 수레에 달려 있던 수레바퀴는 아닐까요?

 

이 그림책에는 여전히 살펴볼 것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집의 외관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우물은 어떻게 변했는지, 이 집에서 키운 고양이는 몇 마리였는지, 사람들이 일하는 곳엔 왜 항상 와인병이 등장했는지(아마도 여기가 와인의 나라, 인노첸티의 조국인 이탈리아의 농가이기 때문일 테지만), 여러 가지 소소한 것들을 살펴보고 짐작해 보는 것도 이 그림책을 보는 재미일 겁니다. 한 세기의 엄숙한 진실을 담고 있는 그림들은 센 울림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림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눈이 온 날 침묵이 내려온 소리를 듣고, 단단한 돌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 향긋한 포도 내음까지 맡아 볼 수 있을 겁니다. 한 장 한 장의 그림을 앞뒤로 넘겨 보며, 어른과 아이가 함께 그림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로베르토 인노첸티

이탈리아 플로렌스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열세 살에 학교를 떠나 가족을 돕기 위해 철강 공장에서 일을 하는 바람에 독학으로 그림을 익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정교한 선과 여리고 섬세한 색으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히 그려지곤 하는데, 이는 그가 독학한 화가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20세기의 신여성으로 재창조된 『신데렐라』,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 2차 대전 이야기를 담은 『백장미』, 유대인 대학살을 다룬 『에리카 이야기』,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 휴양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노첸티의 정교한 상상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독자와 평론가, 양편 모두를 사로잡은 이 행복한 화가는 1985년과 1991년 브라티슬라바 비엔날레 황금사과상을 두 번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으며, 2008년 최고의 그림책 화가에게 주는 일러스트레이션 부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림에 심취해 있습니다.

 

존 패트릭 루이스는 경제학 교수로 여러 해를 보내다 자신의 문학적 열정을 발견하고 작가의 길에 들어선, 시인이자 글 작가입니다. 운율이 살아 있는 시에서 리드미컬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쓰는 글에는 항상 말의 리듬과 유머가 살아 있습니다. 다양한 시 형식을 넘나들며 실험하는 그에게 이 그림책 『그 집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책에서 '그 집'을 화자로 택하여 품격 있고 균형 잡힌 4행시를 선보였습니다. 그의 시로 인해서 인노첸티의 그림은 독자들에게 더욱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겁니다.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계절출판사 독서 코칭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23 <호랑이가 예끼놈!> 깊이 읽기
- 연암 박지원의 「호질」을 이은홍이 다시 쓰고 그리다

 

글․그림 이은홍 / 원작 박지원

 

그림책으로 새로이 태어난 18세기의 소설 「호질」

사람들은 평소 점잖고 근엄하고 두루 학식이 높은 사람들을 우러러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겉보기에 더럽고 천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멸시하고는 하지요. 하지만 겉보기에 더럽다고 하여 그 살아가는 모습 또한 더러울까요? 겉보기에 훌륭하다고 하여 그 살아가는 모습 또한 깨끗할까요?


『호랑이가 예끼놈!』은 겉과 속의 다른 모습을 밀착해서 고발하는 18세기의 소설 「호질」을 작가 이은홍이 다시 쓰고 그린 것입니다. 「호질」은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였던 박지원이 중국을 여행하고 와서 쓴 기행문인 『열하일기』의 '관내정사(관내에서 본 이야기)' 편에 실려 있는 단편소설입니다. 박지원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탄탄대로의 벼슬길이 열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박지원이 주목한 것은 열심히 성실하게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백성들과 그에 비해 말만 앞세워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한 양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소설에는 세도를 쥐고 있는 양반에 대한 질타와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호질」의 주인공, 북곽 선생은 나이 마흔에 제 손으로 교열한 책이 만 권이나 되고, 사서오경의 뜻을 풀어서 다시 지은 책만 해도 1만5천 권이나 되는 사람입니다. 모두들 북곽 선생이 이룬 업적이 높다 하여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고 왕들까지도 북곽 선생을 한번 찾아가 보려고 줄을 서는 판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북곽 선생이 어느 날 밤을 틈타, 수절 잘하기로 소문난 과부 동리자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때마침, 훌륭한 저녁거리를 찾아 고을로 내려 온 영물 호랑이에게 들키고 맙니다.


이쯤이면 이야기가 어찌 전개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요. 영물인 호랑이가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가짜 북곽 선생의 모습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이야기, 「호질」은 참 시원하고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한문으로 된 글이라 지금의 우리가 읽기 어렵고 또한 한글로 번역을 하여도 예전 18세기의 이야기라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조금 있습니다. 해서 그 이야기를 다시 쉽게 풀어서 잘 다듬어 그림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그림책을 본 다음, 원래의 이야기를 꼭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림책으로 이야기를 읽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진짜인 척하는 가짜의 가면 벗기기

「호질」의 주인공 '북곽 선생'은 그림책 『호랑이가 예끼놈!』에서 '홀로홀로방방'으로 희화화됩니다. 홀로홀로방방에 대면 날고 기는 재주꾼도 꼬리를 감추고 제아무리 똑똑해도 입을 못 뗍니다. 높이 솟은 관모에 고급 의복을 갖추어 입고 수염까지 기른 풍모가 고관대작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으리으리합니다. 겉모습이 그러한 터라, 사람들은 선생님이라 부르며 가까이 하고 우러러 보려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 선생이 '정숙한 부인'이라 칭해지는 과부를 꼬이려 밤 행차를 나섰다가 과부의 아들들에게 들켜 줄행랑을 치게 되고 급기야 똥구덩이에 빠지고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커다란 호랑이와 대면하게 됩니다.

 

똥구덩이에 빠진 것만 해도 우스운데, 그 영험하고 무섭다는 호랑이와 마주쳤다니요. 젠체하던 모습은 그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살려만 주면 날마다 싱싱한 젊은이로만 골라 만 명이라도 바치겠다며 벌벌 떠는 모양새가 가여울 지경입니다. 이제 홀로홀로방방 앞에서 호랑이의 질책이 시작됩니다. 저 잘난 맛에 살지만 실상은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 귀하고 높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통치배들에 대한 호랑이의 따끔한 질책은 이 그림책의 백미가 되는 부분입니다. 홀로홀로방방으로 대표되는 겉보기에 훌륭하고 귀하고 잘난 사람들, 가짜인데 진짜인 척하는 사람들의 겉모습이 홀랑 벗겨지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나'되짚어 보기

요즘 세상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요. 요즘도 홀로홀로방방 같은 사람들은 많이 보입니다. 이룬 업적으로만 보면 모자랄 게 없는 사람입니다만, 그 업적 뒤에 가려진 위선적인 면모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요. 가슴 쓸어내릴 위기를 모면하고 난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도 더러 있게 마련이고요. 여기 이 그림책의 호랑이 말처럼, 사람이란 모름지기 조금은 모자란 속성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슬쩍 넘어가기에는 너무 심한 경우도 많지요. 주위를 한번 두루 살펴보세요. 이렇게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있는지요. 그리고 그 전에 나를 되돌아보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호랑이의 따끔한 일침이 필요할 지도 모를 일이지요.

 

글․그림 / 이은홍
이은홍은 충북 제천, 월악산 아래 마을에 삽니다. 책을 통하여 어린이와 청소년들과 만나는 일을 가장 기쁘고 보람된 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역사신문', '세계사신문', '한국생활사박물관', '어린이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를 다른 이들과 함께 만들어 펴냈으며, 『역사야, 나오너라!』, 『술꾼』(2001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 수상),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내 친구 똥퍼』(2008년 '부천 만화상' 수상) 등의 책을 지었습니다.

 

원작 / 박지원
원작인 「호질」을 쓴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에 살았던 문인이자 학자로 호는 연암입니다. 실제생활에서 동떨어진 채 점잖고 고상한 말과 글만을 귀히 여기는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귀천을 떠나 사람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담은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열하일기』는 우리나라 여행문학의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밖에 「예덕선생전」, 「호질」, 「광문자전」, 「양반전」, 「허생전」 등, 젠체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꾸짖고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여러 편의 짧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계절출판사 독서 코칭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22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 깊이 읽기

 

찰스 키핑 글․그림 / 서애경 옮김

 

도시 아이들의 애틋한 우정이 담긴 찰스 키핑의 자전적 이야기
'파라다이스'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대도시 런던 어딘가에 있는 거리였지요. 찰리와 샬럿은 이 거리에서 함께 놀았습니다. 거리에는 새를 파는 노점이 있었는데 꼭대기 새장에 있는 금빛 카나리아를 보며 노는 것을 특히 좋아했지요. 그러나 어느 날 모든 것이 변합니다. 철거 회사 사람들이 거리로 들이닥쳐 오래된 건물들을 부수기 시작한 겁니다. 파라다이스 거리 1번지인 샬럿네 집이 첫 번째 차례였지요…….


'몇몇 옛날 거리들이 살아남긴 했지만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거대하고 새로운 '유리 세계'로 바뀌었어요. 어마어마하게 높은 고층 아파트들은 제가 느끼기엔 비인간적이고 차가웠죠. 밤에 불이 켜지면 정말 아름다웠지만, 거기서 살고 싶지는 않았어요.' - 찰스 키핑(더글라스 마틴, 『찰스 키핑,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삶』)

 

책을 지은 찰스 키핑은 런던의 램베스Lambeth 거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램베스 거리를 교차하는 또 하나의 거리로 올드 파라다이스 스트리트Old Paradise Street가 있었는데, 두 거리의 교차로에서 찰스 키핑의 할아버지인 잭 키핑Jack Keeping이 채소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키핑은 이 거리의 서정을 스케치에 담아내곤 했지요. 파라다이스 거리는 그야말로 키핑의 유년 시절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공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파라다이스 거리'는 찰스 키핑의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 책에서도 파라다이스는 작가의 유년기의 은유로, 찰리와 샬럿, 그리고 금빛 카나리아가 함께 있던 공간으로, 사라져 버린 아이들의 놀이터로, 재개발된 도시의 잃어버린 옛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변해 가는 대도시 속 아이들의 상실과 희망
샬럿은 아파트 꼭대기로 이사한 뒤 거리로 나가 놀지 못하게 됩니다. 새장에 갇혀 지내는 금빛 카나리아와 아파트에 갇힌 샬럿은 닮아 있습니다. 책 속에서 금빛은 샬럿과 카나리아를 감싸며 이런 비유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옛날 거리의 참새들은 정말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도 그렇고요. 그러다 아파트를 올려다보게 되었어요. 작은 발코니에서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이들을 보았어요. 아마 부모님이 거리로 내려가 놀지 말라고 했을 거예요. 그 애들은 안전했지만, 새장 속에 갇힌 거나 다름없었죠. 이삼십 층이나 되는 새장이요. 그 아이들과 새장의 카나리아는 상당히 비슷한 구석이 있었죠. 새장 속 카나리아를 생각해 보세요. 완벽하게 행복해 보이죠. 편안하고, 주인이 늘 먹을 것을 주고……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생존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반면 길거리 참새는 차에 치일 수도 있고, 겨울에 얼어 죽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훨씬 나은 삶이에요. 적어도 참새들은 자유로우니까요.'  - 찰스 키핑(더글라스 마틴, 『찰스 키핑, 한 일러스트레이터의 삶』)

 

작품 속에서 키핑은 도시화와 현대화가 아이들의 정서나 자유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통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발을 위해 기존의 것을 부수고 거기 깃든 서정과 기억을 파괴하는 것에 관해, 새것과 개발에 집착하는 문명의 진행 방향에 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폭력적인 방식의 재개발과 도시화에 대해 현대를 사는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키핑은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폭력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것들'을 '아이들 삶의 일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작가의 개인사로만 읽히지 않는 것은 현대 사회의 아이들이야말로 끊임없는 개발 속에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의 공간이 지속되는 것을 보기가 어려울 겁니다. 무수한 개발 속에서 끊임없이 상실감을 겪게 될 겁니다. 도시화와 재개발은 결정권을 가진 어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결정을 강요당하는 아이들에게도 다른 의미의 숙제로 남습니다.
그러나, 카나리아는 새장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고양이의 공격이 있었지만 그 틈에 날아올라 찰리의 친구, 샬럿을 찾아 줍니다. 아파트에 갇힌 아이들을 풀어 주고픈 키핑의 소망이 담긴 것 아닐까요? 흔히들 키핑의 책이 우울하고 무겁다, 어렵다고들 하지만, 키핑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근거 없는 낙관을 꺼려하면서도 삶의 굴곡 속에서 결국 회복과 평화,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파트 발코니에서지만 찰리와 샬럿과 금빛 카나리아의 우정을, 키핑은 지켜 주고 싶었나 봅니다.

 

새로운 기법과 표현 방식으로 만든 아름다운 그림책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는 시각적인 면에서도 아름답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그림책입니다. 40여 년 전의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의 탁월한 색감과 현대적인 조형감각을 보여 주고 있지요.


키핑은 색을 분리하여 석판으로 찍어 낸 이미지 위에 따로 선을 그려 형태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왁스나 스펀지, 덧칠하기 등을 이용해 여러 가지 시각적 효과를 내기도 했지요. 이렇게 완성한 그림의 인쇄는 비엔나의 이름난 인쇄업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의 인쇄 수준에 견주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처럼 독특한 그만의 기법은 이른바 '키핑 스타일'을 만들어 냈고, 이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는 1967년,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책에 수여하는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몇 십 년 전 도시 아이들의 이야기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의미 있게 읽힐 것입니다. 그림책으로서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거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현대 우리 사회의 재개발 문제와 너무나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1967년의 키핑이 건네는 이야기에서 2010년을 사는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찰스 키핑(Charles Keeping)

찰스 키핑은 192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여 신문배급업자인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가판 포스터 뒷면에 그림을 즐겨 그리곤 했습니다. 평범했던 그의 삶은 그러나 여덟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이어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깊은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공으로 일하던 키핑은 2차대전 중이던 열여덟 살 때 군에 입대하였는데, 군 생활 중에 머리 부상을 입어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이 경험은 완치된 뒤에도 그의 내면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946년 전역을 한 뒤 런던에 있는 리젠트 스트릿 폴리테크닉이라는 미술학교에 들어가 낮에는 가스 검침원 일을 하고 밤에는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석판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키핑은, 졸업 후 신문 만화 일을 시작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후 200여 권의 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1966년 그림책 『검은 돌리』의 출간을 시작으로 평생 22권의 그림책을 쓰고 그렸는데,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급속한 현대화 과정 속 대도시의 변화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린 작품들입니다.

 

빼어난 조형성과 색감, 깊은 주제의식으로 '어린 독자에겐 너무 어렵고 깊은 심리적 접근을 하는 것이 유일한 흠'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키핑은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1967)와 『노상강도』(1981)로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두 차례 받았으며, 1988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계절출판사 독서 코칭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21 <시간의 네 방향> 깊이 읽기
- 커다란 금빛 시계를 따라 떠나는 시간 여행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 이지원 옮김

 

퍼즐을 맞추듯 곰곰 생각하며 들여다보는 그림책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세계'라 부릅니다. '세'는 시간을 뜻하고 '계'는 공간을 뜻하니,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간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동서남북이 있고 전후좌우가 있고 아래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뒤로 이리저리 나아갈 수 있고,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어떤가요? …… 흔히 '앞으로만 가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은 그저 내일이라는 한 방향을 향해 끝없이 흘러갈 뿐, 멈춰 설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은 퍽 이상합니다. '시간의 네 방향'이라니……?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넘기면, 종이연극 무대 위에서 두 배우가 문을 열고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유럽의 동쪽 어느 강가에 세워진 중세 도시. 한가운데 시계판 네 개가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는 시계탑이 서 있고, 시계탑을 바라보는 동서남북의 네 집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백 년마다 한 번씩 같은 시각에 그 집들에서 각각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도대체 그 이야기들이 시간의 방향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이 그림책은 끝내 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이로 만든 표정 없는 얼굴의 배우들이 펼치는 연극의 장면들을 하나씩 보여 줄 뿐. 그런데 그 장면들은 한결같이, 어디선가 한번쯤 본 것도 같은 그림들과, 거기 있는 의미를 알 듯도 모를 듯도 싶은 소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커다란 퍼즐의 조각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그림책은 퍼즐을 맞추듯 곰곰 생각하며 들여다보는 책입니다. 몇 백 년의 세월을 앞으로 뒤로 건너뛰어 다니면서, 동서남북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퍼즐을 맞추듯 조금씩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책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퍼즐의 조각들이 모여 이루는 커다란 그림이 모습을 드러내겠지요.

 

같은 시간의 다른 얼굴들
때는 1500년 2월 어느 날 아침 6시. 강을 꽁꽁 얼린 추위 속에, 동서남북 네 집의 창문에 촛불의 희미한 빛이 깜박거리고 그 너머 집 안에서 하루가 시작됩니다.


동쪽 집은 부엌. 요리사 아주머니가 저녁에 있을 사육제 잔치 준비를 시작합니다. 어부 아저씨가 얼음을 깨고 잡은 커다란 물고기를 가져왔는데, 주석으로 만든 그릇 더미를 옮기다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밝지가 않습니다. 저녁이 오기 전에 이런저런 잔치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지하실의 맥주도 날라 와야 하고, 신선한 빵도 구워 놓아야 하는, 바쁘디 바쁜 하루의 아침이 달갑지만은 않을 터. 지금 아주머니의 시간은 얼마나 빨리 지나가고 있을까요? 이즈음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종말을 막을 큰 종을 만들 주석을 모으는 일이라는데,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그릇 더미는 마침 종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남쪽 집은 공방. 제본 기술자 빌헬름이 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교회에서 부탁한 책 표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재료로 쓸 가죽이 어제 떨어져 버렸습니다. 새 가죽을 가져올 사람은 세 시간 뒤에나 도착할 예정이니, 재료가 없어 손을 놓고 기다려야 하는 빌헬름에게 이 시간은 얼마나 더디게 흐르고 있을까요? 지루한 빌헬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깁니다. '어제 집 앞에서 주운 고양이를 아는 집에 가져다줄까? 그 집 아이들이 착한데, 어제 얼음을 지치고 돌아오다가 고양이를 보고 좋아했는데…….' 한편, 세 시간 뒤에 도착해야 할 가죽장수는 무대의 커튼 뒤에 숨어 등장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쪽 집은 아이들 방. 어제 늦도록 얼음을 지친 아이 둘이 아직 잠들어 있고, 엄마는 날마다 그 시간에 깨어 우는 갓난아기 살로메아에게 방금 젖을 먹였습니다. 돌아오는 부활절에 살로메아에게 세례를 받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난밤 감기라도 걸렸는지 악몽을 꾼 아들 크리스티안을 달래던 일을 떠올립니다. 좀 전엔 크리스티안의 이마를 짚어 보았지요. 어서 날이 밝고 아이들이 아무 탈 없이 일어나 뛰놀기를 바라는 엄마에게 이 시간의 표정은 어떤 것일까요? 아이들의 침대맡에 걸려 있는 그림 속의 수호천사도 엄마의 마음인 양, 손 모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북쪽 집은 거실. 젊은 아내가 곧 동생과 함께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날 남편 안제이를 배웅하고 있습니다. 날이 춥고 길은 멀고 험하니 불안함도 크려니와, 배가 불룩하니 아이를 가진 듯한데, 한 해가 될지 두 해가 될지 헤어져 있을 시간을 헤아리는 안타까움이 더 커 보입니다. 지금 이 두 사람의 시간은 어떤 색깔일까요? 창문 아래 모래시계는 떠날 시각을 재촉하는 것만 같고, 선반 위 화분에는 안타까운 이별 뒤에 다가올 미래의 희망을 말하는 듯 새싹이 움터 오르고 있습니다.


동남서북, 집집마다 창문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시계탑은 똑같은 시각을 알려 주고 있건만, 그 창문 안의 사람들은 이처럼 저마다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구는 그릇을 나르고 누구는 가죽을 기다리고, 누구는 아이들을 걱정하고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을 하고……. 그들이 느끼는 시간의 속도가, 시간의 색깔이, 시간의 표정이 다 같을 수 있을까요? 시계탑이 가리키는 시간의 네 방향은, 사람들이 저마다 마주치는 같은 시간의 서로 다른 얼굴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같은 시간의 다른 얼굴들'…… 퍼즐을 맞추는 첫 번째 열쇳말입니다.

 

어제의 시간, 오늘의 시간, 내일의 시간
이야기는 그렇게 100년씩 시간을 건너뛰어 1700년, 1800년, 1900년, 그리고 2000년 우리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그 시간들 사이에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시대와 시대를 오가며 꼼꼼히 들여다보면, 시간의 비밀을 간직한 실마리들이 곳곳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1700년의 공방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는 1500년의 거실에 놓여 있던 바로 그 모래시계였고, 같은 해 거실 벽에 걸린 사슴머리 박제는 1600년 아버지가 사냥해 온 바로 그 사슴의 머리였습니다. 1900년의 거실에서 아버지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1600년의 거실 한쪽에 놓여 있던 바이올린이었으며, 2000년 이 도시를 방문한 외국인 한 쌍이 길에서 주운 열쇠는 1800년에 잃어버린 설탕 함의 열쇠였습니다. 이 사실들은 무엇을 뜻할까요?


한편으로 우리는 1700년에 아이들이 만들어 날리던 연과 똑같은 연이 1800년의 아이들 방 창문 너머 하늘에 날고 있음을 발견하고, 1500년에 어부가 가져온 물고기와 똑같은 물고기를 2000년의 식구들이 요리해 먹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00년 시계 기술자의 공방에 천둥소리에 놀란 개가 있었던 것처럼, 2000년 화가의 작업실에 폭죽소리와 불빛을 무서워하는 개가 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2000년의 아빠와 1500년의 엄마가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자세로 아기를 안고 있으며, 거실의 두 남녀들도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자세로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것들은 또한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100년, 200년, 300년, 400년……, 시계탑이 지켜보아 온 몇백 년 세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제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 그리고 내일의 시간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모습으로 흘러가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제의 일은 오늘의 원인이 되고 오늘의 일은 내일 결과로 나타납니다. 끝없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시간의 사슬은 시곗바늘이 돌고 태양이 돌고 계절이 돌기를 되풀이하듯, 끝없이 돌고 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제의 시간, 오늘의 시간, 내일의 시간'…… 퍼즐을 맞추는 세 번째 열쇳말입니다.
 

나의 시간, 너의 시간, 그들의 시간
이제까지 우리는 500년 동안 펼쳐진 24장면의 이야기를 지켜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웃고 울고 떠나보내고 만나고, 일하고 놀고 꿈꾸며 저마다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보낸 그 시간들이 정말 '저마다'만의 시간들이었을까요?


이야기는 우리에게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들이 서로 겹치고 엮이고 영향을 미치며 인연을 맺는 풍경들을 보여 줍니다.

 

거기에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아 가져온 시간이 요리사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주고, 가난한 조각가와의 사랑을 관철하려는 딸의 시간이 만류하는 부모를 속상하게 하는 것처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서 맺어지는 인연들이 있습니다. 흰 블라우스에 수를 놓는 아가씨의 시간이 딸의 세례식을 준비하는 친구에게 선물이 되고, 그 도시에서 그림책을 만드는 화가의 시간이 멀리 다른 나라의 어린 독자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처럼 같은 시간 다른 공간 속에서 맺어지는 인연들도 있습니다.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병정을 100년 뒤 그의 증손자가 가지고 놀게 되고, 요리사 아주머니가 쓰던 반죽 그릇을 100년 뒤 그 부엌의 새 주인이 쓰게 되는 것처럼 다른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맺어지는 인연들도 있으며, 시계 장인의 공방에서 만든 시계가 100년 뒤 다른 집의 거실 벽에 걸려 있거나, 아빠의 사진 공방에서 놀던 아이가 몇십 년 뒤 다른 나라의 유명한 과학자와 화가의 사진을 찍게 되는 것처럼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맺어지는 인연도 있습니다.


100년, 200년, 300년, 400년,…… 그리고 동서남북. 시계탑이 간직한 500년 세월과 네 방향의 이야기들은 이처럼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은 전혀 별개의 시간이 아니며, 또한 수많은 그들의 시간들이 서로의 시간들 속에 엮이고 엮여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 중 누군가는 500년 전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유심히 하늘을 관찰하는 소년이었던 미코와이 코페르니크(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리며 훌륭한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울 수 있는 것이고,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그림책을 통해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눈 파란 작가와 만나, 시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겠지요.


나의 시간, 너의 시간, 그들의 시간'…… 네 번째 열쇳말을 끝으로 커다란 퍼즐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림책 속에는 끼워지지 않은 퍼즐 조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두고두고 넘겨 보면서 그 조각들을 찾아 퍼즐을 완성하는 놀이를 즐겨 보세요.

 

글․그림 /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Iwona Chmielewska)

1960년에 태어나 폴란드의 중세 도시 토룬의 코페르니쿠스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습니다. 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작가는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지금은 직접 글을 쓰고 그리는 그림책 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파블리코프스카─야스노젬스카 시화집』으로 바르샤바 국제 책 예술제 '책예술상'을, 『생각하는 ABC』로 'BIB 황금사과상'을 받았습니다. 쓰고 그린 그림책으로 『파란 막대․파란 상자』, 『두 사람』, 『생각』, 『발가락』, 『생각하는 123』, 『안녕, 유럽』, 그린 책으로 『비움』, 『마음의 집』 등이 있습니다.

 

번역 / 이지원

1974년에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 폴란드어과를 졸업하고 폴란드에서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어린이책 연구와 기획,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파란 막대․파란 상자』, 『두 사람』, 『생각』, 『발가락』,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안녕, 유럽』, 『장미와 반지』, 『착한 괴물은 무섭지 않아』 등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자료 제공 : 사계절출판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