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8~1592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최고의 교양인, 사상가, 철학자, 때로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도 하는 몽테뉴 그러나 곧 덧붙여 말해야 한다. 그는 당대 인문학자들과 달리 라틴어가 아닌 속어(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나아가 장바닥의 생생한 말로만 쓰고싶다고 한 교양인이요 어려운 개념도 체계도 교화적 목적도 없이 누구나 부딪히는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온당한 답, 주어진 삶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길을 찾고자 하는 보통 사람의 ˝자기 탐구˝로 사상가, 철학자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내란으로 분열된 나라에서 중재자로, 보르도의 시장으로 일했지만, 공격 생활에 염증을 느껴 서른여덟 살에 은퇴하여‘자기만의 방‘으로 물러났고, 왕이 하사하는 은전을 거절하고, 억지로 시장직을 맡았으며, 사적 삶의 문제로도 벅찬 사람으로서, 공적인 일에 ‘손‘과 ‘어깨‘까지는 빌려줄 수 있어도 그일을 ‘간과 폐‘에 담지는 않겠다고 공언한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면서, 유대인 핍박과 신대륙에서 저지른 유럽인들의 잔인한 행위를 큰 소리로 비판한 유일한 문인이요, 농부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교훈을 얻은 사람, 그가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여기 20여 년 동안 써 내려간 『에세에서 그의 시대만큼 혼란스런 시대를 사는 21세기 독자에게 들려준다.


독자에게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진솔하게 쓴 것이다. 처음부터 내 집안에만 관련된 사적인 목적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음을 밝혀둔다. 그대를 위해서나 내 영광을 위해서 쓰겠다는 생각은 추호도없었다. 내 역량은 그런 계획을 세울 만하지 못하다. 나는 그저 내 집안 사람들과 친구들을 위해,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니) 내 처신이나 성격의 특징들을 여기서 찾아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더 온전하고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나는 나를 더잘 장식하고 공들여 제시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여기서 꾸 - P35

밈없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보통 때의 내 모습을 봐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려 보이는 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공공에 대한 예의가 내게 허락했던 한에서, 내 결점이며 생긴 그대로의 내모양이 여기서 읽힐 것이다. 여전히 대자연의 원초적인 규범 아래아늑한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저쪽 나라들에서 태어났다면 장담컨대 나는 정녕 기꺼이 나를 통째로 적나라하게 그렸을 것이다.
그러니 독자여, 나 자신이 내 책의 재료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경박하고 헛된 주제에 그대의 한가한 시간을 쓰는 것은 당치않다.

그럼 안녕, 몽테뉴로부터,
1580년 3월 1일3 - P36

이 이야기는 우리가 최근에 본 프랑스 왕공들 중 한 분의 이야기와 쌍벽을 이룰 만하다. 그분은 체류 중인 트렌토에서, 온집안의 지주요, 영광이었던 맏형‘의 사망에 연이어 두번째 희망이던 아우의 사망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이 두 번의 애사를 감탄스러우리만큼 의연하게 견딘 그가 며칠 뒤 자기 수하 중 하나가 죽게 되자 이 마지막 참사에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전의 꿋꿋함은 간데없이 어찌나 슬퍼하고 원통해하던지, 어떤 이들은 이 마지막 충격만이 그의 급소를 찌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인즉 이미 슬픔으로 꽉 차서 넘칠 지경이었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일 하나라도 더 얹히자 인내의 방벽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 P46

닥쳐올 일에 대해 우리는 전혀 힘을 쓸 수 없고, 심지어지난 일에 대해서보다 더 속수무책이니, 사람들이 늘 미래의 일에만급급한 것을 나무라며, 현재의 복을 붙들어 그것에 만족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인간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자기 작품이 지속되게 하는데 우리의 지혜보다행동이 더 절실하다 보니 다른 많은 그릇된 생각들처럼 그런 그릇된 생각을 주입하여 우리를 그쪽으로 이끈 것인데, 그것을 감히콰오라고 부르겠다면 말이다. 우리는 편안하게 제 집에 머무는 적이 없고 늘 저 너머로 나가 있다. 두려움, 욕망, 희망은 우리를 미래로 집어던지며, 지금 있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며앞으로 올 일, 심지어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의 일에까지 정신을 팔게 한다. "미래를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으로 짓눌린다."(세네카)
플라톤에서 자주 언급되는 위대한 가르침은 네 일을 하고 너우리 시대를 알라는 것이다. 두 부분으로 된 이 가르침은 각각 우리의 의 - P52

무 전체를 담고 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자기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이 자기가누구이고, 자기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무관한 일을 자기 일로 삼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꾼다. 헛된 일이나 쓸모없는 생각과계획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지혜는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결코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키케로)
에피쿠로스는 현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나 염려가 없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과 관련된 법 중에서 왕들의 행적을 그 사후에 판별하도록 만들어 놓은 법은 내 생각에 아주 마땅해 보인다. 왕이란 법의 주인은 아닐지라도 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들이다.
정의가 그들의 머리를 누를 힘이 별로 없는 만큼 그들의 사후 명성과 그 후손들의 복락에 정의가 행사되도록 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흔히 사후 명성과 후손의 복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여기니 말이다. 이 관습은 그것을 지키는 나라들에 특별한 이익을 가져다주며, 자신들이 못된 군주들과 엇비슷하게 기억되는 것을 불평할 선한 군주들에게는 바람직한 일이다. - P53

모든 것을 휘저어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도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수 없다고 한 솔론의 말을 따져 보며, 순탄하게 살다 죽었는데 나중에 그 명성이 훼손되고 후손이 비참하다면 그 경우에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살아 움직이는 동안 우리는 어디든 기대에 차서 마음에 드는 곳으로 옮겨다닌다. 그러나 존재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여기 이 세상의 것과는 아무런 소통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솔론에게는 이렇게말하는 것이 좋으리라. 인간은 이 세상에 없고서야 행복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노라고 말이다.


자기 뿌리를 온전히 들어 내어,
삶 밖으로 자기를 내던지기는 어렵다.
저도 모르게 자기의 무언가가
이승에 존속하리라 상상하는 것이다.
죽음이 쓰러뜨린 육체에서
인간은 완전히 벗어나 해방되지 못한다.
루크레티우스 - P55

크리스푸스는 경주하는 자들은 빨리 달리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지 적수를 손으로 잡아 저지하거나 딴죽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층 더 고결하게, 저 위대한 알렉산드로스는 야음을 틈타 다레이오스를 공격하라고 설득하려는 폴리페르콘에게 말했다. "승리를 훔치는 것은 내게 합당치 않다. 승리를 수치스러워하느니 차라리 운명을 한탄하는 편이 낫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그(메젠티우스)는 달아나는 오로데스를 등 뒤에서 공격하여, 상대가 볼 수 없는 화살로 쓰러뜨리는 것은 자기답지 않은일로 여겨, 그에게 달려가 마주 보고 일대일로 맞붙었으니,
기습이 아니라 오로지 무력으로만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 - P76

진실로 거짓말하는 것은 못된 악덕이다. 우리가 사람인 것도그렇고 우리 서로가 연결될 수 있는 것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말을 통해 가능해지는 일이다. 거짓말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심각한 일인지 안다면 그 죄를 화형에 처한다 해도 다른 범죄의 경우보다 정당하게 여겨야 할 정도이다. 내 보기에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들의 죄 없는 실수를 엉뚱하게 처벌하면서 즐거워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무슨 영향이 남는 것도 중대한 결과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저 무분별한 행동을 한 것을 두고 아이들을 괴롭힌다. 오직 거짓말하는 것,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드세게 고집 피우는 것 정도가 그 씨앗이 보이자마자 더 자라기 전에 즉각 꺾어 놓아야 할 결점들이다. 이런 것들은 아이들과 함께 자라난다. 한번 이 잘못된 궤도에 올라선 혀는 다시는 그 길에서 끌어내릴 수 없을 정도이니 사뭇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점에서는 그토록 점잖은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 그 버릇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내게 재단사 견습공이 하나 있는데나는 그가 참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한 경우마저 그렇게 못하는 것이다. - P88

나는 나 자신을 잘 제어하여 다루지 못한다. 그 일엔 나 자신보다 우연히 더 많은 권리를 갖고 있다. 주변 상황, 동반자 하다못해 내 목소리의 떨림까지도 내가 나만을 위해 캐내어 사용하려할 때 얻어 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 정신에서 이끌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내 정신을 드러내는 데는 내 말이 글보다 낫다. 가치라곤 없는 것들 중에서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찾으려 하는 곳에서는 나를 발견하지못하는 수도 있다. 내 생각을 조사하고 검토하는 일을 통해서보다는 우연히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쓰다 보면 내가 뭔가 예리한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우둔한말이나 내게는 예리한 뭔가라는 뜻이다. 이런 말치레는 그만두자.
각자 자기 역량에 따라 판단할 일이니.) 시간이 지나면 내 글의 요지를 완전히 잊어버려 내가 말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때로는 타인이 나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낸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 구절들을 면도칼로 긁어낸다면 내 책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느 날에는 우연이 내가 말하려 했던 바를 대낮보다 환히 내게 밝혀 주리라. 그리하여 더듬고 망설이던 내 꼴에 내가 놀라게 되리라. - P95

각 나라뿐 아니라 각 도시도 나름의 특별한 예법이 있으며각 직업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어린 시절 우리 프랑스인의 예법이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만큼 세심한 교육을 받았고, 사람들과 잘어울리며 지내 올 수 있었다. 예법 강의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기꺼이 이 예법을 따르려 하지만 그렇다고 비굴할 정도로 거기에 얽매여 내 삶을 답답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예법에는 이러저런 귀찮은 형식이 담겨 있는데, 실수가 아니라 잘 판단해 그것을 빼놓는 경우라면 그 때문에 품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 P108

너무 예의를 차리다 결례를 범하고 너무 정중해서 남에게 폐가 되는 사람들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이의 예법을 안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것은 우아함이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친숙해지는 과정으로 가는 첫걸음을 마련해 준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예를 보고 우리가 배우고, 또 우리에게 무슨 가르칠 만하고 전할 만한 점이 있으면 우리의 예를 돋보이게제시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 - P109

페라울라스는 행운과 불운, 두 가지 운수를 다 경험한 뒤, 재물이 늘었다고 먹고 마시고 자고 아내를 안는 욕망까지 커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한편으론 내게도 그랬듯이 성가신 재산 관리까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끼자, 자기의 충실한 친구로서 부를 열망하는 한 가난한 젊은이를 만족시켜 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젊은이에게 과할 정도로 엄청난 그의 재산과 그의 선한 주군 키루스의 관대함과 전쟁이 날마다 불려 주는 것까지 모두 선사하고, 자기를 손님이요 친구로 보살피며 정중히 부양할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이후 매우 행복하게 살았고, 두 사람 모두자기 처지의 변화에 만족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꺼이 흉내 내고 싶은 방식이다.
나는 또 나이 든 한 고위 성직자의 행운을 높이 칭송한다. 그는 그의 지갑, 그의 수입, 그의 지출을 때로는 자기가 고르 하인에 - P136

게, 때로는 다른 이에게 깨끗이 맡겨 버리고, 긴 세월을 그런 유의 일들에 대해선 마치 남의 일처럼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타인의 선함에 대한 신뢰는 그 자신의 선함에 대한 가볍지 않은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기꺼이 그것을 돕는다. 그래서 그 성직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집안의 질서가 그의 집보다 더 한결같이 위엄 있게 유지되는 집을 보지 못했다. 근심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가진 것으로 넉넉히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필요를 딱 알맞게 조절한 사람, 지출이나 돈 모으기 따위에 방해받지 않고, 자기에게 더 적합하고 더 편안한 다른 일들을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도다. - P137

그러므로 여유와 궁핍은 각자의 견해에 달렸다. 부도 영광도 건강도 그 소유자가 그것들에 부여한 만큼만 아름답고 즐거운것이다. 각자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이다.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바로 그럴 때에만 믿음이 알맹이를 갖게 되고 현실이 된다.
운수는 우리에게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재료와 씨앗을 제공할 뿐이다. 운수보다 더 강력한 우리 마음이 운수를 제 맘대로 해석하고 제식으로 써먹는다. 저를 행복하게 만들지 불행하게 만들지를 정하는 유일한 원인이며 주관자로서.
외부에서 오는 것들의 맛과 색은 우리 내부에서 구성된다. 옷을 입으면 더워지는 것이 옷의 열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열 때문인 것과 같다. 옷은 우리 자신의 열을 보호해 키워 줄 뿐이다. 옷을 둘러 추운 몸을 보온하는 사람은 냉기를 보호하기 위해 - P137

서도 같은 방법을 쓸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해서 눈이나 얼음을 간수한다.
당연히 게으름쟁이에게 학업이, 술꾼에게 금주가 고통인것처럼, 방탕한 자에게 검약은 형벌이요, 허약하고 나태한 사람에게 운동은 고문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물 자체가 그토록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약함과 비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하고 고매한 것을 가려 내려면 그만큼위대하고 높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에 우리 자신의 악덕을 넘겨씌울 것이다. 곧은 노도 물에 잠기면휘어 보인다. 무엇을 보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도 문제인것이다. - P138

그런데 참, 죽음을 대수롭게 여기지 말며 고통을 견디라고 제각각으로 설득하는 수많은 논설 중에 왜 우리는 우리에게 딱 들어맞는 것을 찾지 못할까? 남을 설득하는 데 쓴 그 수많은 공상들중에서 왜 각자 자기 기질에 제일 잘맞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을까? 불행을 뿌리 뽑을 강력하고 효과적인 약을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적어도 불행을 완화하는 약이라도 먹어야 한다.
‘쾌락 가운데에서나 고통 가운데에서나 우리는 경박한 편견,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어떤 편견에 지배된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물러져서, 이를테면 물같이 되면, 우리는 벌에 쏘이기만 해도 소리를지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제어하는 능력에달려 있다." (키케로)
결국 고통의 쓰라림이나 인간의 허약함을 아무리 내세워 봐도, 철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 봤자 철학은 이런 난공불락의답변으로 방어할 테니 말이다. 필요에 시달리는 삶이 나쁘다면, 적 - P138

어도 필요에 시달리는 삶, 그것을 반드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자기 탓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오래 고통받지 않는다.
죽음도 삶도 견딜 용기가 없는 사람, 저항할 의지도 도망칠에 대한 가능의지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쩌겠는가? - P139

 다른 덕성도 그렇지만 용맹에도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넘는 순간 우리는 어느덧 악덕의 길 위에 서 있게 된다. 이 한계를 잘알지 못하면 용맹에서 무모함, 고집불통, 어리석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경계 지대에 가까울수록 어디가 한계인지 아는 것이 참으로 어려워진다. 군사 원칙으로 보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요새를 고집스레 방어한 자들을 극형까지 포함해 중형에 처하는우리의 전시 중 관습은, 이 같은 점을 고려한 끝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벌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닭장 하나를 사수하려고 온 군대가 매달려 있는 일도 없으리란 법이 없다.  - P140

남과의 대화를 통해(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학교중 하나이다.) 항상 무엇이든 배워 보려고, 나는 여행 중에 만난이야기 상대를 그들이 제일 잘 아는 것에 관한 화제로 이끄는 방법을 고수한다.


뱃사공은 바람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고
농부는 황소에 대해, 병사는 자신의 상처에 대해,
양치기는 양 떼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라.
프로페르티우스


사람들은 흔히 이와는 반대로, 자기 직업보다는 남의 직업에대해 이야기하려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새로운 명성을 얻는다고 여긴다.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무스가 페리안데르를 두고, 형편없는 시인이라는 평판을 얻으려고 훌륭한 의사의 영광을 버렸다고 비난한 것이 그 증거이다. - P145

하느님은 당신이 좋은 대로 세상사를 조절하셨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내가 혐오해 마지않았던, 가장 타기할 만하고 수치스러운 인물들 중 세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리만큼 조절되고 절제된 죽음을 맞이했다.
당당하고 행복한 죽음이 있다. 눈부실 만큼 승승장구하던 자가 그 출세의 한복판에 있을 때 죽음이 돌연 그 실을 끊어 멋진 최후를 마련해 주는 것을 보았다. 내 보기에 그가 세운 열정적이고야심 찬 계획들 중 그 무엇도 이 돌연한 중단만큼 고고한 것은 없는 듯 여겨졌다. 그는 맘먹었던 곳에 가지 않고도 도달한 셈이다.
그가 바라고 원했던 것 이상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힘껏 달려서 얻으려던 권위와 명성을, 말에서 떨어짐으로써당겨 얻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때 나는 항상 그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고려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주요한 관심 중 하나는그 마지막이 잘 이루어지는 것, 즉 고요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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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씨가 자꾸 째려보는 듯 해서 시작했는데...^^
쓸데없는 기우였는지, 번역탓인지.. 좀 술술~ 하든데요^^ 게으름에 관한 한 유구무언이라서~
 

안새와 박새


차가운 바이올린 소리
쨍하게 얼어붙은 강물 위를 날아가며
얼음 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내려다보듯
새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거지

그 새가 창문에 부딪히자
내게 일어난 증상

우유에 떨어지는 코피처럼
눈 내린 광장에서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춥지? 하면 아니! 하고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
바이올린 요람인가 너와 나
같이 열렸다 같이 닫히는

두 몸 사이가
오히려 살아 있는 듯
너무 귀해서 만질 수도 없는 - P55

투명하고 뭉클한 새가 우리 사이에 있는 듯

위에서 보는 마음이 아프다
식탁 위의 전등과 싱크대 위의 전등 스위치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처럼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

책 표지를 넘기면 나타나는 하얀 빈 종이 위에
진통제로 몽롱한 선생님이 쓰신 글씨 두 개처럼

이 세상에도 저세상에도 문이란 게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제야 느낀다
새가 날지 않으면 세상이 거울처럼 납작해진다는 것
그리하여 나의 새는 잠들어서도 날아간다는 것

그 새가 다시 유리창을 쪼는 동안
내게 일어난 증상 - P56

마치 얼음 밑에 갇힌
물고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걸어가는 너와 나
공중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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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센티


간혹 천사는 갇힌다
미쳐서

나는 남의 알을 품었다고 쓴다

사전의 글자들 위에 까맣게 쓴다
새장에 앉아 쓴다

손을 잡아보면 알아요
당신은 새가 아니군요
당신은 더러운 손을 내미는군요

간수가 오면 나는 내 혀를 두꺼운 책 속에 감추어둔다

어느 아침은 높이 날았고
어느 아침은 깊이 떨어졌다고
쓴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게요라고
쓴다 - P49

동터올 때 부리로 쓴다

가다가서고
가다가 울고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서는 멀리 갈 수 있답니다
노래도 아니고
메아리도 아니고
아주 멀지만 자유만 있는 장소에서
나는 그곳을 나는 새입니다

겨우 지상에서 10센티 떠오른 채

새장엔 미친 새

어느 밤하늘 날아가는데
너희의 화살이 심장을 꿰뚫어
푸르르푸르르 불안 장애 경련 장애
그 때문에 새가 된 새  - P50

어느새
새가 된 새

그 칼날의 울음 같은 소리
미친 게 분명한 새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
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

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
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모국어 사전에 혀가 물린 천사는
입속이 뜨거울 정도로 상냥하답니다라고
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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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시집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내게서 새가 우는 날의 기록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공기는 상처로 가득하고
나를 덮은 상처 속에서
광대뼈는 뾰족하지만
당신이 세게 잡으면 뼈가 똑 부러지는
그런 작은 새가 태어나는 순서

새하는 여자를 보고도
시가 모르는 척하는 순서 - P11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
죽을 만큼 아프다고 죽겠다고
두 손이 결박되고 치마가 날개처럼 찢어지자 다행히 날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종종 그렇게 날 수 있었다고
문득 발을 떼고
난간 아래 새하는
일종의 새소리 번역의 기록
그 순서

밤의 시체가 부푸는 밤에
억울한 영혼이 파도쳐 오는 밤에
새가 한 마리
세상의 모든 밤
밤의 꼭지를 입에 물고 송곳같이 뾰족한
에베레스트를 넘는 순서

눈이 검고 작아진 새가
손으로 감싸 쥘 만큼 작아진 새가 - P12

입술을 맞대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새가
새의 혀는 새순처럼 가늘고
태아의 혀처럼 얇은데
그 작은 새가
이불을 박차고 내 몸을 박차고
흙을 박차고 나가는 순서

결단코 새하지 않으려다 새하는 내가
결단코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라고 말하는 내가

이 삶을 뿌리치리라
결단코 뿌리치리라

물에서 솟구친 새가 날개를 터는 시집

시방새의 시집엔 시간의 발자국이 쓴 낙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연필을 들고
가느다란 새의 발이 남기는 낙서 - P13

혹은 낙서 속에서 유서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
그 순서의 뒤늦은 기록

이것을 다 적으면
이 시집을 벗어나 종이처럼 얇은 난간에서
발을 떼게 된다는 약속
그리고 뒤늦은 후회의 기록 - P14

쌍시옷
쌍시옷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의 마음
알고 싶지 않다 당신의 처절

도시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에게 여러 넘버들을 매겨주었지

나는 이 도시에서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않겠다
더 이상 먹지도 않겠다

부리처럼 입술에 조개껍데기를 물고
물고기의 피를 얼굴에 바르고
바람의 손목을 두 손에 나눠 잡고

웃어주겠다
증발하겠다
은퇴하겠다

나는 도시의 눈에 띄지 않겠다 - P17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아이스크림집 빵집 책방 국솟집 아케이드를 잘근잘근 씹어서 먹으면 뜨거운 해변이 목구멍에서 쏟아질 것 같다

나는 이제 줄이 긴 새 떼가 될 거다
이 도시를 칭칭 감을 거다
그러면 새 떼가 말할 거다

(다음에 서로 어울리는 항목끼리 줄을 그으세요)
나무 고래  남국의 고래는 꽃의 정원
꽃 얼음  햇빛을 정육면체로 잘라 차곡차곡 담장을 쌓는다
햇빛 강 강물에 발을 담그자 이 물결이 개미떼라는 걸 알았다
개미 배 뿌리내린 배

도로들이 일어서게 한 다음
자동차를 공중에 띄우고
새 떼가 공중에 뜬 강물로 활강해 갈 거다 - P18

금빛 가는 실로 검은 바다에 수를 놓던 한 마리 새가
바다를 물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그만 탁 놓아버리면
물결이 도시를 뒤덮을 거다
내 공책의 행과 행 사이로 물이 들어올 거다

새들은 발바닥에 쌍시옷이 두 개 달렸다
(한강의 다리 난간 위 새 한 마리
왼발에 미래
오른발에 과거
었, 겠, 었, 겠, 었, 겠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고
내 일기엔 쌍시옷이 쌓인다)

(나는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이 세상이 너무 좁다고 폐소공포증에 걸린다)

그리하여 나는 공책에 긴 줄을 내리그으며 - P19

새는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걸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러겠다
얼굴에 깃털을 기르겠다
날아가겠다

라고
쓴다 - P20

날개 환상통


하이힐을 신은 새 한 마리
아스팔트 위를 울면서 간다

마스카라는 녹아 흐르고
밤의 깃털은 무한대 무한대

그들은 말했다
애도는 우리 것
너는 더러워서 안돼

늘 같은 꿈을 꿉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팔을 펼치면 새
말 끊지 말라고 했잖아요
늘 같은 꿈을 꿉니다
뼛속엔 투명한 새의 행로
선글라스 뒤에는
은쟁반 위의 까만 콩 두 개 - P21

(그 콩두 개로 꿈도 보나요?)

지금은 식사 중이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걸어가면서 먹습니다
걸어가면서 머리를 올립니다
걸어가면서 피를 쌉니다

그 이름, 새는
복부에 창이 박힌 저 새는
모래의 날개를 가졌나?
바람에 쫓겨 가는 저 새는

저 좁은 어깨
노숙의 새가
유리에 맺혔다 사라집니다

사실은 겨드랑이가 푸드덕거려 걷습니다
커다란 날개가 부끄러워 걷습니다
세든 집이 몸보다 작아서 걷습니다 - P22

비가 오면 내 젖은 두 손이 무한대 무한대

죽으려고 몸을 숨기러 가던 저 새가
나를 돌아보던 순간
여기는 서울인데
여기는 숨을 곳이 없는데

제발 나를 떠밀어주세요

쓸쓸한 눈빛처럼
공중을 헤매는 새에게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고
들어오면 때리겠다고
제발 떠벌리지 마세요

저 새는 땅에서 내동댕이쳐져
공중에 있답니다 - P23

사실 이 소리는 빗소리가 아닙니다
내 하이힐이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오늘 밤 나는
이 화장실밖에는 숨을 곳이 없어요
물이 나오는 곳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나를 위로해주는 곳
나는 여기서 애도합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은 날개를 들어 올리듯
마스카라로 눈썹을 들어 올리면

타일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떠밉니다

내 시를 내려놓을 곳 없는 이 밤에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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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마지막 일곱해를 
사셨다.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
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절뚝절뚝 산동네 아래 구멍가게까지 
걸어내려가
주머니에 사 넣는 한갑 담배를 미워하면서,
술 취한 아들이 밤늦게 사들고 들어와
심통과 함께 들이미는 군밤을 미워하면서,
너무 반가워, 그것도 너무 반가워
말보다 먼저 나가는 야윈 손을 미워하면서,

돌아가셔도 눈물 한방울 안 보일,
남편의 미운 짓이 미워 눈물 한방울 안 보일
아내를 미워하면서,
시신을 덮은 홑이불 밖으로 나온 그의 앙상한 발을 만지며 울 막내를 
미워하면서, 고향 선산까지 그를 실어갈 낡은 장의차를 미워하면서,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를 미워하면서,
산동네를 환하게 비출 달빛을 미워하면서,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이 지번에서 아버지는 지금도 살고 계신다.


시집 [사진관집 이층] p 16, 17

서울의 춥고 스산한 이미지는 아내와도, 또 할머니와 아버지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홍은동 산동네 생활을 청산하고 안양 비산동의 산비알에 작은 집을 지었을 때 아내는 여간만 좋아하지 않았다. 집이라고는 하나, 수도가 나오지않고 우물도 없어 뒷산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 비문화주택이었다. 그 무렵 우리집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의 몸을 쓰지 못하는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세 칸뿐인 방이 모자라 목욕탕을 없애고 방을 들여야 할 지경으로 갑자기 대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아내는 이 집에서 겨우 일년을 살았을 뿐이다. 시름시름 앓았으나 위궤양이라해서 별것 아니려니 했던 것이 막판에 위암으로 판정을 받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아내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까지도 집에서는 아내가 벽과 마루에 칠한 페인트와 니스 냄새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 P90

그 다음 해 겨울에는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아흔이 가까운 호상이라고는 하나 젊어서 과부가 되고 아들 하나를 청춘에 앞세웠으니 좋은 팔자였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더욱이 국수장사도 하고 돼지도 키우고 하며 극성스럽게 돈을 모아 땅마지기도 장만했지만 아들이 다 날려 말년을 서러운 셋방살이로 살았다. 그래도 늦도록 건강해서 잔병치레 같은 것은 없었는데, 손주며느리를 앞세우고부터는 노망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중풍으로 누워 있는 아들을 괴롭히는 짓을 일부러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 년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들어누운 지 칠 년, 내게 와 의탁한 것만도 육 년, 아마 아버지한테도 오래 사는 것이 꼭 복된 일만은 아니었을 터이다. - P90

그리고 내게는 그 육 년이 견딜 수 없이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한 시절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만 같아 단하루도 마음놓고 밖에 나다니지를 못했다. 여행을 하다가도 불안해져 도중에 돌아오기가 일쑤였고, 일을 할 때도 술을 마실 때도 늘 안절부절, 집에 돌아와 부기가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물론 집에 전화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때로 아직 일할 나이에 병들어누워 있는 아버지가 가엾어 좋아하는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가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공연히 심술이 나서 불쑥봉투를 내밀어 놓고는 말없이 문을 닫고 내 방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눈물이 나지않았다. 어쩌면 내가 이 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는지도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 P91

안양집에서 산 것이 그때까지 만 육년, 오 년도 안되는사이에 가장 가까운 사람 셋을 잃은 그 집이 나는 싫어졌다. 이듬해 이른봄 서울 삼양동에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셋을 안양집에 버리고 오는 것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고향의 선영에 묻혀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두고 나만 오는 서울은 옛날보다 더 스산했다. 몹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짐을 대충정리하고 방에 누우니 창문으로 환한 달빛이 새어들어왔다. 마루의 유리문을 사납게 흔들고 지붕을 지나는, 전선을잉잉 울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역시 임화의 시구절을 생각했을까, 지금 기억에 없다. - P91

누릇누릇 벼가 익어가는 논이 있는가 하면 벼베기를 하는논도 있고, 벤 벼를 널어 말리는 논도 있었다. 어떤 늙은 부부는 새참을 사이에 놓고 논둑에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내친김에 논둑길로 해서 강까지 나갔다. 새파란 강물에는두둥실 떠가는 하얀 구름과 바위너설의 새빨간 단풍이 아프게 박혀 있고, 치마를 둥둥 걷어 허리에 동여맨 아낙네들과 열댓 살이 안되었을 소녀들이 허리께까지 차는 찬물에들어가 올갱이를 줍고 있었다. 수수를 꺾어 머리에 무겁게인 아낙네들이 왁자지껄 진한 육담을 주고받으며 떼를 지어내 곁을 지날 때 내가 느낀 것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다음날부터 강마을로 산마을로 나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를 찾아가기도 하고 친척을 찾아가기도 했으며, 노자를 구해 멀리도 갔다. 새재를 넘어 문경에 점촌까지도 가고 박달재를 넘어 제천과 영월과 단양까지도 갔다. 걷기도 하고타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이 실의와 좌절, 그리고 격절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나의 이십대도 끝났다. - P108

농토를 빼앗기고 농촌서 떨려난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든 마을이 바로 홍은동이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시골서 살던 버릇과 정서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서울로 옮겨 왔으나 여전히 농민이요, 시골 사람들인 것이다.
장구경은 내가 가장 나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고, 나는 아직 새댁 티를 못 벗은 젊은 아내와 함께 그 사람들 속에 섞이는 일이 더없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때 아내는 행복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언 이십 년이 지난 이야기다. 이제 아내도 가고, 아내에게 술심부름을 시키던 김관식, 박봉우, 백시걸, 이현우시인도 갔다. 기쁨과 고달픔을 신혼의 아내와 함께했던 월세방, 전세방, 장골목 자리는 찾을 길조차 없다. - P116

산과 들에는 막 새잎이 피기 시작하고 개울마다 맑은 물이 철철 흐르는이른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첫여름 풍경에 연실 감탄을 하는 사이 버스는 바꿔 타야 할 곳에 와 우리를 내려놓았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하지만 두어 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아 나는 강변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그때 어깨에 그물을 멘 소년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알 수는 없지만 민요조였다. 나는 문득 내가 두 번이나 쓰고도 실패한 시「목계장터」가 생각났다. 나는 이 자리에서 새로 쓸 시의 첫구절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를 생각해냈다.
돌아가라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그 암울했던 70년대가요즘은 가끔 그립기도 한 것은,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 아래서 그래도 나는 강물처럼 흘러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 P148

백두를 떠나 장장 천오백 리를 달려오다가 산줄기는 꿈틀 발을 멈춘다. 민족의 분단으로 해서 온통 쇠붙이로 메워진 허리가 아파서다. 산줄기는 잠시 얼굴에 주름을 잡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 내달려 마침내 파도 높은 동해를 마주해 선다. 바야흐로 바다와 맞닿은 동녘 하늘 그 밑동이붉게 물들고, 해를 머금은 바다는 하늘을 향해 크게 몸을벌리고 그 힘차고 화려한 창조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렇다, 바로 이곳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 년 전, 십만 년 전에 우랄과 알타이의 지붕 밑 중앙아시아를 출발, 험준한 산과 강을 건너고 거친 초원과 사막을 지나, 다시 백두대간이 꾸불텅 만들어놓은 산줄기를 따라 허위단심 내려오다가 마침내 멈추어 서서 바라보고 감격의 울음을 운 곳이. - P233

그들은 해를 잉태하여 만삭이 된 바다를 향해 무릎을 꿇고 다시 한번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곳이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준 땅이 아니냐며. 그리하여 한바탕 춤과 노래로 하늘에 감사드리면서 바다의 용왕님을만나는 잔치를 벌인 다음, 산기슭과 언덕 아래 움을 파거처를 마련하고, 달과 별에게도 뜨거운 사랑은 부끄러워 감추면서 언 땅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만리, 십만리 먼 길을안고 이고 온 씨를 뿌렸으리라.
저 눈 덮인 설악을 보라. 지금 내설악, 외설악이 그 속의바위며, 나무며,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우리 조상들이 처음 동해를 마주했을 때의 그 감격과 외경을 간직한 채 바다를 향해 서 있지 않느냐. 대륙에서 바다를 향해 뻗어나온 반도의 등뼈 저 백두대간은 비단 우리 조상들이 삶의터전을 찾아 더듬어 내려온 산줄기만이 아니라 그들이 피와 땀으로 돋우어놓은 산줄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 P234

바다를 믿고 살다 보면 기상학자가 다 된다. 먼저 새댓바람(북풍)을 보고 그날의 날씨와 바다 상태를 예상한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조금만 세면 그날의 조업은 포기해야한다. 먼바다에 파도가 높다는 징후다. 가까운 바다에도이내 큰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저녁에 부는 새바람은 다음날의 평안한 바다를 약속해 준다. 새벽의 출어준비를 저녁에 미리 해둔다. 마댓바람(남풍)은 더 불길한바람이다. 약하든 강하든 반드시 사나운 파도를 데불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름을 보고도 기상을 미리 안다. 서쪽 하늘에 노란 구름이 끼면 급히 조업을 중단하고 귀항한다. 서쪽 하늘의 노란 구름은 언제고 강풍을 몰아온다.
그들은 또 생태학자, 해양지리학자가 되기도 한다. 봄철썰물 때는 어떤 지점에 어떤 종류의 고기가 몰려들고, 가을철 밀물 때는 어느 지점으로 어떤 종류의 고기가 이동하는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안다. 어느 지점에 화성암이 발달해 있고, 또 얼마를 가면 표면이 평평한 수성암이 펼쳐져있고, 또 어디가 모래펄로 덮여 있는가도 안다. 섬게며 대 - P235

합이 어디에 많고, 소라나 전복이 어디에 몰려 있는가도 안다. 그래서 5미터씩 6미터씩 바닷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섬게를 잡고 전복을 따는 일은 힘들지만 즐겁기도 하다.
때로 물안경 너머로 보이는 물 속 풍경은 꿈속처럼 아름답고, 발에 밟히는 바다 바닥은 새 흙처럼 부드럽다. 그 즐거움을 알기에 삼십 년, 사십 년을 잠수부로 살아온 사람은이제 갯마을의 당나무가 되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본디 바다로부터 나왔다. 모든 생명체들이 그들의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은 본능이리라.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로부터 바다를 찾아가 사람이살아갈 수 있는 두 축인 꿈과 먹거리를 얻었으니, 그 꿈과먹거리를 바다로부터 건져올려 준 어부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열어준 최초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 P236

하지만 바다는 늘 표범처럼 사나워 때로 느닷없이 성을 내고 몸부림을 치니, 그 바다를 터전으로 하는 일이 어찌고달프고 힘겹지 않으랴. 그러나 그물을 놓아 광어,삼치, 고등어, 도미, 이면수를 잡아 올려, 또는 보름씩 한 달씩 바다에 나가 오징어를 잡아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기쁨을, 바다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 아니고 어찌 알랴. 동해에 가거든 작은 어항(港)의 지붕 낮은 횟집에서 늙은 어부나잠수부를 찾을 일이다. 그들의 굵은 주름살 속에서 당신은대륙의 성화와 섬나라의 악다구니 속에 태평양의 한 모서리에 반도로 삐어져 나와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우리의 엄청난 생명력을 보게 될 것이다. - P236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그 땅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삶의 모습을 땅에 맞추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람이 땅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리하여우리가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함부로 산을 깎아내리고, 아무렇게나 들판을 파헤치고, 닥치는대로 물을 막는다. 빠른 길이라면 바위와 산을 가리지 않고 뚫고, 좋은 터라면 천년 묵은 솔숲도 아낌없이 베어제친다. 당장 생산성, 경제성만이 문제가 되지, 우리 조상들의숨결과 땀이 배어 비로소 그 땅이 이룩되었다는 사실 따위는 생각에도 없다. 남정네들이 수백 년에 걸쳐 장을 보러다니던 길과 고개는 비능률적이라 하여 버려지고, 젊은이들이 외적의 침입을 피로 막은 성은 새 길에 방해가 된다하여 치워지고, 아낙네들의 한숨과 눈물이 서린 고가들은 살기 어렵다고 헐려, 마침내 우리 땅은 경박한 새 부자의 날림집 꼴을 하게 되었다. - P239

더 딱한 것은 염치도 체면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위락 시설들이다. 웬만큼 산세 좋고 물 맑은 곳이다 싶으면 이른바 ‘러브호텔‘이나 ‘가든‘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식당이 차지하고, 멀쩡한 산과 언덕이 까뭉개져 골프장으로 바뀐다. 이런 위락 시설들은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아름다운 경관에 흠집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몰고오는 추악한 바람과 더러운 오물이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 - P239

까지를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사람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아무렇게나 뜯어고쳐도 좋다고 생각한 그 땅이,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안타까움으로 내쉬는 깊은 한숨이, 지금이나라에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우리 국토는 아름답다. 하늘에우뚝 솟았다가 짐짓 몸을 낮추어 마을까지 내려와 가만히사람 사는 구경을 하고 있는 산줄기를 보라. 그 산등성이에 우뚝 서서 억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받고 있는 키 큰나무들을 보라. 그 묵은 잎과 줄기에 앉은 하얀 눈송이들을보라. 바위너설에 달라붙은 가는 잎의 키 작은 나무들을보라. 골짜기의 얼고 녹은 얼음 밑을 쫄쫄거리며 흐르는냇물을 보라. 비록 그 산줄기에 잇대어 펼쳐진 들은 넓지않지만, 우리들의 체질에 맞는 먹을 거리를 만들어 주고,
우리들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위해 양지를 제공해 주지 않는가. 우리가 이 땅을 오로지 당장의 편의를 위해 짓밟고뭉개는 대신 우리 생명의 근원으로서 천년이고 만년이고그 속에 안겨 함께 살아갈 땅으로 귀히 여긴다면, 이 땅은더욱 아름다워지고 그 위에 사람 또한 한결 아름다워지리라. - P240

도시의 소음에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강산은 더 아름다워진다. 산은 사람을 피하듯 가파르게 기어올라가고 물은람을 그리듯 골짜기를 더듬으며 내려온다. 그 산은 군데군데서 잣나무와 소나무숲, 낙엽송숲으로 깨끗이 정돈되어 - P240

있는가 하면, 또 군데군데서 노간주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오리나무가 뒤섞인 잡목 숲을 만들어 화려함을 뽐내고 물은 댐에서 모여 큰 호수를 이루기까지 얼었다 녹았다하면서 바위 틈에 막혀 웅덩이가 되거나, 폭포로 급하게 떨어지기도 하고 큰 줄기로 함께 흐르기도 한다. 이래서 우리 조상들은 우리 땅을 한마디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이라표현했는가 보다. 산의 뜻과 물의 마음을 아는 그들은 산자락에 조심스레 집을 틀어, 스스로 산자락이 되고 물가에밭을 일구어 물과 함께 사는 길을 터득했으리라. 한데 이아름답고 맑은 산과 물은 비무장지대가 가까워지면서 몸살에 걸려 있으니 어찌 딱하지 않으랴. 국토의 분단으로형제끼리 총을 겨누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우리의 다른형제가 무서워, 소나무숲을 아무렇게나 뚫어 구불구불 시뻘건 군삿길을 내고, 잡목숲을 잘라 을씨년스러운 차폐물을 설치한 것이다. - P241

물길은 아무데서나 막히고 비틀리고, 철조망으로 가로막히고, 자명(明)하다던 산과 물이 건드리기만 해도 단숨에 온 천하를 날려보내는 폭발물로 가득 차,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짐승도 마음놓고 다닐 수 없는 무서운 곳이 되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우리 형편을 위정자들이 국민을 순치하는 방편으로 이용, 없어도 좋을 시설들을만들어 산과 물을 더욱 어지럽혀 왔다는 점이니, 이른바
‘평화의 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초 이 댐은 북한이 금 - P241

강산댐을 만들어, 그것을 터뜨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해서, 5공 당시 776억 원의 국민성금에 총 1,509억 원의예산으로 부랴부랴 공사에 착수했으나 일단계 공사만 완료한 채 흐지부지돼 버린 터이다. 당시 이 공사는 초등학생들의 코묻은 돈까지 우려내며 안보 공포증에 걸려 있는국민들을 긴장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이제 북한이 금강산댐을 터뜨려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 했다고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금강산댐은 소양강댐과 마찬가지로 단번에는 어떠한 힘으로도 허물 수 없는 사력(砂礫)댐이라고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게 된 그 평화의 댐까지도 어느새 우리 산자수명의 한부분이 되었다. 산과 물의 아름다움을 크게 해친 것마저 아름다움 속에 쓸어 안을수 있는 우리 땅의 힘은 놀랍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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