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봄비 내린다
겨우내 꿰맨 마음의 솔기가 촘촘하다 冬安居를 끝낸 중들이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로 궁성대는 새벽, 봄비 내린다 연한 비, 비린내 난다 한 그루 산수유에서도 수런거리는 소리 노랗다 봄 春字 벌레 蟲字 그대로 준동蠢動이다 벌레들 우듬지 끝까지 따라 오르다 저런! 봄신명이 잘못 지폈나 보다 헛발 디뎌 제 몸 패대기친다 터진 속내가 벌써 초록色이다 새순들 과식하셨구나 몸이 무거우셨구나
껍질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 나온 나는 또 한번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 그렇게 나가서 저 언덕을 아득히 걸어가는 키 큰 내뒷모습을 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준비 중이다 확인 중이다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 내 껍질이 이다음 강원도 정선 어디쯤서 낡은 빨래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 쨍쨍한 날 보송보송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흔한 매미 껍질같이는 싫다그건 너무 낡은 슬픔이지 않느냐
마른 들깻단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늦가을
上等品으로만 온 마을이 가득 비었다 들앉을 자리가넘친다 태양초 고추 멍석이 빠알갛다 살림 차리자 빠알갛게 들어앉거라 바로 너인 줄 모를 리 없다
장마
비 듣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진종일 귀가 열리고 있다 안이 꽤 깊다 틈서리마다 젖어들어서 불어난 집의 부피와 무게들이 내 마음의 容量 위에 푸른곰팡이의 눈금을 하나씩 더 올려놓고 있다 슬픔이 살찐다 다친 다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감당키 어려운 대목이 이런 날엔 어김없이 응답을 해야 直性이 풀린다 내가 새고 있다 집이 새고 있다 그게 몸이다 새는 낮게 낮게 뒷산 허리를 날아가고 있다 비리게 속까지 젖어서 높게 뜨지 못한다 새는 어디를 다치셨는가 새도 새고 있다 둥지가 새고있다 슬픔이 새로 살찐다 한참 비안개 자옥하다 새어서 새어서 너에게서도 새어서 나는 여기까지 왔구나 다친 몸은 정직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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