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느 시공간에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글과 마주치든 간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채 읽기를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 같다. 이 글을쓰고 있는 지금 내 앞에는 『세상의 발견』 가제본 책과 『달걀과 닭 한권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두 책을 번갈아 본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세상의 발견』 표지는 백지이며 『달걀과 닭』에는 어느덧 친근해진 클라리시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 그의 두 눈이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2020년대의 한국 독자인 나를 바라본다. 『달걀과 닭처럼 표지 전체가 작가 얼굴로 점령되어 있는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사진속 무표정이 너무나 심원해 보여서 책을 집어 들다 멈칫하게 되는 경험은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클라리시의 얼굴은 독서의 시간 동안 또다른 풍경처럼 머릿속 한편에 둥둥 떠 있다. 그의 초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강렬한 인상은 책의 감상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왔을 것이다.
내 얼굴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래전의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을 그의 시선은 50여 년의 생애 동안 어느 표면과 심층을 오가며 무엇을 식별하고 또 축조해왔을까. 클라리시의 소설에서 사건들의 시간은 문장의 나열을 통해 팽창된다. 부엌에 놓인 달걀을 바라보거나 거리에서 죽은 쥐의 시체를 밟거나 모르는 개를 묻어주거나 차창 밖으로
껌 씹는 장님을 목격하는 등, 일상적인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탈구된 장면들은 문장으로 분화되는 동안 더 넓은 시간성을 확보한다. 반면 결말은 단말마의 비명처럼 찾아온다. 이 급작스러운 끝남이 죽음의 형식과닮아 있다고 느껴지기에 나는 한 편 한 편의 소설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살덩어리처럼 여기게 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뜨거운 내장을 내 손으로 쥐는 일 같았다. 처음 읽으며 몸서리쳤던 기억이지금도 선명하다. 이러한 독서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거의 경악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이제는 인쇄물의 형태로만 마주할 수 있는 그의 두 눈이, 감정과 감각을 지닌 육체에 속해 있었을 때에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소설의 형태로 구성되고 형식화되지 않은, 아직 재료인 상태였을장면들을 그가 어떻게 다루고 간직해왔을지. 이 얼굴이 목소리로 내뱉은말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타자와 나누었던 대화들은 어떤 내용이었을지.
2단편 「버펄로」 낭독회에서 한 독자가 "이야기 전체가 마치 내장으로만들어진 것 같다"라는 후기를 전했다는 일화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클라리시의 소설이 내장과 같다면 『세상의 발견』은 피부에 가까운 글들의 모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표면인 것. 부드럽고 따뜻하고익숙하지만 그 속에 뼈와 내장과 정신을 품고 있는 것. 산문의 넓이를 누리며 멀리까지 뻗어나가는 일상적이고 경쾌한 문장들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라는 작가의 신비를 걷어내 폐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걷힌 자리에서 새로운 형식의 신비를 발견하게 한다. 가령 아래와같은 문장들.
나는 삶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느낀다. 봄에는 몇 시간이고 혼자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때로는 피를 흘릴 수도 있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 나는 내 피 안에서 봄을 느끼니까. 그래서 아프다. 봄은 내게 무언가를 준다. 봄은 나를 살게해준다. 나는 어느 봄에 죽을 것이다. 나를 찌르는 사랑과 약해진 심장으로.
각주에 따르면 남반구의 봄은 9월 말부터 12월 말까지이다. 클라리시는 1977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 단편 「버펄로」는 "그러나 봄이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봄이라는 계절의 폭력적일 만큼 강인한 생명력 앞에서 클라리시는 줄곧 경탄했던 것 같다. 어머니로서의 자신이 작가로서의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였으므로 만물이 탄생하는 봄이 자신의 소멸과 잘 어울리는 계절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대체 어떻게 "나는 어느 봄에 죽을 것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게는 단지 눈으로 보기 힘든 더섬세하고 어려운 현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문장처럼, 클라리시에게 스스로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섬세하고 어려운 현실이기에 어떠한 방식의 예감과 확신이 가능한 대상이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이렇게 무릎에 타자기를 올리고 글을 썼어요. 이사진은 연출된 것이기는 하지만요. 어머니는 네다섯 시쯤, 아주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글을 썼어요. 요즘에는 주로 컴퓨터를사용하니까 타자기 소리를 잘 모르실 텐데, 빗방울이 창문에부딪치는 것 같았어요. 몇 년 전에는 창문에 빗방울 부딪치는소리가 들리기에 엄마가 글을 쓰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도했죠.
이른 아침 일어나 타자기로 글을 쓰는 것은 클라리시의 일상이었다.「세상의 발견』에 수록된 글들 역시 같은 시간에 쓰였을 것이다. 동틀녘의 빛이 붉게 물들이는 그의 손등과 타자기의 네모난 자판들을 떠올려본다. 마치 타악기 연주처럼 이어지는 타자기의 규칙적인 소리들은 아침의공기를 흔들었을 것이다. 오래전 열 손가락의 부지런한 움직임을 통해적힌 포르투갈어 문장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지금 우리 곁에 책의 형태로 도착해 있다. 그의 죽음 이후 약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지구 반대편 작은 나라에서 열렬한 그의 독자들이 등장하게 될 것임을 클라리시는 예상하였을까. 발음도 구조도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미래의 사람들이 그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며, 그의 영혼을 이토록 환대할 것임을알았더라면 이에 대해 그는 어떤 문장을 적고 싶어 했을까.
클라리시의 글에서 포착되는 미지의 여러 양상 중 가장 불가해한 것은 쓰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힘과 용기였다.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로서의, 작가로서의 그 모든 정체성을 쇠약한 육체로 수렴시켜 문학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그의 쓰기에, 수십 년전 타자기를 두드리던 클라리시의 두 손에, 오늘 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의 움직임이 빚지고 있다.
『세상의 발견』을 읽는 동안 나는 독서보다 대화에 가까운 경험을 했다. 또한 작가로서 글을 쓰는 동안 가지게 되었던 여러 의문들에 대한 대부분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질문보다 먼저 쓰인 대답인셈이다. 내내 많은 위안을 받았다. 클라리시는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자라난 브라질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사회문제에 분노하며시위에 참여하였고 언제나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명 많은 이들의의심이 뒤따랐을 테지만 자신의 작품을 일종의 참여문학이라 여기기도했다. 주목받지 못하는 친구의 아름다운 글을 자신의 글 안으로 초대하였고, 파블로 네루다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몹시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기
도 했으며, 구걸하는 자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지갑을 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크리스마스이브마다 수면제를 먹고 48시간 동안 잠들어버린다 말하는 젊은 여성에게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를 레스토랑에서함께 보내자고 제안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매사에 좋은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클라리시의 일상은 추상적이며 난해하다고 치부되는 그의 문장들과 별개의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의 깊이와 넓이를 통렬하게 감각하는 동시에한 명의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프로 작가가 아닌 아마추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7년,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는 그에게 브라질 혹은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들과 교류하는지 묻는다. 클라리시는 그렇다고 답한다. 인터뷰어가 브라질 작가 중 요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누구인지 묻자 클라리시는 이러한 호명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대답을 거절한다. 재차 인상 깊은 작품을 말해달라 요구하자 그는 단호하게 다시 거절한다. 그의 배려는 그가 아끼는 대상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