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봄비 내린다


겨우내 꿰맨 마음의 솔기가 촘촘하다 冬安居를 끝낸 중들이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로 궁성대는 새벽, 봄비 내린다 연한 비, 비린내 난다 한 그루 산수유에서도 수런거리는 소리 노랗다 봄 春字 벌레 蟲字 그대로 준동蠢動이다 벌레들 우듬지 끝까지 따라 오르다 저런! 봄신명이 잘못 지폈나 보다 헛발 디뎌 제 몸 패대기친다 터진 속내가 벌써 초록色이다 새순들 과식하셨구나 몸이 무거우셨구나

껍질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 나온 나는 또 한번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 그렇게 나가서 저 언덕을 아득히 걸어가는 키 큰 내뒷모습을 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준비 중이다 확인 중이다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 내 껍질이 이다음 강원도 정선 어디쯤서 낡은 빨래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 쨍쨍한 날 보송보송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흔한 매미 껍질같이는 싫다그건 너무 낡은 슬픔이지 않느냐

마른 들깻단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늦가을


上等品으로만 온 마을이 가득 비었다 들앉을 자리가넘친다 태양초 고추 멍석이 빠알갛다 살림 차리자 빠알갛게 들어앉거라 바로 너인 줄 모를 리 없다

장마


비 듣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진종일 귀가 열리고 있다 안이 꽤 깊다 틈서리마다 젖어들어서 불어난 집의 부피와 무게들이 내 마음의 容量 위에 푸른곰팡이의 눈금을 하나씩 더 올려놓고 있다 슬픔이 살찐다 다친 다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감당키 어려운 대목이 이런 날엔 어김없이 응답을 해야 直性이 풀린다 내가 새고 있다 집이 새고 있다 그게 몸이다 새는 낮게 낮게 뒷산 허리를 날아가고 있다 비리게 속까지 젖어서 높게 뜨지 못한다 새는 어디를 다치셨는가 새도 새고 있다 둥지가 새고있다 슬픔이 새로 살찐다 한참 비안개 자옥하다 새어서 새어서 너에게서도 새어서 나는 여기까지 왔구나 다친 몸은 정직하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들장미"라는 말만 들어도 단번에 세상이 싱그러운 장미가 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내게는 가끔씩 들장미를 보내주는 친한 친구가 있다. 그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나를 숨 쉬게하고 살게 한다.
들장미는 시간이 갈수록 향이 더 진해지는 낯설고 섬세한 신비로움이 있다. 들장미는 노랗게 시들 때가 되어도 향이 강하고 달콤해서 헤시피의 달밤 향기를 떠오르게 한다. 결국 그 꽃이 시들면, 시들고 또 시들어버리면 대지의 요람에서 다시 태어나는 꽃처럼 향기가 나는데 나는 그것에 취해버린다. 꽃은 시들고, 보기 싫어지고, 색이 바래고 갈색을 띤다. 그렇지만 어떻게 버릴수 있겠는가? 죽었다고 해도 영혼은 살아있지 않을까? 나는 시든 들장미를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향기 진한 꽃잎을 따서 속옷서랍장에 뿌려놓는 것이다.
최근에 친구가 들장미를 보냈는데 꽃이 시들려던 차에 향기가 더 진해져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저렇게 사랑의 향기를 내뿜으며 죽고 싶구나. 살아 있는영혼을 발산하며 죽고 싶어."  - P170

사우다지*는 허기짐과 비슷하다. 사우다지는 당신이 그 사람의 현재를 음미할 때에만 지나간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현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당신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흡수하길 원한다. 어떤 존재가 완전한 결합을 위해 타인을 원하는 것은 삶에서 절박한 감정 중 하나다.



Saudade, 향수, 추억, 그리움, 외로움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감정. 사랑하지만 부재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우울하거나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정 상태, 종종 그리움의 대상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 P172

더는 글을 쓸 수 없다,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봤다. 그중에 덜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하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혹은 그저 중얼중얼 내뱉으려다 실패하고야 마는 벌어진 입을 보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그 입들이 설명하지 못한 것들을 말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문학적 행위들은 내게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글을 쓰지 못하는 건 어쩌면 구체적으로 나를 문학으로부터 구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어쨌든 문학 덕분에 그런 것이 생겼을 것이다. - P184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게 이 글을 쓰면서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곧 있으면 내 과거와 현재의 삶을 출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내 계획에 없던 것이다. 또 하나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쓰는 글이 정말 원하는 사람만 열어볼 수 있는책이 아니라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신문에 실린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다. 그렇지만 조금 더 깊고 내면적인 변화여서 글에도 반영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지 칼럼이나 기사를 쓴다고 글이 바뀐다면? 독자들이 원한다고 그저 더 ‘가벼워진다면? 재미있어진다면? 몇 분동안 읽을거리가 될 수 있다면? 또 하나, 나는 내 책 속에서 나와독자들이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기 이 신문에서는 독자들에게 그저 말을 건네는 것이며그들이 만족하면 나도 만족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만족하지 않는다. 후벵 브라가와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 P186

며칠 후에 그 젊은 여성은 다시 나를 만나러 왔고, 나는 그녀에게 로리바우 박사에게 책을 전해줬는지 물었다. 그녀는 책을 전해줬고, 그가 내 헌사에 대해 언급했다고 말했다. 나는 호기심에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클라리시는 남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면서 정작 자신이 존재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네요."
그렇습니다. 로리바우 박사님, 저는 존재해도 되는지를 겸허하게 묻습니다. 겸허하게 기쁨을, 은혜로운 행동을 애원하지요.
저는 조금 덜 고통받으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저를 사랑과 존중을 받아 마땅한인간으로 봐달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삶의 축복을 원합니다. - P199

내가 괜히 길을 찾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힘들게 길을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감히 길에 대해 말할 수없기 때문에 오늘처럼 열기에 들떠 격렬하게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 나의 길을 찾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길을 원했지만, 이제는 맹렬하게 확실한 걸음으로 걷는 방식을 찾는 데 매달린다. 그렇지만 시원한 그늘과 나무 사이로 빛이 반사되는 오솔길, 내가 마침내 진짜 내가 되는 그 오솔길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 길은 내가 아니라는것이다. 그것은 타인, 다른 사람들이다. 내가 타인을 충만하게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위험을 벗어나며, 그곳이 나의 휴식처라고느낄 것이다. - P203

언젠가 글쓰기는 저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왜 진심을 담아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면, 글쓰기는 저주이긴 하나 구원하는 저주다.
내가 신문에 기고하는 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나소설로 변형될 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신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당신을 고통스러운 악취미로 끌어들이되 대체할 수 있는 게아무것도 없으므로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저주이며 구원이다. - P222

글쓰기는 붙들린 영혼을 구하고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사람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를 구하는데, 이것은 글을 쓰지 않는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고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재현하는 일이며 단지 모호하고 답답하게 남아 있는 감정들을 깊이 느껴보는 일이다. 글쓰기는 축복받지 못한 인생을 축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무언가‘가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순간에만 글을 쓸 수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하늘의 뜻에 맡긴다. 진정한 글쓰기에 이르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책을 쓰면서 겪었던 고통이 지금 아련하게 기억난다. - P222

가장 최악은 갑자기 모든 것에 지치는 것이다. 풍족해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가져서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것 같다. 비틀스에도 지치고 다른 이들에게도 지친다. 아주 힘겹게 얻은 나의내면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 지쳐서 차라리 미움이 나을 것 같다. 이 풍족한 느낌으로부터 ㅡ이것은 풍족함인가, 혹은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ㅡ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분노일 것이다.
애정을 품은 분노 같은 것이 아니다. 단순하고 폭력적인 분노다. 그것은 거칠수록 더 좋다.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때문에 생긴 분노다.  - P223

또 똑똑한 사람들, 그러니까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분노이며 누보시네마 때문에 생긴 분노이기도 하다. 안 될 것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다른 영화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몇몇 사람에게 느끼는 애착 때문에 생긴 분노이기도 하다, 마치 나에 대한 애착이 없는 듯이. 성공 때문에 생긴 분노일까? 성공은 실수이자 거짓 현실이다. 분노가 내 삶을 구했다. 분노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브라질에서 매일 기아로 아이들이 죽어간다고 말하는 최근 신문 기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분노는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가장 깊은 저항일까? 누군가가 되는 일은 나를 피로하 - P223

게 한다. 나는 이토록 많은 사랑을 느끼는 것에 몹시 분노한다. 산다는 것에 분노하며 며칠을 산다. 왜냐하면 분노는 내게 활기를 불어넣으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경계심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며 필요한 결핍이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원할 것이다. 모든 것을!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얻는 일은 얼마나 좋은가. 소유하기 이전의 순간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쉽게 가져서는안 된다. 왜냐하면 그 허울뿐인 용이함은 우리를 지치게 하니까. 그렇다면 쉽게 쓰는 글도? 가슴 깊은 곳으로 글을 썼던 내가 지금은 왜 손가락 끝으로 쓰고 있는가? 나도 안다, 결핍을 원하는것은 죄악이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결핍은 이런 유의 풍족함보다는 충만에 훨씬 더 가깝다. 나는 그저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잠을 잘 것이다. 오늘의 내 세상을 견딜 수 없으니까. 불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안녕, 영원히 안녕, 다음 주 토요일까지 안녕. 내게 대답하지 말기를, 인간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작별 인사를 하는 내 목소리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목소리가 분노를더욱 돋우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축복받는 하나의 분노가 있다. 필요한 사람들의 분노다.  - P224

1968년 10월 5일


나는 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봄이 완연한 지금, 나는 봄이 무엇인지 안다는 말의 덧없음을 잘알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너무 겸손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나친 감사에서 오는 겸손함으로, 이는 어린애 같은 ‘나‘와 어린애 같은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순간, 비 오는 봄이 올 때 느껴지는 기쁨에 내가 너무 겸손하다는 걸 깨닫는 이런 순간이면 나는 내게 속한 것도 남에게 속한 것도 모두 손에 넣는다. - P236

봄이 뭔지 안다. 공기에 꽃가루 향이 퍼져 있으니까. 어쩌면 내고유의 꽃가루일 수도 있다. 작은 새가 노래할 때면 느닷없이 소틈이 돋고, 나도 모르게 삶을 환원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살아있으니까. 가슴에 사무치는, 맑은, 죽음이 드리운 봄은 내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나는 해마다 봄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도 이것이 감각의 혼란임을 잘 알지만, 머리가 어지러우면어떤가?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반짝이는 봄비를 맞는다. 나는 나의 존재를, 타인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고, 그들이 없다면 나는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최소한의 것을 위해 기도했고, 받지 못했음에도 위대한 타인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나는 삶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느낀다. 봄에는 몇 시간이고 혼지자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때로는 피를 흘릴 수도 있다. 그 - P236

러나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 나는 내 피 안에서 봄을 느끼니까. 그래서 아프다. 봄은 내게 무언가를 준다. 봄은 나를 살게 해준다. 나는 어느 봄에 죽을 것이다. 나를 찌르는 사랑과 약해진 심장으로 - P237

지식인?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지식인이라 부를 때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겸손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덜 상처받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지성을 이용하는 것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직관과 본능을이용한다. 지식인이 되는 것은 문화를 알아야 하는데 나는 너무보잘것없는 독자이며, 이곳에서 부끄러움 없이 고백하자면, 진정한 문화를 잘 모른다. 인류 역사상 중요하다고 하는 작품도 읽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매우 적게 읽는다. 열세 살에서 열다섯살 때까지는 많이 읽었다. 탐욕스럽게 손에 잡히는 대로. 그러고나서는 누구에게도 지도받은 적 없이 가끔씩 읽었다. 게다가 고백하자면 이번만큼은 부끄럽다 몇 년 동안 추리 소설만 읽었다. 요즘은 글 쓰는 게 자주 귀찮지만,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 P253

귀찮을 때도 있다.
나는 문학인도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직업‘이나 ‘커리어‘가바뀌지 않았으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것이 올 때, 내가정말 원할 때에만 쓴다. 나는 아마추어 작가일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때때로 지각하는 심장을 가진사람이고, 어리석은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단어로 말하는사람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의 삶에 대해 해야 할 말을 문장으로 완성했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살짝 뛰는 사람이다. - P253

내가 되고 싶었던 것

내게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투사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타인의 안위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 그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원하던 것이었다. 왜 운명은내 안에 있던 투사의 기질을 발전시키지 않고 내가 이미 쓴 그 글들을 쓰도록 이끌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 내 가족은 장난으로나를 "동물 수호자"라고 불렀다. 누군가를 비난하면 내가 곧장그를 변호했으니까. 나는 이른바 소외 계층이 당하는 엄청난 불의 앞에서 난감한 마음으로 살아갈 만큼 사회적 비극을 강렬하게 느꼈다. 헤시피에서 살 때 일요일에는 빈민촌에서 사는 가정부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것이 나를 이런 일이 계속되게 둘 수 없다고 다짐하게 했다. 나는 행동하고 싶었다. 열두 살 때까지 살았던 헤시피에서 나는 종종 거리에서 사회적 비 - P253

극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중을 봤다. 나는 온몸을 떨면서 언젠가 이 일을, 그러니까 타인의 권리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토록 일찍 무엇이 되었는가? 나는 결국 깊이 느끼는 것을 찾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단어를 쓰는 사람이 됐다.
보잘것없다. 매우 보잘것없다. - P2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곡선은 모양 때문에 우묵한 곡선 hollow curve 이라고 불리며, 특히 이 우묵한 곡선에는 이름이 있다. 이것은 윌리스의 우묵한 곡선Willis‘s hollow curve이다. 이름이 따로 있는 이유는 이 문제가 거의 한 세기 가깝게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논의한 이들은 인류학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계속 속들 속에 종들을 이렇게 배치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전문 분류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왜 자꾸만 이렇게 하는 것이며, 민속 분류학을 하는 일반 사람들도 왜 똑같이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해줄 것은 움벨트이다. 움벨트는 우리에게 종들이 매우 특정한 방식으로, 상당히 윌리스의 우묵한 곡선을 닮은 방식으로 속들을 채우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가 그런 그래프를 본 적이있든 없든 말이다. 그리고 분류학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각이 알려주는 것에 좌우되는 움벨트의 포로들이다. - P208

인간의 행동은 유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리가 생명의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동안 우리의 움벨트는 근본적인 면에서 변함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움벨트는 우리 존재의 확실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움벨트를 무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움벨트에 따라 사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들어본 적도 없는 규칙을 따르는 일일망정 침대에서 굴러나오는 것만큼이나 쉽다. 뉴기니의 수렵인부터 마야의 농부를 거쳐 독일의 분류학자까지, 이 시각이 반투어나 표준 중국어로 표현되든, 브라질의 마샤칼리어 혹은 라틴어 학명으로 표현되든 모든 사람이 심층적인 면에서는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생명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 P209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이건 대단히 장엄한 일이다. 그토록 분명하고 명백하고 그토록 사랑받는 어떤 것(자연 질서 안에서 분명히 구별되는 수많은 생명 형태들과 그것들이 거주하는 움벨트)을 골라내 거기에 손을 대는, 아니면 적어도 그 근처에 손가락 끝을 갖다 대는 일 말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것이 이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정신, 우리 뇌의 어두운 모퉁이들을 탐험하는 그 남자들과 여자들이 해낸 일로 보인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이 연구자들이 움벨트에 손상을 입은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정말로 움벨트가 지닌 가장 심층적이고도 심오한 중요성이 무엇인지 밝혀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작위적 현실로부터 질서 정연한 움벨트를 뽑아낼 수 있도록 생물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뇌 영역을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이 분류학자들에게 그리고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낸 것이다. - P229

우리가 매일 움벨트의 렌즈를 통해 생명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나면 얼마 뒤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눈 닿는 모든 곳에서 움벨트가 미치는 효과와 힘과 영향이 보이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 보편적인 생명의 비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점차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나는 꼭 움벨트에 사로잡힌 여자 같았다. 매일같이 나는 책을 읽다가 혹은 장을 보다가 문득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야! 저기 그게 또 있네! 또 움벨트잖아!" 다음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메릴을 쿡쿡 찌르며 "당신 저것 좀 봐! 저것도 움벨트야!" 하고 말했다. 일부러 움벨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조차 (어쩌면 그럴 때특히 더), 나는 움벨트를 발견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움벨트를 가장 활발하게 가장 생동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들이 바로 아이들,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경이로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움벨트의 힘이 작동하는 모습을 목격하려고 뉴기니의 야생으로탐험을 떠나거나 지도에도 없는 멕시코 고원지대로 트레킹 여행을떠날 필요는 없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모습을 볼 수있다.  - P234

그러니까 움벨트는 자연탐구가나 분류학자가 생물의 질서를 이해하는 일만 돕는 것이 아니다. 움벨트는 우리 모두에게 강력하며 탁원한 쓸모를 지닌, 절대적으로 필요한 안내자이며, 그것이 없다면 낯설고 불확실해질 세계에서 우리가 현실에 굳건히 발붙이게 해주는닻이다. 아이들은 이를 알고 있다. 심지어 아기들도 이를 잘 알아서, 기저귀를 차고 앉은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도 생명 세계의 질서를 가능한 한 잘, 가능한 한 신속히 파악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도 모두 한때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 다 잊어버리고말았다. 움벨트를 갖는다는 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안다는 것이고, 주변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류학자들이 움벨트가 주는 비전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리는것도, 우리가 우리 움벨트의 비전을 그토록 필사적으로 되찾고자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2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글은 사랑의 고백이다. 나는 포르투갈어를 사랑한다. 쉽지 않은 언어다. 다루기 어렵다. 사유로 깊이 다루지 않으면 그 언어는 섬세함이 결여되거나 때로는 무분별하게 감정과 경계, 그리고 사랑의 언어로 바꾸려고 하는 이들에게 진짜 발길질로 대응하기도 한다. 포르투갈어는 글 쓰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도전이다. 사물과 사람에게서 피상성이라는 첫 꺼풀을 벗겨내며 쓰는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포르투갈어는 때때로 더 복잡한 생각 앞에서 반응한다. 또 때로는 문장의 예측 불가능을 염려한다. 나는 그 언어를 다루는 게좋다-말에 올라타 고삐를 잡고 천천히 달리거나 질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포르투갈어가 최대한 내 손에 당도하길 바란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는 열망이다. 카몽이스*, 그리고 다른 중요한 시인들도 이미 완성된 언어의 유산을 영원히 남겨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우리는 모두 "생각의 무덤"에 생명을불어넣는 무언가를 만든다. - P160

우리는 그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나는 심화되지 않은 언어에 도전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려받은 것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만약 말하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한다면, 누군가 내게 어떤 언어를 갖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나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언어인 영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어 장애가 없고 글을 쓸 줄 알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분명한 포르투갈어로 쓰는 것이다. 나는 포르투갈어에 순결하고 순수하게 접근하기 위해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 P161

내가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생을 바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게 세 가지 있다. 나는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해, 내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태어났다. "타인을 사랑하기"는 범위가 아주 광대한데,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그 세 가지 일은 그것들을 인정하기에 너무 짧은 내 삶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없다. 내 삶에 결정적인 순간을 단 1분도 허비할 수 없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는 유일한 개인적 구원이다. 사랑을 주고 또 때로는 그 대가로 사랑을 받는다면 아무도 길을 잃지않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말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를 열심히 유혹하는 여러 가 - P161

지 사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사명을 좇아왔다. 어쩌면 글쓰기를 위한 배움이란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의 고유한 삶인 데 반해 다른 일은 오랜견습 기간이 필요해서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공부할 줄 모르는것일 수도 있다. 사실 글쓰기를 위한 유일한 공부는 글을 쓰는것이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언젠가 나만의 언어를 갖기 위해 연습해왔다. 그런데도 매번 글을 쓰려고 하면 마치 처음 같았다.나의 모든 책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데뷔작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가 완전히 새로워지는 이 능력을 나는 삶과 글이라고 부른다. - P162

내 아들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탄생이 우연의 결실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가 되기를 원했다. 내 두 아들은 나의 의지로 태어났다. 그 두 남자아이는 여기 내 곁에 있다. 나는 그 아이들이자랑스럽다. 나는 그 아이들 안에서 소생한다. 나는 그 아이들의고통과 불안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준다. 내가 어머니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였을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후손이 있고 그들을 위해 날마다 내이름을 준비한다. 나는 그들이 언젠가 비행을 위해 날개를 펼칠 것을 아는데, 그러면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숙명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아이들을 키우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키우니까. 혼자가 되면 나는 모든 여자의 운명을 따를 것이다.
나의 사랑은 늘 남아돈다. 글을 쓰는 일은 엄청나게 강렬한 일이지만 그것은 나를 배신하거나 버릴 수도 있다. 언젠가 내 몫의 - P162

글을 썼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고, 멈추는 것 또한 배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글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장담할수 없다.
반면에 사랑에 관해서라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일은 끝나지 않는다. 마치 세상이 나를 기다려준 것과 같다. 나는 나를 기다리는 것을 만나러 갈 것이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신에게 바란다. 늘 지금 이 순간을 살기를, 착각일지라도, 미래의 무언가를 가질 수 있기를.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시간이 짧으니 서둘러야 하겠지만, 나는 인생이 영원할 것처럼 산다. 그러면 죽음이 반짝이는 무언가의 피날레가 될 테니까. 죽는 것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행위가 될 것이다. 나는 죽는 게 두렵다. 어떤 모호함, 어떤 뿌연 길이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삶과 죽음 모두를 강조하며 죽고싶다. - P163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죽을 때 내 곁에서 손을 잡아줄 한사람을 갖는 것. 그렇다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을 때 두려움없이 배웅받을 것이다. 나는 윤회가 있기를 바란다. 죽은 후에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사람에게 살아 있는 내 영혼을 주고 싶다. 그렇지만 신중해지고 싶다. 윤회가 정말 존재한다면 현재 내가살아가는 삶은 완전히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내 육체에 영혼이 주어진 것일 뿐. 나는 언제까지나 다시 태어나고 싶다. 다음 생에는 평범한 독자로서 내 책을 흥미롭게 읽을 것이다. 그 환생에서나는 그 책이 내가 쓴 글인 줄 모를 것이다. - P163

경고와 신호가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직감처럼 찾아올까? 책을 펼치는 순간 찾아올까? 내가 음악을 들을 때 찾아올까?
내가 아는 가장 외로운 일 중 하나는 예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 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족의 노래를 짓는 데는 아흔여섯 가지 방법이 있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옳거니!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1885-19182

나는 생명에 대해 인류가 공유하는 비전인 움벨트 이야기를 우연히알게 됐다. 그런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매일같이 인간종 특유의 감각, 태고부터 내려오는 자연 질서에 대한 인간의 비전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우리의 고유한 감각에 딱 맞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매우 특유한 인식을 품고 살고 있으리라는생각을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연히 움벨트라는 개념을접했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은, 과학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생명의세계에 질서와 이름을 짓는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것뿐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동안 나는 정말로 모든 인류가 생명의세계를 바라보는 한 가지 방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종족들의 왕왕 이국적이고 괴상한 분류 속에서 바로 그 공통된 지각의 가장 충만한 표현들을 보았다. 그리고 진화분류학자들(과학사에서그들이 겪은 안쓰러운 사정에 관해 내가 더 배울 일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결 - P171

로 예상하지 못했던 바로 그들이 자기 분야를 거의 파괴해버린 이유를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가 바로 그 움벨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달리는 설명할 수 없었던 그들의 행동을 움벨트의 존재가, 그리고 움벨트에 대한 그들의 끈덕진 충성이 해명해주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은, 움벨트가 진화분류학자들의 평판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한 줄기 희망을 비춰준다는것이었다. 이 움벨트라는 경이로움을 되찾는 것은 우리가 가늠할 수있는 정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죽어가고 있는 생명의 세계(국제연합이 내놓은 최근의 한 추정치에 따르면 한 시간마다 약 3개의 종이 사라•지고 있으며, 연간 총계는 18,000~55,000종에 이른다)와 우리 사이의 점점 더 심해지는 단절에서 우리를 구해줄 마지막 최선의 희망이다. - P172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처음에 내가 찾고 있던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생명의 세계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방식, 자기 주변 생물들의 이름을 짓고 체계화하고 개념화하는 방식에 관해 기존에 어떤 사실들이 알려져 있는지 알아보고싶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다른 종족들이 네발 달린 동물이나 숲속의꽃들을 어떻게 분류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도 확신할 수없었다. 게다가 내가 그 일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리확실한 생각이 없었다. 고백하자면 어떤 면에서 그 전체 과정은 뚜렷이 정의된 탐구라기보다는 종잡을 수 없이 떠돌아다니는 탐닉에 훨씬 더 가까웠다. 나는 오래된 책들과 옛날의 과학저널들을 들쑤시고다녔고, 이상한 것들, 잊힌 것들, 한 번도 제대로 알려진 적 없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어둡고 먼지 쌓인 도서관들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게 좋았다. 괴상한 동물과 이국적인 식물, 그리고 그보다 더 기이 - P172

해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들에 관한 글을 읽을 핑곗거리가 생긴 것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그 일에 착수했다.


괴상한 분류법과 이름들을, 말하자면 ‘잘못된 분류‘들을 보게 될거라 예상했건만 곧바로 내가 예상한 모든 것을 한참 넘어서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 즐거운 괴상함이었다. 사실 너무나 많은 것이 이상해서 인류의 대부분이 생명의 세계에 관해 한 말은 내가보았거나 알았던 생명의 세계와는 우주 하나만큼이나 동떨어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남서부 사막지대에 사는 파파고 인디언은생물을 "생각하는 것",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나는 것", "가시가 있는 것" 등 놀랍도록 특이한 범주들로 분류한다고 한다. 식물계 안에꽃을 피우는 다양한 식물들이 있고 그 안에 다시 장미와 해바라기 등이 들어가는 범주를 만들었던 린나이우스가 이들의 분류를 알았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어떤 종류의 세계관, 어떤 종류의 삶의 방식이어야 이렇게 이상한 범주들을 이해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걸까? 왜 모든 생각하는 것들, 혹은 모든 가시 있는 것들을 한 부류로 모아놓은 것일까? - P173

인류학 기록들을 뒤지며 돌아다니던 나는 마침내 1960년대에시작된 다음 연구들 앞에 이르렀다. 1960년대는 상황이 겉보기처럼그렇게 불일치와 바벨 같은 난맥상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몇몇연구자들이 깨닫기 시작한 시기였다. 여러 민족 간 생명 분류법과 명명법에서 나타나는 다름에 초점을 맞추며 수년을 보낸 끝에 마침내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과학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때는 바야흐로 민권과 사회적 해방과 더 민주적인 사유의 시대였다. 오랫동안 억압받아온 이들(여자, 그리고 연구 대상이 된 원주민을 포함해어두운 피부색을 지닌 모든 부류의 사람)이 조금은 더 존중받기 시작한때였다. 세계 각지의 야생에서 살아가는 야만인들을 그들과 함께 일하는 인류학자들이 조금 더 인간답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 P182

학계 자체에서도 경이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인간의 정신(겉으로 아무리 문명화되어 보이건 야만적으로 보이건 모든 인간의 정신)에는 인간의언어에 대한 보편문법이 존재한다는 노엄 촘스키의 가설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들끓는 변화의 한가운데서 인류학자들의 마음에는뒤죽박죽인 민속 분류학에서 보이는 것이 차이만은 아니라는, 우리모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통일시키는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가능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사용되는 이름, 묘사된 생물들, 갖 - P182

취진 질서에는 엄청난 다양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또한 일부 인류학자들은 생명 세계의 질서 짓기와 이름 짓기에서 뉴기니부터 뉴욕까중국부터 칠레까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뿌리 깊고 심오하고 근본적인 유사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인류학자들이 그 정신 없는혼란 속에서 무엇이든 발견했다는 것만도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걸 해냈다. 지구 위 생명의 질서에 대한 인류의 비전이세계 각지에서 표현된 양상들을, 여태껏 보아온 인간의 움벨트에 대한 것 중 가장 풍부한 표현과 가장 완전한 그림을 찾아낸 것이다.
민속 분류학에서 인류학자들이 알아챈 가장 놀라운 일치 중 하나는 이 민속 분류학 저 민속 분류학 할 것 없이 어디서나 동일한 분류군들이 계속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눈치 못 채고 지나치기 쉽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의 집단이든 한결같이 ‘물고기‘라는 분류군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기 마련이다. 이건 너무나 기본적이고 뻔한 일로 보여서 (사실상 필연적인 일로 보인다) 처음에는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 P183

오히려 물고기를 가리키는 수많은 단어들에 관심을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몇 가지만 열거하자면 언어에 따라 물고기는 푸아송 poisson부터 바이vai, 피시fish, 아젠a-jen, 퓨스pyus, 마마야크mamayak, 이이yi, 후후huhu, 사카나sakana 등 다양하게 불린다. 하지만이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길을 잃으면 진짜 요점을 놓치게 된다. 바로 모든 언어에 실제로 물고기를 가리키는 이름이 존재한다는 요점말이다. 보편성은 구체적인 이름들이 아니라, 물에 젖어 있고 비늘이있으며 헤엄을 치는 그 존재들을 알아보았다는 데 있었다. ‘물고기‘라는 집단은 다시 또다시, 그리고 또다시 체계화되고 분류되고 목격되고 인지되었다. - P183

사람들이 한결같이 분류하고 명명하는 것만 있는게 아니라 한결같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특정 생물의 형태를 항상 알아보는 것처럼 어떤 생물 집단은 항상 알아보지 못한다. 항상 부재하는 것들, 다시 말해 우리 움벨트의 레이더 스크린에 한결같이 잡히지 않는 것들에는 결정적인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우리 기준에서 아주 작은 것들에게는 마음을 잘 주지 않는다. 몇 밀리미터 길이의 기생벌,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 목숨을 빼앗는바이러스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도 생물에 속하며 잠재적으로인간의 생명에 극도로 중요하지만, 민속 분류학에서는 공통적으로찾아볼 수 없다. 이 외에도 우리가 한결같이 알아보지 못하는 생물이많다. 각각을 구별해주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인간의 감각에는 너무 - P185

왜일까?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움벨트, 우리 인간이 매일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감지한 세계의 풍경에서 높이 솟아 불타고 있는 봉화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형적인 인간의 눈으로 그 세계를바라볼 때, 키 작은 관목들은 높이 솟은 나무들과 상당히 다른 존재로 우리 눈에 그냥 확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새들을 알아보지못하는 일이 결코 없고 박테리아를 알아보는 일도 결코 없다. 우리는꽃을 보지만 벌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하게 보이는 꽃들의자외선 무늬는 결코 보지 못한다. 전형적인 인간의 코로 우리는 장미의 달콤한 향기는 맡지만 개들이 즉각 감지할 수 있는 다른 많은 냄새는 맡지 못한다. 그리고 이건 다른 모든 종도 마찬가지다. 모든 종류의 감각에 대해 서로 다르고 각자 고유한 움벨트가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종의 움벨트가 그러하듯 우리의 움벨트는 매우 특유한장소다.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가 날아다니는 움벨트, 우리의 감각에특화된 움벨트, 우리가 감지할 수 있고 우리가 알아차리는 경향이 있으며, 봉화처럼 활활 타오르는 움벨트. - P187

인간의 행동은 유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리가 생명의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동안 우리의 움벨트는 근본적인 면에서 변함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움벨트는 우리 존재의 확실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움벨트를 무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움벨트에 따라 사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들어본 적도 없는규칙을 따르는 일일망정 침대에서 굴러나오는 것만큼이나 쉽다. 뉴기니의 수렵인부터 마야의 농부를 거쳐 독일의 분류학자까지, 이 시각이 반투어나 표준 중국어로 표현되든, 브라질의 마샤칼리어 혹은라틴어 학명으로 표현되든 모든 사람이 심층적인 면에서는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생명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이 비전은 사람들에게 다윈이 보았던 분류군 속의 분류군, 린나이우스가 찾던 자연의 질서를 포착하게 하고 현실로 인지하지 않을수 없게 한다. 또한 자기네 지역의 산과 계곡을 모두 다 탐험한 뒤 지구의 나머지 지역에 사는 생물을 탐사하려는 열망을 품은 박물학자들 때문에 수백 척의 범선이 출항하게 한다. 인간의 움벨트는 심지어 - P209

인간의 깊은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분류학이라는 온전한 과학 분야하나를 탄생시켰다. 이 과학의 가장 사랑받는 전통은 단순히 학문적유산만도 아니요, 이 분야의 아버지인 린나이우스가 발명한 규칙들과 체계들만도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깊은 무엇이며, 인류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애호와 전통이다.
나는 인류학의 세계에 뛰어들어 보고서야 이 강력하고 보편적인 생명의 비전이 또렷하게 그려진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움벨트가 지닌 진짜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이한 심리학의세계로 풍덩 뛰어들어야만 할 터였다. 그 세계에서 자신의 움벨트를완전히 도둑맞은 희한한 사람들에 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떤 비극적인 진실도 보게 된다. 이 사람들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그렇겠지만, 움벨트를 잃어버림으로써 정말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 P210

새로운 별 하나가, 아니 그보다는 태양이, 정신의 지평선 위로 떠올랐다.
이 태양은 과학적 확실성의 손가락으로 모든 정신적 능력을 하나씩 짚어주고.
그 무엇도 어둠이나 의혹 속에 남겨두지 않으며,
다만 진정한 정신의 과학을 발달시킬 뿐이다.

O. S.와 L. N. 파울러「삽화가 들어간 골상학 및 생리학 자습서

우리의 움벨트를 곧바로 만들어내는 것일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사람이 토마토를 보거나 ‘검치호랑이saber-tooth tiger"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우리 측두엽에서는 뭔가 특별하고 뚜렷하며 정형화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상측두고랑의허공을 가로지르며 신호들이 발사되거나, 외측방추이랑의 비탈 위로뇌우가 쏟아져 내리거나, 우리 두개골 속 커다랗고 물렁물렁한 호두처럼 생긴 덩어리 안 특정 협곡 안에서 또 다른 신경 네트워킹이 복잡한 조합을 일으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J. B. R. 이낙타를 보면서도 낙타를 알아보지 못할 때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그 활동이다. 그의 좌뇌 측두엽이 도와주지 않으면, 코끝이 통통하고 목이 뱀처럼 길고 구불구불하며, 몸은 털로 뒤덮이고 등에는 불룩한 혹이 있는 이 동물이 ‘낙타‘라는 것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 P228

한때 자연 다큐멘터리를 좋아했던 P. S.가 왜가리를 바라보며 그것이물고기라고 확신할 때도 비슷하게 뭔가 잘못된 발화가 일어나거나발생해야 할 어떤 정신적 번개가 전혀 일어나지 않으며, 이것이 병든 그의 뇌로 하여금 깃털로 덮이고 키가 크며 부리가 큰 그 새가 미끌거리고 비늘이 있으며 물속에서 숨을 쉬는 동물들만으로 가득 찼어야 할 머릿속 범주에 속한다고 믿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개한 마리를 보고서 그것이 바로 개임을 즉각 알아볼 때, 고양이나 비슷한 늑대나 전혀 다른 독수리가 아니라 바로 한 마리 개라는 걸 알아볼 때, 아마도 우리의 방추이랑과 상측두고랑 어디에선가 불꽃이튈 것이다. 또 날개를 펄럭임에 따라 무지갯빛으로 색깔이 변하는 아름다운 나비를 경이로움에 차 바라볼 때도 윙 하는 소리를 내며 기어가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 P228

그러니까 거기가 그 결정적인 회색질, 당신의 생명에 대한 비전, 당신의 움벨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소용돌이와 똬리가 자리한 곳인 듯하다. 당신의 왼쪽 관자놀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가 만약 그곳이 손상된다면 당신은 거위를 보고 당황하고 단풍나무를 보며 완전히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 결정적인 회색질이 멀쩡하고 건강하게 남아 있다면 당신은 움벨트가 지닌 온전하고 완전한 힘을 누릴 것이다. - P229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이건 대단히 장엄한 일이다. 그토록 분명하고 명백하고 그토록 사랑받는 어떤 것(자연 질서 안에서 분명히 구별되는 수많은 생명 형태들과 그것들이 거주하는 움벨트)을 골라내 거기에 손을 대는, 아니면 적어도 그 근처에 손가락 끝을 갖다 대는 일 말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것이 이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정신, 우리 뇌의 어두운 모퉁이들을 탐험하는 그 남자들과 여자들이 해낸 일로 보인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이 연구자들이 움벨트에 손상을 입은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정말로 움벨트가 지닌 가장 심층적이고도 심오한 중요성이 무엇인지 밝혀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작위적 현실로부터 질서 정연한 움벨트를 뽑아낼 수 있도록 생물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뇌 영역을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이 분류학자들에게 그리고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낸 것이다. - P2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