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를 금하노라>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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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얽혀 바쁘게 달리는 행복하고도 버거운 나날이 계속되는 요즈음입니다. 서평대상 도서들이 도착할 때마다 갖던 뿌듯하고도 설레는 감정이 슬슬 부담으로 다가올 즈음 도착한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고등어를 금하라.' 군사 훈련 중 군인들에게 전하는 명령같기도 한 어투의 제목에서 저는 늘 그렇듯이 많은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고등어'란 필히 무엇인가의 약자(略字)일 거란 생각도 했었답니다. '고등한 인간들의 등푸른 어제를 위하여'라든지 '고유하고 기세등등한 어미들'이 아닐까라는 생각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여기서 '고등어'는 말 그대로 생선 '고등어'를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쉽게 생각하면 될 것을 전 참으로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필자와 복잡하고 고단하게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시작부터 씁쓸했습니다.  

  이 글은 독일 생활을 하고 있는 한 가족의 생활일기 같은 글입니다. 홍세화씨가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소개하며 프랑스는 모든 면에서 합리적이라고 묘사했던 것과 달리 이 글의 저자는 독일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자기네 가족들을 통해 독일을 관찰하고,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시각에서 한국인들의 모습을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독일은 뭐든지 최고라며 미화하거나 인정주의적 한국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교하고 얘기해 주려한 그녀의 나름 객관적인 시각이 내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독일에서 살아온 시간이 훨씬 많은 그녀가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콕 짚어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회 속에 묻혀 살아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 발 물러서서 살펴보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요? 그녀는 한국인으로서 독일을 살펴보고, 또 독일인으로서 한 발 뒤로 물러나 한국이란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완전한 독일인도 완전한 한국인도 아닌 이방인스러운 그녀의 처지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를 택한 그녀의 생활은 환경보호라는 코드와 어울리고, 내륙지역인 독일에서 고등어를 금하고 그 지역 농산물만 소비하고자 하는 태도는 로컬푸드를 지향하는 사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나치에 대한 독일인들의 시각이나 처사는 친일파 청산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안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도 하지요. 부모들의 과잉 치맛바람으로 일컬어지는 아이들의 교육문제 또한 그녀의 자녀 교육법을 돋보이게 합니다. 돈보다는 시간을, 그것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선택한 그녀의 모습은 읽는 내내 나에게 부러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가 단순히 자기 자식을 자랑하고 미화하는데 그쳤다면 "그럼 그렇지. 에세이 형식을 빌어 자기는 이렇게 완벽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군. 책 역시 자랑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라고 치부하며 한껏 깎아내릴 수라도 있었을 텐데, 진솔한 그녀의 글은 하루하루 고민거릴 만들며 살아가는 내 옆에서 누군가가 조근조근 얘기를 들려주는 듯 했습니다. 듣고 있으면 나의 마음 역시 푸근해지는 조언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사진 속에서 인물들의 찡그린 모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고민이 가득할 때는 카메라를 들이댈 여유가 없기 때문일 테지요. 그리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사진일 경우에는 더욱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끄집어 내기 마련이구요. 적어도 남에게는 내가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이겠지요. 그런데 그녀가 보여준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다양하기 그지없습니다. 찌푸린 모습과 난감한 표정, 행복한 표정과 우울한 뒷모습까지. 그런데 그런 그녀의 인생살이를 듣고 있으면 부러운 것은 왜일까요? 아마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자유로운 만큼 상대도 자유롭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행복한 일인 모양입니다.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가족들에게 외친 그녀의 목소리가 적어도 저에게는 헛된 울림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 역시 그녀처럼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들이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생활을 꿈꾸고 있다면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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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복을 꿈꾸거든 버려라
    from 날아라! 도야지 2009-11-19 14:30 
    고등어를 금하노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혜지 (푸른숲, 2009년) 상세보기 경제력과 행복지수는 비례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통계청이 발간한 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명목 GDP는 IMF 집계치 기준 9,291억 달러로 세계 15위에 올랐다고 한다. 반면 영국 신경제재단이 전세계 143개국을 대상으로 발표한 행복지수(HPI)는 68위를 차지했다. 이 행복지수의 평가항목은 경제적 요인, 자립, 형평성, 건강,..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 수수께끼와 역설의 유쾌한 철학퍼즐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4
피터 케이브 지음, 남경태 옮김 / 사계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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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동건과 고소영 열애설로 각종 사이트마다 난리다. 외면하려고 해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인 양, 메일을 확인하려 해도, 검색을 하려 해도, 여기저기서 눈에 띄인다. 연예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심한 양 생활하는 나도 장동건-고소영 열애 기사만큼은 눈이 가는데 다른 이들의 관심이야 일러 무엇할까 싶다. 그러면서도 꿈이었으면 싶은 마음은 왜 일까? 혹시 꿈인 걸까? 만약 꿈이 아니라면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은 누가 어떻게 증명해 줄 것인가? 도대체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은 누가 증명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럴 때마다 인용되곤 하는 ‘호접지몽’이 생각난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니 장자가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가?

이제 말하게 될 책은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라는 책이다. 제목으로 짐작하기에는 과학과 관련된 문제나 인간 복제와 관련된 윤리 문제가 아닌가 싶었는데 내용은 철학적 퍼즐로 구성되어 있었다. 흔히 우리가 궁금해 하면서도 파고들지 않았던 문제들을 하나 둘 툭툭 던져주는 것으로 책은 전개되고 있다.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 사형수가 교수형을 피하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믿고 있는 도덕적 신념은 절대적인 ‘선’이라고 할 수 있는지, 현재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은 도대체 누구의 관점에서 나누는 기준인지 등등 이 책의 저자는 매 장마다 어려운 질문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친절한 사례를 유머러스한 이름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긴 한데 저자나 번역자의 의도와는 달리 그리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 게 흠이다. 나의 무지 탓이려나? 그러나 나의 무지함은 또 어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 글을 읽은 내가 맞다는 말인가?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역시 이야기는 끝이 없기 마련이다.

책은 서른 세 개로 정리된 다양한 철학적 명제를 쉽게 설명하는 동시에 각 장과 연관되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의 장을 화살표 표시해 주고 있다. 시키는 것을 좀처럼 거부하지 않고 순응하고자 하는 나로서는 게임의 말처럼 주사위에 나온 숫자대로-책에 표시된 지시대로- 갔다가 오기를 반복해 보다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걸 보았던 듯도 싶고 보지 않았던 듯도 싶어 오히려 읽는 행위 자체가 나의 정신을 혼란시키곤 했다.(이것이 총평에서 별 하나를 뺀 이유다) 그러다 어설픈 나의 순응성을 거부하고 자유의지를 가진 양 다시 책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딱히 순서가 상관이 없는 구성인 만큼 그냥 하나의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읽으면서 ‘진작 자유의지(?)를 따를 걸’이라고 생각하며 이전의 나의 순응적인 태도를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저자의 설명대로 우리와 동떨어진 철학적인 사고를 현실로 끌어주었다는 면에서는 나 역시 이 책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하지만 이전에 먹은 음식이 워낙 달콤했던지 이번에는 도통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잭 보웬’이 쓴 ‘드림 위버’라는 음식이 계속 뇌리를 맴돌 뿐이었다. 그 책에 비한다면 이 책은 머리 속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떠들어 대는 소리로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별 하나 더 뺐다. 여튼 철학자들만 생각할 법한 철학에 대한 논의가 점점 연구실에서 벗어나 우리 주변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은 머리가 아플 만큼 기쁜 일이다. 고통에는 그에서 벗어날 개운한 해결책도 함께 올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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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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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에게 학교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그곳에서 생활하는 학생과 교사들은 그 속에 있는 사람 나름으로, 그곳을 졸업한 사람은 또 그들 나름으로, 또한 그 속에 있는 사람과 엮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 학부모들과 교직원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다른 제각각의 모습으로 학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던 과거세대를 제외하고 학교라는 곳을 거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다시피 할 것입니다.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무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그곳을 한 번은 거쳐가기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정치적 사안과 달리 교육 문제나 학교 문제가 화젯거리로 오를라치면 저마다 전문가가 되어 핏대를 세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거쳐간 곳인 만큼 그곳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간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들이 나름 다양한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들 학교만큼 세대가 다양할까요? 10대부터 20대, 30대까지, 하물며 60대까지 모두들 사각형의 상자 속에서 추억을 만들고, 기억을 만들고, 상처를 입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고 있지요. ‘여섯 번째 사요코’라는 소설에서 ‘온다 리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교실은 하나의 그릇이 되어 매년 사람들을 담았다가 쏟아내기를 반복한다고 말이지요. 늘 봐 왔던 똑같은 교실 속에서 교사와 학생이 어우러져 생활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는 결국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나토 가나에’는 학교에 대한 아주 흥미진진하고도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하고 있는 셈이네요. 
  

  여고생들의 추억이 서린 아련한 학교의 모습이 아니라 살인사건이 얽힌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서글픈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은 읽는 내내 저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일본의 남다른 엽기적인 행적이라 치부하기엔 시절이 너무 흉흉한 요즈음이 더욱 실감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 속에 마음까지 더 스산해졌다고나 할까요? 이 소설에는 그닥 많은 인물이 등장하진 않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잃은 한 교사의 담담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초입인데도 불구하고 엄연히 사건의 경위와 범인까지 알려주는 1장의 내용은 사람을 섬뜩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그런데 책을 덮어버리게 하기보단 눈앞으로 책을 더 끌어당기게 만드는 것이 작가의 힘일 테지요. 특별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현란함이 있다기보다는 자분자분 이끌어가는 글의 전개가 사람의 손을 더욱 끈끈하게 잡아당긴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듯 싶습니다. 가해자들의 고백과 가해자 부모들의 고백들. 이젠 더이상 누가 누구의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도 모를 상황들까지 머리 속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렇기에 스포일러처럼 소설의 내용을 다 일러바친다고 해도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스릴감은 여전할 듯 하네요. 그게 작가의, 번역자의 역량이었겠지만요. 

  이번 소설을 읽고 ‘한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단순히 한 명의 범인이 정해져 있다면 그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는 범인이 아니니까, 나는 선한 편에 있으니까’라고 위안까지 얻을 수 있는데 범인을 양성한 사회를 고발할 즈음에는 도대체 저는 어디로 숨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죽어 마땅한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산한 것은 결국 우리의 무관심이라는 것을 살아갈수록 더욱 실감하곤 합니다. 내 가족의 안전과 부귀를 위해 울타리를 튼튼히 할 수록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적개심은 더욱 커져만 갈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할 때가 지금인 것만 같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더욱 겉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제가 무엇부터 해야 할른지 모르겠네요. ‘슈야’와 ‘시모무라’들이 한 걸음 더 내딛기 전에 내가 무엇인가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사람을 얕본다’라는 웃지 못할 속담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통하는, 서로 배려할 줄 아는 세상을 우리 모두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우리의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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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유가에서 실학, 사회주의까지 지식의 거장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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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요즈음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인 저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창은 바로 책이랍니다.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들려주는 사람과 유익한 이야깃거리를 들려주는 사람들, 엉뚱한 이야깃거릴 들려주는 사람들, 모두모두 저에게는 세상과 통하는 창인 셈입니다. 그 중에서 황광우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미있고도 심오하면서도 유익하기 그지 없습니다. 철학콘서트를 읽었을 때 그 감동을 뭐라 표현해야 할른지요. 신기하게도 주위 사람들 중에는 쉬운 이야기도 어렵게, 어려운 이야기는 더 어렵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야 권위가 있어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꾸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할수록 우린 그들을 뜬금없이 바라보는데 그 시선을 사람들은 존경이라는 말로 고착시켜 버린 모양입니다. 그런 면에서 황광우씨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쉬운 이야기 투성이입니다. 저렇게 거창한 사상들이 이렇게 쉽다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때 우리들의 시선은 하찮음일까요? 이게 바로 진정한 존경의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쉬운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요. 그런 의미에서 그가 훑어준 사상사는 읽기 참 좋았습니다.  철학이란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를 통해서 철학이 곧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보수적이라서 한 번 지어놓은 사유의 집을 부수고 새로운 사유의 집을 짓는 일은 매우 두려운 일이라고 한 그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런 두려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라고 그는 말했지요.그래서 저 역시 그런 두려움을 견디어 보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런 저에게 황광우씨는 이번엔 사상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상 역시 철학자들의 생각인 만큼 겹치는 이야기도 있을 법 한데 어째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종플루에다 세종시 건설까지, 성폭행과 어린이 폭행까지 세상이 뒤숭숭한 요즈음 그의 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많아 보입니다. 

백성들이 가장 존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재이다. 이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운다. 좋은 제물을 준비하여 때를 어기지 않고 제사를 올렸는데도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사직도 갈아 치운다.(p155) 

 과거 맹자의 사상인데 불구하고 지금 역시 되새겨야 할 말이 아닐까요? 천자는 백성의 마음을 얻은 사람임이 분명한데 요즘은 어찌 된 것이 백성이 천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려고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잘못 마음을 주다 보니 엉뚱한 천자가 지위를 얻은 것은 아닐까요? 모든 국회위원들은 국민을 위해, 국민만을 생각하여 정치를 한다고 하는데 정작 국민들은 나날이 힘들어지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요. 하긴 지금 상황에서는 정작 누가 백성이고 누가 천자인지도 모호할 때가 많기는 합니다. 모두들 국민을 위한 방책이라고 의견을 내놓기는 하는데 그 모양들이 제각각이니 말입니다. 황광우씨가 말하는 '대중이 가담하는 야바위'가 바로 이런 것일까요? 

공원 모퉁이에서 삼삼오오 모여 벌이는 야바위판은 그 사기성을 쉽게 간파할 수 있지만 국가권력이 앞장 서고, 수천만 대중이 가담하는 역사의 야바위는 그 진위를 가려내기가 참으로 힘들다.(p54) 

제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혹 야바위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과 이 세상을 조금 더 신중히 돌아보아야 할 때인 듯 합니다. 이러다가는 노자와 장자의 말처럼 옳고 그름조차 판단할 수 없는 혼돈에 빠질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너와 논쟁을 해서 네가 이겼다면 과연 너는 옳고 나는 그른 것인가? 내가 너를 이겼다면 과연 너는 틀린 것인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제 삼자를 부른다면 누구에게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너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나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다른데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같은데 어떻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와 나와 제삼자가 모두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해결되겠는가?(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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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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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한 권의 책이란다.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기에 나는 단편 소설보다 장편소설을, 장편소설보다는 대하소설을 선호하곤 한다. 사람의 다양한 굴곡을 이야기하기에는 단편은 너무 찰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처럼 찰나의 묘사에 매혹되어 한참을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단편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번 소설을 선택한 것은 오롯이 나의 실수 때문이었다. 당연히 장편이려니 생각한 나의 착각이 이 책을 사게 한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작가 '김연수'에 대한 믿음일 테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난 이전의 내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이 책을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다를 터이니 말이다. 
 
  나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라는 작품으로 작가 '김연수'를 처음 만났다. 그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들고 나는 역 앞 빵집이라는 배경에서 많은 군상을 바라보던 겉늙은 아이의 시선과, 추억은 항상 즐거운 쪽으로 예감은 항상 불길한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라던 그의 문장 정도가 전부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심 나는 다음에는 이 작가를 피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것은 책에 대한 막연한 나의 기대가 깨졌기 때문이리라. 물론 나보고 그와 같은 작품을 쓰라면 나는 한 자도 쓰지 못할 테지만 독자로만 여러 해를 살아온 나만의 안목으로는 그의 글이 나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김연수'를 나의 독서 목록에서 완전히 제명시키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은, 특히 작가들의 어제와 오늘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나 역시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접한 책이 <여행할 권리>라는 책이었다. 너무나 많은 곳을 다니는 그의 삶이 부러웠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써내려간 그의 글이 사무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밤은 노래한다>라는 글과 이상문학 수상집에 실린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글까지. 내가 집어든 김연수의 작품은 그야말로 연타석 홈런이었다. 이제 두근두근해 하면서 그를 기다리게까지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난생 처음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책을 예약 구매하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이 책이 누구에게 갈지 알지도 못하고 쓴 사인일 테지만 동그란 ‘ㄴ’ 받침으로 쓴 ‘이천구년’과 단호하게 꺾어진 듯하면서도 여지를 둔 각진 ‘ㄴ’이 들어간 ‘김연수’라는 이름에 혼자 미소까지 지어보았다. 다름 아닌 그의 글씨이기에... 서두가 길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에 대한 나의 감상평은 대만족이다. 각각의 단편들이 장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걸 보면 분명 그러하다. 작품 내내 흐르는 순간적인 사건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들, 남의 고통과 소통하는 순간 그 고통은 이미 이전의 고통과는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는 그의 말이, 크나 큰 불행 속에 허우거리다 다시 살겠다고 마음 먹는 것은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것이라는 소설 속 인물 ‘해피’의 전혀 해피하지 않은 말들이 내 마음 속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p27

고통을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고통을 피하려고 스스로 죽기도 한다. 해피에게는 아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게 되는 건,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뜻이었다.

p179

나의 삶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나만이 느꼈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또 다른 누군가도 봤으리라고 짐작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인지 깨닫게 됐다.
 
   

작가는 말한다. 나만의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받는 위로에 대해.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부여잡고 있는 마지막 위안이 아닐까 싶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제 정신이 아닌 한 여인이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다.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기에 죽은 아이를 부여잡고 울던 여인을 안타까이 지켜보던 이웃들은 그녀에게 근방에 이름난 성인(聖人)이 있다고 하니 거기 가서 도움을 청해 보라고 뀌띔해 준다. 이름난 성인이 말했다. 사람이 한 명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얻어오면 방법을 알려주겠노라고. 그러자 이 여인은 모든 집을 돌아다니며 혹 누군가 죽은 사람이 있느냐고, 없다면 겨자씨를 달라고 청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겨자씨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없다. 발 아프게 돌아다니며 그녀가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다는 사실,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 역시 그녀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크게 깨우쳐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던가.-<티베트의 즐거운 지혜>에서 읽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라 적어 본다.- 이렇듯 고통이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망각한다. 나만의 고통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삶을 두렵게 만드는지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소통이 부재하는 현재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행복의 나라로 가자는 터무니 없는 선동이나 환타지가 아니라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일 것이다. 그 통로에서 더러는 주저앉기도 하고 엉엉 울어보기도 하며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내가 이전에 느낀 그런 고통은 아닐 것이다. 

또 작가는 말한다.




   
 
p316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그래 이게 핵심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전제 조건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단언하기 전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즉,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부터 인정해야만 우리도 비로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수줍게 고개를 들면서 말해봐야 한다. 나는 너를 잘 모른다고. 그렇기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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