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라고 메모했다.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였지만 젊은 사회학자의저서는 고등학생의 심성 구조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흔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했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생활하며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들 했다. 퇴행보다는조로(早老)가 나았다.
생각은 생각이고 시간은 시간이었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십오년은 더 일해야 했다.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이십오년이 남아 있었다. 따지자면 곽은 교무실에서는 젊은 축이었다. 대표전화와 가깝고 방문자에게 등을 보이는 자리, 도서전에서 받은 머그잔과 저녁 산책을 하다 구입한 스투키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면 힘이 빠졌다. 밀린 보직 업무를 시작하기 전, 의자에 몸을 묻고 수업을 돌아봤다.  - P115

연주하던 기타를 부수거나 관객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있는 록 밴드들의 음악을 한두 곡 이어폰으로 들었다. 오아시스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
라며 위악적으로 남긴 말은 재미있었다. 그걸 이렇게 바꿔서 속으로 읊기도 했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그러니까 엿같은 월급이나 내놔.‘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유용했다. 머그잔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 - P115

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아쉬운 월급이었지만 임금노동자 평균•수입에 비하면 넉넉했다. 법으로 고용을 보장받았고 실적의 압박이 없으며 냉난방이 원활한 공간에서 일했다. 자잘한 연수나 업무가 있긴 해도 방학은 방학이었다. 일 년에 두 달을 쉴 수 있는직업은 많지 않았다. 균형감각, 계급의식, 뭐라고 부르든 견지해야 할 미덕이 있다면 푸념은 자제해야 했다. 게다가 한국은 대다수의 국민이 십 년 이상 공교육을 받는 선진국이므로, 명절의 친척집이든 독서 모임이든 포털 댓글난이든 모두가 학교와 교사에대해 나쁜 기억 하나쯤은 있었다. 병원에 가봤다고 의사의 일을.
은행에 가봤다고 은행원의 일을 다 아는 건 아닐 텐데 다들 지나치게 비난한다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그만큼 지난 시대 교육이 남긴 상흔이 큰 탓일지도 몰랐다.  - P116

하지만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다‘
4월이 되자 완연히 따뜻해진 날씨에 꽃나무들이 만개했다. 고전읽기 교실은 2층이라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하얗고 부드러운꽃잎들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듯했다. 교실 안으로 고개를 돌리면 엎드려 자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다른 과목 문제집을 풀고있는 학생들이 한가득 보였다. 곽은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감사하려고 했다. 네다섯 명은 곽의 설명을 듣고 텍스트를 읽고 학습지를 쓰고 있었으며 이따금 웃어주기도 했다. 은재도 그중 하나였다. 철학이나 사회학전공을 고려하고 있다고, ‘수업 재미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고 정돈된 글씨체로 썼던 은재, 그렇다고 평가를 계산하며 요란하게 열심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단지 허리를 펴고 수업을 듣다가 종종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초연하게 앉아 있던 은재, 덕분에 창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았다고 농담을 건네며 나중에 악수라도 하고 싶었던 은재.
민원을 넣은 건 은재의 아버지였다. 은재가 마르크스를 읽고있다는 것이었다. 『자본론」은 수업에서 다루는 열한 권의 추천 도서 중 하나였다. - P125

부조리의 경험에 있어서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적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그 고통은 그것이 집단적인 것임을 의식하게 되고, 그 고통은 인간 모두가 겪는 모험이 된다. 이상함의 느낌에 사로잡힌 인간이 최초로 내딛는 진일보는 그러므로 이 이상함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느낀다는 사실과……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에서  - P143

애들 얘기 하지 말라고 싫다고 난.
나는 다시금 말했다. 정호는 내가 매일 학원에서 어떤 생각과 어떤 눈빛들을 마주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매번 나의 치부를 들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얼마나 하찮은 사람인지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눈빛과, 꼭꼭 숨겨둔 것이 무색하게 나의 지저분한 면모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듯한 표정들, 언젠가 나 스스로 순순히 그 치부를 보여줄 수밖에없는 날이 올 것 같은, 처형을 기다리는 염소의 마음을 정호가 알리 없었다. - P166

현철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는 데는 딱 일주일이 걸렸다. 정호의 말은 틀렸고, 현철의 말은 진짜였다. 현철은 시시하게 찾아왔지만 끈질기게 괴롭힐 준비가 된 사람 같았다. 현철은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현철이 찾아온 지 딱 일주일 되던 날, 현철은 증거의 일부를 정호에게 보냈다. 얻어맞은 사진과 의사의소견서도 삼 년 전에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진짜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게 불쑥불쑥 꺼내도 미울 만큼의 미움을, 나는 잘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미움은 어떤 것일까. 시시해 보일 만큼 자연스럽고 명이 긴 미움은 어떤 것일까. 현철은 그 이후부터 그림자처럼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정해진 입금일이 되었거나, 날짜가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나타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현철이 무섭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철이라면 분명 나에게 해를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현철은 그저 시시한 일상처럼 스며들었다. 그러나 정호는 달랐다. 정호는 현철과 비슷한 그림자만 보아도 소름 끼쳐했고, 그럴 때면 머리가 무거운 사람처럼 고개를 조금 떨구고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 P168

...... 모르겠네요. 그냥 매일 그 속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롭혔으니까. 아니.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저 새끼 전역하면 진짜다 끝이다. 생각하면서 버티고. 근데 진짜 끝이더라고요. 허무하게. 허무해서 더 화가 나더라고요. 사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생각도 해요. 근데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넘어가면 나는 다음번에 또 이렇게 넘어가겠구나, 하는 생각. 앞으로 계속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상상하니까 내 다음이 무서워지고, 내가 무서워지고. 무서워지니까 또 밉고...... 미치게 밉고, 이해 안 되겠지만 그래서 그랬어요. 전역하고 나서 매일 생각했어요. 목 조르는 생각, 칼로 찌르는 생각. 그런데 막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렇게 골라내다보니 이렇게 시시해진 것도 같고. 그땐 진짜 죽이고 싶었는데. 어떤 사람한테는 삼 년이 어저께 같아요. 그 생각에 묶여서 시간이 안가요. - P180

소설을 쓰면서 약한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싫었다. 소설도 사람도 전부 다 싫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안 쓰고 안 읽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울지도 않았다. 다 잊어버린 척 열심히 연기했다. 그러다가 한 번쯤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편에 품고서 살았으니까.
약하지만 약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싶었다. 「파주에 나오는 현철은 정호보다, 그리고 ‘나‘보다도 힘이 세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셀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소망 때문에 현철이 파주를 빙빙돌고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제는.
이상한 소설도 많이 썼다. 멀리서 누군가를 지켜보기만 하는소설. 망가지는 누군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소설. 그러다가 같이뭉개져버리는 소설, 소설을 쓴다는 건 조금씩 시간을 유예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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