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느 시공간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글과 마주치든 간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채 읽기를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 같다. 이 글을쓰고 있는 지금 내 앞에는 『세상의 발견』 가제본 책과 『달걀과 닭 한권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두 책을 번갈아 본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세상의 발견』 표지는 백지이며 『달걀과 닭』에는 어느덧 친근해진 클라리시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 그의 두 눈이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2020년대의 한국 독자인 나를 바라본다. 『달걀과 닭처럼 표지 전체가 작가 얼굴로 점령되어 있는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사진속 무표정이 너무나 심원해 보여서 책을 집어 들다 멈칫하게 되는 경험은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클라리시의 얼굴은 독서의 시간 동안 또다른 풍경처럼 머릿속 한편에 둥둥 떠 있다. 그의 초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강렬한 인상은 책의 감상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왔을 것이다.

내 얼굴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래전의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을 그의 시선은 50여 년의 생애 동안 어느 표면과 심층을 오가며 무엇을 식별하고 또 축조해왔을까. 클라리시의 소설에서 사건들의 시간은 문장의 나열을 통해 팽창된다. 부엌에 놓인 달걀을 바라보거나 거리에서 죽은 쥐의 시체를 밟거나 모르는 개를 묻어주거나 차창 밖으로

껌 씹는 장님을 목격하는 등, 일상적인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탈구된 장면들은 문장으로 분화되는 동안 더 넓은 시간성을 확보한다. 반면 결말은 단말마의 비명처럼 찾아온다. 이 급작스러운 끝남이 죽음의 형식과닮아 있다고 느껴지기에 나는 한 편 한 편의 소설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살덩어리처럼 여기게 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뜨거운 내장을 내 손으로 쥐는 일 같았다. 처음 읽으며 몸서리쳤던 기억이지금도 선명하다. 이러한 독서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거의 경악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이제는 인쇄물의 형태로만 마주할 수 있는 그의 두 눈이, 감정과 감각을 지닌 육체에 속해 있었을 때에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소설의 형태로 구성되고 형식화되지 않은, 아직 재료인 상태였을장면들을 그가 어떻게 다루고 간직해왔을지. 이 얼굴이 목소리로 내뱉은말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타자와 나누었던 대화들은 어떤 내용이었을지.

2단편 「버펄로」 낭독회에서 한 독자가 "이야기 전체가 마치 내장으로만들어진 것 같다"라는 후기를 전했다는 일화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클라리시의 소설이 내장과 같다면 『세상의 발견』은 피부에 가까운 글들의 모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표면인 것. 부드럽고 따뜻하고익숙하지만 그 속에 뼈와 내장과 정신을 품고 있는 것. 산문의 넓이를 누리며 멀리까지 뻗어나가는 일상적이고 경쾌한 문장들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라는 작가의 신비를 걷어내 폐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걷힌 자리에서 새로운 형식의 신비를 발견하게 한다. 가령 아래와같은 문장들.

나는 삶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느낀다. 봄에는 몇 시간이고 혼자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때로는 피를 흘릴 수도 있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 나는 내 피 안에서 봄을 느끼니까.
그래서 아프다. 봄은 내게 무언가를 준다. 봄은 나를 살게해준다. 나는 어느 봄에 죽을 것이다. 나를 찌르는 사랑과 약해진 심장으로.


각주에 따르면 남반구의 봄은 9월 말부터 12월 말까지이다. 클라리시는 1977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 단편 「버펄로」는 "그러나 봄이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봄이라는 계절의 폭력적일 만큼 강인한 생명력 앞에서 클라리시는 줄곧 경탄했던 것 같다. 어머니로서의 자신이 작가로서의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였으므로 만물이 탄생하는 봄이 자신의 소멸과 잘 어울리는 계절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대체 어떻게 "나는 어느 봄에 죽을 것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게는 단지 눈으로 보기 힘든 더섬세하고 어려운 현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문장처럼, 클라리시에게 스스로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섬세하고 어려운 현실이기에 어떠한 방식의 예감과 확신이 가능한 대상이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이렇게 무릎에 타자기를 올리고 글을 썼어요. 이사진은 연출된 것이기는 하지만요. 어머니는 네다섯 시쯤, 아주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글을 썼어요. 요즘에는 주로 컴퓨터를사용하니까 타자기 소리를 잘 모르실 텐데, 빗방울이 창문에부딪치는 것 같았어요. 몇 년 전에는 창문에 빗방울 부딪치는소리가 들리기에 엄마가 글을 쓰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도했죠.


이른 아침 일어나 타자기로 글을 쓰는 것은 클라리시의 일상이었다.「세상의 발견』에 수록된 글들 역시 같은 시간에 쓰였을 것이다. 동틀녘의 빛이 붉게 물들이는 그의 손등과 타자기의 네모난 자판들을 떠올려본다. 마치 타악기 연주처럼 이어지는 타자기의 규칙적인 소리들은 아침의공기를 흔들었을 것이다. 오래전 열 손가락의 부지런한 움직임을 통해적힌 포르투갈어 문장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지금 우리 곁에 책의 형태로 도착해 있다. 그의 죽음 이후 약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지구 반대편 작은 나라에서 열렬한 그의 독자들이 등장하게 될 것임을 클라리시는 예상하였을까. 발음도 구조도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미래의 사람들이 그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며, 그의 영혼을 이토록 환대할 것임을알았더라면 이에 대해 그는 어떤 문장을 적고 싶어 했을까.

클라리시의 글에서 포착되는 미지의 여러 양상 중 가장 불가해한 것은 쓰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힘과 용기였다.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로서의, 작가로서의 그 모든 정체성을 쇠약한 육체로 수렴시켜 문학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그의 쓰기에, 수십 년전 타자기를 두드리던 클라리시의 두 손에, 오늘 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의 움직임이 빚지고 있다.

『세상의 발견』을 읽는 동안 나는 독서보다 대화에 가까운 경험을 했다. 또한 작가로서 글을 쓰는 동안 가지게 되었던 여러 의문들에 대한 대부분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질문보다 먼저 쓰인 대답인셈이다. 내내 많은 위안을 받았다. 클라리시는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라난 브라질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사회문제에 분노하며시위에 참여하였고 언제나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명 많은 이들의의심이 뒤따랐을 테지만 자신의 작품을 일종의 참여문학이라 여기기도했다. 주목받지 못하는 친구의 아름다운 글을 자신의 글 안으로 초대하였고, 파블로 네루다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몹시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기

도 했으며, 구걸하는 자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지갑을 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크리스마스이브마다 수면제를 먹고 48시간 동안 잠들어버린다 말하는 젊은 여성에게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를 레스토랑에서함께 보내자고 제안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매사에 좋은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클라리시의 일상은 추상적이며 난해하다고 치부되는 그의 문장들과 별개의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의 깊이와 넓이를 통렬하게 감각하는 동시에한 명의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프로 작가가 아닌 아마추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7년,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는 그에게 브라질 혹은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과 교류하는지 묻는다. 클라리시는 그렇다고 답한다. 인터뷰어가 브라질 작가 중 요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누구인지 묻자 클라리시는 이러한 호명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대답을 거절한다. 재차 인상 깊은 작품을 말해달라 요구하자 그는 단호하게 다시 거절한다. 그의 배려는 그가 아끼는 대상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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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계속 윤CAROL KAESUK YOON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이자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 현역 과학자였던부모님 곁에서 실험용 생쥐와 함께 놀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사춘기가 오기 전에는 사랑이나 멋진헤어스타일의 힘보다 다양한 통계 기법에 더 빠삭해질 만큼 자칭 ‘과학의 젖을 먹고 자랐다. 과학자와 결혼했고, 친구들도 대부분 과학자이며 자신 역시 과학자가 되었다.

예일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후, 코넬대학교에서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뉴욕 타임스》에 과학자들이 내놓은신기하고 경이롭고 새로운 발견들에 관한 글을 쓰며 보냈다. <사이언스>,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도 기고했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과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온 학자이자 저술가인 캐럴 계숙 윤이 온갖 생물의 이름과 질서를 연구하는 학문인 분류학의 세계로 뛰어들면서 마주하게 된 뜻밖의 사실과 충격을 그려낸 이야기다. 인생의 가치관 그 자체였던 과학의 세계와 어릴 적 집 뒤편의 숲속에서 수없이 다채로운 동식물과 어울리며 느꼈던 직관적감각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기막힌 현장들을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2009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도서상 과학·기술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이 책은, 과학 전문 기자 룰루 밀러의 화제작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보다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다. 섬세한 관찰자이자 면밀한 과학자로서 저자가 길러낸 이 열매들을 즐겁게 맛보다 보면 어느새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될 것이다.
-룰루 밀러, 과학 전문 기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

발굴된 고인류 화석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고민하는 과정은 고인류학에서 중요한 과제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이러한 고민을 특별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한다. 동식물의 이름을 익히며 즐거워하는 아이, 어떤 식물을 두고 풀인지 나무인지 구분하기 위해 말다툼하는 부부. 저자는 분류학의 역사를 꼼꼼히 파헤치며, 생명에 이름을 붙이고 비슷한 것끼리모으고 다른 것끼리 나누는 일이란 취미나 과학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몸짓에서 기원하고 진화했음을 깨닫는다. 살아 있는 존재를 느끼고 유심히 살피는 본능적인 감각에 관한 깨달음이 갈피마다 가득한 이 책은 무감하게 바라봐왔던 우리 일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준다.
-이상희, 캘리포니아대학교 리버사이드 인류학 교수, 『인류의 진화』 저자

생명의 세계에는 이미 질서가 존재했지만 자기의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려는 이른바 분류학자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분류학이 발전할수록 생물은 사라져간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생물을 구분하는방식이 진화분류학, 수리분류학, 분기학으로 발전하면서 각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생명의 이름이 사라지는 사정을 소상히 밝힌다. 아뿔싸! 이젠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이한 일이다. 이름이 사라지면 지식이 사라지고, 이름이 사라지면 생명이 사라진다. 다시 지구를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법. 각자 자기 세계의 생명에게 스스로 이름을 붙이는것이다. 물고기가 다시 헤엄치게 하자.
-이정모, 펭귄 각종과학관장,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저자

분류학에 관한 풍성한 지식과 살아 있는 존재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책이다. 분류학이란 다양한 과학적 기술을 바탕으로 종과 종 사이의관계를 밝히고 이름을 부여하는 학문이다. 그 분야의 지식을 저자는 물고기를 예로 들어 무척이나 흥미롭게 짚어낸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편에 서서 바라봐야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은 말 그대로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주체로서의 삶을 지탱하느라 망각하고 있는 우리의 본능을 ‘움벨트‘라는 개념을 통해일깨워 주기도 한다. 자연과 더 가까워지고 더 깊이 연결되어 있어야 세계의 진실에 가까스로 도달하게 된다는 것! 무릎을 치면서 배운다.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초록목록』 저자

진화생물학자 캐럴 계숙 윤은 우리가 이 세상의 경이를 바라보고, 만져보고, 귀 기울이고, 불완전한 우리만의 감각으로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다윈이 그랬듯 윤도 따개비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생물학과 전기와 민담으로 풍성하게 꾸려진 그의 책을 읽는 것은 감각적 환희를 선사한다.
-오프라 매거진 (0)

분류학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시각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은 이 책에서... 캐럴 계숙 윤은 분류학이 무슨 학문이며 어떤 환경에서 형성되었는지, 이 분야를 추동하는 동기는 무엇이고 거기 매진한 과학자들은 어떤사람들이었는지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분류학에 휘몰아친 수많은 이념의 파도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생생한 현장감까지 느낄수 있다.
--리처드 레인, 《네이처》

얼핏 따분해 보이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과학적 지식과 개인적 경험을재치 있고 산뜻하게 엮어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독자들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런 걸 보면 윤은 아주 특출한 과학 저술가다. 최고.
-《커커스 리뷰》

재미와 통찰이 가득하다. 캐럴 계숙 윤은 각자 자신의 ‘움벨트‘를 되찾아보라고, 생명의 세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라고, 그리고 생명의분류에 나타나는 경이로운 다양성들을 있는 그대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보라고 권유한다. 낙관적이면서 신명 나고 혁명적인 책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이 책은 과학이 생명의 다양성 속 깊숙이 자리한 질서정연함을 찾아내는방법을 어떻게 깨우쳤는지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린나이우스부터 에른스트 마이어와 빌리 헤니히까지 까칠한 인물들이 잔뜩 등장해 이야기에 생동감을 더한다.
•데이비드 쾀멘, 『신중한 다윈씨], [도도의 노래」, 『진화를 묻다] 저자

정확히 우리에게 필요한 책이다. 정말 주의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자연 속을 더 많이 걷고, 새들을 더 많이 관찰하고, 생명의 세계와 직접 더 많이 접촉해볼 것을 권하는 윤에게 우리 대부분이 찬사를보내게 될 것이다.
-아서 M. 샤피로, 《계간 생물학 리뷰anarty Beries of Bong)

60년이나 분류학자로 살아온 나도 이 책에서 린나이우스와 다윈 같은사람들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배웠고, 주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분류학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생물학자, 탐조인, 자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이 책을 즐겁게 읽을 것이다.
-폴 R. 에얼릭, 「진화의 종말』 저자

매혹적인 과학사이자, 자연이 지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풍요로움의 실례이며, 인간이 내린 정의와 실제 생명의 현실 사이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사려 깊은 검토.
-데버러 블룸, 『원숭이 전쟁 Monkey Wars』, 「사랑의 발견 Love at Goon Park] 저자

캐럴 계숙 윤에게 진짜 과학이란 생명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그러니까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생명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야외로 박차고 나가보라고, 생명의 진화적 기원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보다 생명의 경이를 직접 눈으로 바라보라고 권한다. 이 책은 숲속으로 들어가 그런 경이들을 탐험할 수 있게 독자들을 이끌 것이다.
-빌 던컨, 《오리건 커런츠》

"이름을 불러도 벌레들이 대답을 안 한다면이름이 있어 봐야 무슨 쓸모가 있니?" 각다귀가 말했다.
"걔들한텐 쓸모가 없지. 그렇지만 걔들한테 이름을 붙인 사람들한테는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아니면 애초에 왜 걔들한테 이름이 생겼겠어?" 앨리스가 말했다.
"나야 모르지" 하고 각다귀가 대답했다.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200년도 더 전에 과학자들은 생명 세계 전체 (꽥꽥거리고, 휙휙 지나다니고, 꽃을 피우고, 덩굴손으로 감아 오르고, 잎을 내고, 털이 복슬복슬하고, 초록이고, 경이로운 그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려는 과업에 착수했다. 처음에 내가 이 책에 대해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바로 그 추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오늘날 분류학taxonomy 이나 계통학systematics이라고 불리는 그 유서 깊은 분류의 과학에 관해 이야기할작정이었다. 과학자들이 생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모든 생명을포괄하는 하나의 계층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동물과 식물 및 그 밖의모든 생물을 나누고 무리 짓는 그 복잡미묘한 방식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과학자들 외에도 중앙아메리카 마야인부터 중세 중국인,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사람, 미국의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여러 집단이 생명의 세계를 체계화하는 특이하고 신기한 여러 방식에 관해서 - P19

도 쓸 계획이었다. 흥미를 자아낼 이 특이한 분류법들이 귀퉁이에서스며드는 한 줄기 빛처럼 재미있는 곁다리 정보를 더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분류법들은 적어도 과학과 다르다는 점에서는 틀렸다는것을 나는 기정사실로 여겼다. 과학적 분류도 불완전할 수 있고 아직많은 부분이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생명의 세계를 체계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실로 타당한 유일한 방법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명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일에서는 언제나 과학을 따라야 하며, 또한 한결같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 P20

급기야는 과학이 완벽하게 해내려고 애쓰고 있던 것, 바로 생명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과학 자체가 훼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더욱더 예상하지 못했던 깨달음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새로운 분류의 과학이 사실상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을 생명의 세계와점점 더 단절되도록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거의 아무도 눈치채거나 크게 염려하지 않는 사이 세계 곳곳에서 여러 생물 종이 차례로 사라져가는 현 상황을 초래한 비극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얼핏 부정확해 보이는 그 수많은 비과학적 이름과 범주(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주변의 생명들을 기쁘게기리며 만들어낸 질서의 체계)가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이름과 범주는 각자 더없이 옳았으며, 그것들(그중어느 하나든, 당신이 원한다면 그 모두든)을 되살리는 일이 이 모든 상황을 치유하는 열쇠였다. - P21

숲속을 누비며 다니는 아이라면 누구나 아는 어떤 사실, 자기가 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아는 그 사실을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것도 바로 그 숲에서였다. 그건 바로 생명의 세계란 아무렇게나 뒤죽박죽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비슷한 것들끼리 무리를 이루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야생의 세계가 다양한 종류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각 범주 안에는 또 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알아보았던 것에 이름이 있으며 그이름이 몇 세기나 되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이름은 바로
‘자연의 질서‘였다. 태고부터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관찰하고 집착해왔던 바로 그 자연의 질서. 그 사람들 대부분이 한 것처럼 내가 한 관찰 역시 세밀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기회만 생기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쉽게 자연탐구가naturalist 가 된다.
내게 그 숲에 있던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명백했고, 언제나 당연했으며, 아주 실제적이고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그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까마귀의 깍깍거림이 들리고, 내 발에 밟혀 나뭇가지가 부서지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건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었고, 맑고 파란 하늘만큼 명백한 것이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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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라고 메모했다.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였지만 젊은 사회학자의저서는 고등학생의 심성 구조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흔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했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생활하며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들 했다. 퇴행보다는조로(早老)가 나았다.
생각은 생각이고 시간은 시간이었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십오년은 더 일해야 했다.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이십오년이 남아 있었다. 따지자면 곽은 교무실에서는 젊은 축이었다. 대표전화와 가깝고 방문자에게 등을 보이는 자리, 도서전에서 받은 머그잔과 저녁 산책을 하다 구입한 스투키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면 힘이 빠졌다. 밀린 보직 업무를 시작하기 전, 의자에 몸을 묻고 수업을 돌아봤다.  - P115

연주하던 기타를 부수거나 관객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있는 록 밴드들의 음악을 한두 곡 이어폰으로 들었다. 오아시스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
라며 위악적으로 남긴 말은 재미있었다. 그걸 이렇게 바꿔서 속으로 읊기도 했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그러니까 엿같은 월급이나 내놔.‘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유용했다. 머그잔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 - P115

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아쉬운 월급이었지만 임금노동자 평균•수입에 비하면 넉넉했다. 법으로 고용을 보장받았고 실적의 압박이 없으며 냉난방이 원활한 공간에서 일했다. 자잘한 연수나 업무가 있긴 해도 방학은 방학이었다. 일 년에 두 달을 쉴 수 있는직업은 많지 않았다. 균형감각, 계급의식, 뭐라고 부르든 견지해야 할 미덕이 있다면 푸념은 자제해야 했다. 게다가 한국은 대다수의 국민이 십 년 이상 공교육을 받는 선진국이므로, 명절의 친척집이든 독서 모임이든 포털 댓글난이든 모두가 학교와 교사에대해 나쁜 기억 하나쯤은 있었다. 병원에 가봤다고 의사의 일을.
은행에 가봤다고 은행원의 일을 다 아는 건 아닐 텐데 다들 지나치게 비난한다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그만큼 지난 시대 교육이 남긴 상흔이 큰 탓일지도 몰랐다.  - P116

하지만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다‘
4월이 되자 완연히 따뜻해진 날씨에 꽃나무들이 만개했다. 고전읽기 교실은 2층이라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하얗고 부드러운꽃잎들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듯했다. 교실 안으로 고개를 돌리면 엎드려 자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다른 과목 문제집을 풀고있는 학생들이 한가득 보였다. 곽은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감사하려고 했다. 네다섯 명은 곽의 설명을 듣고 텍스트를 읽고 학습지를 쓰고 있었으며 이따금 웃어주기도 했다. 은재도 그중 하나였다. 철학이나 사회학전공을 고려하고 있다고, ‘수업 재미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고 정돈된 글씨체로 썼던 은재, 그렇다고 평가를 계산하며 요란하게 열심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단지 허리를 펴고 수업을 듣다가 종종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초연하게 앉아 있던 은재, 덕분에 창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았다고 농담을 건네며 나중에 악수라도 하고 싶었던 은재.
민원을 넣은 건 은재의 아버지였다. 은재가 마르크스를 읽고있다는 것이었다. 『자본론」은 수업에서 다루는 열한 권의 추천 도서 중 하나였다. - P125

부조리의 경험에 있어서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적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그 고통은 그것이 집단적인 것임을 의식하게 되고, 그 고통은 인간 모두가 겪는 모험이 된다. 이상함의 느낌에 사로잡힌 인간이 최초로 내딛는 진일보는 그러므로 이 이상함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느낀다는 사실과……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에서  - P143

애들 얘기 하지 말라고 싫다고 난.
나는 다시금 말했다. 정호는 내가 매일 학원에서 어떤 생각과 어떤 눈빛들을 마주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매번 나의 치부를 들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얼마나 하찮은 사람인지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눈빛과, 꼭꼭 숨겨둔 것이 무색하게 나의 지저분한 면모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듯한 표정들, 언젠가 나 스스로 순순히 그 치부를 보여줄 수밖에없는 날이 올 것 같은, 처형을 기다리는 염소의 마음을 정호가 알리 없었다. - P166

현철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는 데는 딱 일주일이 걸렸다. 정호의 말은 틀렸고, 현철의 말은 진짜였다. 현철은 시시하게 찾아왔지만 끈질기게 괴롭힐 준비가 된 사람 같았다. 현철은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현철이 찾아온 지 딱 일주일 되던 날, 현철은 증거의 일부를 정호에게 보냈다. 얻어맞은 사진과 의사의소견서도 삼 년 전에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진짜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게 불쑥불쑥 꺼내도 미울 만큼의 미움을, 나는 잘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미움은 어떤 것일까. 시시해 보일 만큼 자연스럽고 명이 긴 미움은 어떤 것일까. 현철은 그 이후부터 그림자처럼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정해진 입금일이 되었거나, 날짜가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나타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현철이 무섭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철이라면 분명 나에게 해를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현철은 그저 시시한 일상처럼 스며들었다. 그러나 정호는 달랐다. 정호는 현철과 비슷한 그림자만 보아도 소름 끼쳐했고, 그럴 때면 머리가 무거운 사람처럼 고개를 조금 떨구고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 P168

...... 모르겠네요. 그냥 매일 그 속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롭혔으니까. 아니.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저 새끼 전역하면 진짜다 끝이다. 생각하면서 버티고. 근데 진짜 끝이더라고요. 허무하게. 허무해서 더 화가 나더라고요. 사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생각도 해요. 근데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넘어가면 나는 다음번에 또 이렇게 넘어가겠구나, 하는 생각. 앞으로 계속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상상하니까 내 다음이 무서워지고, 내가 무서워지고. 무서워지니까 또 밉고...... 미치게 밉고, 이해 안 되겠지만 그래서 그랬어요. 전역하고 나서 매일 생각했어요. 목 조르는 생각, 칼로 찌르는 생각. 그런데 막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렇게 골라내다보니 이렇게 시시해진 것도 같고. 그땐 진짜 죽이고 싶었는데. 어떤 사람한테는 삼 년이 어저께 같아요. 그 생각에 묶여서 시간이 안가요. - P180

소설을 쓰면서 약한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싫었다. 소설도 사람도 전부 다 싫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안 쓰고 안 읽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울지도 않았다. 다 잊어버린 척 열심히 연기했다. 그러다가 한 번쯤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편에 품고서 살았으니까.
약하지만 약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싶었다. 「파주에 나오는 현철은 정호보다, 그리고 ‘나‘보다도 힘이 세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셀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소망 때문에 현철이 파주를 빙빙돌고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제는.
이상한 소설도 많이 썼다. 멀리서 누군가를 지켜보기만 하는소설. 망가지는 누군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소설. 그러다가 같이뭉개져버리는 소설, 소설을 쓴다는 건 조금씩 시간을 유예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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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수리


아내는 또다시 집수리를 시작했다 같이 사는 동안 몇 번있었다 집을 아주 바꾸지는 않았다 제 살 집을 바꾸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를 바꾸고 싶은 모양이었다 불륜과는 다르다

삶은 감자 세 알


사무실 건물 환경원 아줌마가 옥상에 감자를 심어 길렀다고 오늘캤다고 뜨끈뜨끈한 주먹만 한 감자 세 알씩을 사무실마다 돌리며 귀한 거니 잡수어보시라고 했다 세 알을맛있게 다 먹었다 먹는 일이 제일로 귀하다는 걸 몸으로 알았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귀하다는말! 진종일 내가 귀했다

개구리 우는 밤


논농사 두어 마지기 밤새 물꼬 터두고 새벽에 나가보면그들먹한 논물, 그들먹한 논물로 밤새 울고 울던 개구리들도 예법을 챙긴다 가까이 다가가면 가만히 침묵으로 읍한다 拱手로 절한다 그 침묵의 물 떠다가 혼자 놔두면 다시밤새 울을까 그들먹한 논물, 비친 낮달, 슬픈 눈썹 새로 그리고 있다 택배로 부쳐드리니 놔두고 보시게나

감실 부처님


나를 獨對해주셨다 경주 남산 감실 부처님, 늦은 나의 귀가에도 저녁밥 새로 상 보아 고봉밥으로 허기를 채워주시던 어머니를 상봉했다 손톱 닳아 반달이셨다 늘 들에 나갈 때마다 눌러쓰시던 머릿수건이 좀 낡아 보였다 어머니 가신지 서른세 해 되던 날 겨우 새 타월 하나로 갈아드렸다

슬픈 공복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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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자연의 제 당길심이 무섭도록 크고 그 內奧의 세계에 흐르는 生命의 律呂가 주는 황홀은 더더욱 깊다는 것을 從心之年이 넘어서야 눈치채게 되었다. 이곳 生家 夕佳軒에 寓居를 정하고 나서 거기 기대고만 있는 나를 추스르다 보니 4년 터울의 내 시집이 2년 만에 나오게 되었다. 그만큼 편수가 늘어난 것이 사뭇 조심스럽다. 충실한 시의 일생이고자 하는 나의 생각이 잘 마무리될 수 있기를 늘 다짐하고있다. 이번에도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서둘러주신 책만드는집 김영재 시인의 배려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

己丑 한여름
夕佳軒에서
鄭鎮圭

되새 떼들의 하늘


오늘 석양 무렵 그곳으로 떼 지어 날으는 되새 떼들의하늘을 햇살 남은 쪽으로 몇 장 모사해두었네 밑그림으로 남기어두었네 그걸로 무사히 당도할 것 같네 이승과 저승을 드나드는 날개붓이여, 새들의 운필이여 붓 한 자루 겨우 얻었네 秘標하날 얻어두었네 한 하늘에 대한 여러 개의 질문과 응답을 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지덕지할 일인가 오늘 서쪽 하늘에 되새 떼들이 긋고 간 飛白이여, 되새 떼들의 書體여, 자유의 격식이여 몇 장 밑그림으로 모사해두었네 가슴팍에 바짝 당겨 넣은 새들의 발톱이 하늘 찢지 않으려고, 흠내지 않으려고 제 가슴 찢고 가는 그게 飛白이라네 하얀 피라네

박태기 꽃


충혈인지 어혈인지 그쪽으로 자꾸 깊게 물들고 있다 진자주다 한 번 되게 그대에게 부딪쳤을 뿐인데 온몸 다닥다닥 꽃 벌기 직전이다 어쩌려고 이러나 등짬을 당겨보지만돌아서지 않는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갈 때까지 갈 모양이다다닥다닥 서둔다 어느 문전이라는 걸 벌써 다 알고 있는눈치다 박태기 꽃 맺힌 걸 다닥다닥 바라다보며 이 봄이 위태위태하다 한 번 되게 살구나무가 부딪친 것 滿開로 본것이 엊그제인데 맘먹고 박태기 꽃 마지막을 서둔다 이 늦봄 꿈속의 꿈까지 꾸어 몸 밖의 몸을 보려 한다 박태기 꽃 진자주

비 오는 날


빗속에서 저 맨몸 빗줄기들 자연분만된 줄로만 알고 있었더니 빗줄기 속에서 비가 비로소 몸을 얻고 있음을 여기와 보았다 비 젖고 섰는 큰 느티나무를 비가 와서 만든 줄알았더니 느티나물 만나서 비가 비로소 느티나물 크게 적시게 되었음을 알았다 느티나무에게 잘 모시겠다고 큰절했다 이 늦봄 새벽, 사랑이 와서 초록 풀밭 아득히 적시는 빗소리를 귀 열고 있었더니 맨몸 적시고 있었더니 오래전에 있었던 초록 풀밭이 비로소 사랑을 몸 부리고 있음을 알고 큰절했다 노박이로 비 맞고 은하 건너온 칠석날 까치 두마리도 아침 뜨락에 와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두어 번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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