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녀는 날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하게, 붉은
하늘의 상처처럼,
그녀를 죽인 기관차처럼ㅡ
그 웅장한 무덤, 밀랍의 집 위를 나는
붉은 혜성처럼.


웅장한 무덤. 여성들이 갇혀 있는 역사의 무덤을 말하는 걸까? 곤충학 교수(『뒁벌과 그들의 생태』의 저자)였던 그녀의 죽은 아버지가 어쩐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상상 속웅장한 무덤일까? 그녀가 여덟 살 때 죽은 아버지인데도? 밀랍의 집은 또 어떤가. 실제 벌집을 가리키는 것에 더해, <레이디스홈 저널>의 지면 속에서 영원히 손짓하며 유혹하는 1950년대의 가정생활이라는 가짜 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혹은 코트그린 그 자체, 남편이 런던에서 자신의 정부와 문우들과신나게 나다니던 동안 그녀가 두 아이와 함께 생매장당했던 그영국 역사의 환상이라는 바로 그곳일까? - P119

딸이 죽고 나서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을 때 실비아 플라스의 어머니 오럴리아 쇼버 플라스는 실비아가 스미스대학교에입학했을 때부터 가족들과 주고받은 다정한 편지들을 신중하게선별해 모음집 형태로 엮었다. 「아빠」의 작가가 실은 사후에 발표된 그녀의 시들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편지 모음집이「실비아 플라스가 집으로 보낸 편지』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을때, 뒤표지에는 강렬하고도 호의적인 단평이 실렸다. 플라스와동시대인이었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쓴 세 문장짜리 글이었다.
"이제 젊은 여성 작가들은 마침내 실비아 플라스 내면에 있는명백한 자기 파괴자와의 동일시를 멈출 수 있게 되었으며, 무시할 수 없던 힘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편지들을 통해 만나게 되는 인물은 생존자(작가가 된다는 것은 규율, 지칠 줄 모르는 헌신, 고된 작업에 대한 열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생존자)다. 모든 이야기가 다 담긴 것은 아니지만 여기 이 편지들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은 신화적인 여성 작가가 아니라 실체를 지닌 여성 작가다." - P126

말하자면 시의 주제는 결혼을 통한 가정생활과여기에서 생기는 불만들, 혹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며느리가 된 여자들의 운명이다. 나이 많은 여성의 정신이 "단순한 사실의/칼날 아래 조각조각" 바스러지는 동안에도, 그녀의 반항적인 며느리는 "다른 식으로 성장한다." 열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이 연작시의 다음 번 단락에서는 부엌에 갇혀 지내는 그녀가불화의 메신저인 "천사들"로부터 "꾸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분노를 느낀다. 천사들은 "참고 견디지 마라. (...) 만족하지 마라. (...)너 스스로를 구원해라. 다른 사람들이 너를 구원해줄 수 없다." (강조는 리치가 한 것이다.) 천사들의 이 명령은 분명 자신의 재능을발전시켜가면서도 세 아이를 키우느라 분투했던 리치 자신의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말일 것이다. 혹시 신부가 며느리가 되었을 때 먹게 되는 역겨운 썩은 웨딩 케이크를 자신도 먹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품었던 것이 틀림없다.  - P131

그 다음 여덟 개 단락은 에세이 같기도 하고 보고서 같기도하다. 어쩌면 리치도 베티 프리단이나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여성의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2의 성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가부장제 문화라는 기본법 아래에서 여성성의신화를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이다. 그녀는 세 번째 단락 첫 문장에서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들과 함께 잔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신을 꽉 물고 있는 부리가 된다." 여성은, 특히 주제넘게 생각이란 것을 하는 여성은 정말 괴물일까? 그리고 생각하는 (여자) 괴물이 되는 것이 두렵다면,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하피‘의 부리에 꽉 물려 있다면, 우리 - P131

는 그와 비슷한 자연의 별종이 될까? 이 같은 불안감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서로 소원해지고 서로의 적이 되며 서로의등 뒤에 칼을 찌르게 된다. "여성에 대한 인신 공격성 논리, 모든 낡은 칼 / 내 등에서 녹슬고 있는 / 내가 너의 등에 박아넣었어, / 나를 닮은 자, 나의 자매여."44 생각하는 여자들의 (그중 일부는 그녀의 독자이기도 할 것이다) 자매애에 적용되는 사항이그녀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혹은 바로 그것을 리치는 여기에서암시하고 있다.
「아빠」와 마찬가지로 「며느리의 스냅사진들은 마지막까지그 자체의 비통함에 갇혀 있는 시다. 그리하여 이 시는 문화를기록한 문서로서 대개 분노에 휩싸여 1950년대를 되돌아보면서, 그 시대의 스냅사진을 촬영하는 1960년대의 카메라 렌즈같기도 하다. 확실히 네 번째 단락에서 리치는 "글을 쓸 때 내삶은-장전된 총처럼 - 그곳 에머스트의 식료품 저장실에 서 있었다"고 한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사색하는데, 그 순간이 하도 강렬해서 그녀 스스로가 카메라가 아니라 장전된 총을 들고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 할 정도다. 45 대개는 문학사에서 광범위한 인용구들을 그러모아 여성성의 신화의 규칙과 역할을 조명하고 있지만 말이다. - P132

그러나 니나 시몬이 인생에서 세 번째로 겪은 모욕은 무대 위에서 왕처럼 처신하던 사람도 결국은 취약한 여성이었다는 점을 조명한다. 그녀는 뉴욕시 경찰이었던 앤디 스트라우드와 약흔하고 축하 파티를 열었는데 파티가 끝나자 그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그녀를 잔인하게 폭행했다. "그는 택시 안에서, 내 아파트 앞 도로에서, 건물 로비에서, 12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안에서, 아파트 복도에서 나를 때렸다. " 그녀는 그에게 꽁꽁묶여 구타당하고 난 뒤 강간까지 당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앤디 스트라우드와 결혼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커리어와 금전 관리를 그에게 맡겼다.
왜 그랬는지 완전히 밝혀지진 않았다. 물론 시몬은 자신이 "고독과 불안 때문에 그 같은 일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느꼈다. "앤디는 강한 남자였고 나는 그를 사랑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가 나를 더 이상 때리지 않을 거라고 믿으라며 다그쳤다." 그녀는 자신이 재능이 있긴 하지만 다른 "소녀처럼 욕망"을 지닌 "소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것을 원했다. 나는 전부를 원했다." 그녀는 남편이 "이건 이렇게 해야 해"라고 결정하는 "전통적인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 P139

시몬의 말마따나 "어느 흑인 여성이든 이 노래를 듣는다면울기 시작하든지 밖으로 나가서 누군가를 죽이든지 할 것이다." 시몬과 오래 함께한 기타리스트 알 새크먼은 피치스를 "니나 시몬이 되어가던 인물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라면 그런 여자가 하는 일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순식간에 칼을 꺼내 들고, 다른 세 여자가 견디고 넘어갔던 모욕을 참지도 않으며, 다른 세 여자처럼 백인들의 손에 놀아나지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물론 시몬이 백인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태어난 여성들에게 슬그머니 덧씌워지는 이 네 가지 스테레오타입(흑인 유모나 가정부, 비극적인 흑백 아이,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이나 매춘부, 거친 여자)과 동일시할 수 있는 배우, 그런 혼합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이 곡의 기저에 깔린 슬픔은 부분적으로 독백 형식에 있다. 이 네 여자가 대화할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까.
니나 시몬은 각각의 인물이 이름을 밝히기 직전, (매 구절마다 반복되는)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부를까?"라는 물음에 대해 어떤 토도 달지 않는다. 이름의 문제는 "당신들은 나를 시스더 세이디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던 <망할 미시시피>로 돌아간다. 이는 흑인 여성에게 타격처럼 가해지는 언어가 이질적 - P147

손택은 눈에 띄는 외모와 말갈기처럼 긴 흑발의 소유자였다. (나이가 들면서는 흰머리가 줄무늬처럼 양쪽으로 흘러내렸다.)한 평론가는 그녀를 "마릴린"이나 "주다" (성 없이 이름만으로도 숭배자들의 머릿속에 곧장 떠오르는 매력적인 여성들)에 비교하기도 했다. 재키 역시 이런 범주에 들어맞는 이름일 것이고글로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여성들 중 누구도 자신의유명한 외모에 걸맞은 지적 매력을 지니지 못했다. 오직 ‘수전‘만이 그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점을 강조하듯 그녀의 첫 책인 "안티 소설" 은인의 <뉴욕 타임스>의 한 기자는 "이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않고 그러는 척만한다"고 말한 바 있다) 뒤표지에는 광고 문구 하나 없이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사색에 잠긴 듯한 프랑스풍 저자의 호화스러운 초상만 실려 있다. - P165

다양한 문화적 법령을 모아 기록하면서 손택은 스스로 대중문화의 철학자로 변신했고 오스카 와일드 같은 역할을 떠맡았다. 그녀는 이렇게 선언한다. "캠프는 모든 것을 인용부호 안에넣어서 본다. 그냥 램프가 아니라 ‘램프‘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여자‘다." "캠프는 양성적 스타일의 승리다.(‘남자‘와 ‘여자‘, ‘사람‘과 ‘사물‘을 서로 전환해서 쓸 수 있다.)" 이 두 단상(10번과 11번)을 쓰면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나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하지는 않았지만) 손택은 본질적인 여성이란 존재하지않으며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199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적 개념을 창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손택이 파리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강연을 주의 깊게 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은 태어나는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고 했던 보부아르의 견해를 들이마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P166

《해석에 반대한다》를 발표할 무렵 손택은 역사학자 시어도어 로자크가 예리하게도 대항문화라고 불렀던 문화 운동의 진정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전복적인 운동의 열혈 지지자로서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의 ‘플라워 칠드런‘ 히피‘로 대표되는 새로운 혁명의 옹호자뿐만 아니라 미군이 베트남전쟁에서수행했던 역할에 몸서리치는 반전 운동가도 되어 있었다. 「캠프에 관한 단상」이 성별 구분에 저항하는 게이 미학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면, 1966년에 발표한 「미국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는 "캘리포니아의 새로운 아빠가 된 로널드 레이건과 백악관에서 돼지갈비를 씹고 있는 존 웨인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공격했다는 점에서더욱 괘씸한 글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결함을 나열하면서("근대의 제도 중 가장 잔혹한 노예제도", "토착 문화가 그저 적일 - P167

뿐인 나라", "자연 역시 적으로 삼는 나라" 그녀는 미국이 악명 높게도 "백인종" 문화를 신성시하는 곳이라고 언명했고, "백인종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암덩어리이며, (...) 그들이 퍼져나가는 곳마다 자율 문명을 박멸하고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뒤집었다""고 결론지었다.
손택은 이런 "야후들의 나라" 같은 미국 땅에서 1960년대의 반항적인 젊은이들이 멋진 신세계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고 외쳤다. 그녀는 히피족에 대한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의 (그는 장발을 하고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청년들이 "서구 남성의 급격한변모"를 가져오는 "새로운 변종"이라며 두려워했다) 공격에 답하면서, 자신이 "양성의 탈양극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성 혁명의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차기 단계"라고 하면서 찬양했다. "나자신의 경험과 관찰에 의하면, 재정의된 성 혁명과 재정의된 정치 혁명 사이에는 깊은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증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부 젊은이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대 미국인의 성격 구조 전체야말로 (…) 방향 전환이 필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 P168

그녀는 철저히 페일리다운 순간 속에서 자신의 모국인들을제대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정말이지 그들은 베트남의 시골들과 작은 냇물들을 과잉 살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여러분의미국 아니던가.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미국 벌판에 사는 파리와빈대, 나무, 물고기, 강, 꽃을 과잉 살상해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유치원에서 단짝 친구에게 의지하며 지내다가 그 친구를죽이고 마는 웃자란 아이와 같다." 하지만 이 비유는 유효하지않다. 페일리는 미국인들의 계획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대량학살에 가까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량학살genocide‘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으니 단어는 내버려두자.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전쟁에서는 모두가 참가자이고, 사리에 맞는 군사적 두뇌를 가진 사람이 걸려드는 그다음 문제는 모든 사람이 군인의 표적 혹은 군인의 표적의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한집에 산다. 한 가지 더, 군인의 표적은 모두 박멸되어야하므로 모든 사람은 반드시 박멸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른다. " - P179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리카 종의 회상에 의하면 "1968년에는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 ‘여성이 경제적 동등을 위해 그들의 남자 형제들과 아버지들과 (...) 싸울 수 있다‘는 위대한 희망의감정이 존재했다." 1968년, 불법 낙태 시술이 필요한 여성을 돕던 시카고의 한 지하 단체 회원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보호하기위해 단체 이름을 "제인"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내걸었다. (그다음 해에 "하우 Howe"라는 성을 붙이긴 했다.) "적절한 이름 같았다. 제인이라면 우리에게 어떻게how 해야 할지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 1968년 가을, 셜리 치점이 자신의 역사적인 하원의원 당선을 자축하며 정치 활동 무대에서 "흑인이라는 사실보다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용감하게발언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산파 역할을 위해 다이앤 디프리마의 집에 와 있던) 오드리 로드가 남편 곁을 떠나 딸과 아들을 데리고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의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깨닫고 있었다. - P187

1970년 여름, 2만여 명의 여성들이 미국 여성 참정권 획득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뉴욕 5번가에 모여 사상 최대 규모의 ‘여성 평등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 행진의 지적 격렬함을 반영하듯 <타임>의 표지에는 화가 앨리스 닐이 그린 페미니스트 사상가 케이트 밀릿의 초상화가 실렸다.‘ 시위 행진 참가자들의핵심 요구 사항은 동등한 교육과 고용 기회, 그리고 임신 중단과 보육의 권리였다. 케이트 밀릿의 베스트셀러 『성 정치학의핵심 주장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여성이라는 종을 종속시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1971년 10월 운동가들과 이론가들은 하원에서 성평등 헌법수정안이 짧은 토론 끝에 통과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틀림없이 신속하게 이 수정안을 국가의 법•령으로 삼게 되리라 믿었다. 그것은 이 수정안이 "이 법 아래에 - P197

서는 권리의 평등이 성별을 이유로 미합중국에 의해서든 개별주에 의해서든 부정되거나 약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확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수정안은 인종, 종교, 국적, 성별에 근거한 고용차별을 금지한 1964년의 민권법 7조를 확대하는 법안이 될 것이었다. 1972년과 1973년 그런 낙관론은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어떠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활동도 성별을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교육법 수정안 9조에서도확인되었고, 수정 헌법 14조가 보장하는 사생활의 권리를 근거•로 전국 임신 중단 합법화를 공포한 ‘로 대 웨이드 소송‘ 대법원7대 2 판결에서도 확인되었다. - P198

1970년 <타임>은 표지 관련 기사에서 밀릿을 "여성해방운동의 마오쩌둥"이라고 묘사하면서, 그녀가 어린 시절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을 때리고 끝내는 버린 포악한 아버지와 맞서 싸웠고, 대학 교육을 받고 처음 얻은 일자리가 백화점 감자칼 사용 시연 일이었던 어머니와도 맞서 싸웠다고 설명했다. 밀릿과 마찬가지로 뉴욕 시위 행진에 참가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의 어머니의 좌절에서 여성의 굴종이 빚어낸 고통스러운 결과를 처음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자신의 어머니가 2차 세계대전 동안이나 그 후에 계속 일을 했기 때문에 용기를 얻은 여성들도 있었다. 성 정치 혁명을 일으킨 이 세대는 많은 여성 동지들의 삶을 방해했던 밀실 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가정생활을 부수고 나오기로 결심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의 어머니라면 좌절했을지도 모를 계획들을 실행해나갔다. - P198

1960년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 비평가 레이철 블라우 뒤플레시는 일레인 쇼월터가 "대각성"이라고 명명했던 각성 체험을 생생하묘사한 많은 사람 중 하나다. "이 체험은 강력하고 활기를북돋고 의미를 밝혀준, 헌신과 확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69년부터 1979년까지의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운동가 앤 스니토 또한 페미니스트 그룹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던 느낌에대해 회상했다. "지금은 되찾기 힘든 격노와 희망이 뒤섞인 느낌이었달까. (...)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좀 더 물질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1970년대의 "현실과의 몽상적인 관계"는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제안, 정치 집회, 보육 센터, 매 맞는 여성들의 쉼터, 강간 위기 센터, 차별 철폐 정책, 페미니스트 예술 공동체, 서점과 출판사, 여성학 연구 프로그램, 무수히 많은 저널들을 만들어냈다. 수백만 여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이 대각성 운동은 우리의 삶을 구체화하는 온갖 페미니즘들을 발생시켰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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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새벽 공기를 빠듯이 뚫고 지나와야 하루가 안심이 된다 새벽 공기의 내음을 아니? 그만한 향수를 나는 아직알지 못한다 노인인 내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젊은너를 내게 쏠리게 하는 그 비방을 비로소 고백한다 오늘도 화계사 솔숲을 지나왔다 눈이 내려서 새벽 정신 더욱 깔끔했다 하루를 너끈히 견딜 만했다


春窮


저녁 무렵 겨우 비가 내렸다 땅으로 함께 뛰어내렸던꽃잎들, 꽃잎들이 氣絶해 있다 맨살로 땅바닥에 찰싹 붙어 있다 이런 저녁엔 아무도 나를 찾아 떠나는 차표 한장 끊고 있지 않으리라 따뜻한 예감의 여린 발목 하나가멀리서 잠깐 서성이다 만다 지워진다

春泥


햇살들 초록 덧칠 쉬지 않고 있음을 눈치채기는 했으나 수렁이다 흐르지 않는다 좀체 튀어오를 기미가 없다그렇다고 가라앉을 수도 없는 지느러미 하나가 非夢似夢 멈추어 있다 흐를 수 없다는 것이 제일로 참기 어렵다너의 어깨에 滿開의 벚꽃들 허공 담아 져내리고는 있으나 정지된 화면이다 이따금씩 들판 끝자락 말아올리며갑자기 달려오는 마을 쪽 기계톱날 소리, 자지러지지만 금간 것 이내 아물고 그 다음 정적은 왜 그리 길던지 움직일 可望이 전혀 없다

한컷


그날 소쇄원 齊月堂 마루에 앉아 끝내 보지 못하고 온그 달을, 다시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내가 어젯밤 꿈 속에서 보였다 그걸 내가 보고 있었다 한 방 사진으로 찍어두면 그림이 되겠다 싶었다 그날처럼 비가 내리지는 않겠지 구름이 몰려오진 않겠지 조마조마했던가그랬다 할말이 있다면 지금 그립다! 이거다

놋수저


어머니 쓰시던 놋수저 한 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오늘도 놋수저를 꽂는다 제삿날 메올리는 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봉밥을 어머니의 놋수저로내가 먹는다 혼령의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는 오늘도 내 밥이시다 죽이 아니라 밥이시다 어머니 가신 뒤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놋수저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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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호흡의 살결과 흐름, 내용의 농담 혹은 의식의 유형에 따라작품을 앉혔다. 언어의 리듬과 이미지의 리듬이라는 것이있다. 그 만남에도 유의했다. 그러다 보니 한자리에 앉히기가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많이 유보해 두었다. 헤프다면 헤펐던 것 같다. 도둑이 다녀가셨다』 이후 3년여에 걸친 소산들 가운데서 간추렸다. 되도록 자연분만의 것들을 택했다. 제왕절개의 것들은 함부로 내놓기가 안쓰러웠다. 이시집도 몸이후의 시집들과 連帶性을 지니고 있음을느낀다. <몸은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실체>란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實物化하려는 나의 간절함을 스스로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2004년 雨水節

清洌


이 겨울 내내 내가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동상 걸린내 발가락들 사이 사이 깊게 박힌 서릿발들,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해동 무렵에야 그게 무에라는 걸 겨우 터득했다 만져지는 빛, 삼십 년만의 추위가 있던 날 어둠 하늘에서 내 몸에 避接된 별들의 눈물, 이런 降神도 있다 차가운

立春


햇볕들도 재잘재잘 작아질 때가 있다 사량도 앞바다에 떨어져선 예쁘게 구겨졌다 자주자주 몸을 펴는 햇볕들 뒤채긴다는 말은 너무 무겁다 느리다 저토록 끝없는바다가 각자 작아지다니! 눈이 부시다 빛들이 일시에 출산을 하고 있었다 粒子들, 진종일 내 사랑도 자주자주 사소해졌다 萬坪쯤 예쁘게 사소해졌다

봄비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문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다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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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에게 「코시 판 투테」는 특별히 중요한 작품이었다.
「코시판 투테」는 한층 더 과감하게 ‘남부유럽적이다. 나폴김배경의 등장인물 모두가 정직하지 못하고 쾌락을 좇으며, 몇몇예외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자기중심적이고, 「피델리오」의 기준으로보자면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하면서도 상대적으로죄의식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코시 판 투테」에서는 변장과 그 변장이 가져오는 마음의 동요나 미혹이야말로 정상적이며, 굳은 지조나 수미일관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며 조소의 대상이 된다."(에드워드 사이드, 앞의 책)
‘정말로 그렇겠구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몇 번이나 「코시판투테」를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이 경쾌한 희극의 위트를 즐겼지만지금으로부터 10년 정도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이 오페라를보았을 때, 피날레곡인 6중창 여자는 다 그래」에 이르자 예기치않게 불의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재미있으면서도 서글프다‘고해야할까, 정체 모를 ‘인간의 부조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오른 탓이다. 이상하고도 신기한 순간이었다. 사이드 - P213

가 말한대로 나 자신이 아이덴티티의 수미일관성"이라는 내적규율에 속박된 근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는 물론, 이런 점을 지적한 사이드 역시 대단한 존재다. 사이드가 지녔던 착종된 아이덴티티를 함께 생각해본다면 그의 「코시 판 투테론은 적어도 나에게는 충분히 납득이된다.
사이드라면, 내가 이번에 본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문득 넓은 객석 어딘가에 그가앉아 있는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 P215

9.11 이후 정서적 애국주의가 미국 전역을 뒤덮었다. 사건이일어나고 일주일 정도 지나 사이드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 애국주의에 휘말린 호전적인 집단 열광에 몸을 맡기지 말고, ‘이슬람대서구‘라는 단순화된 대립 구도에도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테러 방지에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인내와 교육에 투자하는 일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성의 목소리‘는 감쪽같이 지워졌고 세계는 ‘전쟁‘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출구 없는 대립 구도 속으로 눈사태처럼 휘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부자 나라 미국이 일본을 포함한 동맹국과 하나가 되어, 최빈국아프가니스탄에 빗발처럼 폭탄을 퍼붓는 일이 벌어졌다. - P223

그의 부음을 접한 후 이런 생각이 나날이 커졌다. 나는사이드의 좋은 독자는 아니었다. 그의 저작을 열심히 읽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내가 만약 1990년대에도 사이드를 읽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해본적이 있다.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심하게 정신적으로 방황했을 테고 분명 혼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즐겨 읽은 그의 글은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와 제국주의』와 같은 학술적 저술이 아니다. 펜과 칼은 그리 눈에 띄지않는 작은 책이고 그다지 팔리지도 않았다고들었지만, 내게는 결정적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이 책은 아르메니아 난민 출신 데이비드버사미언David Barsamian (1945~)이 사이드를 다섯 차례 인터뷰한내용을 담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관한 가장 좋은 입문서임은 분명하지만, 펜과 칼의 가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참에 책장을 펼쳐보니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다. 모두 다인용하고 싶지만, 우선 두 단락 정도만 소개해보려 한다. - P229

우리가 지금 와 있는곳이 마지막 변방이며, 정말로 하늘의 끝자락을 보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남아있는 파멸을 향해 갈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 P229

그렇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묻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지?" 우리는 또 다른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싶습니다. "너희들은 죽었다."라는 사망선고를 들었다고 그저 납득하고 체념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입니다.(에드워드 W. 사이드 · 데이비드 버사미언, 펜과 칼』, 헤이마켓북스,2010년(초판 1994년), 한국어판은 장호연 옮김, 마티, 2011년)


(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편하고 안락한 삶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지않았는가. 왜 실천적인 정치 참여처럼 강단과는 다른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는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자) - P231

내게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967년 이후의 어느 순간에 당연한 어떤 ‘부름‘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 이어 어느 순간 사태의 전체적 의미가훨씬 큰 차원에서 보이게 되었습니다. 단지 나의 민족적인 출신 배경에서 유래한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에 관여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뿐만 아니라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라틴계 연대 그룹,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단체와 - P231

도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교류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투쟁이 이런 여러 운동 가운데 핵심이었던 까닭은 그 투쟁이 정의에 관해 되묻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의 문제였습니다.

(에드워드 W. 사이드 · 데이비드 버사미언, 앞의 책 - P233

"파멸을 향해 갈 운명임을 알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한편의 시와 같다.
사람은 승리를 약속받았기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넘쳐나는 불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 되묻고, 허위가 뒤덮고 있기에 진실을 위해 싸운다. 단적으로 말해 사이드는 우리에게 현대를 살아가는자에게 있어 도덕의 거처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전 지구적 시장 경제, 세계 전쟁의 시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본래 귀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떼어놓았다. 모어, 모문화, 역사로부터 추방된 수많은 디아스포라가 지구상을 유랑하고 있다. - P233

디아스포라 문학은 이렇게나 성립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매우 예외적인 성공사례가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이다. 이 책은 인류사의 현시점까지 나온 디아스포라문학의 최고 걸작이라고나는 확신한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도, 게다가 아버지세대부터 미합중국의 국적 보유자인사이드는 예루살렘, 베이루트, 카이로를 연결하는 지역을 오가며 성장했고 인생 후반기를미국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서 삶을 마쳤다.‘라고 덧붙여야만 한다. 책의 첫머리를 조금 인용해보자.


하지만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른 것은 마땅한 어떤상태로부터 내 자신은 언제나 벗어나 있다는 감각이었다. ‘사이드‘라는 누가봐도 명백한 아랍계 성에 무리하게 이어 붙인,
우스울만큼 영국풍인 이름‘에드워드‘ 내가 여기에 순응하기까지, 아니 정확히는 그다지 불쾌감을 느끼지 않게 되기까지는 50년 정도의 세월이 필요했다.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빈티지, 2000년(초판 1999년), 한국어판은 김석희 옮김, 살림,2001년) - P236

다니엘 바렌보임과 나눈 대담집 평행과 역설』에는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있다. 유대인이면서 아르헨티나에서 자랐던바렌보임은 그의 좋은 대화상대였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에는 일종의 기억상실증이 만연합니다. 미합중국이 진정한 이민 사회이며 언제나 계속 그래왔다는사실을 망각하는 병이지요. 미국은 오직 하나이며, 다른 대안은 없다는 생각, 미국의 전통과 규범은 무엇인지, 단일한 미국의 면모는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최근 일어난 논쟁을 보고있노라면 마음이 무척 불안해집니다. 일종의 ‘수입된 내셔널리즘‘, 다시 말해 "독일적인 것은 무엇인가? 영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식으로 변용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민족주의는 심하게 변덕스럽고 파란으로 가득 차 있기에 제게너무도 매력적인 미국의 모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말 - P247

이죠. 제가 이 나라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측면은 어떤 규정으로 정해져 완전히 굳어버린 사회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항상 불안정하게 동요하는 사회라는 점입니다.(『평행과 역설, 빈티지, 2004년)


트럼프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했던 발언이다. 하지만 ‘미국우선 America First‘을 부르짖고 이민규제 강화를 주장했던 트럼프정권을 미국 국민이 절반가까이 지지한다는끔찍한 현실을 떠올리면, 사이드의 진단은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사이드를 낳고기르고, 사이드가 사랑했던 ‘아메리카, 물론 언제나 미국의 한측면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조차도 영원 속으로 사라진걸까.
(이 글을 마무리한 날은 2020년 11월 9일이며, 드디어 어제 민주당 조바이든 후보가 대통령 선거 승리 선언을 마친 참이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항전의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기에 장래는여전히 불투명하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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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넷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1981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자신의 기념비적인 1959년 연설 <흑인작가와 그의 뿌리>(강조는 우리가 한 것이다)를 두고 자신이 이연설 제목을 잘못 달게 만든 영향이 과연 무엇인지 분석했다. 우리가 『노턴 여성문학 앤솔러지』 초판에 포함시키기 전까지출간된 적이 없던 1961년의 글 「남성 평등 옹호」에서는 여성을 "이류의 지위"에 효과적으로 묶어놓으면서도 "남성에게 가장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우월성‘과 ‘권위‘라는 짐을 강요하는 일에대해서는 비판을 덜 가하는" 사회 질서를 혹평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우월성‘이나 ‘권위‘는 남성의 인간다움을 모욕하고, 그들이 문명화된 상태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데만 효과가 있다."
핸스베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케이디 스탠턴, 해리엇 터브먼을 인용하면서 가정주부의 신화를 거듭 벗겨내기도 했다. "자기 운명에 대한 여성의 불만은 페미니스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페미니스트는 그들이 등장할 수 있는유일한 장소에서 생겨난 존재다 - 이 세상 주부들의 자리 말이다!" (강조는 헨스베리가 한 것이다.)  베티 프리단 이전에, 로레인 핸스베리가 있었다. - P92

지금의 독자들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한 여성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위트를 포착한 이매니 페리의 로레인을 찾아서』를 읽으며 핸스베리의 일부 글이 여성들과의 에로틱한 관계를 다루었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면의 자기 검열과외부의 검열 때문에 생겨난 피해를 지적했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옳았다. 핸스베리가 제안했던 프로젝트 <제니 리드의 창문에 걸린 간판>은 <시드니 브루스테인의 창문에 걸린 간판>으로 변형되었다. (이 쇼는 그녀가 죽기 전날 밤 막을 내렸다.) 원래 여성 인물들이 주역으로 나왔던 그녀의 차기작 극본 <백인들>도 최종 버전에서 돋보였던 인물들은 남자 주인공들이었다.
그녀는 "무수히 깨부수어진" 여성의 강력한 대변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관한 장편 드라마도 계획했었지만 집필할 시간이 없었다. 한편 핸스베리는 (레즈비언 인권단체 ‘빌리티스의딸들‘이 1955년에 창간한) 레즈비언 간행물 <래더>에 익명으로 기고하기도 했다. 이 글들은 레즈비언에게 가해지는 결혼 압박, 동성애자 핍박, 안티 페미니스트 도그마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 P93

<매콜스>가 그녀의 글 게재를 거부했던 것은 아마 그 내용이 너무 격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홈 저널>이나 <마드무아젤><레드북> 같은 잡지도 거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을 거부했고, 기사 형태의 그 글을 개작해 단행본으로출간하자는 제안을 하며 출판권을 W. W. 노턴 출판사에 팔았다. 1963년 『여성성의 신화』 초판 3000부가 출간되자 곧바로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놀랍게도 서점에서 날개 돋친듯 팔렸다. 그러나 프리단은 불만 사항들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록한 사람도, 그런 사실을 최초로 탐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밝혔듯이, "덫에 갇힌 가정주부"라는 주제는 <라이프>와 <뉴스위크> 같은 잡지들이나 <뉴욕 타임스>에 거듭 등장하는 주제였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이런 공표까지 했다. "프로이트에서 냉장고까지, 소포클레스에서 소아과 의사 스폭까지 이 - P184

르는 길은 울퉁불퉁한 험로였음이 밝혀졌다."
정말로 그랬다. 프리단의 주장처럼 "1960년,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가 미국의 행복한 가정주부라는 이미지를 뚫고 부글부글 끓어넘치고 있었다. " - P105

1960년대로 들어설 때 1950년대는 그 시대의 성격을 계속해서 잘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한 가지 극적인 공적 변화가 있기는 했다. 젊은 존 F. 케네디와 그의 우아한 아내가 백악관의 아버지 같은 아이젠하워와 다소 세련되지 못한 그의 아내 메이미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와 재키는 새로운시대의 대표자로서 1950년대가 욕망했던 모든 것의 아이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부유하고 지적인 남편과 매력적인 ‘사교계 인사‘ 아내로 말이다. 아이젠하워 부부는 말하자면 1940년대의 유물이었다. - P109

1963년 11월 22일에는 존 F. 케네디가 자동차를 타고 댈러스의 다운타운을 통과하는 도중 암살당했다. 마릴린 먼로 때와 마찬가지로 앤디 워홀은 거의 즉각적으로 재키를 미술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재키의 스무 가지 모습>(1964)에서 워홀은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한 정복 경호원 앞에 선 채 침울하게 눈을 내리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포착했다. 
품위 있는 로맨스를 꿈꾸었던 1950년대는 끝났다. 먼로와 존F. 케네디, 실비아 플라스 휴스가 세상을 떠났듯이. 개인사에묻혀 있던 플라스가 남긴 초기 페미니즘적 시들은 그녀의 동시대인이었던 에이드리언 리치가 가부장제에 반대하며 표현한 항의와 니나 시몬이 노래했던 항변을 예고한다. 두 사람은 민권운동의 에너지를 여성 문제 쪽으로 튼 이들이었다. - P113

이제 그 시들은 잘 다듬어진 새로운 자아, 지면 위에서 구축뢴 차이를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새로 창조된 지면위의 자하는 의미심장하게도 페미니스트였다. 저자가 시몬 드•보부아르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인데도 말이다. 마침내 그녀는「화씨 103도의 고열」부터 「에어리얼」, 「레이디 라자로」, 「벌침」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시들에서 해묵은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던졌다. 특히 휴스가 짐을 꾸리기 위해 코트그린에 들렀던1962년 10월 6일에 쓴 마지막 작품에서, 그녀는 앞으로 양봉에열중하겠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꾸준히 일만 하는 일벌이 아니야 / 여러 해 동안 먼지만 먹고 살아왔어 / 내 빽빽한털들로 접시를 닦아왔고"
이것이 바로 그녀를 거의 "질식시켰던 가정생활이었다. 코트그린의 실제 먼지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 집의 오랜 과거라는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남편을 위해 가정을 꾸리고 그의 시를 대신 타이핑하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식기를 설거지하면서 들이마신 실제 먼지와 비유적인 먼지 속에서 그녀는 질식해갔다. 마침내 이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내게는되찾아야 할 자아가 있어, 여왕벌처럼."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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