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들장미"라는 말만 들어도 단번에 세상이 싱그러운 장미가 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내게는 가끔씩 들장미를 보내주는 친한 친구가 있다. 그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나를 숨 쉬게하고 살게 한다. 들장미는 시간이 갈수록 향이 더 진해지는 낯설고 섬세한 신비로움이 있다. 들장미는 노랗게 시들 때가 되어도 향이 강하고 달콤해서 헤시피의 달밤 향기를 떠오르게 한다. 결국 그 꽃이 시들면, 시들고 또 시들어버리면 대지의 요람에서 다시 태어나는 꽃처럼 향기가 나는데 나는 그것에 취해버린다. 꽃은 시들고, 보기 싫어지고, 색이 바래고 갈색을 띤다. 그렇지만 어떻게 버릴수 있겠는가? 죽었다고 해도 영혼은 살아있지 않을까? 나는 시든 들장미를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향기 진한 꽃잎을 따서 속옷서랍장에 뿌려놓는 것이다. 최근에 친구가 들장미를 보냈는데 꽃이 시들려던 차에 향기가 더 진해져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저렇게 사랑의 향기를 내뿜으며 죽고 싶구나. 살아 있는영혼을 발산하며 죽고 싶어." - P170
사우다지*는 허기짐과 비슷하다. 사우다지는 당신이 그 사람의 현재를 음미할 때에만 지나간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현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당신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흡수하길 원한다. 어떤 존재가 완전한 결합을 위해 타인을 원하는 것은 삶에서 절박한 감정 중 하나다.
Saudade, 향수, 추억, 그리움, 외로움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감정. 사랑하지만 부재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우울하거나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정 상태, 종종 그리움의 대상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 P172
더는 글을 쓸 수 없다,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봤다. 그중에 덜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하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혹은 그저 중얼중얼 내뱉으려다 실패하고야 마는 벌어진 입을 보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그 입들이 설명하지 못한 것들을 말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문학적 행위들은 내게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글을 쓰지 못하는 건 어쩌면 구체적으로 나를 문학으로부터 구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어쨌든 문학 덕분에 그런 것이 생겼을 것이다. - P184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게 이 글을 쓰면서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곧 있으면 내 과거와 현재의 삶을 출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내 계획에 없던 것이다. 또 하나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쓰는 글이 정말 원하는 사람만 열어볼 수 있는책이 아니라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신문에 실린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다. 그렇지만 조금 더 깊고 내면적인 변화여서 글에도 반영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지 칼럼이나 기사를 쓴다고 글이 바뀐다면? 독자들이 원한다고 그저 더 ‘가벼워진다면? 재미있어진다면? 몇 분동안 읽을거리가 될 수 있다면? 또 하나, 나는 내 책 속에서 나와독자들이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기 이 신문에서는 독자들에게 그저 말을 건네는 것이며그들이 만족하면 나도 만족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만족하지 않는다. 후벵 브라가와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 P186
며칠 후에 그 젊은 여성은 다시 나를 만나러 왔고, 나는 그녀에게 로리바우 박사에게 책을 전해줬는지 물었다. 그녀는 책을 전해줬고, 그가 내 헌사에 대해 언급했다고 말했다. 나는 호기심에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클라리시는 남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면서 정작 자신이 존재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네요." 그렇습니다. 로리바우 박사님, 저는 존재해도 되는지를 겸허하게 묻습니다. 겸허하게 기쁨을, 은혜로운 행동을 애원하지요. 저는 조금 덜 고통받으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저를 사랑과 존중을 받아 마땅한인간으로 봐달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삶의 축복을 원합니다. - P199
내가 괜히 길을 찾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힘들게 길을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감히 길에 대해 말할 수없기 때문에 오늘처럼 열기에 들떠 격렬하게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 나의 길을 찾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길을 원했지만, 이제는 맹렬하게 확실한 걸음으로 걷는 방식을 찾는 데 매달린다. 그렇지만 시원한 그늘과 나무 사이로 빛이 반사되는 오솔길, 내가 마침내 진짜 내가 되는 그 오솔길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 길은 내가 아니라는것이다. 그것은 타인, 다른 사람들이다. 내가 타인을 충만하게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위험을 벗어나며, 그곳이 나의 휴식처라고느낄 것이다. - P203
언젠가 글쓰기는 저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왜 진심을 담아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면, 글쓰기는 저주이긴 하나 구원하는 저주다. 내가 신문에 기고하는 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나소설로 변형될 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신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당신을 고통스러운 악취미로 끌어들이되 대체할 수 있는 게아무것도 없으므로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저주이며 구원이다. - P222
글쓰기는 붙들린 영혼을 구하고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사람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를 구하는데, 이것은 글을 쓰지 않는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고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재현하는 일이며 단지 모호하고 답답하게 남아 있는 감정들을 깊이 느껴보는 일이다. 글쓰기는 축복받지 못한 인생을 축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무언가‘가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순간에만 글을 쓸 수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하늘의 뜻에 맡긴다. 진정한 글쓰기에 이르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책을 쓰면서 겪었던 고통이 지금 아련하게 기억난다. - P222
가장 최악은 갑자기 모든 것에 지치는 것이다. 풍족해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가져서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것 같다. 비틀스에도 지치고 다른 이들에게도 지친다. 아주 힘겹게 얻은 나의내면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 지쳐서 차라리 미움이 나을 것 같다. 이 풍족한 느낌으로부터 ㅡ이것은 풍족함인가, 혹은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ㅡ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분노일 것이다. 애정을 품은 분노 같은 것이 아니다. 단순하고 폭력적인 분노다. 그것은 거칠수록 더 좋다.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때문에 생긴 분노다. - P223
또 똑똑한 사람들, 그러니까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분노이며 누보시네마 때문에 생긴 분노이기도 하다. 안 될 것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다른 영화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몇몇 사람에게 느끼는 애착 때문에 생긴 분노이기도 하다, 마치 나에 대한 애착이 없는 듯이. 성공 때문에 생긴 분노일까? 성공은 실수이자 거짓 현실이다. 분노가 내 삶을 구했다. 분노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브라질에서 매일 기아로 아이들이 죽어간다고 말하는 최근 신문 기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분노는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가장 깊은 저항일까? 누군가가 되는 일은 나를 피로하 - P223
게 한다. 나는 이토록 많은 사랑을 느끼는 것에 몹시 분노한다. 산다는 것에 분노하며 며칠을 산다. 왜냐하면 분노는 내게 활기를 불어넣으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경계심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며 필요한 결핍이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원할 것이다. 모든 것을!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얻는 일은 얼마나 좋은가. 소유하기 이전의 순간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쉽게 가져서는안 된다. 왜냐하면 그 허울뿐인 용이함은 우리를 지치게 하니까. 그렇다면 쉽게 쓰는 글도? 가슴 깊은 곳으로 글을 썼던 내가 지금은 왜 손가락 끝으로 쓰고 있는가? 나도 안다, 결핍을 원하는것은 죄악이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결핍은 이런 유의 풍족함보다는 충만에 훨씬 더 가깝다. 나는 그저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잠을 잘 것이다. 오늘의 내 세상을 견딜 수 없으니까. 불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안녕, 영원히 안녕, 다음 주 토요일까지 안녕. 내게 대답하지 말기를, 인간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작별 인사를 하는 내 목소리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목소리가 분노를더욱 돋우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축복받는 하나의 분노가 있다. 필요한 사람들의 분노다. - P224
1968년 10월 5일
나는 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봄이 완연한 지금, 나는 봄이 무엇인지 안다는 말의 덧없음을 잘알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너무 겸손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나친 감사에서 오는 겸손함으로, 이는 어린애 같은 ‘나‘와 어린애 같은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순간, 비 오는 봄이 올 때 느껴지는 기쁨에 내가 너무 겸손하다는 걸 깨닫는 이런 순간이면 나는 내게 속한 것도 남에게 속한 것도 모두 손에 넣는다. - P236
봄이 뭔지 안다. 공기에 꽃가루 향이 퍼져 있으니까. 어쩌면 내고유의 꽃가루일 수도 있다. 작은 새가 노래할 때면 느닷없이 소틈이 돋고, 나도 모르게 삶을 환원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살아있으니까. 가슴에 사무치는, 맑은, 죽음이 드리운 봄은 내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나는 해마다 봄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도 이것이 감각의 혼란임을 잘 알지만, 머리가 어지러우면어떤가?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반짝이는 봄비를 맞는다. 나는 나의 존재를, 타인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고, 그들이 없다면 나는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최소한의 것을 위해 기도했고, 받지 못했음에도 위대한 타인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나는 삶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느낀다. 봄에는 몇 시간이고 혼지자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때로는 피를 흘릴 수도 있다. 그 - P236
러나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 나는 내 피 안에서 봄을 느끼니까. 그래서 아프다. 봄은 내게 무언가를 준다. 봄은 나를 살게 해준다. 나는 어느 봄에 죽을 것이다. 나를 찌르는 사랑과 약해진 심장으로 - P237
지식인?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지식인이라 부를 때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겸손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덜 상처받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지성을 이용하는 것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직관과 본능을이용한다. 지식인이 되는 것은 문화를 알아야 하는데 나는 너무보잘것없는 독자이며, 이곳에서 부끄러움 없이 고백하자면, 진정한 문화를 잘 모른다. 인류 역사상 중요하다고 하는 작품도 읽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매우 적게 읽는다. 열세 살에서 열다섯살 때까지는 많이 읽었다. 탐욕스럽게 손에 잡히는 대로. 그러고나서는 누구에게도 지도받은 적 없이 가끔씩 읽었다. 게다가 고백하자면 이번만큼은 부끄럽다 몇 년 동안 추리 소설만 읽었다. 요즘은 글 쓰는 게 자주 귀찮지만,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 P253
귀찮을 때도 있다. 나는 문학인도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직업‘이나 ‘커리어‘가바뀌지 않았으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것이 올 때, 내가정말 원할 때에만 쓴다. 나는 아마추어 작가일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때때로 지각하는 심장을 가진사람이고, 어리석은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단어로 말하는사람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의 삶에 대해 해야 할 말을 문장으로 완성했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살짝 뛰는 사람이다. - P253
내가 되고 싶었던 것
내게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투사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타인의 안위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 그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원하던 것이었다. 왜 운명은내 안에 있던 투사의 기질을 발전시키지 않고 내가 이미 쓴 그 글들을 쓰도록 이끌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 내 가족은 장난으로나를 "동물 수호자"라고 불렀다. 누군가를 비난하면 내가 곧장그를 변호했으니까. 나는 이른바 소외 계층이 당하는 엄청난 불의 앞에서 난감한 마음으로 살아갈 만큼 사회적 비극을 강렬하게 느꼈다. 헤시피에서 살 때 일요일에는 빈민촌에서 사는 가정부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것이 나를 이런 일이 계속되게 둘 수 없다고 다짐하게 했다. 나는 행동하고 싶었다. 열두 살 때까지 살았던 헤시피에서 나는 종종 거리에서 사회적 비 - P253
극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중을 봤다. 나는 온몸을 떨면서 언젠가 이 일을, 그러니까 타인의 권리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토록 일찍 무엇이 되었는가? 나는 결국 깊이 느끼는 것을 찾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단어를 쓰는 사람이 됐다. 보잘것없다. 매우 보잘것없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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